고향 서울로 돌아온 나는 포항에서 해병대 거친것만 배워서 그런지
또래 아이들을 데리고 매일 심한 장난을 치고, 싸움꾼으로 소문이 났다.
12살 위인 막내 이모님이 고생 좀했다.
심심하면 아이들을 패서 코피를 터트리고 시퍼런 멍을 남기니 동네 부모들이
집으로 몰려와 난리를 쳤고, 그런 상황을 이모가 정리하였으니 말이다.
종로구와 중구 경계가 바로 청계천이다.
그전에는 광교, 수표교 돌다리와 콘크리트 다리를 두어개 제외하고는 목재로 엉성하게 만든
다리 몇개로 종로와 을지로를 오가든 시절이었다.
여름에 장마 홍수가 지나가고나면 몇일 동안은 청계천에 맑은 물이 흘러 붕어,피라미,송사리,
미꾸라지 등을 잡고 놀았다.
초등학교 취학전 아이들 놀이란, 골목을 몰려다니며 딱지치기, 구슬치기,땅따먹기, 담장에 올라가
오줌 멀리싸기..ㅎㅎ
내가 살던곳은 당시 고관들이나 드나들 수 있던 을지로3가 소갈비 전문점 "조선옥" 골목 이었다.
5~6분 거리 수표교 남쪽(을지로 방면) 수표공원에선 주로 "다방구"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며
놀았고 가끔은 옆동네 아이들과 결투(?)도 자주했었다.
공원옆 골목은 중국 화교분들이 모여사는 곳이었고. 지금도 을지로3가 로터리 부근 중화요리 전문점
"안동장"은 그곳에서 살던 화교분 아드님이 대를 물려 성업 중이다.
을지로4가 국도극장 뒤 영희초등학교 앞 인현공원에는 여름 풀장이 개장되어 물놀이가 최고였다.
지금은 사라진 서울운동장 풀장은 어려서 못들어갔다.
일년에 한두번 기동차타고 여름휴가(?) 가는 곳이 한강 뚝섬유원지, 광나루 였으나 정말 행복했었다..
같이 놀던 여섯 중에 다섯이 그시절 국민학교에 입학하고나니 나혼자 동네 어린 동생들과 놀아야했다.
아이들 방과후를 기다려 놀자해도 숙제다 뭐다 하면서 안놀아주길래 그녀석들 흠씬 패주고, 욕먹고..ㅎㅎ
서씨, 양씨,박씨,김씨,나씨. 아저씨들 어디서 다 잘들있나?.. 참 보고싶다!!...
서울 개발이 시작되자 하나, 둘 이사가고 대부분 전화도 없던 그때라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해 봄 4.19 혁명이 일어나 외삼촌은 다른 사람들과 시발택시를 타고 을지로를 돌아다니고. 저녁무렵
총소리와 함께 거리에서 피흘리던 젊은이가 아직도 기억난다...
즐거운 설 연휴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그시절엔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에서 뚝섬까지 기동차가 다녔고
중학교 3학년까진 길가운데로 전차가 다녀 그거타고 청량리서 서대문 가본일이 있읍니다
대한극장 피카디리 단성사에 단체 영화관람도 학교서 가곤했었죠
청계천변에 늘어선 책방에가 헌책사고 책산다고 받은돈은 주전부리에쓰고....
누구나 그런 추억이 있을겝니다
50년전 이야기지만 아직도 기억은 생생하군요
그러게요..ㅎ
그때 설에는 일년중 새옷 입어보는 날 이었습니다.
세뱃돈 받아 폭음탄, 작은 로켓도 사서 놀았지요
막내이모님은 건강하시죠?
막내 이모님은 평생 독신으로 사시고, 지금은 산사에서 부처님 모시고 있습니다
어릴때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정감 잇는 글 감사합니다.
다방구, 고무줄 놀이~ 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건 명절 보내세요 ~^^
설이 되니 어린시절 생각이 아련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박성광치킨2 대박나세요!
비록 형편은 곤궁했을지라도 지금같이 각박하지 않고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아스라한 한시대의 사진을 보는 듯.
저는 그때 서울에 안 살았으니까 저 박가는 아니겠지요?ㅎㅎ
그때는 빈부의 차이가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물론 친일파 넘들은 엄청난 토지와 재산을 갖고있었지만 일반 서민은 도토리 키재기, 거기서거기였습니다.
이웃간 정을 나누고 살던 시대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