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직굵직한 골목들
-문인수
마을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작고 초라한 집들이 거친 파도 소리에도 와르르 쏟아지지 않는다. 복잡하게 얽혀 꼬부라지는 골목들의 질긴 팔심 덕분인 것 같다. 폭 일 미터도 안 되게 동네 속으로 파고드는 막장 같은 모퉁이도 많은데, 하긴 저렇듯 뭐든 결국 앞이 트일 때까지 시퍼렇게 감고 올라가는 것이 넝쿨 아니냐. 그러니까, 굵직굵직한 동아줄이 기나긴 골목들이 가파른 비탈을 비탈에다 꽉꽉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다. 잘 붙들어 맸는지 또 자주 흔들어보곤 하는 것이다. 오늘도 여기 헌 시멘트 담벼락에 양쪽 어깻죽지를 벅벅 긁히는 고된 작업, 해풍의 저 근육질은 오랜 가난이 절이고 삭힌 마음인데, 가난도 일말 제맛을 끌어안고 놓지 않는 것이다.
한 노파가 지금 당신 집 쪽문 앞에다, 골목 바닥에다 몇 포기 김장 배추를 포개놓고 다듬는 중이다. 한쪽에다 거친 겉잎을 몰아두었는데, 행여 그 시래기라도 밟을까봐, 한 주민의 뒤태가 조심스레 허릴 굽히며, 꾸벅꾸벅 알은 체하며 지나간다. 또 바람 불고, 골목들은 여전히 튼튼하다.
기러기 한줄
-문인수
길바닥에 깔린 눈 녹을 때
신기하다!
애초 디디고 간 데가, 그 첫 발자국 여럿이 길게 먼저 녹는다.
그래 기러기 한줄,
그리고 이제 그 눈 다 녹고 없다.
뭔, 감(感) 쫓아 간 것 같다.
조묵단전(傳)―나비를 업다
-문인수
나 혼자 산소엘 와 넙죽 엎드리는데
잔디를 짚는 손등에 웬 보랏빛 알락나비 한 마리 날아와 살짝 붙는다, 금세
날아간다. 어,
어머니?
……
다만 저 한 잎 우화, 저리 사뿐 펴내느라 그렇듯
한평생 나부대며 고단하게 사셨나.
절을 다 마치고 한참 동안 앉아 사방 기웃기웃 둘러보는데, 없다. 산을 내려오는데
참, 너무 가벼워서 무겁다. 등에,
나비 자국이 싹 트며 아픈 것 같다.
조묵단전(傳)―멍텅구리 배 한 척
-문인수
김해 녹십자노인요양병원.
99세, 어머니의 바닥은 지금
인조가죽 매트리스
거기 전심전력, 전적으로 당신 한 몸 책임지고 앉아 있다, 누워 있다,
누웠다, 앉는다.
누웠다, 앉았다, 누웠다, 앉았다 해도 도무지
안 가는,
아 멍텅구리 배 한 척,
간다.
함박도
-문인수
경상남도 통영시 미륵도에 딸린 작은 섬.
현재, 열여섯 가구에 60대 이상 주민 스무남은 명이 산다.
사람의 바다엔 저렇듯 섬이 있고,
섬이 있어 바다가 아름답다.
목에, 동뫼, 우무실, 굼터, 골에, 독발에, 섯바들, 아랫몰, 후력개, 맨주름, 진살에, 나지막, 밭등, 차암막, 함박끝……
노인들은 오늘도 이 섬을 이루는 곳, 곳, 저 여러 이름들을
푸른 함지박 모양으로 한데 모아
그 바다에 다독다독 잘 심어두는 것이다.
와, 와, 통하다
-문인수
이 벚나무 가로수는 효목육교 바로 옆에 서 있다.
육교 계단을 중간쯤 올라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무성한 가지,
벚나무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계단을 내려갈 때도 그렇다.
올해도 벚꽃이 한꺼번에 활짝 피었다. 내 마음이 와, 감탄하자
벚꽃 무더기도 와, 웃었다.
말이 없었다. 말 없는 중에 홀연
벚꽃 다 졌다. 내 양쪽 어깨뼈가 앙상하게 만져지는 저
흰 구름 속, 육교 자국도 뭉게뭉게 풀리고 있다.
의논이 있었다
-문인수
생활고와 병고를 견디다 못해 결국
세 모녀는 나란히 누운 채 죽었다. 하지만
세상을 향한 단 한마디 원망도 없이, 그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짤막한 유서를 남기고 갔다.
헌 냄비엔 이제 라면 대신 안친 번개탄 세장,
한줌 재 속엔 또한
세 모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서로,
도란도란 젖으며 짤막하게 식어갔다.
물 위의 암각화
-문인수
지금은 모르고 안 운다.
저 원시적 세월호 참사에서 구조된
다섯 살 권 모 어린이.
시방 가족 중에 홀로 ‘침몰’ 바깥에 앉아, 춥다.
아직 비극이란 걸 몰라
그저 놀란, 새까만 눈만 말똥말똥 뜬 채
엄청 큰 바다 앞에 꽉 눌려 무표정하다. 다만
조그만 손으로 애써 젖은 양말을 벗으며, 한가지는
대답한다. 한 살 터울 오빠가 벗어준 구명조끼,
그 구명조끼만은 한사코 벗지 않는다. 봐라,
아이가 한평생 껴입어야 할 여러 벌
젖은 그림들.
저 물 위에 이미 깊이 새겨졌다.
훗날엔 자주 울고 있다.
달소
-문인수
저 먼 낮달의 고향이야말로 농촌일 것이다.
이 도시 변두리 동네 공원 팔각정, 할아버지 네댓 분이 지금 한창나이 때의 농사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가뭄이며 장마며 보릿고개 같은 정황이 여기서도 역시 빠질 수 없는 배경이다. 아무튼, 음력 절기 따라 이랴, 이랴, 쟁기질하던
저 흐릿한 체취가 어느덧 흙냄새에 가깝다.
*만든 말. 허공을 가고 있는 저 달을 한 마리 일하는 소로 보았다.
봄날은 간다, 가
-문인수
강원도 평창군 가리왕산 뒤쪽에 사촌동생 내외가 들어와 사는 전원주택이 있다. 이 집에, 남녀 종반 간 아홉 명이 한여름 더위를 피해 모였다. 누님 셋, 그리고 사촌형 내외, 우리 내외, 다들 60대 중후반이거나 70대 중후반이다. 세 누님은 공교롭게도 아까운 나이에 각기 부부 사별을 겪었다. 그래, 요즘 어디든 함께 잘 어울려 다닌다.
그런데, 이곳 평창에 온 첫날부터 내리 장대비가 쏟아진다. 비에 갇혀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가지 못하니, 일흔아홉 저 누님 이제 또 슬슬, 간다. 물론, 젊은(?) 두 누님도 간다. 금세, 이구동성으로 아직 참 잘도 넘어가는 자매들, 예의 흘러간 유행가 「봄날은 간다」를 부른다. 말하자면 누님들의 주제가다. 지난봄 포항 모임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기다렸다는 듯 형제들도 모두 따라 부른다. 3절까지, 끝까지 다 부르고, 처음부터 다시 부른다. 또 부르고, 또 부른다. 이미 간 봄, 간다 간다 불러일으키니 정말, 철 지나도 실은 봄날은 간다, 가. 가도 가도 비.
내가 불쑥 말했다. 봄날은 간다 3절 다음, 노인들을 위한 봄날을, 그 ‘제4절’을 쓰겠다고…… 썼다. 성원에 힘입어 썼다.
밤 깊은 시간엔 창을 열고 하염없더라.
오늘도 저 혼자 기운 달아
기러기 앞서가는 만 리 꿈길에
너를 만나 기뻐 웃고
너를 잃고 슬피 울던
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간다.
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간다, 가. 그리하여 이제 4절까지, 저 끝까지 가느라 여기 눌러앉은 뒷모습들. 그러나 봄날은 결코 제 몸 앉혀둔 채 마저 간 적 없어, 느린 곡조로 저마다 또 봄날은 간다, 가. 가느라, 지금 등이 더 굽는 중……
첫댓글 몇 년 만에 인수 형님 뵈러 가겠습니다, 그 날 뵈어요.
그래요. 오십시오. 쇠주 한 잔 나눠요.
낭송 시편을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저는 '봄발은 간다, 가'를 낭송하겠습니다.
11월, 동해안 그 어디쯤일 것이다.
그 풍경을 그리면서 굵직굵직한 골목들을 제가 낭독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달소' 읽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창제 시인과 서하 시인께서 낭송하시겠다고 연락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와.와.통통하다
여는 시로 읽겠습니다^^
** 낭송하실 분
1. 굵직굵직한 골목들 - 솜나리 박숙경 님
2. 기러기 한줄
3. 조묵단전(傳)―나비를 업다
4. 조묵단전(傳)―멍텅구리 배 한 척
5. 함박도
6. 와, 와, 통하다 - 여름안개 곽도경 님
7. 의논이 있었다
8. 물 위의 암각화
9. 달소 - 후광 배경자 님
10. 봄날은 간다, 가 - 가우 박창기 님
기러기 한 줄/정숙 시인 낭송하실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