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은 반도의 남반부 중앙에 위치한 산악지대이다. 남쪽으로는 지리산이 길게 누어 있고 백운산, 기백산, 황석산, 개관산, 삼봉산 등 1000m 고지가 넘는 산들이 즐비한 산수가 수려한 곳이다. 함양은 '볕이 가득하다'하여 '다볕'이며, 그 옛 이름은 천령(天領)이다.
함양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고 유림들이 많이 살아 선비정신이 살아 있다. 한양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때, 우측으로 가면 함양에 인물이 많고, 좌측으로 가면 안동에 인물이 많다고 하여 우 함양, 좌 안동이라고 할 정도로 학자들이 많고 유서가 깊은 곳이다. 함양은 군인구가 5만여 명이며 읍민은 2만명이다. 군의 민속제는 천령제로 10월에 열리며 상림에서 다채로운 행사를 한다.
함양에서 제일 먼저 가 볼만한 곳은 역시 상림이다. 상림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 때, 최치원 선생이 함양군수를 지내며 홍수 때마다 위천수가 넘쳐 피해가 크자, 위천수를 막는 방수림을 조성한 것이 오늘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길이 4km, 폭 100m가 넘는 것이 읍내가 확장되면서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다가 끝내는 하림도 없어지고, 현재는 상림 1.5k(길)가 남아 있을 뿐이다. 숲은 대부분이 도토리 나무이며, 느티나무, 팽나무, 단풍나무 등 다양하다. 새순이 막 피어나는 5월과 단풍이 든 10월이 가장 아름답다. 상림은 숲 속 한 가운데로 길이 나 있어 산보하기에 아주 좋다. 상림 우물곁에는 3.1운동비가 있어 당대에 가열차게 독립만세운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옆에 고려시대의 귀없는 좌불상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 숲을 만든 고운 최치원 선생의 신도비가 있고, 고운 선생을 생각하는 사운정이란 정자가 있다. 사운정에 올라 시 한편씩 쓰면 어떨까?
상림을 지나 시내에 들어서면 함양초등학교 맞은편에 학사루가 있다. 학사루는 유림들이 모여 글도 공부하고 풍류도 즐겼던 곳이다. 당시 함양태수이며 신진 사림파의 거두였던 김종직이 후세를 양성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올라갈 수는 없지만 학사루는 당대 함양의 학풍이 얼마나 융성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무오사화의 진원지가 되었다. 김종직이 함양에 부임하여 학사루에 오르니 유자광의 글이 걸려있었다. 이에 김종직은 호통을 치면서 소인배의 글을 당장에 떼라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자광은 김종직에 앙심을 품고 신진 사림파를 숙청하는 무오사화를 일으킨다. 이때에 이미 고인이 되었던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한다.
다시 마천으로 차를 몰면 마천을 지나자마자 의탄이 나오는 데, 오른쪽 다리를 건너서 얼마간 가면 추성리가 나온다. 추성리는 칠선계곡을 오르는 길목이다. 칠선계곡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직접 뻗어 나온 가장 긴 계곡(18k)이며 그 경치는 참으로 비경이다. 그 왼쪽으로 하봉에서 내려온 계곡이 국골인데, 이는 가야국의 마지막 왕이 여기에서 패망을 맞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추성리 입구에서 차를 왼쪽으로 돌려 언덕을 올라가면 벽송사가 나온다. 벽송사는 천왕봉을 볼 수 있는 절로 삼층석탑이 있고, 불에 타다 남은 목장승이 유명하다. 그리고 대나무 숲이 아주 좋다.
이제 지리산 북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엄천강이 되어 남강으로 흘러 낙동강과 합류하여 태평양에 이른다. 엄천강길을 따라 유림쪽으로 가다보면 용유담이 나오는데, 이는 용이 목욕한 곳이란 이름인 듯하다. 용유담은 신기가 있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열심히 기도하는 민속신앙의 장소이기도 하다. 다리가 놓여 있어 다리 위에 올라가 용유담을 내려다보면 정말 장하다.
마천 백무동 하동바위 길은 장터목을 거쳐 지리산 천왕봉을 오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로 지리산을 오르는 많은 사람들이 애용한다. 여름에는 수 십만명의 피서객들과 등산 인구가 이 계곡과 산에서 쉼을 얻는다. 백무동에서 세석고원으로 오르는 길이 한신계곡이다. 약간은 험하지만 세석고원에서 열리는 6월 철쭉제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걷는다. 원시의 비경을 그대로 담고 있어 놀라울 뿐이다.
마천을 지나 유림면에 가면 엄천강을 사이에 두고 산청 금서면을 만난다. 금서면에는 가야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능이 있다. 구형왕릉은 돌을 쌍아 만든 능으로 특색이 있다. 금서면의 가현마을, 방곡마을과 유림면의 서주리는 빨치산 토벌 때 700여명의 양민을 학살했던 곳으로 지금도 그 한이 남아 있다. 유림, 수동을 지나면 청계서원과 남계서원을 만난다. 남계서원은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정여창 선생의 뜻을 기리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그의 제자들이 세운 서원이다. 함양에는 가는 곳마다 서원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당대에 유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 남계서원에는 정여창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안의를 지나 용추사에 오르면 우측으로는 기백산이 좌측으로는 황석산이 있고, 그 사이로 아주 맑은 물이 흐르는데, 그것이 용추계곡인 것이다. 용추계곡을 오르면 용추폭포를 만난다. 용추폭포는 용이 하늘로 오르다가 떨어졌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 큰 이무기가 백일기도를 드리면 용이 된다고 하여 정성껏 백일 기도를 드렸다. 하루를 남겨두고 너무 신이 난 이무기는 하루 남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힘을 다해 하늘로 올랐다가 떨어져 죽었단다. 용추폭포는 어느 폭포에 비할 데 없이 참 아름답다. 폭포 뒤에는 용추사가 있다. 계곡을 따라 계속 오르면 조용한 삼림욕장이 있고 금원산에 이른다. 용추계곡은 아름답고 물이 맑아 여름에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온다. 특히 용소라는 바위와 그 옆에 서 있는 장중한 소나무는 이 계곡의 절경을 만들고 있다. 한 여름 용소바위에 올라 누워보시라. 세상 근심을 모두 잃게 되리라.
다시 돌아 나와 육십령쪽으로 가면 '달을 희롱했다'는 농월정을 만난다. 농월정과 그 앞의 바위는 정말 거대하고 아름답다. 물에 발을 담그고 노래한번 부르면 어떨까? 옛사람들은 그 바위에 동동주를 부어 놓고 진달래를 띄워 풍류를 즐기며 마셨다고 한다. 육십령에서 시작하여 안의에 이르는 계곡을 화림동 계곡이라고 하는 데, 이는 가을의 단풍이 꽃처럼 아름답게 숲을 이루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화림동 계곡의 오른편에 높이 솟아 있는 산이 황석산이다. 이는 바위가 누렇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황석산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치열한 전투를 하였던 곳으로 허물어진 황석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화림동 계곡을 계속해서 오르면 동호정, 거연정, 군자정을 만난다. 물과 바위와 정취와 정자가 한데 어울려 화림동의 절경을 만든다. 허나 지금은 대전간 고속도로 공사로 그 절경이 허물어져 가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다시 뒤돌아 안의에 들어서면 큰 누대가 있는데, 안의 현감을 지낸 정여창 선생이 세운 광풍루가 있다. 광풍루 앞으로 남덕유산과 황석산 금원산 기백산에서 흘러 온 물이 남강 천으로 흐르고 있어 그 아름다움을 더한다. 안의초등학교를 찾아 교정에 들어서면 연암 박지원 선생 사적비가 있다. 박지원 선생은 당시 안의 현감을 지내면서 열하일기 등 많은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안의엔 또 허삼둘 가옥이 유명하다.
안의를 지나 지곡면 개평마을에 이르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고래등같은 기와집들을 볼 수 있는데, 여기가 정여창 선생의 생가인 것이다. 정여창 선생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이며 충신이고 효자였다. 김종직의 제자로 김굉(광?)필 김일손등과 신진 사림파를 이끌었다. 훈구파 유자광의 모함으로 무오사화 때 유배길에 올라 병을 얻어 운명하였다. 이 밖에도 함양엔 많은 문화유적이 있다. 이를 잘 보존하고 사랑하는 길은 자주 찾아와 그 정감을 느끼는 길 외에는 없다.
용추폭포
함양은 산간분지로 비교적 문화가 뒤떨어진 고장이었지만 옛부터 산 높고 물 맑은 고장으로써 자연환경이 아름다워 많은 시인묵객들이 모여들고 선비들이나 학자들이 터전을 잡아 학문과 예술, 자연을 즐기면서 휴양처로 삼아 살던 고장이다. 함양은 촐토된 고분과 유물들을 볼 때에 석기시대부터 부족국가가 형성되어 살아왔음을 엿볼 수 있다. 안의면 이전리와 수동면 상백리에서 마제석검이 출토된 것으로도 이 지방이 일찍이 인간이 취락하여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함양읍 백천리와 수동동면 상백리의 고분군 발굴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함양은 신라시대 초기에는 속함군, 혹은 함성이라 하기도 했다. 그 후 35대 경덕왕 때 천령군으로 개칭한 것으로서 지금의 함양군이며 속현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운봉현이고, 하나는 이안현이라 했으니 본군의 역사적 기록은 이 때부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함양군 안의면의 삼동인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지금은 거창군)은 유명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인 심진동은 그 깊이와 길이의 아름다움이 대단하다. 심진동은 안의면 소재지에서 시작하여 옛 대지면에 속했던 상원리 마음마을, 유동마을, 사평마을을 끼고 올라 우로는 기백산과 금원산을 좌로는 황석산과 거망산을 끼고 그 사이로 흐르는 계곡이다. 그 길이가 대단하며 그 빼어남이 절경이다. 지금은 용추계곡이라고 한다. 그 심진동의 빼어난 절경을 이룬 용추폭포는 그 장관이 놀랍다. 깔끔하고 맑은 폭포가 결코 작지 않아 보인다.
이 폭포를 중심으로 하여 상류로 설옥암. 만월대가 있고, 아래로 용음뢰, 용소바위. 풍류암. 탄금대 등과 이를 둘러싼 좌우의 울창한 수목과 칡덩굴, 거기에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은 심진동을 형승지로 꾸미는 요소들이다. 거대한 암반을 타고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이리저리 부딪혀 백옥같이 부서져 마치 짙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하며, 그 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우뢰와 같다. 푸른 하늘, 푸른 물, 푸른 나무 이세 가지가 혼연 일체가 된 선경에 선녀들이 물긷고 목욕하려 내려오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용추폭포는 그 높이가 약 30m이며, 용호(폭포의 둥근 원)는 그 직경이 약 25m이다. 물 깊이는 알 수가 없다. 속설에 따르면 이 용호에는 이무기가 살고 있어 파계승을 호 안으로 끓어들여 징계하였다고 하며, 한편 용호에 빠지면 진주 남강으로 통하여 수중에서 의기 논개를 만날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용추폭포는 내가 본 폭포중에서는 가장 멋있는 폭포였다. 그 생김새와 정감이 아주 생기 발랄하다. 어디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겠는가? 용추폭포 좌측으로는 용추사가 있고, 우측으로는 옛 장수사 터가 있고 그곳엔 장중한 일주문만이 남아 있다. 용추사는 본래 장수사의 한 암자이었으나 장수사가 6.25때 소실되자 절이 되었다. 용추폭포를 따라 조금 내려가면 용음뢰가 있다. 용음뢰는 용암(용소바위)에 있는데, 폭포수가 떨어지는 물소리가 마치 용이 읊는 소리와도 같다 하여 이름한 것이라 한다. 그 바위에 우뚝 솟은 소나무(반송)는 그 자태가 대단하다.
하루는 용추폭포에 살고 있는 이무기가 용이 되고 싶어서 하느님께 간청하자 하느님이 "생명을 죽이지 않고 정성으로 100일을 기도하면 용이 되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시자, 이무기는 먹기를 단하고 기도에 들어갔다. 정성들여 기도한 지 99일째 되는 날, 이무기는 내일이면 용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자신이 대견하기도 했고, 놀랍기도 하였다.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이무기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99일째라는 사실을 잊고 힘차게 기지개를 폈다. 그 힘이 뻗혀 있는 힘을 다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하루의 정성이 모자라 솟구쳐 올라가다가 용이 되지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이무기는 용추폭포에 떨어졌다. 그 후에 용추폭포의 깊이는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근동지역은 이무기가 썩어 거름이 되어 줌으로 3년동안 대풍을 이루게 되었다.
월명총
함양의 관문인 수동 삼거리에서 함양읍으로 들어오는 다리를 건너면 왼편 산밑에 몇 채의 가옥들이 붙어있는 마을이 보인다. 이곳은 행정구역상으로는 함양읍 백천리에 속해 있다. 이 마을이 월명부락으로서 그 이름이 월명총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월명마을 뒷산에 월명총이 있고, 그 산을 월명산이라고 부른다. 월명총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옛날에 수동은 사근이라 하였고, 역마가 있었던 역촌이었다. 지금도 수동 뒤에 있는 산에는 사근산성이 남아 있다. 사근역은 진주 마산등 남부지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 말을 바꿔 타고 가는 곳이었다. 이곳 사근역에 월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역녀가 있었다. 역녀란 역일을 돕는 계집으로 신분이 낮은 여자였다. 그런데 사근역에는 행사을 하면서 머물러 살고 있는 경주총각이 있었다. 마음씨가 좋고 성실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있었다. 월명과 젊은이는 자주 만나 잘 지냈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 오랜 행상살이에 지친 젊은이에게 월명의 따뜻한 손길은 감사할 뿐이었다. 결국 둘의 사랑은 타올라 주변사람의 권고로 간단하게 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렸다. 행복한 가정생활은 시작되었지만 얼마지 않아 남편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이 날아왔다.
수동에서 경주까지는 아주 먼길이었기에 함께 갈 수가 없어 결국 월명을 혼자 남겨 두고 빨리 돌아오겠노라고 말하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소식도 알 길이 없었다. 몇 달이 지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월명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월명이 남편을 끔찍히 사랑한 나머지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견디다 못해 몸져눕고 말았다. 음식은 먹기조차 싫어졌고 몸은 쇠약해졌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월명은 결국 남편이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월명은 죽으면서 남편의 고향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다 묻어달라고 말했다. 남편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자 하는 애절한 마음이다.
남편은 어머니의 병환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아들의 정성에도 아랑곳없이 어머니의 병은 깊어졌고, 결국 어머니는 숨을 거두셨다. 먼 여행과 어머니를 위한 병간호 때문에 남편도 몸져눕고 말았다. 하루도 월명을 잊지 못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월명이 걱정이 된 남편은 아픈 몸을 이끌고 먼길을 걸어 월명에게 간신히 돌아왔지만 애석하게도 월명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월명의 무덤은 사근역 삼거리 맞은 편에 있는 산, 수지봉 중턱에 남편의 고향인 경주를 바라볼 수 있게 묻어두었던 것이다. 남편은 월명의 무덤에서 하염없이 울고 또 울다가 결국 병이 깊어져 남편도 죽으니 동네 사람들은 남편을 월명과 함께 합장하였다. 후세에 그 무덤을 월명총이라 하였다.
향토문인 김윤수의 월명총 이해는 이렇다 성종 때 함양군수로 5년여 동안 재직한 점필재 김종직은 월명총을 이렇게 노래했다.
무덤 위에는 푸르고 푸른 연리지 /
길손이 그를 위해 화산기 부르네
지금처럼 달 밝으면 여우가 우는데 /
꽃다운 넋은 나비되어 날겠지
또한 점필재의 제자인 뇌계 유인호는 월명총을 이렇게 노래했다.
월명총 위에는 밝은 달만 떠 있고 /
해마다 한식날에는 풀만 우거졌네
어젯밤 떠도는 혼의 패옥은 차디찬데 /
봄바람 불어 진달래 꽃 다 피었네
또 태촌 고상안의 시를 살펴보면 결구에 "농사철에는 비가 되어 내렸네"로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월명총은 후대에 기후제의 자리가 된다. 점필재는 기후제를 용유담의 성모묘에서 드렸으나 조선후기 태촌시대에는 월명이 영험 있는 비의 신이 되어 있었다. "월명총의 흙을 훼손하여 무너뜨리면 비가 내렸다"한다. 신인 태촌은 "4년동안 두 번의 가뭄에서 실제 월명총의 흙을 무너뜨렸더니 비가 내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제 월명은 신비한 힘까지 지니게 되어 후세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것은 애틋한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다. 월명총 이야기가 담고 있는 알속은 무엇일까?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이 아닐까? 역녀와 장똘뱅이의 못 다 이룬 사랑은 후세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눈물이 되었다.
그 눈물은 그토록 가문 날에 무덤을 만지면 비가 되어 내렸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 애틋한 사랑을 만나고 싶다.
황대마을 효성바위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 황대마을에는 우씨성을 가진 농부 내외가 슬하에 자식하나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옛 말에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이 있으나 우씨에게는 자식 없는 생활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 부부는 하늘을 쳐다보며 부모를 괴롭히는 자식이라도 좋으니 천지신명께 자식 하나만 내려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하늘이 도와 그로부터 열달이 지나자 자식을 얻게 되었다. 늙으막에 얻은 자식이라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러워 옥이야 금이야 사랑만 주면서 기른 것이다. 이렇게 되자 부모를 때리는 것은 보통이고 심지어는 남의 집 물건을 망가뜨리고 부수기까지 하였다. 하도 망나니로 자라서 그의 부모는 눈만 뜨면 자식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야 했고, 남의 물건 배상하기가 일쑤였다.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려 동네 사람들은 배우지 못한 후레자식이라고 욕설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물에 물 길러 나온 양가집 딸을 희롱하였는데 그 규수가 이 망나니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너는 짐승같은 놈'이라 맞서니, 할말을 잃고 집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자신이 행한 행동이 '짐승이나 할 짓이었구나' 크게 깨닫고 밥도 먹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행패부리는 것을 중지하고 그 규수를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규수를 찾아갔다. 규수의 아버지는 훈장 선생님이었고, 그 품세가 틀리지는 않아 보였기에 그 젊은이에게 공부를 가르치기로 하였다. 마음을 고쳐먹은 젊은이는 얼마나 글읽기를 잘하는지 훈장은 자식을 그 젊은이와 혼인케 하였다.
젊은이는 이름난 효자가 되었고 동네 어른들께도 깍듯이 대하였다. 혼인식 날에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망령이(치매) 들었다. 젊은이는 아버지 산소에서 시묘살이를 했고, 부인은 금방 밥을 주었는데도 굶겨 죽인다고 고함을 치고 밥을 모래에 섞어 준다며 욕을 하는 등 온갖 수모를 겪으며 망령든 시어머니를 섬겼다. 그렇게 삼년을 살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세는 더욱 심해졌다.
남의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실성한 사람처럼 마구 돌아다녔다. 그 일을 수습하는 일도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과 함께 어머니가 온 정신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자식과 며느리에게 미안하다고 울고, 자식내외는 더욱 지성으로 어머니를 섬기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하며 울었다. 이런 일을 동네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그 젊은이는 효자로 소문이 무성케 되었다.
해마다 큰 바위에 풍년을 기원하였는데, 이 바위에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손을 대면 비가 오고 날이 좋아 그 해에 풍년이 들었다 한다. 우씨도 그 행상에 참여하였는데, 동네 훈장인 우씨의 장인 어른이 우씨를 거론하자 마을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우씨가 손을 대도록 제안하였다. 우씨는 극구 사양하였다.
칠복이가 자신보다 더 훌륭한 효자라고 칠복에게 사양하였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우씨에게 손을 대도록 권장했다. 우씨는 하는 수없이 부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배를 한 다음 바위에 손을 대었다. 그 순간 갑자기 먹구름이 모여들더니 뇌성소리와 함께 바위가 움푹 패이면서 우씨의 손자국이 났다. 온 동민들은 우리 동네 효자 났다고 함성을 지르며 축하했다.
그 해도 농사가 잘 되었고 우씨를 귀감으로 해마다 효자가 끊어지지 않고 배출되었다. 그 후로 큰 바위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손을 대면 손자국이 난다고 하여 효성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은대
이은대는 함양읍을 흐르는 위천수(뇌계)의 남쪽, 지금의 일교와 이교의 중간쯤 되는 거리에 위치한 곳이다. 울창한 숲을 이루고 함양의 시가지를 바라보며 솟아 있는 곳이 이은대요. 그 아래 아늑하게 자리잡은 마을이 이은리라고 한다. 이은대(吏隱臺)란 관리가 숨어 있는 곳이란 뜻으로 지금은 충혼탑이 있다.
유자광은 세조에게 특채되어 당시의 훈구파에 정치적 뿌리를 박고 예종 성종 연산군 등 왕이 바뀔 때마다 줄타기를 잘 해서 승승장구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유자광이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의 고모가 함양군 지곡면 수여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는 천대와 설음 속에서 살아온 서자이기에 입신양명하여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고모에게 인사드리고 싶었다. 함양은 그 당시에 정치적으로 훈구파와 대립관계에 있던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이 고을 원님으로 와 있었다. 이 때 김종직은 그렇지 않아도 유자광을 기피해야하는 인물로 여기고 있었는데 함양에 온 다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관찰사는 원님보다는 높은 벼슬이었기에 융숭한 대접이 해야 한다. 그러나 김종직은 그럴 수가 없었다.
유자광은 지략은 뛰어나나 그 사람됨이 간사하고 서자 출신이요, 훈구파였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관찰사를 만나지 않기 위해서 아전에게 유자광이 오면 지방 순창중이라 이르고 이은대에 숨어 쉬고 있었다.
유자광이 함양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와서 보니 듣던 바와 같이 산수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고장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을 한 수의 시로 남기고 싶었다. 그는 대관림(상림)을 돌아보고 소고대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내려와 학사루에 올랐다. '필묵을 준비하라' 이르고 시 한수를 지어 현판에 걸었다. 유자광이는 목적지인 고모집에 갔다. 김종직이 유자광이가 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학사루에 오르니 보지 못하던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여봐라, 저기 새로 걸려 있는 것이 무엇이더냐?"
"네, 관찰사 유자광 나리께서 걸어 놓고 가셨습니다."
"무슨 현판인데."
"네, 시를 한 수 읊어 걸어놓은 것인 줄로 아옵니다."
"아니, 유자광같은 서출 따위가 감히 학사루에 현판을 걸 자격이 있느냐? 당장 저 현판을 내려라."
"사또, 그래도 이 현판은 관찰사 나으리의 현판이옵니다."
"관찰사가 아니라 정승이라도 어림없다."
"내려서 어지하오리까?"
"아궁이에 쳐 넣어버려라."
김종직이 하도 엄한고로 그 현판을 내려 불에 넣었다. 말은 날개가 돋히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날아가게 마련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이야기가 유자광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으리, 나으리의 시가 함양의 학사루에 걸릴 자격이 없다하여 김종직이가 그 현판을 철거했다 하옵니다." 유자광은 그 말을 듣고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 출신이 떳떳하지 않아 열등감에 싸여 있는 유자광이고 보면 그럴 수 있다.
김종직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치도록 적개심을 느꼈다고 한다. 흔히 이 현판 철거 사건으로 인하여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 유자광은 김종직이가 죽자 부관참시를 거행한다. 큰 뜻을 품은 관리가 사사로운 것 때문에 큰 일을 그르치게 되었다. 당시의 신분관계가 얼마나 이 사회를 좀 먹었는지를 알 수 있다. 누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것인지가 중요하며 거기에는 당리당략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자광이나 김종직은 소인배이다. 이은대는 김종직이 유자광을 피하여 숨은 곳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후에도 김종직은 이곳에 자주 들렀고 사후에는 주민들이 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시기도 하였다. 그 사당은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고 일제 때는 신사참배 강요의 장소가 되었고 해방과 함께 파괴되었는데, 육이오 사변 이후 충훈탑을 세워 순국선혈들의 정신을 기리는 장소가 되었다.
상사바위
불교가 숭상되던 신라 중기에 함양군 안의면 심진동 장수골에도 장수사를 비롯하여 은신암, 용추암 등 많은 사찰들이 한 창 번창하던 때의 일이다. 용추계곡 용추암에서 동쪽으로 약 1km 쯤 되는 곳에 큰 바위가 하나 있다. 이름하여 상사바위다. 이 바위에는 아주 슬픈 이야기가 하나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큰 바위아래에는 조그마한 암자가 하나가 있었고, 그 암자에는 한 창 나이 젊은 중들이 불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어느날, 이 암자에는 꽃다운 나이의 처녀가 불공을 드리러왔다가 암자의 동자승에게 첫눈에 반하여 연정을 품게 되었다.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가슴에 붙은 사랑의 불을 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동자승과의 사랑을 이루려고 처녀는 절을 내려가지 못했다. 이 처녀의 행동을 유심히 들여다 본 절에서는 마침내 이 처녀를 절로부터 강제로 추방하고 말았다. 절에서 쫓겨난 처녀는 집에 돌아와서도 이 동자승을 잊지 못하였다. 활활 타오르는 사랑은 어쩔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그리워지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을 어찌하랴. 잊으려하면 더욱 그립고 증오하면 더 연모의 정이 깊어진다. 그녀는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그 동자승을 연모하는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수도승에게 가서 애원할 수도 없고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녀는 동자승을 밤낮으로 사모하다가 시름시름 앓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뒤, 어느 달 밝은 가을 밤, 이 동자승이 수행을 잠시 멈추고 큰 바위 위에 올라가 쉬게 되었다. 깊어 가는 가을밤 고독하고 외로웠다.
깊은 산 속에서의 수도생활은 힘들고 어려웠다. 두고 온 가족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여러 가지 추억들이 생각 속에서 일어났다. 잠시나마 마음이 산란해진 것이다. 달빛을 받으며 한 숨을 쉬었다. 바로 그 때였다. 난데없이 큰 뱀이 달려들어 온 몸을 칭칭 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손 쓸 수가 없이 당하고 말았다. 칭칭 감은 뱀이 동자승을 노려보면서 말하였다. "나는 당신을 사모하다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한 맺힌 처녀 귀신입니다. 죽어서도 당신을 잊지 못하고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저의 소원은 영혼으로나마 그리운 임의 품에 안겨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라도 듣고 싶어 이렇게 뱀으로 변신하여 찾아왔습니다. 당신의 몸을 감았으니 불쌍한 소녀의 품은 한을 풀어 주십시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만 따뜻하게 해주소서."하고 애원하였다.
이 말을 들은 동자승은 너무 뜻밖의 일이요 놀라운 일이라 정신을 잃었다가 한참 후에 정신을 차려, "이 몸은 벌써 속세를 떠나 머리를 깎고 부처님의 은혜 속에 귀의하고자 맹세하여 이 한 목숨을 다 바쳐 불도를 닦는 일에만 정진하여 왔는데, 어이하여 사련에 눈길을 돌리 수 있으리요?"하고 한 마디로 거절하자, 그 뱀은, "그럼 당신과 나의 맺지 못할 이 사랑을 저 세상에 가서나마 맺어 보자."고 하며, 큰 바위에서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동자승과 뱀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 바위를 후세에 상사바위라 부르고 있다. 동자승과 뱀이 죽은 뒤 절은 망하였으며, 지금도 이곳에는 옛기와 조각이 남아 있어서 그 당시에 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 골짜기에는 요사이에도 뱀이 많기로 유명하다.
상사바위는 오늘도 말없이 흐르는 물을 굽어보면서 여인과 동자승의 넋을 달래고 있다. 그 후로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아파하는 상사병 환자들은 이 곳 상사바위에서 정성을 드리면 그 사랑이 맺어진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