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 군 복무를 마친 23살의 어느 날.
나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위한 도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그 도전의 공간은 다름 아닌 호주 시드니! 친척이나 친구 하나 없는 이 나라에서 내 삶을 맡긴 건 정말 내 인생에 있어 큰 도박이었다.
그 당시 난 달랑 한화 80만원(AU$1,000)을 들고 한국을 떠나왔지만 젊음의 패기와 용기, 그리고 포부만큼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내 목표는 단 하나! 어렵게 온만큼 더욱더 열심히 생활하고 많이 배우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고스란히 내 속에 녹아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호주는 내 인생 제 2의 텃밭이었던 것이다.
호주와의 소박한 첫대면
낯선 나라의 새로운 문화, 그리고 다른 음식과 언어를 접하게 되면 처음엔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된다. 엄격하고 계층적인 한국 사회를 떠나 격의 없는 행동이나 대화로 점철된 이 곳 문화를 접한 나도 그러했다. 하지만 일단 우리 나라와 비교하면서 좋고 나쁨을 따지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모든 호주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내 호주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우선 호주 시드니의 상징인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 TV나 사진으로만 봤었던 이것들을 직접 보게 된 것은 정말 꿈만 같았다. 지금은 아침마다 볼 수 있어 일상의 풍경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호주는 크게 여섯 주로 나눠져 있으며, 시드니는 New South Wales란 주의 한 도시다.
그리고 호주는 얼마나 큰 대륙인지(오죽하면 오세아니아주 자체가 다 호주일까) 시드니에서 퍼스란 지역까지 기차로 72시간, 3박 4일 종단을 해야할 정도다. 각 주마다 시차가 나며 날씨 또한 완연히 다르다. 전반적으로 호주는 치안이 잘 되어 있으며 1년 내내 날씨가 좋고 여행할 곳이 많은 나라다.
특히 시드니는 바다를 끼고 있어 날씨가 좋은 주말에는 언제든지 바닷가에 가서 바비큐 파티를 즐길 수 있고, 수상스포츠(윈드서핑, 스킨스쿠버, 보트낚시 등)를 만끽할 수 있다. 일단 호주에 오면 공원마다 바비큐를 즐길 수 있게 테이블과 불판들을 볼 수 있는데 바비큐는 호주의 전통 음식이기도 하다.
호주는 남반구에 위치한 나라라 우리 나라와는 반대의 계절을 가지고 있다. 11월부터 3월까지의 여름은 유럽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항상 북적거리며 겨울에도 춥지 않아(우리 나라 늦가을 날씨) 바닷가엔 항상 수영하는 사람들이나 서핑 매니아들로 북적거린다.
다양성의 지존, 호주의 문화
시드니에는 많은 나라 민족들이 살고 있으며 그만큼 이민 정책도 잘 되어 있다. 이렇듯 다양한 민족이 호주에 모여들 수 있는 것은 유학과 관광 정책 덕분이다. 국가 경제의 주수입원이 유학과 관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또한 호주 시드니는 세계적으로 살기 좋은 도시 5위 안에 꼽힐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호주로의 이민을 꿈꾼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토양 속에서는 독특한 문화들이 생성되기 마련. 우선 시드니에서는 매년 3월마다 '마디그라' 라는 동성애자 축제가 열린다. 축제가 열리는 Oxford St.는 동성애자 거리로 지정될 정도.
전세계 동성애자들이 참가하여 퍼레이드를 하는데 한국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독특한 재미와 신비감마저 준다. 나도 Oxford St.에 있는 한 Thai(태국) 레스토랑에서 1년 반 동안 일을 한 적이 있는데 15명의 종업원 중 절반 이상이 동성애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밤거리를 남자 홀로 다니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 중 하나다.
한번은 일하던 친구들과 술집에 갔는데, 화장실도 친구들과 같이 가야만 했다. 화장실에서 있을지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는 '자유로운 문화'의 일종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보면 나도 완전히 호주 생활에 적응을 했나 보다.
시드니의 '킹스크로스'란 지역은 예전에 무법지대였으나 지금은 관광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이름 때문인지 왕십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곳이다. 거리마다 스트립 바들이 즐비하며 뒷골목에서는 마약거래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마약을 하는 장소는 합법적으로 정해져 있으며, 경찰의 동의와 보호에 의해 합법적으로 행해진다. 인간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곳, 그런 나라가 바로 호주다.
책임지는 젊음, 단 주말은 FREE!
호주로 건너와 시드니에 둥지를 튼 나는 스시바, 마켓 청소, 수출품 포장, Thai 레스토랑, 홍콩 카페, 식당 주방일 등 안 해본 일 없이 다양한 경험을 했다. 힘들게 유학을 온 상황이라 생활비는 내 스스로 충당해야 했기 때문.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호주 생활 내내 나의 좌우명이 되다시피 했다.
주 학생들은 만 18세만 되면 집에서 독립해 따로 생활한다. 비록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고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하지만 이들에게 '독립'은 당연한 일 중 하나다.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는 한국 젊은이들에게는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호주 젊은이들의 문화인 것이다(사실 대부분의 나라들은 그러하다).
평일동안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 젊은이들에게 주말은 일종의 해방구 같은 시간이다. 금요일과 토요일은 모든 젊은이들이 시내로 쏟아져 나온 듯 북적거리고 집집마다 시끌벅적하게 파티를 한다.
주말 파티에서 나오는 음악이나 굉음은 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다(한국에서라면 곧바로 경찰에 신고할 것이다). 내가 살던 집 위층에는 주말마다 시끄럽게 파티를 해서 항상 불면의 밤을 지새곤 했지만 이러한 젊은이들의 문화를 터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파티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맥주인데 특히, 호주 대표 맥주인 VB(Victoria Beer)는 정말 환상적인 맛을 자랑한다.
한국 맥주는 맹물처럼 느낄 정도로 시원하고 톡톡 쏘는 맛이 일품! 호주는 각 주마다 상징하는 맥주가 있는데(한국에도 각 지방마다 대표하는 소주가 있듯) 호주에 처음 왔을 때 난 그 VB맥주에 반해 혼자 반 박스를 마시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호주의 음주 문화는 '친근감'으로 대변된다. 시내 길거리나 술집에서는 얼굴만 스쳐도 인사를 나눈다. 'Hello, Hi' 혹은 'How are you? How is going?'과 같은 인사말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잘도 건넨다. 맨 처음에는 언제 봤다고 나한테 인사냐며 의아해 했지만 이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과정을 보면서 지금은 나도 생면부지의 젊은이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곤 한다.
호주의 기본기, 경제성과 효율성
이 곳은 유행이 없는 나라다. 옷, 차, 휴대폰 등등은 그저 생활 용품일 뿐이며 한번 사면 고장날 때까지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차는 그냥 굴러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통 10년 이상 몰고 다니며 새 차를 구입하기보다는 중고차를 선호한다. 그렇기 때문에 호주 중고차 시장은 아주 활발하며 거리 어디서든 중고차 시장을 쉽게 찾을 수가 있다. 한번 유행이 되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옷을 입고, 또 고장 나지 않아도 질리면 쉽게 다른 휴대폰, 자동차를 구입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인 것이다.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호주 처음에 왔을 때 정장에 남성 백을 들고 집을 나섰다(한국에서 외출할 때 흔히 입는 그런 복장). 옆집 호주 아저씨가 나를 보고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교회에 가느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정장 같은 것은 교회에 가거나 중요한 행사에 참가할 때나 입는 그런 복장이었던 것이다.
주말에는 각 동네마다 마켓이 열린다. 그곳에선 쓰던 물건을 교환하거나 저렴한 비용으로 물건을 살수가 있으며, 먹거리와 볼거리 또한 푸짐하다. 이 곳 사람들에게 경제성과 효율성은 그야말로 일상인 것이다. 주말이 아닌 호주 시내는 대부분 조용하다. 저녁 5시가 넘으면 가게들은 하나 둘씩 문을 닿고, 사람들도 어디로 갔는지 거리엔 침묵만이 흐른다.
대신, Movie day(매주 화요일)나 Shopping day(매주 목요일)에는 늦게까지 쇼핑몰들이 문을 열고 사람들도 꽤 북적거린다. 아참, 호주 시드니의 차이나타운을 빼먹을 뻔했구나.
차이나타운은 시드니 다운타운의 5분의 1을 차지할 만큼 큰 규모다. 이러한 차이나타운의 유래는 하버브리지 공사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버 브리지는 사람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다리인데, 중국인들이 공사 중에 많이 죽었으며, 그것을 위로하기 위해 시드니 당국에서 차이나 타운을 만들어 준 것(시내 한복판에!). 차이나타운에 가면 저렴한 가격으로 입맛에 맞는 식사를 할 수 있다.
그 반면에 우리 한국 교민 역사는 아주 짧다. 베트남 전쟁 이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호주에 정착한 세대가 이민 1세대이고, 내 또래 이민자들이 2세대라 불린다.
제발 뚜렷한 목표 의식을!
맨처음 나는 영어공부보다 호주가 어떤 나라며, 나에게 찬스를 줄 수 있는 나라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4년 동안 대학공부는 물론 시간 나는 대로 여행도 하고, 여기저기 일도 많이 해보고, 많은 나라 사람들도 만나 그들의 문화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던 중 평생에 딱 한번 있을 법한 경험을 하기도 했는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는 자원봉사로 한국선수단 응원단장을 맡아 활동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응원단장을 한 경력이 있기는 했지만 타국에서 대한민국의 승리를 외친 것은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20경기 이상 참관해 목이 터져라 응원했음).
이렇듯 스스로 능동적으로 움직인다면 외국 생활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유학이든 여행이든 목표를 갖고 움직인다면 찬스는 항상 자신에게 돌아오는 법.
학업도 올해면 마치고 내년에는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찬스와 행운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자에게만 다가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몸소 체험했다.
만약 지금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확고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흔들리지 않는 목표는 행운을 잡는데 한걸음 다가가는 계기가 되어 줄 것임을 확신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