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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찬군 족보에 대해 의문
5. 천손, 왕손 함창김문은 대동보(大同譜) 5번 발간한
뿌리 깊은 함창 김씨이다
족보
대동보(大同譜) 5번 발간
西紀 1782년 古寧紀元 1741년[正祖(정조) 6년] 壬寅譜 임인보 5권
西紀 1807년 古寧紀元 1776년[純祖(순조) 7년] 丁卯譜 정묘보 5권(보유)
西紀 1907년 古寧紀元 16년[純宗(순조) 1년] 丁未譜 정미보 5권
西紀 1968년 古寧紀元 1927년 戊申譜 무신보 5권
西紀 2000년 古寧紀元 1959년 庚辰譜 경진보 6권
족보에 대해
족보의 역사
민찬군 우리 족보를 신뢰하라
선조들의 훌륭한 점을 선양하라
씨족원류는 각문중에서 보낸 것이기에 오류가 많다
민찬군 조상을 알고, 족보를 공부하는 것은 성씨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기
위한 것이기 하늘도 탄복하네
그러나 함창김씨의 아름다운 역사, 긍정정인 면을 찾아 선양하게
세계의 모든 역사는 산화로 시작 되었다
조선의 역사도 단군신화로 시작 되었다
우리가야의 역사도 설화로 시작하였다네
삶이 아름다운 사람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긍정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모든 삶에 긍정적 에어지로
세상의 아름다움만 바라보기 바란다
우리 함창김씨 족보를 사랑하고 신뢰하게
세계 문화유산청에서 우리족보를 문화유산으로 등재 하고자한다
“한국 족보는 700~800년 된 정품이라는 진정성(authenticity),
조선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소멸한다면 인류 유산에 심각한 손실을 끼치는
독창성과 비(非)대체성을 지니고 있어 세계기록유산의 가치가 있다”
각 성씨들의 시조에서, 중시조 까지는 구전이다
그러나 역사성, 학문성, 독창성, 진정성은 인류유산 기록물로 가치를 인정 받았지만
씨족원류는 17세기 중반 조종운(豐壤人 1607~1683 광해군, 인조)이
각성씨들의 족보를 필사한 것으로 오류가 많다
각문중의 자료를 받아 작성 하였기에 오류가 많다
내용은 필사본으로 분량은 7책이며,
현재 조종운의 14세손 조용진(趙鏞珍)씨가 소장하고 있다.
믿을 만한 자료가 아니다
위보(僞譜), 즉 가짜 족보가 많이 생겼다
그래서 세계 문화유산청 역사성, 학문성, 독창성, 진정성을 인정 받지 못하고
문화로서 가치성이 부족함을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 목판 인쇄는 1400년경 활성화
활자 인쇄는 직지심경에서 시작 되어 책의 필요성을 느끼고, 족보의 기록을 위해
1650년 중반기부터 활성화 되어
1750년경부터 활성화 되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중기 까지는 문자를 익히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글과 문자는 5% 이내의 명문가, 승녀들이 배우고 익혀오다가
천주교, 기독교의 서양문화가 들어오면서 전도를 목적으로
1900년경부터 교회, 학교가 생기면서 50%가 글자를 익히다가
1950 6.25 이후에 학교가 전국에 세우게 되고 문맹자 퇴치로
80%가 읽고 쓰는 문자 혁명을 이르켰다
조선 사회의 혼란
당파씨움으로 4대 사화
4대 사화(四大士禍)는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 간에 다툼이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 1498년 연산군 4 조이제문, 세조비난, 부관참시김종직, 훈구득세),
갑자사화(甲子士禍 : 1504년 연산군 10 패비 윤씨 한명회부관참시, 김굉필.정여창처형
사림 득세, 중종반정),
을묘사화(乙卯士禍 : 1519년 중종 14 조광조 도학정치, 애송논쟁 붕당정치 훈구반발
서인과 동인 갈등)
을사사화(乙巳士禍 : 1545년 명종 즉위 벽서사건 외척간 대립 대윤, 소윤 )
기축옥사(1589 선조 )정여립 모반 동인을 물리치고 서인이 득세 송강 정철
특히 정여립 기축옥사 때 1000명이 넘는 동인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기축옥사 후에 서인 정철도 세자 책봉 문제와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의
문서가 거짓이었다는 정적들의 탄핵에 말려
유배로 길지 않은 삶을 끝냈으니 인과응보라고나 할까? (정철 1594 선조에게 버림 받음)
전쟁으로 국토의 황폐화
임진왜란(1592)의 화를 당함
호란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의 화를 당함
성종의 아들 연산군은 중종반정(1506 중종과 정난정) 군으로 전략하였다
선조의 아들 광해군도 인조반정(1623) 군으로 전략하였다
숙종1674-경종-영조-정조-(순조1800-(익종)-헌종-철종 안동김씨 세도정치
익종의 비 풍양조씨 조대비(헌종의 어머니) 풍양조씨 세도정치
고종-순종 1910 국가 패망)
서양문물의 유입
영정조시는 탕평책으로 국가 개혁을 하였으나
서양문화가 물밀드시 들어왔다
천주교의 전래 1783 이승훈이(다산의 매부) 전파
(1791년(정조 15년)에 일어난 신해박해.
신유박해 1801년(순조 원년, 수렴청정기)
기해박해 1839년(헌종 5년)에 일어난 박해.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세도 정치의 중심
병오박해 1846년(헌종 12년)에 일어난 박해. 김대건 신부 순교 (한국 103위 순교성인)
병인박해 16년(고종 3년)에 일어난 박해. 24명의 순교
병인양요 1866년 개항 요구(일본은 1853년 개항, 1868년 명치유신 한국 보다 200년 앞서감)
1853 일본개항, 홍경래의 난(1881 홍경래의 난, 1868 명치유신, 1866 개항요구,
1876 강화도 조약, 1882 조미수교)
흥선개원군 집권(13) 쇄국정치(1905 을사보호 조약 1910.8.29. 한일합방) *서원철폐령 18(고종) 사액 서원 47개 남김
동학의 실학운동
병인양요 1866년 개항 요구(일본은 1853년 개항, 1868년 명치유신 한국 보다 200년 앞서감)
1853 일본개항, 1868 명치유신, 1866(병인영요) 개항요구,
1876 강화도 조약, 홍경래의 난(1881 홍경래의 난), 1882 조미수교
흥선개원군 집권, 쇄국정치(1905 을사보호 조약 1910.8.29. 한일합방) *서원철폐령 1864
순조-헌종-철종 시대는 왕권이 흔들리고
전쟁과 서양문화의 유입으로 족보가 필요했다
임진왜란 이전에 발행된 족보인 목판본 9성씨(매우 신빙성이 높음)
안동권씨(1476), 청송심씨(1545), 문화류씨(1423, 1562) 남양홍씨(南陽洪氏,1454),
전의이씨(全義李氏,1476), 여흥민씨(驪興閔氏, 1478), 창녕성씨(昌寧成氏,1493),
영일정씨대종보(1545년경), 목판본 , 고령신씨족보(1578)
임진왜란 후조선시대 중엽(1567~1608) 족보의 일반화 (신빙성이 조금 떨어짐)
함양박씨세보(咸陽朴氏世譜)1600, 진양하씨세보(晉陽河氏世譜1606, 파평윤씨성보(1613),
광주이씨동성보(廣州李氏同姓譜)(1613), 순흥안씨족보(1614), 청주한씨세보(1614),
전주이씨(1412, 1679), 천안전씨족보(天安全氏族譜)1614, 창녕성씨족보(昌寧成氏族譜)1616, 예안김씨족보(禮安金氏族譜)1627
함창김씨대동보 壬寅譜 임인보 5권(1782)
(1750년 이후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한국 족보는 700~800년 된 정품이라는 진정성(authenticity),
조선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소멸한다면 인류 유산에 심각한 손실을 끼치는
독창성과 비(非)대체성을 지니고 있어 세계기록유산의 가치가 있다”
“옛 족보 원본은 훼손·멸실된 경우가 많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그나마 적었던 족보가 여러 문중에서 많이 소실돼
그 이전에 출간된 족보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
조선 후기에는 등짐장수처럼 목활자를 지게에 짊어지고 대규모 집성촌을 찾아다니며
문집과 족보를 인쇄해 주는 일종의‘이동 출판업자’가 생겨났다고 한다.
위보(僞譜), 즉 가짜 족보는 조선 후기 신분 질서가 흔들리며 나타나
전국으로 확산된 현상이다.
풍양조씨
풍양조씨의 시조는 고려 초에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낸 조맹(趙孟)이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워 벼슬과 함께 조맹이라는 이름을 하사
고려말에 조운흘(趙云?)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그는 고려말 문신으로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하는 왕을 시종하여 2등 공신에 올랐고
씨족원류는 17세기 중반 조종운(豐壤人 1607~1683 광해군, 인조)이
540여개의 각성씨들의 족보를 필사한 것으로 오류가 많다
위보(僞譜), 즉 가짜 족보가 많이 생겼다
조선 숙종 이후. 상신 7명·대제학 4명·공신 7명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고구마를 들여온 조엄(趙?)이다.
조엄의 손자가 풍양조씨 세도정치를 연 조만영·조인영 형제이다. 풍양조씨의 세도정치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이 순조의 아들인 익종(추존, 효명세자)의 비가 되면서부터이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대비가 되었다.
이두, 향찰, 향기로 적어왔다
한문은 너무 어려워 스님, 명문가 자제 등 5% 미만의 사람이 배우고 익혔다
책은
필사
751년 석가탑(다나니경)
목판 인쇄
초조장경 1096년 몽골 침략으로 1235년 소실
상정고금예문(1234년(고종 21) 50권 28부)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 (1251년 8만 4천 법문(法門)
금속활자
사랑한다
아름답다로 시작
1377 직지심경(1450년 구텐베르크)
1433 훈민정음
임진왜란으로 많은 일간 친척을 잃게 되어
일기 친척을 알아야 할 이유가 생기면사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글자를 읽고 쓰는 사람은 스님, 명문가 자녀로 5% 미만의 극소수의 사람이다
글자를 아는 사람이 소수이기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족보를 목판 활자로 저작하였다
신빙성이 약하다
조선 후기에는 등짐장수처럼 목활자를 지게에 짊어지고 대규모 집성촌을 찾아다니며
문집과 족보를 인쇄해 주는 일종의‘이동 출판업자’가 생겨났다고 한다.
위보(僞譜), 즉 가짜 족보는 조선 후기 신분 질서가 흔들리며 나타나
전국으로 확산 된 현상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족보상에서 각 문중의 상호 인척 관계는
교차 검증이 가능한 상태다.
조선 후기의 족보도 초간보는 대체로 신뢰가 가능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족보는 조선시대 사회제도 연구, 역사학, 문화인류학, 유전학 등의
연구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각 족보의 내용과 친인척 관계, 연대 등을 교차 검증한 결과
19세기 이후의 가짜 족보와는 달리 진본임을 확인했다”
명문가나 세도가일수록 편찬에 힘을 기울였고,
보존도 비교적 잘됐다는 것이 고족보의 특징 중 하나다.
‘족보의 내용을 보면 가문이 보이고, 족보의 보존 상태를 보면 집안의 처지가 보인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할 계획이다
공개되는 古족보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 1545
영일정씨대종보(迎日鄭氏大宗譜) 1545년경
고령신씨족보(高靈申氏族譜) 1578
함양박씨세보(咸陽朴氏世譜) 1600년대 초
진양하씨세보(晉陽河氏世譜) 1606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新編廣州李氏同姓之譜) 1610
파평윤씨성보(坡平尹氏姓譜) 1613
순흥안씨족보(順興安氏族譜) 1614
천안전씨족보(天安全氏族譜) 1614
창녕성씨족보(昌寧成氏族譜) 1616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 1617
예안김씨족보(禮安金氏族譜) 1627
야로송씨족보(冶爐宋氏族譜) 1650년 이전
평양박씨족보(平壤朴氏族譜) 1653
동래정씨족보(東萊鄭氏族譜) 1655
청주이씨족보(淸州李氏族譜) 1657
전주이씨 장의공자손보(章懿公子孫譜) 1657
화순최씨가보(和順崔氏家譜) 1660년경
밀양박씨족보(密陽朴氏族譜) 1662
신평송씨족보(新平宋氏族譜) 1667
18성씨 이외의 족보는 대부분 자신의 성씨를 미화하여 만든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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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사학과 졸업하신 분이 쓰신 청주 한씨에 대한 글입니다. 참고하시고요.
족보 오염이 시작된 시기는 보통 정조때 즈음으로 봅니다. 그렇기에 씨족원류로 선대 계보를 찾아가는 가문이 있는 것이고요. 관련 근거를 제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말로만 하는 논쟁은 신뢰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