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26일 저녁. 작고 아담한 정선역. 마치 첫 중학교 1학년이 된 학생처럼 깔끔한 인상이다.
아마도 매달 2일과 7일에 서는 정선5일장 관광객을 위해서 세심한 배려를 한 모양.
나는 여행지에 도착하면 맨 먼저 그 지방의 기차역부터 방문한다. 시간이 맞으면 기차여행으로 내 여행을 이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차역은 그 지방의 얼굴이라는 점에서도 그저 무심코 넘겨보지 않을 수 없는 방문처이다. 나에겐.
고한에서 정선읍으로 가자면 38번국도를 타고 달리다 정선군 남면(별어곡)에서 59번국도로 접어들어 북행하는 길이다.
또 하나의 환상의 드라이브 길ㅡ59번국도
강원도 도로는 어딜가나 드라이브 길로 손색이 없는 곳이 없겠으나 남면에서 평창군 진부면까지 달리는 길은
깊은 산계곡과 오대천을 끼고 달리는 길이라 여행광들에겐 소문난 드라이브 코스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가을에 달리는 것이란.
나는 버스로 정선읍까지만 두번 가보았다. 언젠가는 정선에 진부까지 가볼 날도 오겠지. 그때가 가을 길이기를.
▲정선역 바로 좌측옆에 공원처럼 조성해 놓은 작은 쉼터.
도시의 역에선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자연 친화적인 공간이다.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는 계절에 저녁식사를 마친 후 저런 곳으로 산책나가 벤취에 앉아서 담배 한 개피 피워물고
느긋한 휴식에 잠기노라면 60kg에서 왔다갔다하는 내 초라한 육신의 무게가 금방 부자가 될 듯 싶다.
저녁 새 우는 소리도 들었다. 문득 이곳에서 봄밤,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 해 전 해남여행시 숙소근처 논에서 밤새도록 울어대던 개구리 울음소리에 온밤을 뒤척이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이 근처에서 논이 없다. 논보다 밭과 산이 흔한 강원도니까.
▲"너도 외롭냐?"
정선역 구내로 들어가 봤더니 대피선 선로위해 화차 한 대 달랑 정선역을 지키고 있었다.
그 많은 친구들 어디에 보내놓고 이 쓸쓸한 산골역에 유폐되어 외로움에 떨고 있을까.
너도 외롭냐? 외롭기는 나역시 네 마음 같으리라. 곧 친구들과 어울려 이 산골역을 떠날 때도 있겠지.
그때는 너도 이 산골역을 추억하게 되리라.
▲정선역 근처에서 본 어느 시골여인숙.
마치 방이 여럿인 시골 처갓집같은 분위기의 여인숙이다.
마당 가운데 돌무더기로 쌓아올린 작은 화원도 있고 시골여인숙치곤 꽤나 정갈한 느낌이었다.
집주인 성품으로 봐서 침구 또한 청결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시골여행을 할 때 이런 여인숙을 만나면 음욕이 꿈틀거리는 모텔보다 이런 평안한 곳에서 내 피곤한 육신을 뉘이고 싶다.
그러나 오늘 어쩌랴. 택시기사가 알려준 새 모텔에다 이미 여장을 풀어버린 후라....
얼마 전, 모카페 친구가 나에게 들려준 詩가 생각난다.
사람들에게서 상처받아 마음 아플 때
순창여인숙으로 가고 싶다
도화지만한 창과 적벽돌 무늬벽지
평반 좁고 긴 방에 즐거운 수인처럼 갇혀
젖은 양말과 함께 꿈 없이 편안히 잠들고 싶다
문 위 신발 얹는 작은 종이상자엔
내 마음처럼 뒤축 구겨진 구두 얌전히 얹어 놓고
남루한 기와 끝 타고 장독대로 낙수지는
새벽 빗소리 홀로 깨어 듣고 싶다
저 늦가을 비에 마음의 담장 허물 수 있다면
그 담장 묵정밭 갈아 고추씨 뿌려
푸른 여름 보내고 욕심 없이 붉은 가을 맞이한다면
나도 한 단지 찰지게 순창고추장 담글 수 있으리
그 고추장 속에 상처난 마음 하룻밤 푹 묻었다가
아침 일찍 다시 꺼내는 싱싱한 용서를 배울 수 있으리
순창의 새벽 안개를 여는 품일 나가는 얇은 벽 너머의 이웃들
섬돌 밑 붉은 슬리퍼 속에 가지런히 남겨 두고 간
사람의 따뜻한 체온 한줌 내 발목에 걸려 목이 잠기고
밤새 마음의 고추장 한 단지 넉넉히 담았다 퍼내는
순창여인숙으로 가고 싶다
고샅길 꺽어 들어 삐걱거리는 나무대문을 열면
젖 물린 젊은 주인아낙이 순한 순창 사투리로 반기는
순창여인숙 / 정일근 詩
▲5월27일 오전 7시23분. 증산에서 출발한 첫 꼬마열차가 정선역에 장날 손님을 내려놓고 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정선5일장 구경에 나선다. 사고싶은 물건도 없지만 오랜만에 시골5일장 구경한다는 그 쏠쏠한 재미 하나로.
도시에서는 재래시장이나 어시장 구경하는 것도 괜찮다. 특히 부산 자갈치시장, 인천 소래어시장....권장하고 싶은 시장.
▲이른 아침 정선5일장터 가기위해 나선 정선거리 등교를 위한 학생들만 가끔씩 보일 뿐 거리는 장날이라도
아직 한적하다. 아니 여유롭다.
무공해 청청지역 정선ㅡ공기..... "서울의 대기오염을 마시고 사시는 님들 생각해 보셨나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산림욕이라는 게 필요없을 듯 싶다.
그래서 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고싶은 땅, 정선.
▲이제 막 개장중인 정선5일장터. 돌아다녀봤지만 도시의 작은 재래시장과는 크게 다를바가 없지만
무공해 산나물과 약초들이 특히 많다는 것이 특색이라할 수 있겠다.
할머니들의 투박한 강원도사투리가 정겹다.
▲정선장날.... 난장에서 내가 사먹은 강원도 토속음식 "올챙이국수"
올챙이국수란 옥수수를 갈아서 틀에 넣고 짜내서 만든 국수인데 끈기가 적은 탓으로 금방 토막되어
틀 아래에 받친 물통에 뚝뚝 떨어지는데 그 모양이 꼭 올챙이같아서 올챙이국수라고 이름붙였다고 알고 있다.
메밀로 만든 콧등치기국수는 예전에 먹어본 탓으로 이번 올챙이국수를 먹어보았다.
장터에서 올챙이국수 한 그릇을 먹으면서 詩人 고 은님의 단 두줄 시를 떠올린다.
미안하다.
나 같은 것이 살아서 오일장 국밥을 사 먹는다.
국밥을 사먹는 게 아니어서 나는 그런대로 덜 미안하다.
그런데 고 은님은 국밥을 사먹는 게 왜 미안했을까. 얻어먹는 국밥도 아닐진데.
혹, 승려시절 승적을 박탈 당하고 파계승이 되어 세속으로 돌아와 고깃국을 먹는 게
지난 날 승려시절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였을까.
살아있을 때는 인간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다 죽어서는 인간의 영양섭취를 위해 제 한 몸 아낌없이 바치는
소야말로 진짜 보살이 아닐까.
소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소보살에게 덜 미안하다. 다행이다.
▲정선 장날에서 내가 가장 의미깊게 본 물건들.
아! 풀무.... 그리고 숯불 다리미....
나의 유년시절엔 연탄도 귀해서 장작불로을 방 덥히고 밥 지어먹고 살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때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우다보면 꼭 필요한 것이 풀무.
장난감이라곤 변변한 것이 없었던 그 시절 나는 풀무를 자전거처럼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들키면 고장난다고 혼나곤 했던 시절.
그리고 숯불 다리미.
하얀 옥양목 이불 홋청이라도 다리미질을 할라치면 그 긴 빨랫감을 멀리서 양 손에 힘을 주어 꽉 붙잡고 있었다.
어머니의 숯불 다리미가 어느새 내 손 가까히 와서 손이라도 데지않을까 그 조바심으로 그 힘든 고역을 인내해야 했던 그 때.
30촉 낮은 촉광의 백열전등 아래 잠 많던 소년은 그 고역이 지겨워 연신 억지 하품만 품어내고 있었지.
아, 그 시절이 그립다.
▲정선5일장 구경을 끝내고 버스터미날로 돌아가는 길에 정선 읍내에서 본 오래된 집.
남들은 옛 집터를 허물고 슬라브주택으로 변신하였는데 양반의 고집처럼 굿굿히 버티고 있는 옛 집.
나는 세월이 가도 변치않는 저런 모습이 왜 그리도 좋은지.
그 집에 들려 집 주인에게 집의 역사를 물어보았더니 건축된지 100년도 넘었다고 한다.
앞으로 오랫동안 저 집이 보존되어 역사의 한 장으로 오래 남아있기를 바라며 1박2일의 정선여행을 마치고
술 깨려는 새벽 속쓰림뿐인,그래도 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한가는 완행버스에 몸을 싣는 나는 어느새 나른한 피로감에 젖어들고 있었다.
▲정선읍 전경
작고 아담한 소읍, 복잡하지 않아서 좋다. 적어도 나에겐......
( 정선읍 전경- 이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온 사진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윤승일.
첫댓글 승일님.. 이 아침.. 승일님 발걸음..마음 자국 따라.. 작은 발걸음 같이 옮겨봅니다.. 참 좋은 분.. 승일님~~~~ 풍성한 아침 열게 해주셔 고마워요
강원도 사람보다 더 강원도를 사랑하는 사람....승일님은 그렇게 내 머릿속에 자리 하지요....정선 오일장이 삼척 오일장과 한날이군요...2,7일.... 늘 건강하세요~~~
회전목마방에 늑대님을 위한, 송화님을 위한 선물 한가지씩 갖다놨으니 다른 사람이 훔쳐가기 전에 얼렁 가저 가시요....꼬리글 고맙습니다.
승일님, 정말 새처럼 자유롭고 싶은 유혹을 ...모처럼의 자유로움이 무색해져 버립니다..단체 여행을 정말 싫어하다 보니 먼 여행 다닐 기회가 언젯쯤에나 ,...순창이라면 우당님,모악님 계신 곳인데,..점심들은 드셨어요?..
뎀 누님! 가정의 족쇄를 풀어버린 자유란 어쩌면 방종일지도 모르지요.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력이 없어 내 마음껏 세상 하늘을 날지만 보이는것은 온통 쓸쓸함 뿐.. 그래서 가끔은 몇 평 안된 '감옥안에서 자유'가 그리울 때.. 있습니다. 새장안의 관상조의 그 답답한 자유랄까?/ 아내에게 만원의 용돈을 받았습니다.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