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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정치사(양장본 HardCover) 저자노중국 출판일조각 | 2018.12.31.
책소개
이 책은 백제사 연구의 대가인 노중국교수가 『백제정치사연구』(일조각, 1988)를 출간한 지 30여 년 만에 그사이 나온 많은 연구 성과들을 비롯해 새로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들로 인해 밝혀진 사실들을 반영하여 백제정치사를 재정리한 것이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저자
노중국
1949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계명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회 활동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학회 회장, 대구사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백제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1979년부터 현재까지 계명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인문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이 밖에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을 맡았고, 현재 문화재위원회 위원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위원 · 한성백제박물관건립추진단 전시기획실무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백제정치사연구', '백제부흥운동사', '역주 삼국사기 1 · 2 · 3 · 4 · 5', '대가야의 정신세계' 등이 있고,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15권을 기획하였다. 연구 논문으로는 '백제의 골족 의식과 골족 범위', '백제의 의 · 약 기술의 발전과 사찰의 의료 활동', '한국고대의 유가정치사상', '백제의 제의체계 정비와 그 변화' 등 다수가 있다.
목차
책을 펴내며
머리글
Ⅰ. 기본 자료를 보는 시각
Ⅱ. 백제의 주민 구성과 백제인의 형성
제1부 건국과 성장
제1장 십제국의 건국
Ⅰ. 한강 유역의 선주 세력: 진국
Ⅱ. 온조의 십제국 건국과 지배조직
제2장 지역연맹체 형성과 하남위례성 천도
Ⅰ. 비류의 미추홀국 건국
Ⅱ. 지역연맹체의 결성과 주도권 장악
Ⅲ. 국호의 개칭과 중심지 이동
제3장 부여씨 왕실의 확립
Ⅰ. 초기 왕계보
Ⅱ. 왕실 교체와 부여씨 왕실의 확립
Ⅲ. 부여씨 왕실의 출자
제2부 집권력 강화와 부체제
제1장 부여씨 왕실의 집권력 강화
Ⅰ. 직계 초고왕계와 방계 고이왕계
Ⅱ. 고이왕의 지배 세력 재편
제2장 백제의 마한 병합
Ⅰ. 마한의 성립·성장과 목지국
Ⅱ. 백제와 마한의 관계와 마한 병합
제3장 부체제의 성립과 운영
Ⅰ. 부체제의 성립
Ⅱ. 부체제의 운영과 제솔회의
제3부 초고왕계의 왕위 계승권 확립과 중앙집권체제 정비
제1장 초고왕계의 왕위 계승권 확립
Ⅰ. 초고왕계의 재등장
Ⅱ. 비류왕의 왕권 강화 추진
Ⅲ. 왕위 계승권 확립과 부의 해체
제2장 근초고왕의 중앙집권체제 정비와 정복 활동
Ⅰ. 통치조직의 정비
Ⅱ. 유교정치이념의 수용
Ⅲ. 군사동원체제의 개편과 영역 확대
Ⅳ. 평양성 전투의 승리와 동진과의 교섭
제4부 한성도읍기 지배 세력의 변천
제1장 부여씨 왕실과 진씨 왕비족 중심 체제
Ⅰ. 왕비족 진씨의 등장과 그 활동
Ⅱ. 불교 공인을 둘러싼 왕실의 갈등과 진씨 세력
Ⅲ. 고구려와의 대결과 진씨 세력
Ⅳ. 부여씨 왕실과 진씨 왕비족 중심의 정치 운영의 특징
제2장 진씨와 해씨의 세력 교체
Ⅰ. 전지왕의 즉위
Ⅱ. 지배 세력의 교체
제3장 목만치의 천권과 해씨 세력의 재부상
Ⅰ. 구이신왕의 즉위와 목만치의 천권
Ⅱ. 비유왕의 즉위와 해씨 세력의 재부상
제4장 개로왕의 왕권 강화 추진과 실패
Ⅰ. 개로왕 초기 실권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Ⅱ. 개로왕의 왕권 강화 추진과 문주의 등용
Ⅲ. 개로왕의 정책 실패와 한성 함락
제5부 웅진 천도와 신진 세력의 등장
제1장 웅진 천도와 남래 귀족의 동향
Ⅰ. 문주왕의 즉위와 웅진 천도
Ⅱ. 남래 귀족의 분열과 반란
제2장 신진 세력의 등장
Ⅰ. 동성왕의 즉위와 진씨 세력의 재부상
Ⅱ. 동성왕의 왕권 강화 추진과 신진 세력의 등용
제3장 왕권의 안정과 갱위강국 선언
Ⅰ. 무령왕의 출계와 즉위
Ⅱ. 왕권 강화와 국제적 위상 고...양
Ⅲ. 웅진도읍기의 역사적 의미
제6부 사비 천도와 대성팔족
제1장 사비 천도와 22부 중심 체제
Ⅰ. 사비 천도와 국호 개칭
Ⅱ. 통치조직의 정비와 22부 중심의 정치 운영
Ⅲ. 국가 제의 체계와 불교 교단의 정비
제2장 한강 유역의 상실과 관산성 대회전
Ⅰ. 삼국 연합군의 형성과 한강 유역의 회복
Ⅱ.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과 관산성 대회전
제3장 대성팔족의 대두와 6좌평 중심의 정치 운영
Ⅰ. 위덕왕의 즉위와 대성팔족의 대두
Ⅱ. 6좌평 중심의 정치 운영
Ⅲ. 위덕왕과 법왕의 개혁 정치
제7부 익산 경영과 미륵사
제1장 무왕의 즉위와 왕비들
Ⅰ. 무왕의 즉위
Ⅱ. 무왕의 왕비들
제2장 무왕의 익산 경영과 사탁씨 왕후의 ‘무육만민’
Ⅰ. 익산 경영
Ⅱ. 전륜성왕 추구와 미륵사 창건
Ⅲ. 무왕의 정치적 한계
제8부 백제의 멸망과 부흥백제국
제1장 의자왕 대의 정치
Ⅰ. 의자왕의 즉위와 친위정변의 단행
Ⅱ. 왕권 강화 추진과 대외정책
Ⅲ. 정치의 혼란과 황음탐락
제2장 백제의 멸망
Ⅰ. 동아시아의 정세와 나당동맹의 결성
Ⅱ. 멸망의 징후와 백제의 멸망
제3장 부흥백제국
Ⅰ. 백제국의 부활
Ⅱ. 부흥백제국의 멸망과 역사적 의미
맺는 글
1. 대왕과 폐하
2. 천하관
3. 9층·7층 목탑의 건립과 일통삼한의식
찾아보기
책 속으로
온조의 건국 시기는 국가 발전 단계와 연동해서 보아야 한다. 한국고대사회에서 국가 발전 단계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읍락 단계-국 단계-국 연맹 단계-부체제 단계-중앙집권국가 단계로 설정할 수 있다. 발전 단계론에 입각해 보면 국 단계부터 건국으로 볼 수 있다. 국이 성립하기 이전에는 방국邦國의 칭호도 없고 군신의 칭호도 없이 추장만 있었지만 국이 성립하면서부터 왕과 신하와 백성이 있고 일정한 범위를 영역으로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십제국의 건국 시기는 『삼국사기』의 기사처럼 기원 전후한 시기로 보고,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축조된 3세기 중후반은 부체제 단계에 해당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 ‘제1부 건국과 성장’ 중에서, 69쪽
이후 백제는 국호를 십제국에서 백제국伯濟國으로 고쳤다. 국호 개칭 시기로 주목되는 것이 2세기 중반경이다. 이 시기에 십제국은 미추홀 세력을 대신하여 지역연맹체의 맹주국이 되었으며, 중국 군현에 맞설 정도로 국력이 성장하였다. 이에 십제국은 성장한 국력에 걸맞게 국호를 십제국에서 백제국으로 개칭한 것 같다. 그 시기는 초고왕 대(166~214)에 해당된다.
백제국伯濟國으로 국호가 개칭되면서 국호의 의미도 새로 부여되었다. 새롭게 부여된 의미가 ‘백성들이 즐거이 따른다는 백성낙종[百姓樂從]’이다. 이 국호에는 ‘백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민에 대한 지배권이 국왕에게 있음을 보여 준다. (중략)
백제국百濟國으로 국호 표기를 확정하면서 이 국호에 새롭게 부여된 의미가 ‘백가제해百家濟海’이다. 백가百家는 지배층을 구성한 범위가 그만큼 넓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주변 세력을 정복하거나 흡수하여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음을 보여 준다. ‘제해濟海’는 바다를 잘 이용한다는 의미이다. 백제는 강과 바다를 끼고 있는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바다’의 강조는 백제의 해양적 성격을 잘 드러내 준다. ― ‘제1부 건국과 성장’ 중에서, 90~92쪽
백제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지역연맹체를 구성하였던 국들은 독자성을 잃게 되었고, 그에 따라 국의 수장의 일부는 중앙귀족으로 편제되었다. 중앙귀족의 수는 영역이 확대되면 될수록 늘어났다. 이렇게 늘어난 중앙귀족들을 편제한 것이 지배자 집단으로서의 부部이다. 이 부가 중심이 되어 국가가 운영된 체제를 부체제라고 한다. (중략)
저자는 부체제의 성립 시기와 관련하여 일련의 국가체제 정비가 이루어진 고이왕 후반경을 주목하고자 한다. 고이왕은 목지국을 멸망시키고 주변의 여러 국들을 통합한 후 통합된 지역의 국의 수장들을 중앙귀족으로 전화轉化시켜 집권력을 강화였다. 그리고 중앙귀족으로 전화된 세력들을 편제하기 위해 고이왕은 27년(260)과 28년(261)에 좌평과 솔계, 덕계 관등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조직을 새로이 설치하였다. 이 토대 위에서 고이왕은 부체제를 성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 ‘제2부 집권력 강화와 부체제’ 중에서, 160~163쪽
지방통치조직을 만듦으...로써 종래 부의 유력자의 관할하에 있던 반공지 半公地와 반공민半公民은 이제 국왕의 직접 지배를 받는 공지公地와 공민公民이 되었다. 근초고왕은 이곳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조세를 거두고, 노동력을 동원하고, 군사를 징집하고, 사법권을 일정하게 행사하도록 하였다. 소출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토지대장도 만들고 인구도 파악하여 호적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근초고왕은 전국을 일원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근초고왕이 371년에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할 때 정병 3만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조직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 ‘제3부 초고왕계의 왕위 계승권 확립과 중앙집권체제 정비’ 중에서, 207쪽
이처럼 전지왕의 즉위를 분기점으로 하여 구이신왕과 비유왕 대에 이르기까지 백제 지배층 내에서는 진씨 세력의 퇴조와 해씨 세력의 부상, 목씨 세력의 전횡 등과 같은 집권귀족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근초고왕에서 아신왕 대에 이르기까지 진씨가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여 왕권을 뒷받침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또 상좌평에게 군국정사를 위임하였다든가, 목만치가 왕모와 상음하였다고 한 것 등은 종래 보이지 않던 현상이다. 이는 이 시기에 왕권이 실권귀족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한성도읍기 후기는 왕권이 미약한 속에서 해씨 및 목씨 세력이 최고의 실권귀족으로 정치를 운영해 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제4부 한성도읍기 지배 세력의 변천’ 중에서, 271쪽
즉위 후 무령왕은 집권 기반을 확대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왕족 중심의 정치 운영을 도모하였다. 그래서 왕족을 중용하고 왕족의 위상을 높이려 하였다. 이를 보여 주는 것이 무령왕이 505년에 마나군麻那君을 왜에 파견하였다가 506년에 골족인 사아군斯我君으로 교체한 사실이다. 교체 이유는 마나군이 골족骨族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골족 여부를 따졌다는 것이다. 골족은 혈연적으로 동고조 8촌 범위 내의 친족 집단을 말하며 상복제, 연좌제, 혼인제 등의 기초가 된다. (중략) 무령왕은 즉위 후 왕권 강화를 위해 이성 귀족들의 힘을 억제하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족들을 울타리로 삼아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에 무령왕은 골족을 강조하면서 요소요소에 왕족을 배치하였다. 골족인 사아군을 대왜 외교에 투입한 것과 지방통치조직인 담로에 자제종족을 파견한 것이 이를 보여 준다. ― ‘제5부 웅진 천도와 신진 세력의 등장’ 중에서, 338~339쪽
성왕은 사씨 세력과 목씨 세력의 지지를 받아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왕권 확립에 방해가 되는 세력들의 정치적 비중을 약화시키고 대신 자신을 지지한 세력들을 다수 등용하여 지지 기반을 넓혔다. 이를 통해 성왕은 국왕 중심의 정치를 지향해 나갔다.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내관의 수가 외관의 수보다 많은 것이 이를 보여 준다.
사비도읍기의 정치 운영에서 중심축은 16관등제와 22부제였다. 16관등제에서 5명과 30명으로 정원이 정해진 좌평과 달솔이 핵심 관등이었다. 5명의 좌평은 최고귀족회의체를 구성하여 중요 국사를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이를 ‘5좌평제’라 한다.
5좌평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5좌평과 왕도 5부와의 관계이다. 왕도 5부는 행정구역이면서 지배층들의 거주지 표시이기도 하였다. 성왕은 사비로 천도하면서 이 5부에 여러 귀족 세력들을 배치하였다. 이리하여 귀족들의 인명 표기에 부명이 관칭冠稱되었다. 성왕은 이들을 정치 운영에 참여시켜 체제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천도 초기의 5좌평은 각 부의 대표 세력이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5좌평의 명칭도 5부의 명칭을 따서 상좌평, 중좌평, 하좌평, 전좌평, 후좌평으로 하지 않았을까 한다. ― ‘제6부 사비 천도와 대성팔족’ 중에서, 384~385쪽
무왕이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실권귀족들의 권력 기반과 경제 기반을 축소시키면서 자신의 세력 기반을 확대해야 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세력 기반을 약화시킨다는 것은 법왕의 단명에서 보듯이 상당한 반발을 불러오기 때문에 쉬운 것은 아니었다. 무왕은 그 방법의 하나로 자신이 생장하였던 익산을 새로운 세력 기반으로 키우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추진된 것이 익산 경영益山經營이다. (중략)
이처럼 무왕은 자신과 인연이 깊은 익산 경영을 통해 세력 기반을 확대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을 쇄신하여 부강한 백제를 만들려고 하였다. 익산 경영을 통해 무왕이 추진한 핵심적인 사업이 왕궁 건설, 제석사 조영, 미륵사 창건 등이다. ― ‘제7부 익산 경영과 미륵사’ 중에서, 454~456쪽
두량윤성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복신과 도침은 중심지를 임존성에서 주류성(전북 부안 위금암산성)으로 옮겼다. 당군도 격파하고 신라군도 격파하여 기세가 오른 복신과 도침은 백제국을 부활시키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을 옹립하여야 하였다. 의자왕의 왕자들이 모두 포로로 잡혀 당으로 끌려간 상황에서 이들은 왜에 있는 부여풍을 주목하였다.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모시면 왕위의 정통성도 확보할 뿐만 아니라 왜의 지원을 얻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복신과 도침은 661년 9월 왜에 가 있던 부여풍을 모셔 와 왕으로 옹립하고 국가 통치와 관련한 모든 권한을 맡겼다. 이로써 새로운 왕국이 탄생하였다. 이 왕국이 바로 부흥백제국이다.
― ‘제8부 백제의 멸망과 부흥백제국’ 중에서, 519쪽
출판사서평
저자의 첫 저서이자 해방 이후 우리나라 연구자가 쓴 최초의 백제사 관련 단행본인 『백제정치사연구』는 백제사 연구의 필독서로 여겨졌다. 그러나 출간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데다 그사이 연구자들이 늘어 많은 연구 성과들이 나왔고 다수의 고고학적 자료들이 발굴됨에 따라 이러한 사실들을 반영한 개정판이 절실하였다. 『백제정치사연구』는 백제정치사의 전개 과정을 개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이나 설명도 상대적으로 간략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나옴에 따라 새로운 견해들이 나오면서 사건들을 보다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하였고 이 견해들에 대한 비판과 검토 작업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거치다 보니 저자의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백제정치사』라는 이름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백제정치사』는 『백제정치사연구』의 개정 증보의 성격을 지니지만, 서술 순서를 바꾸고 많은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완전히 새 글이 되었다. 다만 정치사의 전개 과정을 보다 체계적으로 서술하려다 보니 분량이 많이 늘어나서 이전 책에 있던 통치조직 부분을 담아낼 수 없었다. 이 책에서 다루지 못한 통치조직과 향촌 사회와 관련한 부분은 율령제, 군사조직, 신분제 등을 보완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백제정치제도사』(가제)로 출간할 예정이다.
국가 발전 과정과 지배 세력의 변천을 중심으로 백제사를 서술
이 책은 많은 내용을 추가하다 보니 구성도 새로 정리되었다. 연구사 부분은 본문 속에 적절히 안배하는 대신 백제사 연구의 기본이 되는 자료를 보는 시각을 먼저 제시하였다. 역사 연구는 자료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해석이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사기』 초기기록과 『삼국지』 동이전의 내용을 서로 보완해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분해론’과 『삼국지』 동이전의 ‘단계화론’을 먼저 내세웠다. 그리고 삼국사 연구에서 빠질 수 없는 『일본서기』는 해당되는 기사에서 왜곡되거나 윤색된 부분만 제거하고 사실로 확인되는 부분만 이용하였다.
백제사의 전개 과정은 읍락 단계-국 단계-국 연맹 단계-부체제 단계-중앙집권국가 단계라고 하는 국가 발전 단계에 따라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를 수도의 변화와 연관 지었다. 한성도읍기의 경우, 읍락 단계에서부터 부체제 단계까지로 나누어 정리하고 중앙집권국가를 이룬 이후부터는 지배 세력의 변천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웅진도읍기는 동성왕 대까지는 한성도읍기의 연장선상에서, 무령왕에서 성왕 16년까지는 사비도읍기의 개시기라는 관점에서 정리한 후, 이 시기가 가지는 정치적·문화적 의미를 살폈다. 사비도읍기는 천도 이후 554년 관산성 전투 이전까지는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이 이루어진 시기, 위덕왕 이후 무왕 법왕 대까지는 대성팔족을 중심으로 하는 실권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이 이루어진 시기, 무왕 대에는 익산을 중심으로 한 경영이 이루어진 시기, 의자왕 대는 백제의 멸망기로 구분지어 정리하였다. 그리고 부흥군이 세운 부흥백제국도 다루었는데, 왕조 멸망 이후 점령군...이 주둔한 상황에서 새 왕조를 연 것은 한국사에서 부흥백제국이 처음으로 그 정치적 함의가 크기 때문이다.
국가 발전 과정은 중앙 지배 세력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 책에서는 백제의 국가 발전 과정과 더불어 지배 세력의 변천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한성도읍기에는 왕족인 부여씨 세력과 진씨 세력, 해씨 세력, 목씨 세력이 길항 관계를 이루었고, 웅진도읍기에는 금강 유역에 기반을 둔 사씨 세력을 비롯한 신진 세력의 등장에 따라 지배 세력이 교체되었으며, 사비도읍기에는 관산성 전투 패전 이후 미약해진 왕권 대신 대성팔족이 정치 운영을 좌지우지하였다. 이와 함께 왕의 질병이 정치사의 전개에 미치는 영향도 일정하게 다루었다.
지배 세력의 토대는 경제적 기반이다. 경제적 기반은 생산력의 증대와 연관되는데, 생산력 증대는 자연촌의 성장을 가져왔다. 기층사회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지방통치조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한성도읍기에서 웅진도읍기에 이르기까지 광역의 지방통치조직인 담로제가 사비도읍기에 와서 5방-37군-200성(현)이라는 보다 체계적인 지방통치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이러한 자연촌의 성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래서 민에 대한 지배 방식도 연맹 단계의 공납적 지배, 부체제 단계의 반공지(半公地)·반공민(半公民)에 대한 간접 지배, 중앙집권국가 단계에서의 공지·공민에 대한 직접 지배 방식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이러한 구도에서 서술하다 보니 저자의 이전 견해와 달라진 부분도 있다. 이 경우 해당 내용에 따로 표기하여 저자의 연구 궤적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 유적이나 유물 사진 자료들도 삽입하였다. 우리나라 백제사 연구의 기틀을 다진 저자의 평생의 연구와 현재의 견해를 담은 이 책은 백제정치사를 탐구하는 연구자들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되는 동시에 백제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충실한 정보를 제공하는 안내서가 될 것이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