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출장에서 돌아오다가 어두워오는 하늘을 서서히 물들이는 노을을 보았다. 그 때 갑자기 슬픔이 찾아왔다. 내가 앞으로 이런 풍경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뜬끔없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25번쯤 볼까? 아득했다. 캄캄한 물속으로 추락하는 듯했다. 다행히 슬픔은 오래 머물지 않고 내 몸을 빠져 나갔다.
온통 단풍이다. 금요일 오후에 엄마 생각이 나서 전화를 드렸다. 이번 주엔 전화 한 통도 없으셨다. 보청기 끼신 후로는 통화가 자유롭지 못해서 저녁 7시나 8시쯤에 엄마가 전화를 하면 우리가 받곤 하였다. 다행히 내 전화를 받으셨다.
엄마, 내일 춘천 갈게요.
뭐하러, 피곤한데 오지 마라.
아니야, 우리 엄마 단풍놀이 시켜드릴 거니까 점심때 어디 나가지 마세요.
토요일 비가 세차게 내린다. 가을 낭만은 빗속에서 즐길 때 더 폼나는 것이라고 우기며 길을 떠났다. 출장길 노을을 보며 느낀 슬픔을 엄마도 느끼셨을 것 같다. 엄마가 이 아름다운 단풍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실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많아야 열 번이리라. 우리 엄마는 앞으로 10년만 더 자식들 위해 기도할 건강을 달라고 하나님한테 새벽마다 떼를 쓰신다.
엄마는 집을 비우셨다. 점심을 차려 먹고 있자니 양손에 검정 비닐봉다리를 들고 들어오신다. 반찬거리 사러 시장에 갔었단다. 비 오는데 나가지 말자고 하신다.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무조건 옷 입으세요. 가을 낭만은 빗속에서 더 빛나는 거에요. 엄마 단풍 구경 시켜드리려고 일부러 왔으니까 무조건 나 따라 나서야 해요.
엄마는 화장을 하신 상태였다. 마음은 분명히 단풍놀이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빗속에서도 샛노랗게 빛나고 있는, 춘천교대 은행나무 울타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수십 개의 등불이 차례로 불을 켠 듯 마음이 절로 환해졌다. 아아아아아아! 우리는 탄성을 내질렀다. 사진을 찍는 동안에는 잠시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엄마랑 같이 찍지를 못했다.
(사진, 눌러서 크게 보시면 가을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오후 3시, 빗속에서도 남이섬 주차장은 꽉 차 있다. 두 바퀴 돌아서 겨우 차를 세웠다. 비도 오고 엄마 무릎도 아프시니까 우선 강기슭을 따라서 남이섬을 한 바퀴 도는 전기자동차를 탔다. 엄마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신다. 사람들에게 말 시키기 좋아하는 우리 엄마는 또 운전하는 젊은이에게 자꾸 말을 거신다.
엄마,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좀 걸어야 하지 않을까? 다리 괜찮아요?
아직은 괜찮다. 저기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있는데서 사진찍자.
비를 맞은 나무들의 수피는 번들거리고 더 짙은 색을 띄었다. 어둑해지는 숲 속에서도 노랗고 빨간 나뭇잎들은 도드라지게 예뻤다. 숲은 사람들을 품었다. 사람들은 그 품안에서 마냥 즐거운지 여기저기서 감탄사들을 한아름씩 물안개 속에 부려놓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다리 아파서 더 이상 못 가겠다고 하실 때까지 걸었다. 그래야 30분쯤인 것 같다. 아직 은행나무길도 메타세콰이어길도 못 걸었지만 엄마와 팔짱 끼고 사진도 한 장 찍었으니 충분했다.
일요일 아침은 눈이 부셨다. 같이 예배하고 올라가라는 엄마의 요청을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정중히 거절하였다. 의암호길은 조선일보마라톤 행사로 막혔고 가평교를 건너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남이섬길에서 호명산을 넘으려던 계획을 과감히 버리고 가평읍으로 다시 돌아들어와서 서울방향으로 향했다. 가평 방향 반대 차선은 주차장이다. 그런데 저 기다림 후에 남이섬을 들어갈 수만 있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남이섬의 가을은 특별하다.
상천리에서 호명산길로 들어섰다. 양수발전소 주차장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이미 차는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 그냥 돌아갈까? 아니다. 나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걸어 올라갔다. 꺆! 숨 막히도록 아름답다. 가을단풍나무 아래서 수줍게 오르가즘을 느꼈다. 그것은 찰나였다.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 몸을 활짝 열어주었던 네가 거기 있는 듯했다.
카페 VAN에서 잠시 쉬었다. 청평검문소 못 미처 현리 일동 방향 우회전 하기 바로 전에 쉼터가 있다. 작은 카페 하나가 이 길을 낭만적으로 만든다. 춘천에서 이런저런 문제로 속상했어도 이곳에서 커피 한 잔 하는 동안은 여행객처럼 호젓한 숨길이 트인다. 삼십 분 남짓 되도록 나 외엔 손님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회사를 디니다 그만 두었다는 삼십대 젊은이가 주인이다. 오늘은 멋쟁이 어머니도 함께 계신다. 탁자마다 생화를 꽂아두었다. 국화향기가 들숨과 날숨을 따라 찰랑거렸다.
오늘은 기꺼이 복잡한 광릉길을 달렸다. 창문을 활짝 열고 왼손을 차지붕에 올리고 마치 피아노 건반을 치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춘천에서 집까지 오는 내내 나는 평상심을 잃고 상기된 채 흥분 상태였다. 일 년에 이렇게 풍선 같이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을 몇 번이나 느낄까. 많아야 두세 번이다. 2012년 10월 28일, 참으로 귀한 하루다. 그러나 오늘밤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첫댓글 우와 멋진 후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 한밤 중에 엄마가 생각나네요 ㅋ
저도 어제 양평 다녀왔어요. 무엇보다 은행잎 물든 거 보려구요.
저도 가을풍경에 흠뻑젖어 행복한 10월 28일을 보낸 1인^^
멋진 후기에 다시한번 젖어 드네요...
같이 다니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시니... 참 부럽습니다. ^^어머님과 함께한 여행 선물.. 알록달록 촉촉해요 ^^
사진 너무 좋습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감탄사~~ 와~~
사진이 정말~아름답습니다~역시 나무는 우리들보다 오래살지만,,,경쟁자는 아니죠~함께 삶을 나누는 동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