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여는 새벽(창세기편 3:6-7) - 어떤 것이 죄인가?
I. 들어가는 말
죄인 줄 알고 무슨 일을 시작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죄가 반복 됨으로 해서 양심이 화인맞은 것처럼 무뎌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양심이 무뎌진 사람도 최소한의 자기 합리화는 시켜 놓고 죄를 저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죄가 시작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죄는 무의식 중에 시작되는 일이 많다. 즉, 죄인 줄 모르고 시작하는 것이다.
죄의 특성 중 가장 두드러진 점은 죄인 줄 모르고 했던 알고 했던 결과는 똑같다는 것이다. 건널목을 건널 때, 빨간신호에서는 멈춰야 하는데, 그 의미를 모르고 건넜다고 가정해 보자. 교통질서를 어기는 불법인 줄 모르고 건넜지만, 차에 치여 사망에 이르거나 최소한 부상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호를 알아야 길을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처럼 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성도들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다.
죄란 무엇인가?
II. 어떤 것이 죄인가?
첫째는, 양심을 거스리는 것이 죄이다.(6상)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5절과 6절 사이에 약간의 간극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탄은 5절에서 결정적인 거짓말로 하와를 유혹한다.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을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이다. 유혹에 넘어갔다고 해서 하아와 바로 그 열매를 딴 것은 아니다. 하와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은 것이다. 그 시간은 바로 양심이 작용한 시간이라고 본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양심을 심어 놓으시고 죄를 범하기 전에 양심을 자극해서 돌이키도록 하셨다. 다윗은 시16:7에서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고백했다. 다윗을 성군으로 만든 것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였다. 그것은 훈련으로 비로소 내 것이 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롬13:5에서 크리스천의 행동은 “양심에 따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양심의 소리를 듣는 훈련이 되면, 그 때는 양심의 나의 변호자가 된다. 행23:1을 보면,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의 법정인 공회에서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울을 죽일 명분이 하나도 없었기에 법으로가 아닌 암살로 죽이려고 했으나 그마자도 실패하고 만다.
내 스스로의 훈련이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양심이 제 기능을 찾도록 도와 주실 것이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궁지에 빠드릴려고 간음한 여인을 데려와 예수님을 시험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몇 마디에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멀리 도망가고 말았다.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양심을 제대로 가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욕심에서 시작되는 것이 죄이다.(6중)
양심은 작동했지만, 하와는 이미 마음 속 욕심의 문이 열린 상태에서 육신의 눈으로는 진실을 볼 수가 없었다. 감각적인 눈은 오히려 욕망을 부추기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와는 양심의 방어선을 쉽게 넘어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해 버리고 만 것이다.
먹음직하였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을 말한다. 백운 호수를 지나다보면 참으로 많은 식당들이 그들만의 별미를 준비하여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다. 저녁이 되면 그 많은 식당들이 꽉꽉 들어찬다. 만약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애초에 먹도록 허락되었다면 그것은 마치 별미처럼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것이다. 냉장고에 반찬이 그득하고, 전기밥통에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이 있지만, 사람들은 왜 별식을 챙겨 먹기 위해 먼 거리 여행도 불사하는가? 우리의 육신이 그렇게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보암직도 하였다는 것은 안목의 정욕을 말한다. 우리 속담에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이 있다. 보기에 좋은 것이 먹기도 좋다는 말도 있다. 좋은 것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안목의 정욕이다. 우리 한국사람들처럼 큰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고 한다. 눈으로 보아서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 붓기를 멈추지 않는다.
지혜롭게 할 만큼“탐스러운 나무는 이생의 자랑을 부추긴다. 그것을 입으면 더 잘나 보일 것 같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 유명 명품 구입에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지 알면 놀랄 것이다.
야고보 선지자는 약1:15에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욕심이 안 생기도록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셋째로, 동조자를 구하여 죄책감을 감추려는 것이 죄의 속성이다.(6하)
하와는 자기만 먹은 것이 아니고, 남편에게 주어 먹게 했다. 만약에 선악과를 먹는 것이 죄가 아니되고 뱀이 하와에게 말한 것처럼 하나님처럼 되었다면 그녀가 남편에게 그 좋은 것을 함께 나누었을까? 선한 마음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욕심의 유혹에 썩어져 가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니 나누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죄는 이렇게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나누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죄를 다른 사람과 나눠짐으로 해서 죄책감의 무게를 덜 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함께 나누어 가볍게 지려고 하는 것이다.
다윗은 한가할 때에 욕심이 파고들어 충성스런 부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게 된다. 죄를 범한 후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 군대장관 요압을 끌어들여 우리아를 살해하도록 지시한다. 죄는 이렇게 동조자를 구하여 점점 넓게 퍼져가는 것이다.
III.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죄인지 알고 지었든, 모르고 지었든 죄의 결과는 동일하다. 죄를 직접 지은 자이든, 간접적으로 지은 자이든 아담과 하와에서 보듯이 그 결과도 동일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은 마18:6에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고 하셨고,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가 죄를 멀리하고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엡4:20-24)
2012.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