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요한복음 5장
*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처음으로 표적을 행하신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다. - "그후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성전에서 한바탕 일을 벌이신다. 그리고 3장에서 니고데모와 만나신다.
* 다시 4장에서 사마리아에서 여인을 만나시고, 그리고 갈릴리로 가셔서 갈릴리 가나에서의 두 번째의 표적(신하의 아들을 고치심)을 보이시고,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초막절)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 그리고 이쪽(유대)과 저쪽(갈릴리)을 다 치신다.
(요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요 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요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요 5: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 { - } - 고대문헌에는 없더라 - 이 말은 고대부터 있어 온 문헌이 아니라, 최근에 발견된 고대 문헌을 말한다. 지금까지 사용된 고대문헌에는 이 내용이 있었는데, 최근에 발견된 고대문헌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는 뜻이다.
*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의 8장의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인의 내용, 마가복음 끝 부분 등이 고대문헌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킹 제임스 성경에는 다 들어 있다. 세대주의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은 성령께서 사용하도록 했다고 보고, 이 내용은 주의 말씀으로 보는 것이 좋다' 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근호도 여기에 동의한다. 그래서 { }를 무시하고 보는 것이다.
* 베데스다 못 가에 여러 환자들이 모이게 되는데, 그곳에서 가장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누구일까? 전혀 희망이 없는 사람, 저 사람이 병을 고침 받았다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 그가 바로, 38년 된 병자 !
◈ 이 말은 기존의 너희들의 방식은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시는 방식, 이것이 바로 성경의 진행방식인 언약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제일 안 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새로운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그 방식만이 완성된 방식이지, 기존의 방식은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기존의 인간의 방식을 고발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제일 가능성이 없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인데,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된 것은 이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소위 잘났다고 하는 인간들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다.
(고전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상급의 문제
* 그렇다면 약한 것이 자랑거리인가? - 아니다. 문벌 없는 것, 세리와 창기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가난한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바울의 시대에, 이런 방식이 주님께서 공생애 시대에 하셨던, 그 방식 그대로 지금도 똑같이 작용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승천 후에도 주님의 사역은 계속되는 것이다. - 성령의 활동 !!
* 실제 교회 목회를 하려면 잘하는 사람을 잘한다고 해주어야 되는데, 자랑거리를 남겨야 교회가 활성화되는데, 그래서 오늘날 목회가 예수님과 상관없는 짓을 하고 있다.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회가 안 된다고 한다. 목회가 안 된다는 말을 함부로 하고 있다. 목회는 누가 하는 것인가? 목회는 복음을 전하면 되는 것이지, 사람 모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모두가 다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혼자서 기도하는 나다나엘과 같이 간사한 것이 없는, 그 사람처럼 살면 된다. -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목사들이 동의를 하지를 못한다. 혼자서라도 거지 나사로처럼 살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데 장로 권사들이 이해를 못한다고 한다. 당회장 목사가 그렇게 못하게 눈치를 준다는 것이다. 왜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을 쓰는가? 주님께서 그렇게 눈치를 보라고 했던가? 믿음이 없으면 회개해야지, 왜 다른 것으로 보충하려면 되는가? 항상 성경을 볼 때 진리가 무엇인가를,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신경을 써야지, 왜 엉뚱한 곳에 신경을 쓰는가? 상급차등이 왜 나오는가?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상이 크다 ! - 하늘과 땅의 일은 엄청난 감히 비교할 수 없다는 말씀인데, 하나님 자체가 상급인데, 하나님이 무슨 차등이 있는가? 성령을 조금 주고 많이 주는 것이 있는가? 롯의 구원과 아브라함의 구원에 차이가 있는가? [구원=상급] 이라는 것을 알지를 못한다. 상급이 나를 소유하는데, 하나님의 상급은 풀장이고, 나는 그곳에서 헤엄을 치는 물장구인 것이다. 그 안에서의 누림의 차이가 없다.
◈ 소위, 저 높은 곳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는 [올라가는 개념]이 아니라, [영역을 옮긴 개념]이다 !
* 그리고 롯은 롯의 역할극이 있고,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역할극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물을 주는 자와 뿌리는 자가 따로 있지만, 거두는 분은, 즉 자라게 하시는 분은 따로 있는 것이다. 코가 눈더러 쓸데없다고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사찰과 소위 말하는 당회장이 무슨 차등이 있는가? 귀히, 천히 쓸 그릇은 다 똑같다. 천하고, 귀하고 하는 개념은 이 땅에서의 의미가 그렇고, 하늘나라에서는 값없이 주는 생명수를 마심으로 영생을 누리게 된다. 그 공로가 내 공로가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로 하늘나라가 이루어진다. 이른 아침 9시에 온 사람과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같다는 것이다.
* 이런 질문은 말이 안 된다고 할 것이다. - "목사님, 여자가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습니까, 아니면 남자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 그런데 이런 질문은 말이 안 된다고 말을 하면서, 여자와 남자의 차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하다. 여자와 남자로 태어났다면, 이 땅에서 여자의 역할, 남자의 역할을 해야 되는 것이다. 여자는 해산하는 역할,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 헨드릭슨 주석의 문제점 - 구약을 빼 버리고 신약부터 시작하니, 구약의 언약개념을 생각을 못하니, 구약의 언약의 완성이 신약의 새 언약인데, 이것을 고려하지를 않으니, 상급의 차등이라는 말이 나온다. 구약의 전체흐름이 약하기에, 마치 영화를 중간에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구약부터 보아야 엄청난 사랑인데 말이다. 이것은 모든 신약학자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 계속되는 질문사항 - 롯을 구원할 때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원하는데,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에게 뭔가 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아브라함에게는 롯보다는 더 큰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 답변 - 아브라함 전체 일생을 몰라서 그렇다. 아브라함이 처음 애굽에 내려 갈 때는, 아브라함 자신도 그렇게 생각을 하였다. '나는 귀한 존재로다. 그러므로 아내인 너는 바로에게 그만 팔려가라' 라는 식이다. 자기가 복의 근원인 줄 알고, 그래서 자기는 죽어서는 안 되기에,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려고 한다. 나는 귀한 존재라는, 즉 내 똥 굵다는 식이다. 그러나 나중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복의 근원이 아니라 자기 씨가 복의 근원임을 알게 된다.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 아브라함은 자기 씨를 바라본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잘났다고 하다가 얻어터지고 자기 씨를 바라본다. 이삭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씨가 의미 있음을 안다. 이삭이 에서를 좋아하는 것은 타고난 자기의 취미에 불과한 것이다. - 아하, 나의 취미가 문제가 아니구나, 하나님께서는 나와 상관없이 야곱을 선택했구나, 결국 야곱아, 네가 잘해야 돼 !
◈ 구약의 맥 - "너 덕분에 내가 산다!" 그러니까 자식 덕분에 아버지 살리는 것이 구약성경의 맥이다.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구약성경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기다린다.
* 우리 같으면 어떠한가?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기다릴 필요가 없이, 하나님 바로 믿으면 될 터인데'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나 예수를 믿어라. 나는 하나님을 믿을 거야' 라는, 이것이 바로 성경해석의 오류인 것이다 !
* 성경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이레를 믿는다. 계속 기다린다. 계속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다.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이 거꾸로 소급해서 나를 건져서 구원한다는, 그분은 희생제물이고 그분이 날 살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깨닫게 된 것이다.
* 이렇게 주장하는 아브라함이 과연 자기 주장을 할 수가 있을까? 못한다.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롯이나 아브라함이나, 어떤 인간도 자기 자랑할 수 없는 육인 것이다. 예수님을 빼놓고는 그 어떤 인간도 육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 인간들끼리 '누가누가 잘하나'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은혜로 인해서 은혜 받은 인간에게도 아브라함과 롯의 차등이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은 존재론적으로 생각해서 그러한데, 존재론적으로 상급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가 맡은 역할 즉 기능적으로 역할이 다른 것일 뿐이다.
* 은사 - 이것을 고린도전서에서는 '은사'라고 하는데, 그런데 은사라는 말이 한국교회에서 하도 오해를 많이 해서 그냥 은혜라고 표현하면, 이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서 종류가 다를 뿐이지 상급의 차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권성수의 상급차등론은 자기의 학문적 업적을 보이려는 탐욕에 불과하다.)
* 예를 들면, 로마서 8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롬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아버지의 뜻을 아시는 성령께서 기도를 하시는데 어디까지 기도하시는가? 성령의 기도제목 내용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롬8:28-3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 영화롭게 하시는 것 ! - 이것이 누구의 사역인가? 성령님께서 기도를 하시면서 상급에 차등이 나게 하시겠는가? 다같이 맏아들의 형상을 본 받도록 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지, 차등이 나도록 하는데 기도의 초점이 있겠는가?
* 성령께서 기도하시는 것은 자기의 부르신 자, 즉 모두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기 때문에, '너는 적게 너는 많게' 라는 이런 식이 아니다. 상은 있지만 상의 차등은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상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 전체를 가지고 상이라 하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도 영생이 곧 상급이라고 했다.
*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자비를 기다린다. 자비를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님이 등장을 한다. 그래서 기존의 자비는 자비 값도 못하는 것이다. 천사가 와서 병을 고쳐 주는 그런 것도 기적인가 하는 것을 보여 준다. 그것은 실체가 오기 전에 단지 폼잡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래서 진짜 기적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 가장 가능성이 없는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접근하사 그 병자를 못 가로 집어넣지도 않고, 그냥 말씀으로 그 사람을 일으킨다. 문제는 그냥 기적을 행해버리면 기적이 되고 마는데, 이것을 표적과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 기적과 표적의 차이점
* 기적 -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
* 표적 -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실 모든 율법의 완성을 미리 맛보기로 보여 주는 것이다. 즉, sign을 말한다. 그래서 십자가 이전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병 고침 사건이다. 그래서 표적인 것이다.
(요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이 기적이 아니다. 진정한 기적은 주님께서 장차 십자가에 죽고 부활해서 성령세례를 주는, 그것이 참 기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 병자를 다른 날도 아닌 안식일에 고치신다는 것이다. 즉, 병자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요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요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안식일에 그냥 행해버리면 안식일에 대한 고발의 의미가 없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자리(담요)를 들고 가는 것은 율법상 어긋난다고 지적을 한다. 일정한 무게를 어디에 싣고 가면 되는데, 그냥 끌고 가면 안 된다는 안식일 법이 있는 것이다.
* 이것을 의식해서 예수님이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라고 하셨다. 이 고침 받은 사람이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냥 끌고 가버린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에게 시비를 건다. - 왜 안식일 법을 어기느냐?
◈ 38년 된 병자 - '나에게 이런 하나님의 자비를 베푼 분은 이 분이다' 라는 것을 증거한다. 각자의 통로가 다르다. 기존의 율법과 새롭게 개입된 신세대 이적과의 대결구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 이런 자비를 너희들은 베풀 수 있는가 ! - 예수님은 이런 차원에서 답변을 하신다.
(요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 대
(요5: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요5: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요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요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요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는 이유는? - 이적을 행함이 아니라, '왜 당신이 안식일을 어기느냐?'
* 예수님 - 안식일이 무슨 날인데?
* 유대인 - 안식일은 지키는 날이다.
* 예수님 - 안식일 날 일하시는 분이 있잖아?
* 유대인 - 누가 안식일 날 일한다고?
* 예수님 - 하나님 아버지가 일하잖아 !
* 유대인 -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나님은 일하시지 그래.
그런데 너는 인간이잖아. 우리는 일하면 안되잖아. 이 예수야 !
* 예수님 - 내가 하나님인데 !
* 더 이상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가 불가능하다. 드디어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목숨을 건 엄청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요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이 말씀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요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여기서 최초로 죽음이 등장하는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① 예수님 - 남이 나를 죽인 것이 아니고, 예수님 스스로 죽는다고 했다.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② 유대인 -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주신 그 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자꾸 안식일을 어기고, 더 나아가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우기기에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윤리적으로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대드는 그런 것 때문에 죽인 것도 아니고,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 즉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그 열심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그 쪽으로 요한복음은 우리를 자꾸 몰아간다.
◈ 결국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의 최후의 한계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인간이 결국은 그 말씀을 주신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참 아이러니 하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 그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도 그런 식으로 자꾸만 약을 올린다.
(요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요7: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 이상하게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기를 안 죽일까봐 안달이 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이 불한당에게 맞아 죽는 것이 아니고, 꼭 하나님을 위한다는, 율법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는 그런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그것이 꼭 주님의 소원같이 보인다. - 그것은 그래야만 인간은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서 주신 성령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어떠한 제도나 행함으로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유도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그 쪽으로 계속 유도하신다. 그러니 유대인들 미치고 환장을 할 노릇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요즘도 일부 유대인들은 예수를 자기들이 죽이지 않았다고 항변을 한다. 억울도 하겠지 !
* 마태, 마가, 누가가 보는 견해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무슨 짓을 해도 예수를 죽이려고 까지는 아니했다. 그런데 언제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는고 하니,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히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 분명히 예수님이 먼저 유대인들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 유대인 마지막 최후의 보루인 성전을 예수님이 공격한다. 그 공격이 바로 성전청결 사건이다.
* 성전청결 - 예수님 쪽에서 유대인들을 먼저 공격을 하신다. 그 당시에 다른 종교들이 많이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결코 자기종교를 주장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그냥 가만히 놔두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자기들을 건드릴 때는?
(행5:38-41)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 이와 같은 흐름이 그들의 평소 정신이다. 유대인들은 그리 악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깔짝 깔짝 자꾸만 약을 올리는 것이다. 시비를 건다. 꼭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안식일을 범하고 병자를 고치시는 것이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참고 또 참는데, 그러나 자기가 하나님이라 하고, 성전을 부정하는 사건에 가서는 그들도 폭발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병자가 나아서 자리를 들고 가는 것도 꼭 유대인들이 현재 지켜보고 있는 그 쪽으로 가게 해서 속이 상하게 한다. 이것은 바로 자꾸 율법과 영을 대비시켜서 인간이 율법을 아무리 지켜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율법 말고 그들의 믿음으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와야 된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의로 불어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이상 어떤 인간도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율법에 대해서 나(질문자)는 생각을 했다. '즉, 아무 인간도 율법을 지킬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율법을 지키는 자로서 율법의 완성자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지킬 수 있다, 없다' 라는 그런 차원이 아닌 것이 아닌가?
* 답변 - 그런 생각은 요한복음 5장 39-40절에 어긋난다. 성경은 율법을 누가 지킬 수 있다, 못 지킨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고, 성경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한다. '율법을 지킨다, 안 지킨다' 라는 차원으로 이야기를 하면, 율법은 율법대로 남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남는 결과가 된다.
* 방금 질문 내용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다가 도저히 안되어 가지고, 그래서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되겠다는 발상이 나오게 되는 것이 되고 마는데, 그렇게 되어 버리면 인간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 강조되지, 결코 예수님이 강조가 된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 율법이, 즉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해 버리면, 즉 율법은 도마뱀 꼬리이고, 예수님은 도마뱀 몸체가 되는 것이다. 몸체이신 예수님이 오시면 꼬리는 잘려 나가야 된다. 흔적을 없애야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율법이 포함되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율법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한다.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율법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 해버리면, 율법은 그 흔적을 없애버려야 된다.
* 그런데 한국 교회는 여전히 십일조, 안식일, 주일성수를 주장하고 있으니, 율법의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예수님은 공연히 죽어버린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안식일의 완성은 주일이 아니고 예수님인데, 왜 자꾸만 자꾸 [주일 성수]를 거론하고 있는가? 일요일과 월요일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 주일성수 - 아무 날이나 상관이 없는가? - 아무 날이나 상관이 없다는 그런 차원이, 그리심산을 주장하고 예루살렘을 주장하는 그런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곳에서나 드린다는 차원이 아니고, 또한 월요일, 토요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직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초점인데, 왜 구태여 날짜를 바꾸고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일요일에 예배를 드렸다고 주일성수이고, 그러면 다른 날에 예배를 드렸다고 주일성수가 아닌가! 어느 날이든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영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즉,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모일 때마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죄(罪) - 주일을 범한 것이 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생각지 않는 것이 죄이다. 술과 담배를 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죄는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떠난 것이 죄라는 것이다. 죄는 권세로서 덮쳐오는 것이다.
* 안식일 - 안식일을 지켜야만 된다. 율법을 지켜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유대인의 개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영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예수님)를 믿어야 된다' 라고 하신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영생 - 너희들은 하나님, 안식일, 율법, 그리고 아버지로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그런 개념이 아니고, 아버지의 그 아들을 믿으면 영생이라는 것이다. 즉, 안식일을 지향하는 그 아들이 엄연하게 지금 이렇게 왔는데, 너희들은 지금 무엇을 잡고 있느냐는 말이다. 안식일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지금 여기 와 있는데, 너희들은 무엇을 쥐고 있느냐는 말이다.
◈ 율법은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 !
* 성경의 외침 - 영생을 얻고자 성경을 상고하고 있으면서도, 그 성경이 말씀하는 주인공이시고 영생인 예수님이 지금 여기 옆에 와 계신데, 너희들은 아직도 성경, 성경이라고 하면서도, 아직 그 성경을 알지 못하느냐, 이 답답한 사람들아! 아직도 주일성수, 안식일, 도대체 그 무슨 소리인가? 그냥 주일에 모이면 되지 말이다. 성수는, 지키는 것은 아니다 !!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
◈ 주일성수 - 모임이 중요한데, 왜 성수라는 말이 나오느냐! 성수를 외치는 사람은 지금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신자라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나타나야 신자이지, 즉 예수님이 왜 죽고 부활했는가가 나타나야 신자이지, 뭘 지킨다고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교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심판과 긍휼이 담겨 있지 않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골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갈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
(갈4: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 예수님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예수만을 생각하는 사람되는 것! 오늘 염려는 오늘로 족한 것이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오직 예수만! 하루하루 충실하면, 내일의 일을 염려하다 보면 오늘을 충실하지 못할 수가 있다. 하루, 하루 충실한 것이 모여 충실한 삶이 되는 것이다. - 오직 예수 !!!
◈ 신자는 예수만을 생각하는 사람되는 것, 오늘 염려는 오늘로 족한 것이다 !
* 기적이라는 것은 '나 모르겠다' 라고 나자빠질 때 일어난다. 그런데 자빠지면 이상하게도 황송하게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있다. '나 모르겠다' 라고 자빠지는 것은, 이것은 현실을 도피하자는 것이 아니라 장래 일을 하나님께 일임하자는 뜻이다.
* 전도서 3장을 보자.
(전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전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전3:7)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전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 할 때가 있느니라
* 인간이 아무리 촐랑대고 까불어도 모든 때는 전부 하나님의 조절 속에 있는 것이지,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응답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 주여, 오늘은 무슨 때입니까? - 이것 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러 때가 있지만 그 때 중에 우리가 미리 앞일을 걱정할 때는 없고, 또한 그 앞일을 미리 걱정할 자격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항상 모든 일에 때가 있다는 그 사실은 진짜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신자의 태도이다.
◈ 영생 - 요한복음 5장에서 흔드는 작업인데, 즉 '성경을 통해서 영생을 얻을까' 라고 상고하는, 이제는 그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도마뱀의 몸체이고, 율법은 도마뱀의 꼬리와 같다는 것이다. 이제는 예수님이 율법이고 예수님 속에서만 모든 율법의 완성되는 것이다. 예수님 속에서 모든 율법이 완성이 되고, 오직 율법의 완성의 대가로서 주어지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이다.
* 의(義) - 영생이라는 것은 의의 대가가 주어져야 되는 것이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지지만, 그러나 의가 있을 경우에는 영생이 주어진다. 그런데 그 의는 이 땅에는 없고, 오직 그 의는 하늘에서만 내려오는 것이다. 내려오게 되면 그 의를 근거로 해서, 의에 대한 대가인 영생이 오는 것이다(신28장).
◈ 영생 개념 - 어느 것이 의(義)냐, 율법의 완성이냐를 보아야 한다. 율법의 완성은 예수님 자체이다.
*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라고 따지면 이상한 일이 되고 만다. 그것은 산에서 오징어 낚시를 하는 것이고, 어른보고 초등학교 숙제를 했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예수님이 그 정도로 대단합니까? - 그 이상으로 대단한 분이시다. 온 천하보다 예수님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온 천하에 대해 신경을 끊어 버린다.
* 이 싸움을 예수님이 하셨는데,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의 사고방식은 그 당시의 유대인의 사고 방식과 동일하다. 마귀의 사상은 3가지 지도자 상을 요구하였다. - 정치, 경제, 종교적 지도자.
◈ 마태복음 4장에서, 그 당시 이스라엘의 희망사항은? (세 가지 요구사항) 그러나 주님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거부하신다.
* 경제 - 신명기 28장을 이루어 달라. - 들어가나 나오나 복
* 종교 - 성전은 반드시 있어야 된다.
* 정치 - 세상을 정복해 달라.
* 참 설교 - 참 설교라면 이 세 가지를 피해가면서, 반박을 하면서, 고발하는 설교가 되어야만 진정한 주님의 교회를 간직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빼고 나면 설교 할 것이 없다고 항의를 하고, 기도할 것이 없다고 항의를 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아니다.
* 참 기도 - 그러나 얼마나 많은 기도 제목인 주님의 말씀이 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하는 말씀이 있으면,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 아닌가? 주의 뜻대로 기도할 것이 얼마나 많은가?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하는 등, 기도제목이 그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런 것은 빼고 이상하게 주차장 건립, 일천교회 운동, 가정을 위해, 국가를 위해 등, 전부 마귀가 원하는 기도로 일관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오히려 마귀에게 기도를 하면 마귀가 이런 기도는 마귀가 들어준다.
* 철야기도 - 창세기에 의하면 밤에는 자야 한다. 밤을 세우겠다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다.
* 금식 - '나는 밥 먹을 자격도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다.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아 주는 것이 참된 금식이다. 밥을 먹어가면서, '나는 밥 먹을 자격도 없는 인간입니다' 라고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상한 심령이 되는 것인데, 지금 신랑이 함께 있는데, 왜 금식하고 있는가? 옆에 신랑이 함께 있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금식을 하면서 신랑을 찾고 있다는 것인가? 보다 근본적으로 교회가 탐심을 버려야 되는데,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하면 나머지는 주님의 소관인데, 왜 자꾸만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고 율법보다 더 귀하다면, 오직 사람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 병 낫게 될 것이라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죽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무엇 하려고 힘든 세상을 살려고 하는가? 의기소침하고, 그냥 죽으라고 해야 한다. 마지막이라도 주님께 회개를 한다면, '행운을 잡았네요, 나그네 아닙니까?' 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 K. Barth의 이중 선택론 -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들도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 선택 사상 - 선택을 누가 하시는가? 하나님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여기에 보니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는 선택사상이 나온다. 마태복음에서도 마찬가지다.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 마태복음 10, 11장의 '전도' 의미
* 마태복음 10, 11장 - 전도, 전도했더니 사람들에게 호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전도란 '이 세상이 불 심판 받아야 될 이유가 이렇구나' 라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 전도다. - 역시 이 세상은 망해야 돼, 아무리 권능을 해도 씨도 안 먹혀드는구나, 소돔, 고모라 보다 못해 !
* 음란죄 - 소돔과 고모라라 음란한 것은 단순히 성적인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음란죄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성적인 죄가 아니고, 윤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거론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일본과 같은 나라가 아무리 도시질서를 잘 킨다고 하더라도, 그런 도시는 소돔과 고모라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돌아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마11:25-27)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 전도의 마지막 결론의 말씀이다. 이러한 마태복음 10, 11장의 전도개념과 현재 한국교회의 전도개념은 전혀 다르다. 한국교회는 어찌하든지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서 수퍼타이, 시계 등, 온갖 경품을 다 내놓는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을 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던지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전도가 아님은 분명하다.
* 예수님의 전도 - 예수님의 전도는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자존심까지도 다 빼앗아 버린다. - 너희들은 인간도 아니야, 너희들은 다 망해야 돼, 이 세상은 망해야 돼, 정신차려 ! - 그래서 사람들은 다 도망간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들에게 보내면서 하시는 말씀이 다음이다.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 오죽 했으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리고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준비하지 말라고 하신다.
(마10: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마11: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전도에 대한 결론이다. 사도행전도 역시 마찬가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행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 이 말씀은 이 시대에 딱 맞아 들어간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결론이다. 백날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해도 안 믿는 것이 바로 이 시대의 시대상이다. 사람을 모으려고 한다면, 성경은 덮어 버리고, 얼굴에는 철판을 깔면, 그리고 성장, 성장, 외치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천 명, 만 명을 모아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 큰 교회의 특징 - 한결같이 성경과는 상관이 없다. 큰 교회가 되는 비결은 교인들에게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해봐, 시험해봐, 복이 오는지 안 오는지' 등으로 하면 된다. - 잘 안되던데?
* 교회성장의 첫 걸음 - 설교를 할 때에 문장을 딱딱 끊어서 적당한 반말로 설교하고, 그리고 심방 때에 대 부대를 이끌고 시위를 한다. 그리고 부목사와 당회장의 구분을 계속 지어놓으면 된다.
* 민담에 나온 이 민족의 사고방식 - 우리나라 민족성은 전설의 고향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어찌하든지 우리 가문만 잘된다면, 그래서 어떤 종교든지 다 수용하는 것이 한국의 민족성이다. 기독교도 그 민족적 사상에 기독교라는 색깔만 칠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다는 아닌 것이다.
* 언제 기독교가 핍박을 받는가? - 자기 집안이 망하는 쪽으로 인도되면 언제든지 핍박을 한다. 그러나 내 집안만 잘되면 언제든지 무슨 종교든지 신성하게 받아들인다. 그것이 불교이든, 기독교이든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누가 내 형제요 모친인가? - 이 말씀은 기존의 가정공동체를 부수고 새로운 예수중심의 가정공동체를 이끌어 가야 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들은 교회에 모여도 집안에 있는 자기 자식(고3)만을 생각한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가득 찬 사람을 교회 모아놓고 전도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기독교가 핍박을 안 받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뚜렷한 증거가 되고 만다. 불교나 샤마니즘의 다른 변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불교가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말이다.
* 그러나 기독교는 오직 예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인데, 어느 인간이 자기 사랑을 그만두고 제 삼자인 예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좋아요, 예수님이 좋아요?" 라고 묻는다면 "그야 내가 좋지요" 라고 이렇게 솔직하게 나와야 된다.
◈ 기독교 -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제는 예수님만을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모임인데, 이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아니하고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성령의 거듭남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 사영리의 4째 원리에 보면, 삶의 중심을 내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옮긴다고 하기는 하는데, 자기를 부인하면 박찬호가 이기든 노모가 이기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박찬호가 꼭 이겨야만 되는 것으로 야구를 보게 된다. 박찬호가 이기는 것하고 하늘나라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
* 김진홍 - 대한민국 만세 ! - 그러니 이 사람은 아들의 나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 아들의 나라(인자의 나라) -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의 짐승의 나라와 대비되는 나라이다.
* 짐승의 나라 - 느부갓네살이 교만하여서 여섯 때를 짐승으로 지내는 그 시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 짐승의 나라를 형체화시킨 것이 바로 우상인데, 금신상, 금, 은 놋, 동, 철, 진흙 등이다. 제 아무리 이 세상이 번창해도 이 세상은 느부갓네살의 신상과 한 통속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이것을 박살내는 것이 '뜨인 돌' ! - 뜨인 돌이 기존의 국가를 공격하는 내용이 요한 계시록(13-17장)에 펼쳐진다. 돌멩이가 기존의 국가를 공격하기 때문에, 결국 아들의 나라, 즉 인자의 나라에 속한 우리들은 김대중의 대한민국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 여호와 증인의 철학 - 국기에 대해 경례는 안 한다.
* 이근호도 개인적으로 경례를 안하고 가만히 서 있다.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처럼 국가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경례를 안 하는 것을 복음을 전하는 보조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 국가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용하고, 왕과 방백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복음을 전하는데 유익함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데 보조 수단으로 본다. 물론 나중에는 이 나라가 바로 짐승의 나라로 등장을 하지만 말이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국가가 하는 선한 일에 참여하지만, 국가가 잘못된 길로 갈 때,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것을 외치는 것이 선지자적 사명이 아니다), 오직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복음을 보호하는 것이다. 문익환의 오류가 여기에 속하는데, 정부를 바로잡는다고 영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손봉호, 경실련의 오해 - 자신들의 행동이 그 어떠한 영생도 주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지켜야 한다.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의 피밖에 없다. 국가가 잘못된 길로 갈 때,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냥 복음을 지키는 일밖에 없다. 이것이 단순한 일이 아니고 믿는 자의 전부인 것이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문화사명 - 이 창세기 1장 28절은 명령이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되게 되어 있는 복 개념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문화사명으로 바뀌어 사용하고 있다. 처음 계명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 라는 그것 외에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계명(명령, 사명)이 아니다.
◈ 생명은 의(義)가 있어야 되고, 이 의(義)는 아들이 아버지의 소원대로 선택된 자에게만, 아들을 공경하는 자에게만 생명을 주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이 말씀의 초점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예수만 있으면 더 이상 율법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만큼 예수는 대단하다. 너무 너무 대단하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생명으로 말이다.
* 그것을 다음 구절이 잘 보여준다.
(요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이 말씀의 초점은, '육체와 영혼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고, 예수님이 불러낸다는데 초점이 있다. 즉, 성경은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데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누가 불러 주는가?' 성경은 예수님만 증거하면, 그것으로 만족하다. 무엇인가를 덧붙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자꾸 인간들이 뭔가 덧붙이려고 시도를 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 달란트 비유 - 예를 들어,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이 비유는 달란트 비유가 아니고, 주인과 종의 비유라고 해야 바람직하다. 이 비유는 은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목사들이 자꾸만 은사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말씀의 초점은, 주인이 없다고 하더라도 주인이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종말론적 현상
* 종말론적 현상 -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의 비유에서 그 현상을 볼 수 있다. 신랑이 오지 아니했을 때는 미리 기름을 준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랑이 오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기름을 준비하는 모습을 종말론적인 현상으로 말하는 것이다. 단지 준비성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세상적인 준비는 주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 천국의 현재성(종말의 현재성, 선취성)
◈ 성경해석의 대 원칙 - 어떤 성경을 해석을 하더라도 예수님만 남기고 다른 것 다 버려라 !
* 설교자의 모습 - 설교를 연속극 식으로 연결해서 하면 안 된다. 그날, 그날에 하나의 극이 완전하게 끝나야 한다. 오늘 저녁에 예수 믿고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설교자의 본분이다. 강해 설교(사실 성경 읽기의 수준이지만)의 경우 범하기 쉬운 약점인데, 결론을 미루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각 설교 하나 하나마다 예수님이 나타나야 되는데, 자꾸만 예수님을 뒤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보는 안목의 부족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믿음이 없어서?), 해결을 해야만 한다. 어떻게 말인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 이근호 목사의 도움(?)으로 라고 하면 '뻥!'이다.
◈ 성경의 증거 - 오직 주님에 대해서만 !!
(요5: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요5: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5: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 그러나 예수의 영이 없는 사람은 성경을 아무리 연구해도 주님을 모르고 있다.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아무리 공부를 해도 도로묵이다. 정말이다.
* 질문 - 예수님의 영을 받지 않고 율법을 연구하면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는가?
* 대답 - 절대로 알아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 우리는 어둠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식이 왜곡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모르면, 아무리 연구를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 존경하는 목사님들이시여, 쓸데없는 고생을 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