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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의 처신
왕하 16:1-9
16:1 르말랴의 아들 베가 십 칠년에 유다 왕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니
16:2 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륙년을 치리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고
16:3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16:4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16:5 이 때에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 하여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니라
16:6 당시에 아람 왕 르신이 엘랏을 회복하여 아람에 돌리고 유다 사람을 엘랏에서 쫓아내었고 아람 사람이 엘랏에 이르러 거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더라
16:7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 하고
16:8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
16:9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취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길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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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서를 보면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우상을 섬기면 안 된다는 것이 계속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이 우상이라는 것과
참 여호와의 하나님이 차이점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합니다.
제가 쉽게 말씀드리면
요즘을 인터넷 시대라고 말합니다.
원채 적합한 물건들이 많이 나와서
아예 사용하지도 않는데도 쳐박아 두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상이란 그런겁니다.
신이란 요청할 때만 응답해 주시고
가만히 있으면 그냥 뒷방 신세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세상신과 다른가 하면
인간이 원하지도 않는데도
막무가내로 공격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아지를 부를 때면
강아지가 곧장 달려옵니다.
우상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불러줄 때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이처럼 우상이라는 것도
내가 불러주면 나에게 비로소
신으로서 가치가 있지만,
안 불러주면 무가치할 뿐입니다.
우리가 뭔가 필요를 할 때
교회를 찾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면
신과 교류가 되는듯 하고
또 바빠서 나의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은 나하고 별로 관계없이
내팽겨 치게 됩니다.
그때 그 신은 아무소리도 없이
가만히 있게 되는데
그런 신은 바로 우상입니다.
여기에 비해 진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불러서 비로소 의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주든지 상관없이
우리를 먼저 공격해 들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먼저 공격하는 증거가 뭔가 하면
죽음입니다.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입니다.
베드로후서에 보면
전에는 물로서 심판하던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유황불로
이 세계를 공격하신다고 하십니다.
그 예시가 소돔과 고모라에서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져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다 불태워 죽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옛날의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받을 고통에 비하면
옛날 소돔과 고모라의 고통은
아주 미미할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 하지 말고
몸과 마음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라"
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공격해 오고 있다는 겁니다.
이 공격은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거룩한 백성만은 남고
나머지는 다 죽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용서받은 의인은 남기고
다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셔서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나라라고 해서
하나님이 공격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하나님의 공격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격하신다는 근거를
우리는 창세기 3장을 통해 확인할수 있습니다.
여기 배경이 되는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만들어 놓았는데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망친 자가
에덴동산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마귀였습니다.
선악과를 심어 놓고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이 뱀이 여자를 유혹하고
여자는 남자를 유혹해서
결국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이 황무지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드신 창조세계가
악마에 의해서 엉망이 되도록
그냥 두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인간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영원한 생명도 없이
목숨만 유지하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저 무작정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만
결국에는 죽음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짐같은 인생입니다.
자기 필요에 의해 뭔가를 하면서 살아야 되고
그것으로 삶이 완성되는 것도 아니기에
또 뭔가를 선택해서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비정상적 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지금도 철저하게 공격하고 징벌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괴로움 삶 속에서
참 하나님과 소통이라도 되어야 하는데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이러한 소통의 통로로
예배를 삼은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되어야
막혔던 숨통이라도 터질것 아니겠습니까?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오고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그 교류가 가능해 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매일 같이 예배를 드린 겁니다.
요즘처럼 일주일에 한번
얼굴 내미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같이 양을 잡고 염소를 잡아
예배를 드린 겁니다.
그 예배를 안 드리면
그 나라가 폭삭 망하니까
그 예배를 전담해서 실시하는 자들이 두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제사장들입니다.
만약 제사장들이 엉뚱한 짓을 하면
이스라엘은 저주를 받고,
하나님의 용서가 멈추게 될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라는 제사장들은
술을 먹고 아무 감각도 없이
다른 향불을 가지고 성소에 들어갔다가
그 향불에서 나온 하나님의 저주의 불을 받고
그 자리에게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불은 제단을 피울 때 사용한 불이 아니라
아무 불을 함부로 들고 들어갔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거룩에의 규정은 엄중하고, 무섭습니다.
예를 들면,
목사의 입장으로 늘상 하는 일이
예배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벽기도. 수요예배. 주일 예배 등,
교인들을 무시하고
예배를 상투적으로
그냥 해 치우는 식의 안일한 자세로 했다해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죽음에 이르게 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제사장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예배라는 것이
단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 하나님의 무서운 거룩을
너희가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그 무서운 거룩 앞에서
너희 실상이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가를
아느냐 하는 점입니다.
예배 안에서 너의 참된 실체를
날마다 노출시키시는 겁니다. .
사실 우리의 속은 연탄과 같이 죄 덩어리지요.
죄 덩어리 자체,
그 숯 덩어리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양의 생명과 바꾸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늘 교회 예배하러 가는데
하루쯤 빠져도 괜찮겠지
이런 안일한 생각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사지않아도 되는 물건을 빈방에다
쌓아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즉 언젠가는 쓸데가 있겠지 생각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우상의 비유를 말씀드립니다.
우상은 뭐냐?
우상은 사람들이 써줄때에만
하나의 의미가 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빈방에 놔두고 잊어버리면
용도가 사라질뿐만 아니라 폐기처분까지
손수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선제 공격을 하신다고 했지요.
무섭고 완전한 거룩으로
우리를 공격을 하시는 것입니다.
매일 같이 짓는 죄에 대해서
모아두셨다고 한꺼번에 정산하시거나
혹은 잊어버리시거나, 하시지 않고
하나님은 매일 같이 공격을 하시는 거예요.
매일 같이 공격을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는
계속 그 거룩이 유지 될 수 있도록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매일 같이 어린양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제공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끊임없이 구원해 내셨다 말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그 절차가 굉장히 복잡하게 적혀 있습니다.
교인들이 성경을 읽으려면
창세기 때에는 진도가 잘 나갑니다.
그러나 레위기에 들어오면
괜한 트집을 잡으면서 멈추지요.
우리가 기분날때 인터넷에 전화걸어
물건을 주문해서
주문한지도 모르고
빈방에 방치할때
언젠가 사용할때가 있겠지
하는 식으로 안일한 자세를 취하는데
이는 참 하나님을 마치
우상 다루듯이 다루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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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거룩과 구원을 위해 대속의 제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린다는 이 사실을 우리들이 놓치면 안됩니다. 내 쪽에서 하나님께 접근할 때만 교류가 트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공격과 더불어 먼저 택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시고 날마다 제사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경솔히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배란 뭐냐? 예배는 그 현장에서 양의 죽음을 통해서, 정말 필히 죽어야 될 자는 거룩한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존재인 것을 알게 하는 장치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서면서 내가 죽어야 될 실존이라는 것을 완전히 드러내고 폭로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더 간단히 말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아! 나는 하나님 앞에 이것 밖에 안 되는 구나를 다시 한번 절감하고 또 절감하는 거예요. 강도. 거지 나사로 모두가 나보다 훨씬 훌륭한 존재이다.... 그러니 내 대신 구약 때에는 양이 죽었고 신약 때에는 예수님이 어린양으로서 죽어야 되었구나. 이것을 온 몸으로 파악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일회용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심지어 하늘나라에 가서도 어린양의 보좌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 천국에 갈 때에도 어린양으로서 우리 대신 희생한 분으로서 우리 앞에 마중하러 나오십니다. "너 때문에 내가 희생과 수모를 당했다는 것을 네가 아느냐? 그것을 알고 왔나? 어서 오너라. 용서 해주마." 이런 식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때 예배라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는가 하면 인간이라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워낙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에 항상 개개인이 지녔다고 여기는 선한 행동에다 최후의 기대를 걸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선행은 무서운 하나님의 거룩에 부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만족시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어느 정도로 엉망이냐 하면,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것이 욕망이고 그 욕망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뜻과는 어떻게 그렇게도 반대로 나가는지 정말 한심스럽습니다.
죄는 항상 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마저 우리자신을 잠 재우려해도 안 되고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들이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이 욕망을 잠 재어서 정상적인 구원의 반열에 참여할 수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단언입니다. 희생 제물의 죽음이 그렇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양이라는 제물이 무참하게 하나님 앞에서 불태워지는 것은 곧 우리의 실체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희생 제물은 흠 없는 제물입니다. 그래서 희생 재물로서 숨통을 열어 준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잘 안다 하면서도 우리들은 우리 속에 있는 악마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더란 말입니다. 그 모순을 들추어주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 아~ 이 인간이 하나님이 원하는 쪽으로 나가지 않는데 마치 나와 동일하구나"하고 말입니다.
레위기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만약에 고의로 죄를 짓고 난 뒤에 그 죄를 용서를 받기 위해 제물을 갖고 오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받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고의로, 의도적으로 죄를 짓고 나서 용서받기를 구해도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몰라서 죄를 지었을 때에는 용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죽여도 고의가 아닌 실수로 사고가 났을 때는 도피성이라는 곳에 가서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고의로 한 죄는 용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속죄제는 고의가 아닌 무의식중에 저질러진 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운전하다보면 사람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7월 10일날 대속죄일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뭐냐하면 온 나라의 백성들의 죄가 고의든 아니든 그 날에 다 용서받는 그런 제도를 또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때는 누가 담당하느냐? 대제사장이 직접 온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소, 양, 염소를 잡고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 아무도 못 들어가는 지성소에 홀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 모든 민족의 죄를 일시에 그 해의 죄를 다 용서받는 그 제도입니다. 이 제도를 고맙게도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제사장이 누구냐?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하늘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가 한평생 지은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게 하신 겁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내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이 이야기는 구약의 2000년 역사가 쭉 내려오면서 수많은 세월을 지내면서 일관되어 연결되어 오면서 약속한 바에 충실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총괄해볼 때 역시 한사람이 대신 당해야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날 때부터 완전히 죄 없는 분이 그 분이 자기백성을 위해서 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가지고 두 글자로 복음이라 하고, 넉자로 기쁜 소식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드린다는 이 말은 늘 솔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난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다 라는 말입니다. 찬장 열고 하나님을 끄집어냈다가 다시 찬장 속에 집어넣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은 오로지 십자가라는 자기 희생을 가지고 늘 세상을 심판하고 공격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늘상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장, 가정, 학교에서도 주"여 나는 이것밖에 안됩니다"라는 자세가 영적인 자세이고 영적 예배의 자세입니다.
자..오늘 본문을 봅시다. 오늘 본문 아하스라는 인간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악함은 어떤 나쁜 짓을 남보다 더 많이 했다 아니했다 라는 것의 차원이 아니고 뭐가 문제고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베풀어주신 그 자비하심의 장치, 용서하기 위한 제도, 하나님의 복음, 기쁜 소식을 모두 완전히 거부해버리고 이방인들이 우상을 찾는 식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식대로 하나님 앞에 어떤 길을 트려고 시도를 한 겁니다.
그것이 3-4절에 나옵니다. "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아하스가 제사를 안 드렸습니까? 드렸잖아요. 예배 안 드렸습니까? 드렸습니다. 신을 안 찾았습니까?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너무나 인간적인, 신을 불러주니까 하나의 의미가 되어 나에게 온 장난과 같은 신의 생각을 가지고 자기 의미대로 제사를 드린 거예요. 성의와 정성을 다하여 드린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보시기에 한마디로 건방지고 가증한 겁니다. 불쌍한 거예요.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은 마다하고 자기 쪽에서 자기가 상식선에서 만들어 내는 신을 찾는 방법을 구사한 것입니다. 성의를 표하고 정성을 다한다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강의할 때 가장 듣기 괴로운 것이 이런 겁니다. "목사님 오늘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라고 것인데 도전 받았다는 것이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듣기 싫었습니다. 도전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면 "야, 너 세구나" 하는 뜻이거든요. 다시 말해서 신에게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실체를 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네 앞에 다소 위축된다는 점을 솔직하게 고백한다는 식입니다. 이런 마음 고백이 "도전 받았다!"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현대인들이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신을 존중하기는 하는데 어떤 자세냐 하면 신 앞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며 먼지 같은 존재 입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과 완전함에 위축된 마음으로 태도를 정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저 하나님한테 도전 받았습니다. 앞으로 잘할게요"하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 저도 한번 제대로 잘살아 보려고 했는데 식구들 먹여 살리고자 하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하는 식입니다. 이만큼 제가 위축되어 있으니까 제 자존심을 봐서라도 그 정도에서 봐 달라는 식입니다. 신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참으로 자신이 죄인이라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을 잠시 후퇴하는 식으로 자기 잘못에 대한 징벌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밀린다는 것은 자기 자존심 문제이기 때문에 참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버룻을 못 고치고 있습니다. 우리 자존심이 보다 작아지라고 하나님께서 희생의 양을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그 양이 바로 너하고 같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아하스왕은 무엇입니까?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마저 신에게 바쳤지요. 얼마나 제사를 성의껏 지냈으면 자기의 그 귀한 아들을 제물로 바쳤겠습니까. 아예 살아 있는 자기 아들을 바치는데도 설마 신께서 복을 안 주시고는 못 배기시겠지 하는 식입니다. 이것은 엉터리입니다. 어찌 이 일이 아하스라는 왕 이야기에 국한되겠습니까? 우리 이야기 아닙니까? 바로 우리이야기입니다. 우리 속에 엉터리 같은 신에 대한 사고 방식이 있다면 반드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시편 40:6-7에 보면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책에 미리 기록된 메시야를 원하고 계시는 겁니다. 메시야가 나 때문에 죽었다는 자기 실체를 분명히 아는 그렇게 겸손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지 신에게 도전 받았다는지 또 나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는 변명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51:1-2에 보면 제가 평소에 귀히 여기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죄가 무지하게 많고 더덕더덕 붙어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노출하고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교회 나올때만 그렇게 되지 말고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어디서도 나의 몸에는 주님이 싫어하는 죄가 더덕더덕 붙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세가 참된 하나님과 참된 교류입니다. 뭘 바친다고 해결됩니까? 하나님께서도 뇌물 받으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돈을 얼마나 바쳐야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전도를 만 명을 하면 우리 죄를 용서하십니까? 이게 복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 주제파악을 하고 한 평생 살아도 우리의 실체를 바로 영적 예배 안에서 바로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들입니다. 목사든 박사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참 하나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모습으로 왔다는 것을 늘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우리가 전도 열심히 하고 기도 많이 하고 나면 우리 자신이 흐뭇해지지요. 흐뭇해진 자기 교만은 참된 예배도 아니요 참된 회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도전 받았다고 하지 마시고 회개하기를 원하십시오.
아하스가 자기 아들까지 바칠 정도로 신심이 대단한 그것을 하나님은 도리어 가증되게 보시는 겁니다. 이 아하스의 엉터리 같은 너무나 잘못된 기초를 징벌하기 위해서 그 뒤에 보면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공격을 하게 하지요. 공격하게 하니까 이 아하스가 자기 실체를 드러내는데 여기 16:7-9에 보니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 하고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취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길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붙박이 찬장에 가두어 둔 우상처럼 여기기 때문에 실제로 국가를 경영할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힘이 센 깡패같은 나라를 은금을 주면서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하나님 앞에 자기 실체를 안다면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고 작은 것에도 큰 은혜인 줄 알아야 합니다. 욕심만 자꾸 내시지 마시고 조그만 일에도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낮추기 위한 하나님의 기적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심이다"고 받아져야 합니다. 왜? 그것들이 몽땅 없어지더라고 주님이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내가 복을 받아 천당을 가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제가 뉴스를 보니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울에 눈이 많이 왔는데 눈을 치우는 아주머니께 눈이 오니 좋아요, 안 좋아요 라고 리포터가 물으니까 그 아주머니가 대답하기를 " 지겹습니다. 이 눈이 다 쌀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 답변을 듣다보니 요한복음 6장에서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 올 때 하는 소리가 생각났습니다. "예수여 옛날 모세 때에는 하늘에서 만나를 펄펄 내렸는데 당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렵니까?" 라고 하면서 쫓아왔습니다. 그 민중들이 세운 것이 오늘 날 교회가 아닙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줄 것은 하늘에서 만나가 아니라 내가 흘린 피와 찢겨진 살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가 영생이 주어지지 않느니라. 알겠나?"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그 때 따라오던 모든 이들이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자기네들이 원하는 것을 예수님이 안 준다고 생각한 거죠. 진짜 하나님은 하늘에서 쌀을 내려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교회 나오고 사회생활 할 때에 어느 장소에 가든지 이것을 생각하시면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을 절감하는 생애가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