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룸 네스트 도어>
1. 죽음은 전적으로 개인의 영역일까? 존엄한 죽음을 위한 개인의 선택은 어떤 의미일까? 영화 <룸 네스트 도어>는 ‘자발적 죽음’과 관련된 수많은 논의를 드러내면서 인간의 마지막을 차분하게 조명한다. 평생을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여성 A는 불치의 암에 걸린다. 신약개발 시험에도 참여했지만 실패로 끝났고 결국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시한부 인생이란 그저 삶의 기간이 정해져있다는 것을 넘어 남은 시간 지독한 고통과 공포 속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책도 읽을 수 없고, 글도 제대로 쓸 수 없으며, 음악까지 소음으로 들리는 고통의 시간이다. 그렇게 남은 시간을 불안과 고통 속에서 보내는 것을 거부한 A는 스스로 존엄사를 계획한다. 다만 그녀는 혼자만의 절대적 고독이 아닌 곁에 자신을 지켜보아주는 한 사람의 존재를 요구한다. 그것은 삶의 끝을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였던 것이다.
2. A의 요구를 받은 소설가인 친구 B는 고심 끝에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평생을 같이 했던 시간에 대한 존중이었고 죽음을 선택한 친구에 대한 진정한 우정이었다. A가 ‘죽음’을 위해 선택한 장소는 평소 살았던 일상의 공간은 아니었다. 행복과 좋은 기억이 남은 곳에서 ‘죽음’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A은 낯선 공간을 선택한다. 새로운 장소를 약 한 달간의 기간으로 빌렸고 은밀하고 치밀하게 죽음을 계획한다. ‘자발적 죽음’을 허용하는 국가는 많지 않기 때문에 죽음이 발생하면 수많은 복잡한 법률적, 도덕적 후유증을 동반한다. 자신을 위해 동반하기로 한 친구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3. 남은 시간 선택의 순간을 결정하기 전, 두 사람은 과거의 추억과 현재를 이야기하며 인생을 반추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벼운 산책과 차를 나누면서 인생을 정리하였던 것이다. 치열했던 도전의 순간들, 연인을 교차로 공유했던 특별한 경험도 삶의 끝에서 나눌 수 있는 농밀하면서도 강렬한 기억들이었다. 누군가는 시한부 인생의 장점을 삶을 정리할 시간을 강제로 부여받았다는 것이라 말했다.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통증은 심해졌고 A는 B가 잠시 외출한 사이 죽음을 결정한다. 화장을 단정히 한 그녀는 다크웹에서 구한 ‘존엄사약’을 먹고 앞마당 일광욕 의자에 누워 뜨거운 햇빛 속에서 삶을 끝낸 것이다.
4. ‘죽음’에 대한 자발적 선택은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기독교 관련 종교에서는 자살을 죄악이라고 규정하기까지 한다. 삶의 가능성이 무한하게 열린 사람들의 자살은 분명 문제가 있으며, 그러한 자살충동에 대한 억제와 치료의 필요성은 분명하다. 하지만 삶의 가능성이 멈춘 사람들, 현재의 고통이 일상적 삶을 지탱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삶보다 더 큰 존엄과 안식 그리고 평화를 안겨주는 것이 된다. ‘삶’에 대한 인식은 보편적 규정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고 그것은 인간의 존엄을 최대한으로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 그 자체를 절대적인 부정과 회피의 시선으로만 볼 수 없다. ‘죽음’은 어느 순간 ‘삶’보다도 더 큰 인간의 존엄적 상징이기 때문이며, 그것에 대한 선택은 개인의 자율성에서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5. 영화는 존엄사를 선택한 한 인간의 냉정하면서도 강인한 삶의 측면을 조명하며, 그것을 존중하고 도움을 주었던 친구와의 이야기를 통해 ‘존엄사’의 의미를 차분하게 펼쳐낸다. ‘존엄사’는 삶과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충분한 이성적 판단을 통해 숙려한 결과 선택된 결과이다. 정신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때 내려진 결정인 것이다. 삶의 순간을 잃어버려 정신이 혼미해진채 약물이나 기구에 의존하며 연명하는 미래를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현실적 문제는 관습적 시선에 의해 발생한다. 죽음 이후 경찰의 사건 조사가 이루어지고 죽은 자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잠재적인 살인방조자로 취급받는다. 사건의 해결을 위해 투입된 변호사가 자조적으로 말한 ‘광신적인 경찰 때문에 엄청 열받는다.’ 것처럼 종교적 신념에 눈먼 사람들은 ‘자발적 죽음’에 대한 존중과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좁은 관점에서의 ‘죽음=살인=죄악’이라는 등식만 성립할 뿐이다.
6. ‘죽음’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결말이다. 하지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죽음을 연장하기 위해 인간은 물질적, 신체적, 정신적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당연한 행위이다. 살아있는 동안, 할 수 있다면 최선의 방법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방어책에도 일종의 한계가 존재할 것이다. 상징적 우화 속 이야기 <수궁가>에서 용왕이 자신이 살기 위해서 토끼의 간을 구하는 것과 같은 탐욕은 배제되어야 한다. 누군가의 희생과 소멸을 통한 삶의 갈망은 인간의 추악함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담대하게 환대하고 수용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녀야 할 ‘인간성’의 본질이어야 한다. 삶을 충실하게 살아냈기 때문에 죽음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 찾아와 인간의 비참함을 극대화시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닌,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때 좀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정신과 육체를 보존한 채 삶을 멈추는 ‘존엄사’는 죽음보다 더 중요한 삶을 위한 최선의 결정인 것이다. ‘죽음’을 위협하며 삶을 갉아먹는 수많은 허위의 존재들에게 자신의 삶을 저당잡히지 않는 자율적 인간의 선택인 것이다.
첫댓글 - " ‘죽음’은 어느 순간 ‘삶’보다도 더 큰 인간의 존엄적 상징이기 때문이며, 그것에 대한 선택은 개인의 자율성에서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