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정치를 이야기 하면서 <경국대전>을 제외하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조선은 갖추어진 법전에 의해 제도를 마련하고 행정을 펴 나간 법제 국가였으며,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법전 편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경국대전은 조선왕조 전기간에 걸쳐 국가운영의 기본 질서로 간주되었다. 고려 말부터 사용하던 율의 정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조선경국전>과 <경제육전>(1397) 그리고 <경국대전>(1485)으로 이어지는 법제, 법전의 정비과정을 거치면서 유교이념에 맞는 통치구조가 확립되어 갔다. 조선은 단계적인 개혁과정을 거쳐 중앙정치제도, 정치운영의 원칙이 마련되는 가운데 <경국대전>체제로 집약되는 왕조의 정치체제를 마무리하였는데, 그것은 국왕을 중심으로 정치•경제•군사•사회의 모든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국대전》의 구성을 살펴보자면 , 조선왕조 개창 때부터의 정부체제인 육전체제를 따라 6전으로 구성되었다. 원래 육전체제는 <주례>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를 그대로 모방한 것은 아니고 현실에 맞게 조정하였다. 육전을 살펴보자면, 〈이전〉은 궁중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직제 및 관리의 임면과 사령, 〈호전〉은 재정을 비롯하여 호적•조세•녹봉•통화와 상거래 등, 〈예전〉은 여러 종류의 과거와 관리의 의장, 외교, 의례, 공문서, 가족 등, 〈병전〉은 군제와 군사, 〈형전〉은 형벌•재판•노비•상속 등, 〈공전〉은 도로•교량•도량형•산업 등에 대한 규정을 실었다.
조선은 유교이념을 기반으로 한 사회이며, 국가의 체제도 유교에 따라 운용되었다. <경국대전> 속에는 조선 초의 정치적•사회적 배경은 물론, 당시 지배층의 정치이념과 지향하는 바가 반영되어 있다. 이렇듯 <경국대전>은 조선의 정치제도를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사료가 된다. 이번 레포트를 통하여 이야기 할 것은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서부터 <경국대전>으로 이어지는 법전의 편찬과정이다. <경국대전>의 법제사적 의미 또한 매우 중요하지만, 법전이 편찬되는 정치•사회적 상황을 위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경국대전』의 내용
『경국대전』은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육전체제로 되어 있다. 육전체제는 주례(周禮)에 연유하는 것으로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전에서는 하늘이 만물을 주관하는 것을 본떠 국가를 통괄하는 관료제도를 규정하고 있는데,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4) 등 29항목으로 되어 있다. 왕실, 중앙과 지방의 관부, 관리의 임명과 승진 및 상벌 등을 규정하였다. 다만 신성한 존재인 국왕과 세자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았다.
호전에서는 땅이 삶의 근본임에 비추어 재정과 경제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데 경비, 호적 등 30항목으로 되어 있다. 국가의 재정은 횡간(橫看)과 공안(貢案)을 사용한다고 하여 국가재정의 기본원칙을 규정하였고, 회계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토지·조세제도와 아울러 조운(漕運), 농경은 물론 토지와 관련한 매매 등 거래와 관련된 법을 규정하였다.
예전에서는 봄에 만물이 소생하는 것과 짝하여 각종 제도와 가족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제과(諸科), 의장(儀章) 등 35항목과 용문자식(用文字式) 등 25종의 문서양식을 규정하였다. 관리 선발을 위한 과거제도와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제도를 규정하였으며, 친족관계를 나타내는 오복(五服), 혼인과 상장례, 제사와 입후 등을 다루었다. 그리고 국가의 각종 의례와 관원들의 복식, 외교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각종 의식(儀式)의 세부적인 절차와 복식 따위의 내용은 법전에 수록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주(儀註)'조에서는 '오례의'를 쓴다고 하였으며, 이에 따라 세종시대를 거쳐 성종 때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편찬되었다. 『국조오례의』에서는 각종 제사에 대한 '길례(吉禮)', 왕실의 혼인에 대한 '가례(嘉禮)', 외국의 사신을 영접하는 '빈례(賓禮)', 군대의 의식에 대한 '군례(軍禮)', 상장례(喪葬禮)에 대한 '흉례(凶禮)'를 자세히 규정을 하였다. 그리고 각종 문서양식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사회의 관료적 특성과 함께 계급사회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분재기(分財記)」. 1579년(선조 12)에 한 집안의 8남매가 부모의 재산을 나눈 문서이다.
병전은 맹렬한 기세를 떨친 여름을 닮아 군사와 관련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모두 51항목으로 되어 있다. 군제와 직업군인 및 군역의무, 국방과 관련된 교통과 통신, 궁궐의 보위를 다루고 있다.
형전은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가을의 취지에 따라 재판과 노비 그리고 상속에 대해 모두 28항목을 규정하고 있다. 먼저 형사절차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백성들의 생명을 아끼는 흠휼(欽恤)과 애민 정신의 표현이다. 노비에 대해 자세히 규정하고 각종 규제와 금제를 나열하고 있다. 상속에서는 재주(財主) - 현재의 법률용어로는 피상속인 - 에 따라 상속인의 몫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분배하지 않은 노비는 아들과 딸의 생사를 막론하고 나누어 준다. ··· 부모의 노비 ··· 중자녀(衆子女)에게는 균등하게 나누어 준다"고 하여 남녀균분상속을 선언하였다.
첫 항목인 '용률'조에서 대명률을 적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유교적 명분에 근거한 『대명률』은 고려 말부터 주목을 받아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일반 형법으로 인식되었다. 『대명률』은 어려워서 이해를 돕기 위해 1395년(태조 4)에 이두로 번역되었는데, 곧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다. 『경국대전』 등 국전에 특별 규정이 있으면 이것이 『대명률』에 우선하여 적용되었다.
공전은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겨울의 의미를 되새겨 14항목을 두고 있으며, 도로, 도량형, 식산, 공장(工匠) 등에 대해 규정하였다.
『경국대전』 편찬의 역사적 의의
국가의 틀이 채 갖추어지기도 전에 『경제육전』을 편찬하였고, 근 1세기 동안의 노력으로 영세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우리 실정에 적합하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대명률을 적용하기로 하여 번역까지 하였다. 그러면 왜 조선시대에는 지속적으로 법전 편찬에 경주하였을까?
법전 편찬, 즉 통일적이고 획일적인 법의 정비는 통치의 필연적인 요청이었다. 고려시대 말의 문란한 기강을 바로잡는 것은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법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신성한 존재인 국왕은 신성성만으로는 모든 백성을 포용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국왕의 신성성이나 권세가의 무력에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제도를 요구하였다. 이 점에서 법치주의는 신흥사대부나 국왕의 의지가 아닌 시대적 요청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역사의 진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은 고대 중국을 이상사회로 인식하고 추종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이념적으로는 주자학을 수용하고 이를 사회에 실천하는 매개체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수용하였으며 또 『대명률』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유의 요소는 사라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남녀균분상속 등 고유법은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다. 위정자들은 이상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법의 실효성, 현실적합성을 존중하였던 것이다. 『경국대전』의 조문은 관료제도 등 편찬자의 이상을 제도로 한 것도 있고, 또 상속 등 당시 현실을 반영한 것도 있으며, 소송규정 등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정립해온 규정도 있다. 이렇게 정립된 규정은 조종성헌으로 존중되어 후대에 준수되었다. 이 점에서 『경국대전』의 편찬은 압도적인 중국문화의 영향 속에서 고유법을 수호하는 기능을 하였다.
『경국대전』 편찬자들은 법을 민본정책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법을 '좋은 법, 아름다운 뜻'으로 파악하였으며, 특히 오래 된 법을 존중하였다. 이 양법미의(良法美意)의 근거는 바로 백성의 뜻과 믿음이었다. 바로 『경국대전』은 백성의 뜻과 믿음을 성문화한 것으로 함부로 개정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백성의 뜻과 믿음을 구체화한 '양법미의'는 역사 속에서, 즉 조상들의 생활의 지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새롭게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때는 역사성을 중시하였다. 이는 이미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이 적으며 또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추상적인 백성의 뜻과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백성들의 의견을 묻기도 하였다. 양법미의는 때로는 새로운 입법의 근거로, 때로는 반대의 근거로도 이용되었다.
역사성의 강조는 조종성헌존중주의로 표출되었다. 이는 법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나 사회의 변화에 법이 따라가지 못하여 입법의 발전에 장애로 작용하였다. 법의 현실적합성, 민본사상의 강조는 이 원칙과 모순이 된다. 이러한 와중에서 조종성헌존중주의는 초기에 법전편찬을 위한 임시적 원칙에 지나지 않았고, 15세기 중엽 이후에는 사실상 붕괴되어 형식적으로만 유지되었을 뿐이었다.
『경국대전』의 운명
조선을 건국한 신흥사대부들은 그들의 이상사회를 『경국대전』에 규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에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이상사회상을 규정하고 다른 곳에서는 현실을 반영한 조문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지향하면서 또 백성들의 권익을 옹호하려고 하였다. 나아가 강력한 왕권과 이를 견제하려는 신권을 적절히 타협하여 규정하였다. 그러면서 관료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조문도 산재해 있다. 이 모든 것을 육전체제에 따라 편성하면서 정합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구성하였다.
신흥 사대부들은 법을 이용하여 사회와 국가를 이상적으로 건설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어느 정도는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변하고 역사는 발전한다. 그들이 구상한 이상사회는 더 이상 이상이 아니며 또 다른 집단에 의해 새로운 이상사회가 제시된다. 하지만 그 사회마저도 현실에서 실현되기에는 또 난관에 부딪힌다. 그러면서 법과 사회는 새로운 모습을 잉태하고 변해간다.
『경국대전』 체제는 완성과 동시에 붕괴되어 갔다. 유교적 사회를 지향하였지만 그 토대인 가족은 너무나 달랐으며, 이상적인 권력의 분점은 현실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법과 현실의 괴리는 새로운 법령이 메워갔다. 그리고 새로운 법령의 증가는 또 다시 법전 편찬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수요에 따라 영조시대의 『속대전』 등이 편찬되었다. 하지만 『경국대전』은 끝내 폐기되지 않았다. 조종성헌존종주의는 조상들의 위업을 볼 수 있는 그리고 후손들이 해야 할 바를 가리키는 거울이었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법은 발전하는가?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근거는 무엇인가? 오늘날 법이 서로 모순될 때 해결하는 원칙으로 '신법(新法) 우선의 원칙'이 있다. 그렇다면 법에서 역사성을 강조하고 실효성을 중시하는 입장은 현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법의 궁극적인 근원은 무엇일까?
2. 법의 이념으로 정의, 법적안정성, 합목적성을 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법적안정성과 합목적성 가운데 무엇을 우선해야 할까? 『경국대전』을 편찬한 사람들은 어떻게 사고하였을까? 또 그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3. 법치주의와 민본주의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조선시대에 『경국대전』, 나아가 법의 위상은 어떠하였을까? 『경국대전』을 헌법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조선시대에는 헌법과 같은 것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