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12/6) 강의 / 종말론과 정치신학
바울의 종말론을 중심으로 신학과 인문학의 생산적 대화 가능성을 모색한다.
* 일시: 2023년 12월 6일(수) 오후8시.
* 참석자: 박성호, 정단희, 강현숙, 서은혜, 박영기, 서선미, 이샛별, 정명수 (8명)
* 발제자: 없음. 강의
--- 강의 중 일부 필기한 내용입니다.
바울의 종말론과 정치신학
* 바울 서신 중 성서이분법은 영육이분법으로 통상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기독교는 성스러움을 주장하면서 세속적, 정치적 사유는 신학적이 아니라고 주장. 이런 도덕적 태도가 사람들을 사로잡으면서 로마 종교로 선포까지 하게 됨-> 역설은 성스러움을 강조하고 세속에의 무관심함이 오히려 세속적 성취를 이룸. 유대교는 지극히 정치적이고 강력한 종교성을 띠었으며 민족의 위기에서 유대교를 전투적으로 만들었다. 왕이 사제로써 제사 지냈던 고대 종교는 정치적이었으며 정치와 종교는 하나였고 정교분리는 근대적 정신성의 유산이다.
● 바울의 종말론을 바디우와 아감벤, 지젝을 통해 알아보자.
//바디우, 아감벤, 지젝의 정치철학적 사유는 68이후의 사유다. 하나의 동일성은 아니나 그 이전의 사유(자본주의, 사회주의, 전통과 근대적 사고)로부터 이탈된 것이다. 포스트적 사고. 이후의 세계는 정치뿐 아니라 물질(경제), 사회, 정치경제학에서 후기자본주의가 전개됨. 포드주의 때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들의 퇴근시간이 생기고 즐길 여가가 생겼으며 이때 대중문화가 탄생했다. 계급 갈등을 완화해 잉여를 최대한 분배했으나 신자유주의에 들어서면서 자유와 노동유연성을 강조, 자본가의 남은 몫을 분배하던 비율이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급격한 부의 편중이 일어남. 이때부터 행성의 위기까지 온 현재까지 브레이크를 걸 세력을 찾아볼 수 없다. 예전에는 프롤레타리아가 단결, 봉기했다면 지금은 포스트적 사고로 탈정체성화 됨(노동자 정체성은 다양한 정체성들로 바뀌게 됨->인종, 성, 문화, 세대적 갈등 등….)
1. 알랭바디우
* <사도바울> 책 저자인 바디우는 바울을 ‘주체’의 모범으로 보았다. 바디우가 대안적 주체로 바울을 제시한 이유는 기독교도 바울의 복음과 메시지와도 상관없으며 오직 진리-사건으로 바울의 회심을 본 것.
* 보편적 주체성: 바울 사건은 ‘메시아 사건’이다. 한 주체의 종말과 소멸이 한 주체의 창조의 시작이 된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아무런 증거 없는 주관적 사건이다. 객관성이 없다. 이 철저한 주관성으로부터 보편성의 토대를 놓는다. 이것이 개별적 보편성이다. 진리는 바울의 삶을 통해 구성되어졌고 실체로서 진리는 그 실천으로 구성되어 나간다(주체의 충실성). 바울의 주관성은 개별성에서 폐쇄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을 무한한 사건으로, 잠재성을 갖는 것으로 보며 충실한 주체는 이 잠재성을 현실화할 수 있다.
바울의 종말론적 진리 사건은 진리주체가 주체의 진리에 대한 충실성으로 보편성을 담보한다. 바디우의 바울은 주체 형식에만 치우쳤다는 비판 또한 받는다. 그렇다면 이 모범적 주체는 어떤 것으로 채울 수 있나? 무엇으로 가능한가? -> 신앙으로 채워야 하며 이것이 신학의 임무이다. 주체 형식을 채우는 것!
2. 조르주 아감벤
아감벤은 바디우의 ‘보편적 정체성’을 추상적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그리스 담론에서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꿰뚫는 원리가 보편성이나 바디우는 개별적 보편성을 주장함. 애초에 이 보편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주체가 충실한 삶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 아펠레스의 절단: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 대왕의 궁정화가 아펠레스는 프로게네스의 작업실에 몰래 들어가 섬세한 직선을 긋고 나갔다. 이를 본 프로게네스는 그보다 곧고 바른 정교한 직선을 그 위에 그어놓았다. 아펠레스는 다시 와서 더욱 반듯하고 곧은 세밀한 직선을 그 선 위에 또 긋고 갔다는 일화.
* 배제의 정치(이민자, 타 문화, 타 종교, 몫 없는 자들을 배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아감벤은 현대적 삶이 수용소의 삶이라고 본다.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등을 나누는 공간적 분할이 아니라 (기득권의) 통제와 감시 속에서 현대인의 삶 전체가 영위 된다는 것.
* 메시아적인 것: 아감벤의 책<남겨진 시간>은 ‘메시아적인 것’에 대해 성찰하는 연구. 아감벤의 모체 텍스트는 벤야민의 개념. 벤야민의 메시아적 이미지는 변증법적 이미지이며 이것은 역사적 유물론자가 휙 지나갈 때 놓쳐서는 안 되는, 과거의 소망이 응축되어 있는,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의 시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구원의 이미지이다.
바울에게 메시아적인 것은 ‘잔여’다. 아펠레스적 절단은 정체성의 절단이다. 바울의 메시아적인 것은 정체성에 끊임없는 분할을 통해 잔여를 발생시켜 정체성을 위험에 빠트리면서 존재하는 비주체적 주체다. 주어진 정체성을 부정하나 ‘마치~이 아닌 것처럼’ 하나의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을 배제하는 것. 메시아적인 것은 구원의 잠재성이다.
* 호모사케르(성스러운 인간) – 로마시대 범법자를 가리키는 말로 주권자에 의해 법 외부로 내쳐진, 법 보호 밖에 있으며 재물로 바쳐질 수도 없는, 죽여도 죄를 물을 수 없는 존재. 벌거벗은 생명, 날것의 생명. 911테러 이후 테러 용의자들을 수감하기 위해 건설된 법치의 사각지대 수용소에 수감된 존재들(관타나모)은 호모사케르다. 기아, 절망, 고통 속에서 모든 인간성을 상실하고 죽은 자처럼 사는 존재. 아감벤은 여기에서 메시아적인 것을 보는 것.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무젤만’ 과 = ) 아감벤은 아펠레스의 절단을 통해 주어진 정체성을 훼손하고 흩트리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함. 수용소 안 사람들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증언할 수 없는 자들, 언표 될 수 없는 자들, 인간의 말로는 재현 불가능한, 어떤 정체로 포괄되지 않는 존재방식으로 정치적 궁지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3. 지젝
바디우와 아감벤이 주장하는 위 개념을 라캉의 시선으로 비판해 연관성을 모색한 후 종합.
->“비전체”, “전체가 아닌”
지젝은 라캉의 상상, 상징, 실재계 개념에서 주체의 가능성을 보는 개념을 가져옴. 주체 구성의 문제에서 다원적 사유와 포스트적 사유 시대의 결정불가능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나? 어떻게 주체의 ‘행위’가 가능한 관계 체계를 구성할 수 있나?
* 유물론적 신학: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에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장기 두는 기계장치를 역사적 유물론에 비유하고 있다. 장기기계에서 꼭두각시(유물론)가 장기를 두고 있으나 기계 안에 난장이(신학)가 숨어서 실제로 장기를 둠. 이때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 지젝은 오늘날 이 위치를 뒤바꾸면 백전백승이라고 말함.
* 행위: 행위는 ‘act’ 와 ‘action’으로 구분된다. action 은 종말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지만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모든 행동들이며 자기 파괴적 성실성을 보인다. act는 존재의 매트릭스, 모판을 바꾸는 행위다. 주체는 사라지고 주체가 의지한 세계 또한 사라진다. 이것이 지젝의 정치적 종말론이다.
* 라캉의 테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금지된다”가 지젝의 정치신학적 사유의 모판이다. 이것은 신의 영역을 열어야 한다는 것. 기독교에서 신에 대한 사유는 자유에 대한 영역이다. 여기서 신은 실재적 신이 아닌 대타자이다. 주체가 인식 가능한 세계가 구성되지 않으면 인간의 자유 의지는 사라진다. 대타자가 구성한 상징적 세계는 결코 주체를 완전히 구속할 수 없다. 우리는 내 것이 아닌 세계에서 태어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워 내 것으로 살아가므로 인간에게 자유의 여지는 상당히 드물다. 물론 완전히 폐쇄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 자체가 자유 개념과 함께 왔다. 주체가 자기 행위 속에서 세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내용을 결정하고 자기 세계를 구성하는 ‘틈’과 같은 어떤 순간이 자유다.
** 지젝은 다른 강의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므로 간략하게만 소개합니다.
** 그동안 세미나에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세미나를 이끌어 주신 목사님 감사합니다.
첫댓글 강의 들으며 필기한 내용이라... 부정확하거나 오류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