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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일보' 다시 볼까? ① 백범 김구와 인천
'대중일보'에 대한 학계와 인천의 관심은 지대하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성의 인식이 비단 학계에 머무는 것이어서는 충분하지 않다. |
올해는 백범 김구 선생의 70주기이다. 인천과 백범 선생의 인연은 그간 여러 경로로 강조되어 왔다. 해방 후 백범 선생의 첫 지방방문은 인천이었다. 백범 선생이 인천을 방문한 이튿날, 1946년 4월 15일 '대중일보'는 1면과 2면의 헤드라인 기사를 모두 백범의 기사로 채웠다. 백범을 맞이한 인천의 감격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인천에서는 본래 1945년 12월 4일 임시정부 환영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국무회의 일정으로 백범 선생께서 참석하지 못하고 당시 문화부장이던 김상덕이 대신 참석했었다.
기사로서는 다소 긴 편이지만 백범 김구 선생을 맞이하던 그날의 인천의 감격을 느끼기에는 결코 길지 않을 것이다.

'대중일보', 1946.4.15.(1면) 인천 축항의 노역 죄수 金龜 지금은 건국도상의 거인 김구 주석 작일 내리 기독교당에 청년 김구 씨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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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선생은 인천에서 두 번의 옥고를 치렀다. 첫 번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충격을 받고 그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 하에 치하포에서 일본인 상인을 일본군 장교로 오인하고 살해한 사건으로 1896년 체포되었고 인천감리서로 이송되었으니 이것이 1차 투옥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백범 선생은 인천 감리서에서 1898년 3월 9일 탈옥하였다. 2차 투옥은 1911년 안명근의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 미수사건으로 체포된 것이었다. 백범은 17년형을 언도 받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1914년 인천으로 이감되었었다.
이때 축항 공사장으로 끌려다니며 노역으로 고통스러웠던 경험은 <백범일지>에도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1915년 7월에 가출옥하였고 출옥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에 취임하였었다.
'대중일보' 기사의 내용에는 이야기의 확산에 반드시 따르는 문학적 상상력이 결합되어 있다. 백범 선생의 말씀에서 굴절이 발생했는지, 백범 선생의 말씀을 옮기는 대중일보 기자의 글에서 오류가 발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백범일지>와 비교해보면 ‘박영문’으로 알려진 인천 물상객주의 성명을 ‘박영근’으로 잘못 기록된 간단한 실수에서 1차 투옥 때의 경험과 1차 투옥 때의 경험이 얼마간 뒤섞여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1차 투옥의 원인이 되었던 일본인 살해의 장소가 치하포에서 인천으로 옮겨온 중요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우리에게 <백범일지>가 없었다면, 백범이 좀더 오래 생존하여 백범의 역할과 위상이 더 적극적으로 평가되어 이날의 연설이 제대로 구비문학의 성장과정을 거칠 수 있었다면 백범의 이야기는 인천을 무대로 더 재미있는 전설이 되었을 수도 있다.

▲'대중일보' 1946년 4월 15일 - 김구
'대중일보', 1946.4.15.(2면) 김구 주석 인천 교당에 돌현(突現)
예배 석상서 인천 옥중생활을 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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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선생은 1946년 4월 14일 인천을 방문하여 바로 내리교회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신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45분간 인천과의 인천 감옥의 경험과 방문소회를 연설하였다. 예배를 마치고 오후 1시 15분 백범 선생은 내리교회의 전 신도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기념촬영을 하였으며 1시 반 경 점심식사를 위해 교회를 떠났다.

▲김구주석방문기념 - 내리교회
이때 촬영된 사진이 내리교회에 전시되고 있는 <김구 주석 방문 기념(1946.3)>인 듯하다. 즉 이 사진이 촬영된 시기는 1946년 4월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1946년 3월 백범 선생은 인천을 방문한 바 없다. 웹에서는 같은 사진 또는 백범 선생의 인천 방문을 1946년 11월로 설명하거나 1945년 12월로 설명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데 이는 모두 사실과 다르다. 백범 선생이 이때 인천에 방문한 것은 '조선일보' 1946년 4월 16일자 기사와 '동아일보'4월 17일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동아일보는 15일에 방문하여 일박하고 귀경한 것으로 오보를 냈다. 지역의 역사를 지역에서 기록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새삼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대중일보' 1948년 2월 28일, 남한만의 총선 실시 및 단독정부 수립한다는 미국의 제안이 유엔 소총회에서 통과되었다는 기사를 헤드라인으로 실었다. 이승만은 유엔대표에 사의를 표하였고 백범 선생은 ‘단정은 반대’라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때 이승만은 사진이 실렸지만 백범 선생은 캐리커처가 실렸다. 암울한 기사에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모습이다. 기사를 다시 읽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백범선생의 캐리커처는 다시 보아도 다정하고 자애롭다.
▲대중일보1948년 2월 28일 - 김구 캐리커처
윤진현 문학박사, 인문학연구실 오만가지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