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남목사님의 글들을 보면서 아래 글을 이곳에 다시 옮겼습니다.
아래 글은 예전에 구원론에 대하여 토론하다가 나온 글입니다.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아마도 광남목사님께서는
아래 백영희목사님의 건설구원 교리를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태복음, 야고보서, 히브리서에서 사람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구원을 잃어버릴 것처럼 보이는 말씀들을 건설구원교리로 보면 전부 해결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아래 글은 백영희 신앙연구에서 퍼언 글입니다. ( http://www.pkist.net/index.html)
제가 아래 있는 저의 글에서 저의 구원론에 대해서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
아래의 기본구원과 건설구원론에 대한 글은 좀 생소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은 현재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와 좀 다른 주장이 있다 했을때 그것이 정말 그런가 하여
깊은 생각속에서 성경을 상고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라는 사람은 예전에 세대주의 구원론과, 지방교회의 구원론, 일반장로교의 구원론 , 감리교의 구원론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과 대조해 볼 때 무엇인가 성경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백영의 목사의 구원론에 대해 알게 되면서 현재로서는
백영의 목사님의 구원론이 가장 성경과 일치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래 글들이 좀 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성경전체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자신의 성도들에 대한 요구가 진정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아래 글을 천천히 읽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래 글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앞으로 풀고 알아 갈 숙제로 남겨두셨으면
좋겠고, 성경을 계속 상고하시면서 성도들의 완전한 구원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는 시간과 더불어 더 깊은 진리로 모든
성도들이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습니다 . 감사합니다.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것을 ‘구원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것을 잡지 못해서 천주교는 중세 1천년동안 사람의 힘으로 천국을 가겠다고 수도 없이 노력을 했습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는데, 실은 천국은 예수만 믿으면 무조건 그냥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교리를 두고 기억할 이름은 바로 루터와 칼빈입니다.
예수님 믿은 사람이, 예수님 믿고 나서도 신앙생활에 힘쓰는 것은, 천국은 기본적으로 가게 되었으나, 천국의 영원한 모습이 각자 다 다를 것인데 오늘 세상에서만 천국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입니다. 천국 가게 된 것은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같이 무조건 받아 가지는 것이므로 ‘기본구원’이라 합니다(롬3:22, 엡2:8). 그리고 믿은 후 건설은 각자가 다르므로 ‘건설구원’이라 합니다(고전3:10-15, 마5:19).
이제 설명 드린 것이 총공회 구원론입니다. 초기에는 정통 교리와 표현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이단이라는 말도 서슴없이 나왔으나, 지금은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도 쉬운 교리이므로 아무도 반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알고 나면 그렇게 쉬운 것인데, 이 건설구원에 대한 주장을 이렇게 단호하게, 간단하게, 명료하게 요약하는 데 걸린 세월은 자그마치 450여년이었습니다.
현재 모든 교회들이 상식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이 건설구원교리가 처음 교계에 전해졌던 것은 1960년경입니다. 물론 그런 성향의 발언을 했던 종들은 간혹 있었으나 정식 교리체계로 올려 정통 교리 체계 자체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 올려놓은 공로는 ‘백영희’라는 이름에서 찾게 됩니다.
2) 기본구원
앞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무조건 천국을 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구원론’이라 했고 이 표현을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기본구원’이라 했습니다. 이 기본구원은 기존의 정통교리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문제입니다.
(1) 기본구원의 요건
① 예수님
행4:12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의 구원은 반드시 그 대상이 ‘예수님’이라야 합니다.
지금 공자나 석가를 믿는 사람도 봐주자는 말들이 많지만 우리가 의논할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기본구원의 첫째 요건입니다. 만일 다른 이를 믿고도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그는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그 이름이 ‘예수교’입니다. 석가를 믿고도 천국을 가고 싶다면 불교라고 하고, 공자를 믿고도 구원을 얻으려면 유교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을 이는 오직 예수님입니다.(행4:12)
② 믿음
예수님을 믿되,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무조건 받아만 가질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도 예수님 수고에 동참을 해야 한다는 오해들이 많습니다. 천국 가는 구원은 인간이 알기도 전에 예수님이 만들어두신 것입니다. 그것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이라 말은, 천국을 가는 것은 인간의 노력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혹 ‘믿음으로’라는 표현 때문에 우리의 몸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해도 우리 마음의 노력은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행위 중에는 우리 몸이 움직여야 하는 행위보다는 우리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 행위가 더 많습니다. ‘믿음’이 중생의 전제 조건이 될 때 이 ‘믿음’은 마음이라도 움직이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해했다면 오해입니다. 중생의 조건이 되는 ‘믿음’은 인간의 몸과 마음의 어떤 수고도 다 배제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전적 은혜로 주셨고 인간은 죽은 상태이므로 그 주시는 것을 저항하지 않았고 주시는 대로 받게 되었다는 외면만을 두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내면은 전적 은혜이니 인간은 전혀 알지도 못했고 주시는 것을 ‘받게 되어졌다’는 표현입니다.(엡2:8-9, 빌3:9)
갈2:16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라고 했습니다. 천주교는 인간의 행위를 더하여 구원을 얻으려고 했고, 전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부인하였습니다. 오늘 교회가 천주교로부터 개혁하고 나온 것은 구원은 전적 은혜라는 이 교리입니다.
③ 성령과 진리의 역사
예수님의 대속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성령과 진리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대속을 우리에게 입히는 책임자시고 진리는 우리를 살리는 이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고 중생이 될 때는 우리가 알지 못해서 그렇지 이미 예수님이 우리 죄값을 대신 해결해 두었고 성령은 그 대속을 우리에게 입혀 우리를 살리되 진리의 법칙으로 그렇게 합니다.(요14:17, 엡1:13, 살후2:13, 요일5:6-8)
(2) 기본구원의 결과
① 영의 중생
▪ 전적 은혜
예수님을 믿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죄로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이를 중생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알기도 전에 또 노력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그 사람을 씻어 그의 영을 살렸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노력은 그 어떤 형태로도 개입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마음으로 믿는 행위도 포함되지 않습니다.(요3:3-6, 고전2:1-14, 엡2:1)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은, 사람이 알 수 있는 제일 외부 면으로만 말을 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는 것은 마음의 작용까지입니다. 자기 마음이 믿기로 결심한 것이 신앙의 첫 출발인 줄로 사람들은 알지만, 실은 그런 마음을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믿을 마음을 가질 때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먼저 그 사람의 영을 무조건 은혜로 살려놓은 중생이 먼저 있었습니다.
어쨌든 ‘믿음’을 기본구원의 요건으로, 또 ‘중생’을 그 결과로 설명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반적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기본구원의 전개과정을 시간 순서로 살핀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 두어야 합니다.
▪ 신적 요소
영의 중생을 두고 한 가지 더 살필 문제는, 중생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영은 범죄로 죽을 때에도 영 자체의 범죄로 죽은 것이 아니고 심신의 범죄를 주격 위치에서 책임을 지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영이 죽은 후 영의 상태는 작동 불능의 상태로 중생 때까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이 작동 불능의 영에게 다시 생명이 주어지자 영은 중생이 되었는데 이 영이 중생으로 받아 가진 생명은 바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과 성령과 진리로 된 것입니다. 요일5:7-8에서 ‘성령과 물과 피의 증거’라 한 것은 성령과 진리와 대속의 역사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중생시켜 우리 영에게 생명을 주어 우리 심신까지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어 가는 이 생명 역사는 여전히 인적 요소인 영과 마음과 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는 외부 인적 요소만을 보고 우리는 중생의 역사와 이후 믿음 생활에 관련된 모든 행위를 인적 요소가 움직여 만들어 가는 인간의 수고로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중생된 영이 마음과 몸을 붙들고 역사하는 생명의 역사는 그 외부는 인적요소지만 그 속에는 성령의 역사요 진리의 역사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역사로만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받아 가진 중생의 내면은 피조물에 속한 것은 전혀 섞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적 요소입니다.
마치 개가 새끼를 낳으면 개의 요소로만 만들어지듯, 사람이 자녀를 낳으면 그 자녀는 부모의 요소로 형성되듯, 중생된 영은 인적 요소지만 그 생명은 신적요소입니다. 인간의 것이 아니고 인간이 만들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손을 댈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첫째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인간의 출생은 부모의 것이 떨어져 나와서 자라가는 ‘분식’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님으로 새로 생명을 받은 중생의 생명은 신적요소가 분식으로 우리에게 들어 온 것이 아니고 신적요소가 우리 속에까지 뻗쳐 들어와 역사하므로 생명을 만들고 영원히 이어져 나가니 신적요소의 ‘연합’으로 생겨진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약1:18, 롬6:5)
② 하나님의 아들
영이 중생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를 아들로 상대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일반 만물 중에 한 존재로 있다가 영이 살아나게 되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아버지와 아들로 비유한 것은 하나님의 요소를 받아 하나님으로 난 존재라는 말이고,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말이며, 하나님께서 양육하여 기른다는 말이며,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받아 가질 존재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생토록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에게 하나님 노릇을 할 우리는 그 자녀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중생의 결과입니다.(요1:12, 롬8:14, 갈4:6, 요일3:2) 세상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아주 희미하게 짐작하도록 해 주는 정도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된 이 관계는 육의 부모 밑에 자녀로 태어나는 이 관계를 가지고는 측량도 못할 실상과 무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③ 천국 영생
한번 중생된 사람의 영은 다시는 범죄를 하지 않습니다. 중생한 다음에 범죄 하는 것은 마음과 몸입니다. 따라서 마음과 몸의 범죄와 성화의 정도에 따라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의 차이는 있겠지만, 영 자체만을 두고 말한다면, 다시는 범죄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한 번 믿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천국 영생은 다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끼리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본구원이라고 합니다.(롬8:1-2, 요일5:18)
천국의 영생이라는 표현에서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은, 고생스런 세상을 벗어나서 하나님 품 안에 안겨 다시는 세상의 고통을 겪지 않고 영원히 살아 존재하는 것을 ‘영생’의 의미로 대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은 단순히 존재의 연속과 고통이 없는 평안의 연속이라는 면에서만 보는 것은, 이 세상에서 바라 본 천국의 모습이지 천국 안에서 천국을 관찰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계 세상도 그 오묘하고 광대한 것이 끝이 없다 할 정도인데, 하물며 물질을 초월하고 있는 영물의 영계의 범위와 그 활동은 오늘 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나라의 모습은, 오늘 세상에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도 우리 눈이 어두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만 알리고 있습니다. 영원히 아버지를 닮아가는 우리가 될 것이고 그 나라는 그 아버지를 닮아가는 우리에 의하여 운영될 것입니다.
(3) 기본구원의 성격
앞에서 기본구원의 결과로 3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영이 중생되는 것이 첫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둘째, 이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 세번째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3가지 결과를 가져오게 된 기본구원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느냐는 문제를 3가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3가지 문제는 전부 중생된 영은 다시는 범죄 하지 않도록 중생되었다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단번 구원
기본구원은 우리에게 주어질 때 단번에 주어집니다. 두 번 반복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대속하신 것도 단번입니다. 십자가는 두 번이 없습니다. 또 그 대속이 우리에게 입혀질 때에도 단번입니다. 기본구원은 이렇게 단번 구원이므로 중생된 영은 다시는 범죄 하지 않는 영으로 중생이 됐다는 결론이 나옵니다.(롬6:10, 히7:27, 유1:3)
대단히 많은 분들이 한번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았다 해도 죄를 짓게 되면 천국 가는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고 또 다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영과 사람의 마음을 혼동했기 때문입니다. 중생한 사람의 범죄는 마음과 몸이 하는 것입니다.(롬6:13, 19)
② 완전 구원
기본구원의 두 번째 성격은 완전성입니다. 안 믿는 사람을 처음 믿게 하고 영을 중생시킬 때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영에 대한 모든 죄를 완전히 해결하고 구원합니다. 미래에 지을 죄도, 알고 지은 죄도, 또 지극히 작은 죄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지은 모든 죄 때문에 그 영이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은 완전하게 해결을 했습니다.
이렇게 영의 중생은 미래 문제까지 완전하게 해결한 다음 중생이 되었기 때문에 한 번 믿은 사람은 무조건 천국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영이 다시는 범죄 하지 않을 영으로 중생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기본구원의 ‘완전성’이라고 합니다.
이 완전성의 범위는 심지어, 하나님의 법 앞에서도 완전하게 씻었지만 마귀의 눈앞에서도 어떤 티끌만한 것도 남김없이 전부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마귀도 우리가 천국 갈 때 어떤 불평을 하지 못합니다. 기본구원의 성격에 대하여 이 ‘완전성’의 문제는 구원을 할 때 그 범위가 어디까지냐는 문제입니다.(롬8:1, 히7:23-25, 10:14)‘
③ 영원 구원
안 믿던 사람이 처음 믿게 되면서 받는 기본구원의 세 번째 성격은 영원해결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한번 믿으면 그 순간, 영원한 천국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이유는 한 번 중생된 영은 영원성으로 해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처음 믿을 때 중생되는 영은 횟수로는 단번이고, 범위로는 완전이며, 시간적으로는 영원을 향해 살아나게 됩니다. 따라서 중생된 영은 다시는 범죄 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범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중생된 사람의 문제는 이제 다음에 설명 드리는 자기 몸과 마음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평생을 싸워가며 회개하고 고쳐야 하는 건설구원 문제입니다.(히10:14)
(2) 건설구원
앞에서 살펴본 대로 기본구원은, 안 믿던 사람이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되면 무조건 천국을 가게 되는데, 믿는 순간 이렇게 기본적으로 받아가지는 것 일체를 기본구원이라 합니다. 이에 비하여 이번에 살펴볼 건설구원은, 기본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믿은 후 평생을 살아가며 각자가 제각각 따로 건설해 나가는 신앙생활 일체를 말합니다.
평생 자기가 건설해 나가야 하는 것이므로 ‘건설구원’이라 하고, 그 건설은 자기를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므로 ‘성화구원’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깨끗해지게 되면 우리 속에는 의로 살 수 있는 기능이 많아지므로 ‘기능구원’이라고도 합니다.
이 건설구원은 기존의 정통교리가 안개 속을 더듬듯 감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건설구원 교리를 정리하여 일목 요약한 교리체계로 세계 교회에 제시한 것은 백영희 신앙노선입니다.
(1) 건설구원의 요건
① 성령의 역사
안 믿던 사람을 믿게 만든 기본구원도 전적 성령의 역사지만, 믿게 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가는 건설구원의 성화역사도 성령으로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성령 없는 성화는 없다고 단정하면 됩니다.
건설구원은 믿는 사람의 남은 평생 신앙생활입니다. 평생토록 말씀대로 살아도 성령으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 마음이 단독으로 그 말씀을 지키면 건설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말씀을 지켜도 성화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이름도 우리 심신이 성령을 따라 성령을 닮는 것이므로 성화구원이라고 합니다. 심신을 깨끗하게 만드는 역사입니다.(요일2:27, 요14:26)
② 순종
안 믿는 사람이 처음 믿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항거를 해도 무조건 강제로 중생시킵니다. 이것이 기본구원입니다. 그러나 믿게 된 사람을 평생 고쳐가는 건설구원은, 자기의 몸과 마음이 성령의 인도를 알고 따르고 순종해야만 고쳐집니다.
영을 살릴 때는 성령이 사람의 의사에 상관없이 살려서 구원하지만 이제 구원을 받고 믿게 된 사람은 전적 자유성을 허락하여, 자기 마음이 거부하면 성령도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지 강제로 그 사람 마음 문을 열고 밀고 들어가지 않습니다. 따라서 건설구원의 두 번째 요건은 우리 심신의 순점T니다. 순종 없는 성화는 없습니다.
이 순점; 다른 말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기본구원도 믿음으로 받은 것이지만, 건설구원도 실은 믿음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꼭 같은 표현이지만, 기본구원의 믿음은 믿어지게 하여 믿게 하고, 건설구원은 우리가 믿고 순종하도록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차이가 있습니다. 즉 믿음은 ‘은혜’를 강조했고, ‘순종’은 행동을 강조합니다.(롬6:12-18, 히5:8-10, 약2:14-26)
③ 대속과 진리
처음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완전’ ‘단번’ ‘영원’히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믿은 이후 평생 신앙생활에서는 예수님의 대속을, 처음 믿을 때 구원해 주신 과거의 은혜로만 기억하고 감사하기 쉽습니다. 물론 처음 믿을 때는 대속의 은혜만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은 이후 평생 우리가 순종하고 사는 신앙생활에서도 그 대속의 은혜는 한시도 빠짐없이 우리 생활 속에 늘 함께 해야 합니다.
처음 믿을 때 대속의 은혜는 우리를 믿는 자로 만들어 천국을 가게 했고, 이제 믿은 이후 신앙생활에서 ‘대속’의 은혜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순점; 할 때에도 겉으로는 인간이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순점; 하지만, 실은 그 인간의 노력과 순종만을 가지고는 흉내만 낼뿐이지 실제로 성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 마음과 몸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성화가 되는 것은 겉으로는 우리의 노력이지만 그 이면에는 예수님의 대속이 바탕이 되고 그 대속을 힘입어 순종할 때라야 심신의 요소 하나하나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믿을 때 대속은 우리라는 사람 자체를 씻어 하늘나라 사람으로 만들고, 그 후 평생의 신앙생활에서는 그 대속이 우리 심신을 현실마다 해당되는 그 부분적으로 개별적으로 씻어 성화시키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속과 진리의 법칙은 우리가 성화되어 가는 건설구원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됩니다.(요일5:5-8)
(2) 건설구원의 결과
① 심신 자체의 성화
성령이 인도하여 말씀대로 살게 하되 우리 심신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성화시킬 때 그때마다 항상 예수님의 대속으로 씻겨 나가는 것이 성화구원임을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건설구원의 결과는 마음과 몸의 성화입니다.
영은 중생되는 순간 바로 깨끗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복합체로 된 물질이므로 평생 계속 마주치는 현실마다 그 현실에 해당된 마음과 몸의 각 요소가 그 현실에서 순종하면 성화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성화될 기회를 놓쳐서 부분적으로는 지옥에 버려야 할 쓰레기가 됩니다.(마18:8-9)
이렇게 몸과 마음에 성화된 부분을 평생 모아서 마지막 최점{으로 합계를 낸 것이 천국 간 성도들의 차이입니다. 즉 이 세상을 다 살고 나면 최점{으로 우리가 쥐고 갈 것은 중생되는 순간에 살려놓은 영과, 그 영이 평생 깨끗하게 만든 몸과 마음의 성화된 부분 전부입니다. 건설구원의 결과 중 하나는 바로 심신의 성화의 양입니다.(계2:23)
이 성화된 실상은 오늘 땅 위에서 더러워진 손을 씻어 이전처럼 깨끗해지는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이 받아 가진 하나님의 요소로 된 생명이 우리 마음과 몸으로까지 뻗쳐 나와 신적 요소화 시킨 결과이니, 이 성화는 이 세상 피조물로는 비교하거나 비유할 수가 없습니다.
② 심신의 기능
건설구원의 첫 번째 결과가, 심신 자체가 깨끗해지는 성화라고 한다면, 두 번째 결과는 심신이 가진 실력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자기 평생 마련하는 것이 건설구원인데, 자체 성화에 이어 우리가 평생을 통해 두 번째로 마련하는 것은 바로 의를 행할 수 있는 실력입니다.
마음과 몸이 의를 행하는 실력을 갖추는 것은, 말씀을 따라 순종해 본 그 횟수와 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순종하는 만큼 그 심신에는 의를 행할 수 있는 기능이 생기고 자라게 됩니다. 이 의의 기능, 심신 속에 준비된 의의 기능은 건설구원의 결과입니다. 비록 그 양은 각자가 다 다르지만, 우리는 평생 순종하고 산 것만큼 자기 속에 의의 기능이 남아 있게 되니, 이것이 건설구원의 두 번째 결과입니다
③ 심신의 상급
건설구원의 결과 중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각자가 평생 얼마나 상 받을 일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과 몸 자체가 깨끗해진 정도, 그 마음과 몸이 가진 실력에 이어 자기 마음과 몸이 움직여서 얼마나 큰일을 했고 또 많은 일을 했느냐는 문제가 건설구원의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비록 사람마다 그 양은 다르겠지만, 하나님께 상 받을 일을 많이 한 사람은 그 상이 클 것이고, 실력은 있어도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상이 적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은 ‘상’이라는 것을 세상에서 받는 ‘상’으로만 생각하여 그런 면으로만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런 상은 우스운 것이라 해서 비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천국의 ‘상’이라는 말은 일에 대한 칭찬이며 그 일에 대한 인정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잘한 것을 근거로 앞으로 대우할 약속이기도 합니다.(고전3:14, 고후5:10) 그 모습이 천국에서 신령한 형태로 나타나되 어떻게 나타날지 오늘 지상에서 따로 설명할 길이 없어 일단 ‘상’으로만 표현하고 있음을 살펴야 합니다.
(3) 건설구원의 성격
① 중복적 건설
기본구원은 단번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한 번의 기회에 기본구원에 관련된 것은 전부 다 주어지는데, 건설구원은 평생 마주치는 현실에서 항상 건설구원의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중복적 성격을 가집니다.
오늘 실패한 사람이 다음에는 회개하고 돌이켜 큰 의인이 될 수도 있고, 또 젊어서는 대충 교회를 다닌 사람이 노년에 크게 노력하여 젊을 때 못다 한 충성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선 자가 뒤에 서고, 뒤선 자가 앞설 수 있는 것이 건설구원의 성격입니다.(마19:30)
신사참배 때는 실패했으나 다시 준비하여 6.25를 승리하고 순교한 종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신사참배를 승리한 종들 중에서 일찍 죽지 않은 분들은 훗날 교권싸움에서 거의 실패자들이 됩니다. 건설구원의 기회는 평생 주어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건설구원이 중복적으로 건설되어 나간다고 하는 면은 그 사람 전체를 두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안에도 여러 개별 요소들이 많은데 그 개별 구성 요소들에 대한 성화의 기회는 단번입니다.
② 개별적 건설
안 믿는 사람이 천국을 가게 되는 기본구원은 그 사람에게 천국 가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면’을 완전히 해결하여 중생시킵니다. 따라서 기본구원은 빠진 부분이 없고 미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건설구원이라 하는 성화의 과정은 매 현실마다 관련 있는 요소들을 개별적으로 해결해 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그 평생 개별적으로 성화시킨 것을 모두 합하면 그가 평생 마련한 건설의 총합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 평생 심신을 성화시키는 건설의 과정은 매 현실이, 그 현실에 해당된 요소가 개별적으로 성화되는 것이지 그 현실에 상관없는 요소들은 다음 현실에서 해결할 문제입니다. 한 부분의 성공이 다른 부분의 성공에 대단히 유리한 조건은 되지만 보장을 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가진 심신의 모든 요소와 모든 부분이 전부 건설구원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면, 바로 그날이 그 사람이 죽는 날입니다. 이런 면에서 건설구원도 부분적으로는 단번의 기회로 넘어가고 있습니다(고후5:10, 유1:3).
(4) 건설구원의 내용
▪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
우리를 구원한 주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로 지옥 갈 우리에게 기본구원을 주시기 위해 대속하신 이름으로 사용되고,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주로 구원받은 우리로 하여금 3가지 직책을 감당할 자로 길러간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첫째,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마1:21). 우리가 지은 죄로부터 구원하는 분인데 우리가 지은 죄는 ‘인론’의 죄의 종류에서 살펴본 대로 크게 4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를 4가지 죄에서 구원했다는 뜻이니, ‘예수’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볼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말씀을 어긴 ‘죄에서 사죄’를 주신 분이고, 우리 마음대로 산 ‘불의의 죄를 해결하여 칭의’를 주셨고, ‘하나님과 원수를 화친’하게 만들어 하나님과 하나 되도록 만드셨고, 마지막으로 우리를 ‘절망에서 소망’ 주신 분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즉, ‘예수’라는 이름은 ‘사죄, 칭의, 화친, 그리고 소망의 구원’으로 요약해서 알고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지옥 갈 우리를 이 4가지로 구원하신 하나님으로 아셨으면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이니 헬라어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할 때는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야’라고 발음을 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이 단어의 의미를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가 하나님께서 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름을 부어야 하는 직책을 하나씩 알려주셔서 구약교회는 그 단어의 뜻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우선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제사장’을 세울 때는 기름을 붓게 됩니다(출40:15). 또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면을 책임진 직책은 ‘선지자’인데 이 선지자를 세울 때도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왕상19:16).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하고 인도하고 다스리는 ‘왕’을 세울 때도 그렇습니다(삼상10:1).
따라서 ‘그리스도’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의 이름이며 그 뜻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오늘 우리에게는 기름으로 비유한 ‘성령’(행10:38)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제사장, 선지자, 왕노릇’을 하도록 책임을 지신 주님의 이름입니다. 눅4:18 말씀처럼, 죄에게 포로된 것을 해방시키는 제사장,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없는 소경에게 눈을 띄워주는 선지자, 악령의 지배만 알던 우리에게 이제 참 자유의 통치를 받을 수 있는 왕의 직책을 성령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 주님이시며 그 이름을 그리스도로 알렸습니다(눅4:18).
①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구약의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하나님과 단절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문제를 제사로 해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지어 지옥에 가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오셔서(요1:29) 친히 제물로 죽어 바쳐졌기 때문에 그 한번의 제사로 우리를 ‘단번에’ ‘영원토록’ ‘완전하게’ 천국 백성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참 제사장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제사장 노릇을 한다는 뜻을 특별히 강조할 때는 예수님의 이름이 ‘그리스도’로 표시됩니다.(히9:11-12, 10:12-14)
사람이 기본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게 되는 구원은 전부 예수님의 대속으로 해결됩니다. 그러나 구원 받고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 땅 위에서 깨끗하게 길러가는 일은 기본구원을 받은 다음 죽는 날까지 노력하게 되는 우리의 건설구원 문제입니다. 우리가 자기 신앙을 길러가야 하는 이 건설구원 면에서 항상 기억하고 노력해야 할 첫 방향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기억하여 그 이름이 가진 첫째 역할인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우리를 제사장으로 길러 가시겠다고 하셨으니 우리도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어떻게 제사장직책을 했는지 기억하여 우리도 다른 사람의 신앙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 때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합니다.
앞서 제사장이 되셔서 이미 택한 사람의 구원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놓으신 주님이 그냥 직접 구원해도 되는데 일부러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우리를 제사장 노릇을 하도록 오늘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이 복음을 위해 제물이 되고 자기가 수고하고 자기를 희생시켜 자기를 제단위의 제물로 삼아 다른 사람의 신앙에 도움이 되게 하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자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는 제사장 노릇을 잘 한 사람이 됩니다(갈4:19).
여기서 한 가지 참고로 기억할 일은, 택자를 구원한 대속은 오직 예수님의 대속 밖에 없고 그 대속을 주님이 택자들에게 직접 전달하면 되는데 우리를 심부름을 시켜 여러 가지 일을시키시는가? 주님의 대속이 전달되는 이 일에 우리를 심부름꾼으로 사용하고 또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맡기는 이유는 우리가 없으면 이 구원이 전해질 수 없거나 또 우리가 없으면 이 구원이 완성되는데 불편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용하므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닮은 희생의 사람이 되어감으로 우리 자신의 신앙이 장성해지고 깨끗해지고 또 우리의 수고한 이 수고를 전부 하늘에서 계산하여 영광으로 돌려주실 것이므로, 이 수고는 주님 때문이 아니고 우리 때문에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래서 이미 믿고 천국 갈 사람이 되었다 해도 우리는 ‘구원을 위해 한 존재가 대신 죽고 바쳐져야 하는, 예수님의 대속의 희생’을 본받아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하고, 또 믿는 사람을 더 잘 믿게 만드는 이 복음 사역에 어떻게 충성할 것인지를 평생 생각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제사장 노릇을 잘 해야 합니다(계1:6). 제사장이란 어떤 존재이며 제사장은 어떤 면을 조심해야 하며 제사장의 손에 들려 있는 제사의 종류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구약성경을 통해 살펴보고, 그다음 신약성경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구원을 살펴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구약의 제사장직을 어떻게 완성했는지를 알고 이 구원 받은 자가 어떻게 행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연구하여 그대로 실행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비로소 아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므로 ‘기독교’라 하고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표현과 관련된 이런 우리의 이름을 두고 우리는 항상 첫 번째로 ‘제사장’의 이름과 그 이름이 가진 역할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이 빠져 버리면 세상 불신자들이 이웃을 위해 베푸는 희생과 같은 희생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붙들고 있다 해도 자기희생 자기 수고가 빠져버리면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으로 자라가도록 재촉하는 주님의 명령을 저버린 사람이 됩니다. 그래도 천국은 가겠지만 천국에 간 사람들의 실력과 자체 성화의 정도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이 제사장 면의 실력과 제사장 면으로 자신을 만든 차이가 그 차이입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읽을 때 이 ‘제사장’라는 단어 하나만을 가지고 연관을 지어도 전부 연결이 되고 성경 전체가 이 ‘제사장’이라는 단어 하나를 실천하는데 도움 되는 말씀입니다(롬15:16, 벧전2:5).
② ‘선지자’ 되신 그리스도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감추어져 있는 뜻을 먼저 알고 다른 사람에게 그 뜻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120년 후면 천하를 물로 쓸어버릴 것인데 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모두들 자기 세상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이 뜻을 앞서 알게 된 노아가 당대의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전달하는 말을 듣고 노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확정된 줄 알고 순종한 7식구는 구원을 얻었고, 나머지는 노아의 말을 노아가 발표하는 하나의 학설인 줄 알다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위치요 중요성입니다(히11:7).
하나밖에 없는 참 선지자는 예수님입니다(행3:20-24, 신18:18, 요6:14). 이유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적어주신 성경을 읽어도 들어도 깨달을 수 없었고 천국 가는 길을 보여 주어도 그게 무슨 길인지 전혀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감추어있던 모든 뜻을 십자가의 대속으로 다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셔서 우리 죽은 영을 살렸고 성령이 우리 영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모든 하나님의 뜻을 다 밝혀주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전혀 알 도리가 없었는데, 예수님으로 인하여 모든 하나님의 뜻을 다 알게 되었으니 예수님은 우리의 선지자입니다(계5:1-14).
오늘 우리가 선지자노릇을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선지자가 될 실력이나 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선지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놓고 우리에게 알도록 하셨으니 알려 주셔서 알게 된 것을 아직도 모르는 이들에게 배달할 뿐입니다. 그래도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먼저 알았다고 해서 우리의 역할이 선지가 될 수 있습니다.
석가나 공자 같은 천하에 천재들도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천국 가는 방법도 길도 결국은 발견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한없이 무지하고 몽매한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구원으로 살려놓고 성령과 성경으로 얼마든지 알도록 해 놓으셨으니, 우리는 우리 속에 알려 주시는 성령과 성경을 가지면 우주를 알고 영계를 알고 영생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과거 타락했던 원인을 알고 앞으로 갈 천국에 가져갈 우리의 준비물을 갖추는 모든 것을 다 알게 됩니다.
먼저 알려 주신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게 될 때 선지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으로 노력하라고 그리스도의 두 번째 뜻을 ‘선지자’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이라는 뜻인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그 머리 위에 부었습니다. 선지자에게 기름을 붓는 것을 보고 그때서야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진 주님은 우리에게 선지자노릇도 하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그분이 죽기까지 충성하여 선지자로 사신 것처럼 오늘 그분으로 구원받은 우리도 선지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고, 선지자 노릇을 잘 한 것만큼 자기 신앙건설을 바로 한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을 받아 성경을 읽도록 노력하고, 성경을 읽을 때는 성령이 가르쳐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과 주신 현실속의 자연 만물을 살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뜻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 뜻을 한꺼번에 다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먼저 알려 주신 작은 것을 가지고 어려워도 실행을 하게 되면, 그 실행을 통해서 좀더 눈이 밝아지고 그다음에는 좀더 어렵고 복잡한 것을 알려주면서 우리를 길러 가십니다.(롬12:1-2, 눅16:10)
안 믿는 사람에게 천국 가는 구원의 도는 오직 하나 예수님 밖에 없다고 전하는 것이 바로 선지자가 할 일입니다. 그렇게 전하는 사람이면 그가 바로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믿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더 잘 믿는 길, 더 바로 믿는 길,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그것이 바로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내가 깨닫고 알게 된 것처럼 그에게도 말씀과 성령과 현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길을 가르치고, 또 그가 어두워서 알지 못하면 알려 주고, 그로 하여금 실행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도록 한다면 그는 선지자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아 천국가게 되었다면, 이후 평생 노력해야 할 두 번째 방향은 바로 선지자노릇을 바로 하는 것입니다. 점점 온전하게 잘 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읽을 때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을 깨닫는 것과 그 뜻대로 실제 사는 것과 그렇게 다른 사람도 만들어 가는 이것을 주제로 삼고 성경을 연결시켜 보면 성경 전체는 바로 선지자를 만드는 지침서입니다. 하나도 여기에 연결 되지 않은 구절이 없습니다. (딤전5:17)
③ ‘왕’이 되신 그리스도
구약의 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맡겨 그들을 다스리고 인도하고 보호하고 먹여 살리도록 세운 목자요 지도자입니다.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안보, 누구에게 어떤 직책과 위치를 어떻게 맡기는 인사, 약한 이를 돕고 병든 이를 치료하며 환란 중에 있는 이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통치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알려 앞서서 인도하는 지도자이니 바로 구약의 왕이 해야 할 일입니다(삼하5:2).
악령이 우리를 죄짓게 하여 우리가 죄의 점L 되었기 때문에 죄값은 사망과 모든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원수의 나라에 포로가 된 신세였습니다. 이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오셔서 싸워 우리를 다시 본국에 갖다놓으셨고 우리를 말씀으로 먹였고 옳게 행동하도록 하여 의의 행실로 입혔고 원래 하나님께서 만든 참인격에 고장난 부분을 전부 고쳐서 치료했습니다. 그리고 이전처럼 다시 악령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이를 막기 위해 구원으로 성벽을 쌓았으며 우리가 가야 할 하늘 길로만 전념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약 역사를 통해 이 일을 가장 잘 했던 왕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혈통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마1:1에서 말씀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알렸고, 그다음 그리스도의 세 번째 역할인 하나님의 백성을 책임 진 왕으로서는 다윗이 표준이요 다윗처럼 노력하면 된다는 뜻이요 다윗이 가진 중심과 충성이면 누구든지 다 예수님의 구원 안에 그 구원으로 다른 사람을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어 기본적으로 모든 통치와 책임의 문제를 다 해결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이제 믿는 사람이 되었고 이미 천국을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가 죽는 날까지 힘쓰고 노력할 분야는 천국을 못 가는 일이 있을까봐 늘 회개하고 또 회개하는 자리에 있을 것이 아니고, 한번 중생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다시는 지옥 가는 일이 없게 구원되었으니, 우리의 할 일은 천국에서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을 뒤따라 그분과 함께 영계와 우주를 통치하고 다스릴 영원한 왕이 되는 이 일에 주력해야 합니다(벧전2:9, 계5:10).
오늘 세상에서 준비하고 연습하고 실력을 갖춘 만큼 왕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무한한 영계와 새롭게 된 우주를 우리에게 다 주신다고 해도 우리의 실력이 없으면 다 다스리지 못할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으로 연습하고 실력을 갖춘 그만큼 하늘나라에서 통치력과 실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고 천국 간 성도들의 차이입니다. 믿는 사람은 천국을 가고 지옥을 가는 차이로 차이 나는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 같은 성자나 우리처럼 뒤로 술 먹고 죄짓고 별별 짓을 다하고 천국 간 성도가 하늘나라에서 영광과 실력과 영원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꼭 같을 수는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은 믿는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내가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는 그 시간에 안 믿는 사람에게 전도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를 했으며, 믿게 된 사람에게 바로 믿는 길을 어떻게 도와주고 안내했는가? 신앙어린 사람을 유혹하는 주변 사람들의 사소해 보이는 접촉을 어떻게 잘 차단시켰고 그들에게 그런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길러주었는가, 천하를 다 삼키는 이단과 세상 풍조 속에서 자기 맡은 신앙의 사람을 어떻게 안보했고 그들을 이끌고 모세가 광야 40년을 통과한 것처럼 했는가? 오늘 우리가 믿은 이후에 평생 주력할 세 번째 숙제는 바로 ‘그리스도’라는 이름 속에 담아 주신 ‘왕’이라는 이름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를 읽을 때 예수님께서 ‘왕’이라는 직책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성경을 어떻게 기록하셨으며, 또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뒤 따르되 성경을 통해 왕직을 잘 연습하려면 무엇을 알고 어떤 면을 조심하며 어떻게 실력을 길러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엡5:15).
첫댓글 좀 복잡하고 길게 느껴지겠지만 상당히 유익한 글이라 생각됩니다.
함께 생각해볼 수 있도록 가져오신 작은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문제는 성경의 여러 용어들에 대해서와 천국과 천년왕국의 차이, 구원과 구원이후의 보상 기준 등을 감안하여
상당히 복잡하게 고려되어야 할 사안으로 좀더 깊은 상고가 필요하다고 믿어집니다.
백영희 목사는 갑자기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더욱 큰 발자취를 남겼으리라 믿어집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글을 읽고 있다보면 정말 신경질이 나려고 합니다.
백영희 라는분이 정말 거듭난 적이 있는 사람인지 부터 의심스럽고요?
또 그런 분을 존경하는 "작은형제"님은 거듭난 체험을 갖고 계신지요?
지식으로 아는 거듭남은 지방교회 혹은 그곳 출씬 위트니스리 하수인?들이 제일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묻고 싶지도 않습니다.
행위로 성화 된다는 것이 어느 성경에 있는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할때 하나님앞에 아름다운 믿음이 있어서 홍해를 건넜던가요?
출애굽 후에 40년간 광야 생활을 한 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 갈때 그들이 무슨 이쁜 행실이 있어서 들어 갔나요?
믿음이 아니고요?
또 안식에 들어 갈때 하나님 앞에 무슨 선한 행실이 있어야 가는 것인가요?
아니면 무슨 지식이 필요 하던가요?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고요?
결론을 말하자면 저 개인적으로는 저런형식의 신학자를 가장 협오합니다.
마치 본인이 무슨 경지에 오른 사람처럼 화려한 용어에 복잡한 문구로 포장되어져 있지만 실상은 본인의 거듭난 경험적인 체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영희 목사님의 거듭난 간증을 혹시 보여줄수 있는지요?
또 정말 미안하지만, "작은형제"님의 간증도 보여줄수 있는지요?
혹시 5년전 네이버 카페를 운영하시던 "포도가지"방장님과 같은 분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때도 동일한 문제로 저와 심하게 다투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는 귀찮았던지 곤란햇던지? 저를 강퇴 했었죠?
여기서 또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야곱님 성도에게 있어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대한 온전한 순종이 있을때 그에게는 반드시 선하고 아름다운 행위들이 삶 가운데서 드러나고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행위들은 육신에 속한 것들이 아닙니다,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된 것으로 전부 진리에 속한 것들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자신의 선한 행위들을 나타내 보여야합니다. 그래서 세상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자신의 삶이 산위에 세워진 성읍이 되어 세상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진리의 빛을 온 세상에 빛추어야 합니다.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친히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이것들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꾸짖고 아무도 너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디2:11~15)
야곱님! 위의 디도서 2장 말씀만 보더라도 주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서 2장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계3장의 사데교회에서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죽은자들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 2장의 선한 행위가 없는 입으로만의 고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2:17)
야곱님께서 저에게 거듭남을 물의셨습니다. 야곱님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부른것입니다.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성령님의 역사이미 그 역사는 바람과 같습니다(요3:8). 사람들에게 성령님의 역사는 죄에 대하여 의에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증거하시는 분이십니다(요16:8). 그래서 거듭남의 첫번째 조건은 성령님께서 어떤 사람안에서 그 사람의 죄인됨을 알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음심과 부활을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셔서 그의 죽었던 영을 살리시는데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야곱님 저는 요즘 어떤 글이나 성도들의 교제속에서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있는지 그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어떤 글이나 성도의 교제속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있습니다(요일1:1). 이럴때 저는 기쁨이 충만합니다.(요이4절) 그런데 어떤 글이나 교제속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을 분배받지 못하며 성경지식과 신학과 논리뿐입니다. 이럴때는 정말 슬프고 마음이 아픕니다. 만일 야곱님께서도 거듭난 분이시라면 위의 글이 진리에 속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충분히 분별하실 수 있을 것이라 믿어집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사람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옵니다. (요17:3) "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으니 또한 낳으신 그분을 사랑하는 자마다 그분에게서 난 자도 사랑하느니라. (요일5:1)
마지막으로 야곱님께 부탁을 드립니다. 모든 사람들은 말을 할때나, 글을 쓸 때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합니다. 믿음이 장성한 성도들은 모든 것을 다 소화하고 이해하여 자신의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믿음이 연약하고 약한 자들이 자신의 어떤 말이나 글을 통해 실족한다면 그 죄는 심히 무겁습니다(막9:42). 그래서 특히 성도들은 자신의 모든 언행심사를 바르게 하고, 진실과 신중으로 하여 가능한 모든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은혜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롬14:21)
행여나 다른 곳에서 다투셨더라도 여기서 두분께서 잘 화해할 수 있다면 참으로 기쁘겠습니다.
백영희 목사에 관해서는 저는 직접 구원간증을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그토록 대형교회이면서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교회이었으며 어린이들, 학생들까지도 부모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던 교회였다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증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계시록 7장에서 수를 셀수 없는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에 씻음을 받고 나오는 광경을 보듯이, 종말에도 참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영혼들이 거듭나서 구원얻은 사실에 감사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토브님 고맙습니다. 저는 사실 야곱님을 잘 모릅니다. 이곳에서 처음 뵙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님을 따라 살때 그 열매는 화평입니다. 저도 가능한 모든 성도들과 화평을 나누며 영적인 교제를 통해 서로 유익을 얻어 그리스도 예수님안에서 더욱 온전케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감사합니다.
건설구원의 성화 역사도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본 글 속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는데,
제목에다가 자기 행위를 통해 얻는 성화라고 하니, 인간의 행위란 말만 들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분에게 거부감을 주었다고 생각됩니다.^^
읽어보면, 거의 다 수긍할만한 내용입니다.
어린양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사실 위의 제목을 잘 못 달지 않았나 해서 심히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위의 글을 읽으면 " 자신의 행위를 성령님을 배제한 것이 아닌 성령안에서의 자기임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수정을 하지 않았는데 큰 오해를 가져온 것 같습니다." 다음 부터는 모든 것에서 저의 잘못으로 인해 진리의 말씀을 가리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지금 제목에서 "자기"를 빼고 믿음의 행함으로 수정 하였습니다.)감사합니다.
너무나 반가운 구원에 관해 잘 정리된 글입니다.감사합니다. 믿기 시작할 때 이런 개념을 알진 못했지만 지난 이십오년간을 돌이켜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건설구원이 자신의 믿음으로 행한 것이지만 그 믿음도 주께서 주신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개인적 사례를 글로 써보고 싶습니다.
자매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주님안에서 잘 지내셨는지요? 자매님! 위의 글은 저에게도 참으로 유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위의 글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가 하루 하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안내하고 있다고 믿어집니다. 그리고 믿음의 행위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지만 그 배경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임을 진실되게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다 그것을 간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만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자매님 고맙습니다.
##아마도 광남목사님께서는 아래 백영희목사님의 건설구원 교리를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올리신.글 잘 읽었습니다
내용이 긴것같지만 주제는 믿음으로 얻는 기본구원과 이후로 성숙해져가는 과정에서 애씀(성화되려는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건설구원이라고 봅니다
내면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열매들을 표현하는 개념의 차이겠지만...기본, 건설구원이라는 용어가 생소하군요
그리고 저는 위의 글을 쓰신 백목사님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제 안목이 좁은탓도 있겠지요)
토론할만한 주제들이 있기는 하지만...결과적으로는 서로 동의하지 못한채...불필요한 논쟁만 될것 같아서
평가는 유보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예 목사님 아마도 간격을 좁히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람이 진실로 마음 다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를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여 아버지 자신께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