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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서산 여행
합덕 신리성지=> 서산 해미읍성=> 간월도=> 안면도 백사장항=> 간월도 해넘이
간월도의 낙조
신리 성지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생가이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인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머물며 내포지방의 선교활동을 지휘하던 주교관이자 교구청으로 사용된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는 유서 깊은 사적지입니다.
이곳에서 다블뤼 주교는 초기 순교자들의 행적과 교회사를 정리하여 “비망기”(備忘記)를 작성해 파리로
보냄으로써 한국 교회사의 귀중한 사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교회서적을 집필하고 출판함으로써
근대적 출판 인쇄를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다블뤼 주교는 동료 선교사와 함께 주교관 인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갖은 고문 끝에 보령 갈매못에서 성 금요일에 순교하였습니다.
이토록 유서 깊은 신리 순교사적지는 2002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되면서 그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대전교구는 2003년 말 다블뤼 주교가 쓰던 옛 주교관을 교회사적 고증을 거쳐 본래의 초가집으로 복원하고,
2004년 성역화를 본격화하면서 기념성당의 첫 삽을 뜨고 부지매입과 진입로 확장, 편의시설 확충 등을
거쳐 2006년 5월 6일 2년 가까운 공사 끝에 완공한 성 다블뤼 안토니오 ·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및
사제관과 복원된 주교관에 대한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08년 12월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로 등록되었고, 2009년 기념성당 외벽에 순교자들의 부활을
주제로 대형 부조상을 설치하고 다음해 7월말 야외성당(다블뤼 광장) 공사를 마무리하였습니다.
2014년 5월 6일에는 다블뤼 주교 시성 30주년을 기념해 신리 성지 내에 새로 건립한 성 다블뤼 기념관과
순교자 기념공원 봉헌식을 가졌고, 2017년 3월 기념관 지하 2층에 신리 교우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성직자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그린 순교 기록화 등을 전시한 국내 유일의 순교미술관을 개관하였습니다.
지나 가는데 갑자기 종이 움직이며 울리기 시작한다. 10:45분
간밤에 눈이 내려 잔디 위에 쌓인 눈
잔디가 파란 계절에 와야 예쁜 곳인데 삭막한 겨울이라 어떤 풍경을 보여줄지 궁금해 하며 왔는데
간밤에 내린눈이 살짝 내려 앉아 더 성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함부로 밟으면 안 될거 같은 그런 마음..
저 십자가 탑이있는 건물은 미술관이다.
건물 외벽에 ㄱ덩굴과 미술관 입구에 성모상
탑위에서 내려다 본 신리 성지
충남지역에 유난히 많다고 생각되는 천주교 성지들
집에서 9시에 출발해 10시 32분 신리성지에 도착해 한 바퀴 둘러보고, 하루 일정이라 인근의 솔뫼성지는
다음 기회에 다시 오기로 하고 해미읍성으로 이동한다.
돌담으로 지어진 해미읍성..멋지다.
진남문을 들어서며
서산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옛 읍성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건축된 성이지만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다. 서산시에서는 해미읍성을
이용한 축제와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매년 10월에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서산해미읍성문화축제)를,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해미읍성 전통문화공연을 개최하고 있다.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당시 약 1천여 명 이상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당한 천주교 성지이기도 하다.
해미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 7년 1407년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병합하면서 정해현에서
해(海)자를 따고 여미현에서 미(美)자를 가져와 해미(海美)로 부르기 시작하며 유래되었다.
고려 시대에 충청남도 서산 지역은 정해현, 여미현, 부성현, 지곡현이라는 4개 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중에 정해현은 현재의 서산시 해미면 지역에 해당된다.
고려 태조 왕건이 통일전쟁중에 한씨 성을 가진 몽웅역의 관리가 운주 전투에서 승리하며 나라에 큰 공을
세우자 그에게 대광(大匡) 벼슬을 주고 고구현(高丘縣) 땅을 분할하여 정해현을 설치하여
그의 관향으로 삼게 하였다.
여미현은 본래 백제의 여촌현(餘村縣)으로, 757년(경덕왕 16) 이름을 여읍(餘邑)으로 변경되었다가
고려 초 다시 여미(餘美)라 바뀌었다.
이 두지역이 병합되면서 해미현이라 불리게 된것이다. 1895년(고종 32) 행정 구역 개편 시 해미현이
해미군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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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때 천주교도라는 모함을 받아
해미읍으로 유배를 왔었으나 정조의 비호로 10일만에 유배가 해제되어 돌아간적이 있다.
1801년대 순조 때 신유박해로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천주교 박해는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병인양요, 1868년 남영군 분묘 도굴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진다.
조선 후기 충청도 서북 지역(내포지방 13개군현)의 군사와 치안을 함께 관장하던
해미진영(海美鎭營)은 이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따라서 해당 지역의 천주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다.
당시 처형된 천주교인들은 무려 1,000여명 이상 이었다고 전한다.
해미는[6] 조선 초기 충청 병마절도사영이 위치한 곳이였다. 조선 중기의 1651년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지면서 해미는 현으로 축소되었지만, 여전히 1,400~1,500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는 진영으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군사를 거느린 무관 영장은 해미 현감을 겸하였고, 이에 해미 현감은 충청좌도의
내포 지방 해안수비 명목으로 국사범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해미 관아의 담당 지역은 충청도와 함께 경기도 평택에 이르렀다.
이에 담당 지역의 신자들이 체포되면 모두 해미읍성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이들은 해미읍성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였고, 마지막에 처형당하는 곳은 해미읍성 서문 밖과 해미천변(여숫골)이었다.
해미의 첫 순교자는 1800년 1월 9일에 장살형으로 순교한 인언민(마르티노)과 이보현(프란체스코)이다.
1839년 기해박해 이전까지는 1814년에 옥사한 김진후(비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를 비롯하여
모두 8명이 순교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 시기에는 132명이 순교하였는데 성명미상의 순교자 47명을 더하면, 해미읍성에서 순교한 사람은
179명 이상이다.
그밖에 해미천변(여숫골)에서 순교당한 이들까지 합하면 약 1,000명이 넘는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해미읍성의 큰 감옥 두 곳은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 지방에서 끌려온 천주교인(천주학 죄인)들로 항상
북적였다고 전해진다.
감옥이 있던 장소에는 당시 손발을 묶이고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리어 고문대로 쓰여지던 호야나무
가지가 지금도 흔적을 지니고 서 있다.
이 감옥터를 1950년대에 해미 공소 신자들이 식량을 절약하여 1800여 평을 확보하고 공소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에 정부가 문화재 관리 정책의 명목으로 공소 강당을 철거하고 그 터를 일부 보상,
일부 징발하고 순교 기념비만 새로 세워주었다.
그 후 오늘날 그 터의 교회적 성역화 사업이 불허되고 있다.
조선 전기에 무기들
천주교 박해 당시 해미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을 비롯해 관아와 객사 등이
꽉 들어차 있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1579년(선조 12)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도 있고,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해미에서 유배 생활하며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충청도 각 지역에서 잡혀 온 신자들이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특히 1866년에는 한 해에 1,000여 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성내 광장에는 당시 천주교도들이 갇혀있던 둥그런 감옥 터가 새로 복원됐다.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충청도 사투리 호야나무)
1790~1880년대에 이곳 옥사에 수감 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철삿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삿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가지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동쪽 가지는 폭풍으로 부러졌다고 한다.
108계단을 오르면 청허정이 마중한다.
계단에서 내려다 본 동헌
이 겨울에 대나무밭의 푸르름이 좋다.
동헌 뒷산의 청허정
노송들이 많아 산책하기도 좋다.
대쪽같은 대나무의 절개와 기개로 그 힘든 핍박도 견뎌낸 종교의 힘
이병헌과 김태리가 이 대나무 숲길을 걸었을까?
성 안의 여염집 돌담
전통혼례 포토죤
수 많은 순교자가 이곳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순교했다고,
옥사
신리성지에서 40여분 달려 11시 45분 도착해,12시 34분까지 관람하고,
서산 시내에 있는 유명식당으로 이동해 맛점한다.
간월암
일몰의 장관, 간월도 간월암
간월도에 가면 물위에 떠있는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암자를 하나 만날 수 있다.
원래 간월도는 작은 섬이었다.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해도 섬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간월도에는 새끼 섬이 하나 있다.
이 새끼 섬은 하루 두 번씩 밀물과 썰물 때 30m 정도의 모래톱
길이 열려 섬과 육지가 된다. 손바닥만 한 이 섬에 조막만한 '간월암(看月庵)'이 들어앉아 있다.
바다 위의 작은 섬 간월도와 그 안에 있는 작은 절 간월암은 밀물과 썰물 때 섬과 육지로 변화되는
보기 드문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 간월암 너머로 간월도의 명품인 일몰의 경관이 펼쳐지고,
가을이 되면 군무를 통해 새들의 천국을 이룬다.
간월암은 커다란 바위 전체에 아담한 암자가 자리하고 있어 만조 시 물이 차면 마치 암자가 물 위에
떠 있는 듯 신비로운 경관을 만들어내는데 일몰 풍경이 특히 아름다워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다.
섬의 남쪽 바위 위에 암자가 있다. 북쪽으로는 나무들이 있어 전각들을 보호하고 있다.
모래톱을 지나서 오르막길 끝의 조그만 절 대문으로 들어서면 정자모양의 2m 정도 되는
종각에 종이 하나 있다.
해탈문을 거쳐 간월암 마당으로 들자 250년생 사철나무가 푸른 빛을 자랑한다.
대웅전, 지장전, 요사채, 용왕단, 종각, 산신각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촛불을 밝히고 소망을 빌면서 진리를 찾는다.
간월암은 이후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으로 폐사된 것을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해 오늘에 이른다.
수령이 150년이 넘은 팽나무
무학대사가 사용하던 지팡이를 꽂아 놓으시며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사철나무,
이렇게 크고 고목이 된 사철나무는 처음본다.
간월암 원통전
범종각
간월도항 방파제등대 빨간등대와 산마루에 서산의 버드랜드
범종각
바다 건너 태안군 창리. 안면도 방향
2m 높이에 달여있는 종
소원등
점심을 먹고 14시 56분 간월도에 도착,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간월암을 둘러본다.
작은 바위 섬 위에 앙증맞고 조그마한 암자 하나가 세워져 있어 풍광이 아름답고 특히 낙조가 유명하여
전국의 사진 작가들은 물론 각지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들어 겨울철인데도 인파가 몰린다.
간월암을 나와서 낙조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인근의 안면도 백사항으로 이동하여
싱싱한 해산물이 넘치는 어시장을 둘러보고, 백사장항과 드르니 항을 이어주는 새로 건설한
다리 이름도 예쁜 대하랑 꽃게랑 인도교의 멋진 다리 건너보고
서해 바다로 넘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여유시간을 즐긴다.
백사장항 어시장의 싱싱한 수산물
안면도 백사장항의 명물이 된 대하랑 꽃게랑교
다리위에서 본 서해 낙조의 윤슬
드르니 항 모습
다리건너에 작은 바위섬
밀물때라 조업나갔던 배들이 서둘러 귀항하고 있고,
대하랑 꽃게랑 인도교가 멋지다.
이 다리 건설에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었을 텐데,,, 태안의 명물이 되길 바래본다.
태안의 백사장항에서 시간을 보내고 간월도 간월암의 해넘이와 노을을 보기위해 다시 간월도로 되돌아와서
굴이 유명한 간월도의 상징이 된 굴탑
4시 50분쯤 도착하니 해넘이는 아직이라 많이 기다려야 하는데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아 다행으로...
저 해가 넘어가길 많은 사람들이 기다린다.
간월도 낙조 전망대 조형물 속에 간월암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간월도의 석양
이런 모습을 담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기다리고 있다.
점점 붉어지는 간월암 주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간월도의 낙조 풍경
이렇게 멋진 서해바다 해넘이는 정말 황홀하다.
서서히 내려앉는 태양
17시 24분 서서히 구름속으로 숨어버리는 강렬했던 하루의 태양도 내일을 위해 쉬러 갑니다.
간월암 들어갔던 관광객들이 밀물에 길이 막혀 나오는데 애를 먹고 있다.ㅠ
2023년 11월 9일, 충남 서산의 간월도에 새로운 볼거리가 추가 되었습니다.
해상 보행로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계된 간월도 스카이워크는 해수면에서 약 6미터 높이에 위치해
있으며, 길이가 113미터에 달하는 이 보도교는 간월암의 아름다운 낙조를 갯벌이나 바다 위에서
관람할 수 있게 만든 전망대이다.
서산 간월도 여행을 마치고....
오랫만에 아들 며늘과 서산 여행을 하기로 하고 아침 9시 집에서 출발하여 서해안
고속도로에 오르니 이상하게도 차량들이 많지않아 기분좋게 달린다.
평택쯤에서 전북익산까지 개통한 새로운 고속도로를 타고 합덕방향으로 빠져나와
합덕 신리성지에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한다.
원래 계획은 솔뫼성지도 둘러볼 요량이였지만 겨울철 짧은 해로 시간이 안되어
신리 성지만 둘러보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로 하고 넓은 신리 성지를 경건한 마음으로
둘러본다, 전날 밤에 내린 눈이 넓은 잔디밭에 하얗게 내려 앉아 어떤 후기에서 파란 잔디만
보이던 신리성지의 풍경은 또다른 모습으로 신비롭게 다가온다.
하늘에 계신 수 많은 순교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곳, 서서히 한 바퀴 돌아보고,다음 행선지 해미읍성으로 이동하여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해미읍을 보고 놀라며 성안으로 들어가 우리나라 3대 읍성중
하나인 해미읍성을 둘러본다. 규모가 그리 크지않은 해미읍성은 완전히 복원되어
이제는 제대로 된 읍성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조선시대 1,000명이 넘는 많은 선교자들이 처형된 곳이라니? 마음이 더 아프고
가슴이 먹먹하고, 잘 복원된 읍성을 청허정의 푸른 대밭까지 모두 둘러보고 나오니
점심때가 되었고, 서산시내로 이동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간월암을 보기위해 밀물 시간이
되기전에 간월도로 이동하여 많은 관광객들과 간월암을 둘러 본다.
바위 섬에 암자를 지어 풍경이 멋진 서산의 관광지로 이름을 알려 가고, 서해 낙조가
유명하여 수 많은 사진 작가들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고,
한 시간여 아름다운 간월암을 둘러보고 낙조시간 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안면도 백사장항으로 이동하여 해산물이 싱싱한 어시장과 대하랑 꽃게랑 다리에 올라가
멋진 서해 바다 풍경과 기울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윤슬이 아름다운 서해 바다의 모습을
사진에 남기고 여유있게 시간을 보내고,
낙조 시간이 다가 옴에 우리는 다시 안면도 백사장항에서 간월도로 이동하여
포근하고 좋은 날씨에 낙조 전망대로 올라가 해넘이 시간을 기다리며 간월암의
멋진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이런 모습을 보려고 간월도를 들락거렸지,
드디어 서쪽 하늘이 붉어지며 간월암 지붕 위로 떨어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탄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나오며 황홀한 낙조 풍경이 펼쳐진다.
수 없이 많은 사진을 찍으며 인생샷을 남기는 사람들과 대포를 설치하고
순간을 포착하려는 많은 사람들 틈에 우리도 아름다운 모습을 담으며
아내가 보고싶어 하든 간월암 해넘이 풍경을 2025년 신년 초에 만나는 행운을
갖는다.
이렇게 맑은 날이 그닥 많지 않다고 하시는 가까이 사시는 분들의 전언이다.
일기예보상 오늘은 많이 춥고 오후에는 구름이 많아진다고 해서 낙조는 다음으로 미루고
일찌감치 출발하려 했는데 구름은 커녕 하늘도 청명 날씨도 춥지않고 바람도 세지 않아 완벽한
해넘이를 볼 수 있는 생각 못한 기회로, 가는 곳 마다 완벽한 하루여서 좋았고, 굴이 유명한 간월도
영양굴밥으로 맛저하고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 1시간 40분만에 집에 도착한다.
아침부터 날씨가 좋더니 하루종일 온화한 날씨에 고속도로 사정도 최고로
아들 며늘과 함께 한 새해 첫 나들이로는 최고의 날이 아니였나 생각하며 멋진 날,
멋진 여행을 마무리 한다.
여기까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 합니다.
2025. 1. 4.
가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