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응(李顯應)
[생졸년] 1682년(숙종 8)~1732년(영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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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2년(숙종 8)∼1732년(영조 8).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서경(瑞卿)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장령(掌令) 증 찬성(贈贊成) 이형(李迥)이고, 조부는 군수(郡守) 증 영의정(贈領議政) 이중휘(李重輝)이다.
부친 영의정 혜정공(惠定公) 이유(李濡)와 모친 관찰사 증 찬성 어진익(魚震翼)의 딸 정경부인(貞敬夫人) 함종어씨(咸從魚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첨정(僉正) 홍중기(洪重箕)의 딸 풍양홍씨(豊山洪氏)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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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감 이공 묘갈명(縣監李公墓碣銘)
지금 성상 8년 임자년(1732, 영조 8) 4월 22일, 이현응(李顯應) 공이 병으로 남평현(南平縣) 관아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1세였다.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달려와 슬피 울었고, 발인할 적에는 다투어 와서 전(奠)을 올리고 상여를 부둥켜안은 채 차마 놓아 보내질 못하니 상여가 거의 앞으로 나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곡하는 소리가 십 리까지 들려 길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다.
곧장 길가에 동비(銅碑)를 세우고 얼마 뒤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니, 수백 년 사이에 남평현 백성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고 제사를 지낸 것은 오직 송병익(宋炳翼) 공과 공뿐이라고 하였다. 이는 공이 행한 정사가 성심으로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위급한 상황에 빠지니, 공은 노심초사 구제하기를 생각하여 밥상을 대해도 밥을 넘기지 못하고 잠자리에 누워도 벌떡 일어나는 일이 잦았다. 재물을 모아 진휼하는 일이 늘 조리가 있었으니, 겨울부터 이미 명령을 내려 흩어지려는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호적을 살피고 사실을 조사하여 요행을 끊는 데 힘써, 식구 수를 따져 공평하게 양식을 배급하였다.
심지어는 죽을 쑤어서 먹이기까지 하니 주위 수백 리에 걸쳐 한 사람도 굶주려 죽은 이가 없었고 다른 지역의 백성 또한 이 고을에 와서 얻어먹는 경우가 많았다. 근세에 구휼을 잘했다고 칭송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비곡(自備穀)을 보고하여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혐의도 꺼리지 않았지만 공은 부끄럽게 여겨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환곡을 받아들일 때 공은 마치 한 집안의 부자지간처럼 곡식이 생기는 대로 납입하라고 타일렀는데, 백성이 모두 감동하여 곤장을 맞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지만 환곡을 지고 이고 오는 사람이 줄을 이어서 기한에 맞추어 납입하였다.또 구획을 잘하여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한 이후로 민력(民力)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니 실제적인 은택을 입은 것이 굶주린 백성만은 아니었다.
무릇 매우 어리석으면서도 신령한 자가 백성인데, 저들이 공이 살아있을 때는 사랑하고 그리워하였으며, 공이 죽었을 때는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서글프게 곡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성색(聲色)과 호령(號令)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제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십수 년이 넘었는데도 비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으니, 지성(至誠)이 사람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다.
공의 자는 서경(瑞卿)이니 의정부 영의정 혜정공(惠定公) 휘 유(濡)의 아들이요 금산 군수(錦山郡守) 휘 중휘(重輝)의 손자요 사헌부 장령 휘 형(逈)의 증손이다. 세종대왕의 별자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가 공의 시조이다. 모친 함종 어씨(咸從魚氏)는 관찰사 진익(震翼)의 따님이다.
공은 숙종 임술년(1682, 숙종 8)에 태어났다. 천성이 온후하고 순수했으며 어려서부터 이미 어른의 말을 공경하고 따랐다. 효성을 타고나서 부친이 병이 들었을 때는 병세를 살피기 위해 변을 맛보고 하늘에 빌었으며, 상을 당해서는 몹시 슬퍼하며 예를 다하였다. 형제간의 우애는 매우 독실하였다.
혜정공이 오랫동안 국정을 맡은 터라, 자제들이 남의 비방을 쉽게 받았는데, 공은 겸손하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의복은 검소하게 입어 전혀 귀족자제의 습기가 없었기에 평소 벗들 사이에서 존중을 받았고, 혜정공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포의의 신분이었다.
혜정공을 경종의 묘정(廟庭)에 배향시키려고 할 때 상신이 아뢰어 그 아들에게 벼슬을 내릴 것을 청하였으므로, 공은 나이가 거의 5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자익위사 세마가 되었다. 정미년(丁未年,1727, 영조 3), 역당들이 다시 등용되자 공은 강개한 마음이 일어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전야에서 한가롭게 지냈다.
경술년(庚戌年,1730, 영조6), 의릉(懿陵)의 산릉 역사를 감독한 공로로 사옹원 주부에 조용되었고 또 사직하였다가 의금부 도사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남평 현감(南平縣監)이 되었으니 바로 신해년(辛亥年,1731, 영조 7) 봄이었다. 공은 광수산(光秀山) 선영의 오향(午向) 언덕에 안장되었다.
공의 부인 풍산 홍씨(豐山洪氏)는 첨정으로 판서에 추증된 휘 중기(重箕)의 따님으로 아들과 딸 각각 3명을 두었다. 아들은 시중(時中), 명중(明中), 최중(最中)이고, 딸은 참판 신만(申晩), 사인 권학(權翯), 박상로(朴相魯)에게 시집갔다. 상지(商芝)는 시중의 아들이고, 광소(光紹)와 광수(光綏)는 사위 신만의 아들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공이 한번은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의리상 나라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해야 한다. 벼슬의 대소를 따지지 말고 정성을 다해 직분을 다하는 것만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공의 평소 마음이었다.
그러므로 끝내 백성을 위하여 애쓰다가 병을 얻게 되어 평소의 지업(志業)을 지방관으로 조금 베푸는 데 그치고 말았으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혜정공은 40여 년 동안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한결같이 우국봉공(憂國奉公)을 가슴에 새겼으니, 공과 같은 자는 부친의 뜻을 잘 계승했다고 할 만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낮은 관리가 / 一命之士
만물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두면 / 存心愛物
사람을 구제한다 하였네 / 於人有濟
내 이런 말을 들었는데 / 我聞其語
이제 그런 사람을 보았으니 / 今見其人
공은 실로 어질고 은혜롭구나 / 公實仁惠
그 정성스러운 어진 마음이 / 其仁肫肫
효심에 바탕을 두어 / 本之於孝
백성에게 미루어나갔네 / 推以及民
나라 근심 나누어 지방관 되니 / 分憂在余
어찌 감히 힘쓰지 않으랴 / 曷敢不力
아침저녁으로 노력하였네 / 夙夜勞勤
백성에게 지극히 정성을 다하니 / 至誠於物
모두들 감동함이 / 未有不動
귀신처럼 빨랐네 / 捷應如神
죽어가던 백성이 편안해지고 / 溝壑袵席
신음하다가 노래 부르니 / 呻喟歌呼
이 누구의 은혜인가 / 是誰之賜
대강 공을 논한다면 / 槪而論之
정승의 훌륭한 아들이요 / 相國佳兒
성조의 순리였네 / 聖朝循吏
왜 하늘은 공을 빨리 데려가 / 胡天奪速
그 은택이 / 使其利澤
한 고을에 그치게 하였나 / 止於百里
옛날의 누구에게 견주랴 / 於古誰方
소신신과 두시는 / 惟召惟杜
백성이 부모라 일컬었네 / 民曰父母
나는 이를 돌에 새겨 / 我銘玄石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니 / 載敭厥美
참으로 불후하리라 / 亦足不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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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현감 이공 묘갈 :
저자가 이현응(李顯應, 1682~1732)을 위해 쓴 묘갈문이다.
[주02] 남평현 …… 송병익(宋炳翼) :
송병익은 5년 동안 남평 현감으로 있으면서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썼는데, 그가 죽은 뒤 남평현 백성이 사당을 지어
제사 지냈다. 《陶菴集 권42 牧使宋公墓誌》
[주03] 자비곡(自備穀) :
흉년에 대비하여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마련한 곡식을 가리킨다. 흉년이 들면 이 수량을 중앙에 보고하여 진휼에 사용하였다.
[주04] 낮은 …… 구제한다 :
정호(程顥)가 말하기를 “말단 관리도 만물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쓴다면 백성에게 반드시 이로움을 줄 것이다.[一命之士, 苟存心
於愛物, 於人必有所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小學 嘉言》
[주05] 소신신과 …… 일컬었네 :
전한의 원제(元帝), 성제(成帝) 때 남양 태수(南陽太守)였던 소신신(召信臣)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 남양 태수였던 두시(杜詩) 또한 선정을 베풀었는데, 뒤에 백성들이 이들을 아버지 같은 소신신과 어머니 같은 두시라는 뜻에서
소부(召父), 두모(杜母)라고 칭송하였다.《漢書 卷89 循吏傳 召信臣》《後漢書 卷31 杜詩列傳》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