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은 오랜 교회의 역사를 통해 우리 기독교의 여러 용어들에 그의 교묘히 변질된 의미를 주입시켜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그 마귀의 도구로 사용된 적지 않은 분별력 없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러한 변질된 용어들이 많이 쓰여지고 전해져 왔다.바로 이 "율법주의" 라는 용어가 최근에 들어와서 그렇게 일부 기독교인들에 의해 곡해되어 쓰여지고 있는 용어들 중 하나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율법주의" (legalism) 라는 용어가 아직도 여러 표준 사전들에서 다음과 같이 비교적 정확하게 정의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웹스터 신세계 사전 (Webster's New World Dictionary) - "신학에서 선행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는 설"
리더즈 다이제스트 백과사전 (Reader's Digest Great Encyclopedic Dictionary) - "신학에서 은혜에 의하지 않고 선행이나 엄격한 종교적 규약의 준수를 통한 구원을 주장하는 설"
위에 인용된 일반적 사전들의 정의를 보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율법주의적 구원론에는 그리스도의 역사가 존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음을 보게 된다.
율법주의적 신앙에 따라 살려는 시도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계명의 요구를 만족시키려는 노력하에 속박된 노예 정신을 불러일으킨다
“혼자서”, “내 자력으로”, “그리스도의 도움없이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려는 노력 - 바로 이것이 율법주의의 한 부분이다. 율법주의는 행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태도와 동기와 직관한다. 자기 자신의 힘에 의존해서 자기 혀를 다스리려는 사람은 율법주의자 이지만, 이 똑 같은 말조심을 그리스도의 도움에만 의존해 성사시키는 신자는 율법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이 둘에 있는 차이는 그들의 태도이지 밖으로 들어나는 행위가 아님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갈라디아서 4:22-23에 있는 바울의 비유에서 너무나 잘 나타나 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라디아 4:22-23)
이 성경 구절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이 하갈과 가진 관계의 결과와 사라와 가진 관계의 결과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똑 같이 아들들이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행위가 아닌 그 행위를 있게 한 아브라함의 태도와 동기에 있었다. 아브라함의 한 행위은 자기 자신의 구상에 의지하여 성사시킨 행위, 즉 율법주의적 행위였으며, 그의 또 다른 행위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이룬 행위였던 것이다. 이처럼 율법주의란 행위에 있지 않고 그 행위를 있게 한 태도나 동기에 있다. 두명의 다른 사람에 의해 행해진 동일한 행위가 그 행위를 한 그들의 태도와 동기에 따라 율법주의적일 수도 있고 믿음적일 수도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두번에 걸쳐 행한 동일한 행위도 그 때 그 사람의 태도와 동기에 따라 그 행위가 율법주의적일 수도 있고 믿음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의 행위를 그리스도의 존재가 없는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함부로 매도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고 올바르지 못한 행습이다. 율법주의는 사람의 태도및 동기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또 그 태도와 동기는 사람의 마음에 존재하는데, 우리 인간의 안목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동기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어느 한 사람이 (마치 자기에게 다른 이들의 마음을 읽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듯이) 다른 어떤 형제를 율법주의자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분명해 지지 않는가! 이러한 무서운 행습들을 생각없이 함부로 하고 있는 이들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이사야 14:14) 고 한 마귀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지나 않는지 조용히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올바르게 읽고 판단하는데도 실수를 많이 하는 한심한 존재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이 약점과 관련된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인 율법주의에 있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도움없이도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우리가 준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그 누구도 분명히 "아니오" 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자명한 진리적인 교리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진리를 현실적으로 실천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 그리스도와 매순간 동행하는 개인적 관계에 부주의함으로 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을 상실하여 그리스도인 삶에 실패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부주의함에서 오는 율법주의에 대해 우리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마음을 애써 지키며 우리의 동기를 주의깊게 분석하여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도록 단호한 마음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 자주 언급되고 있는 율법주의의 의미는 이러한 부주의함에서 유인하는 율법주의가 아니다. 요즘의 "율법주의"의 개념은 도덕률 철폐주의 (antinomianism)를 방불케하는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율법주의의 개념은 정통적인 기독교의 개념 (즉, "그리스도의 도움없이 인간의 힘에 의존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자세") 가 아닌, 그 어떤 동기에서 유래하던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그 자체를 율법주의로 규정하는 곡해된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죄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설상 그리스도의 능력의 도움이 있더라도 절대로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율법주의가 되고 만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더럽혀지지 않은 삶을 살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로 정죄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여 그리스도를 닮으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높은 표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주의자가 되고 저질적인 생활을 사는 타락된 기독교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논조이지 않은가? 이러한 논조는 "율법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거짓말도 가끔씩 한다" 혹은 "율법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간음도 조금씩 하련다" 라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방식이 가능해 지도록 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한 일서 2:6) 고.
우리 이러한 사단의 기만에 넘어가지 말자.
하나님의 형상을 닮으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에게 탁월한 능력 곧 하늘의 보화가 주어져서 그들로 타락한 일이 전혀 없는 천사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할 것이다.
비축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제공되어 있다. 우리가 냉랭하고 깜깜한 불신의 동굴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있으면 의의 태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믿음을 공언하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주시는 은혜을 의지해 죄를 극복하려는 간절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우리를 위해 비축해 두셨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행사하여 그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은 그 능력을 받을 것이다. 하늘의 문이 열려있어 하나님의 영광이 어려움과 혼란 중에 하늘을 쳐다보는 모든 영혼들에게 비추어 질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고명한 구원의 표준을 우리 생각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 절하며 구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죄의 정의를 바꾸며 구원의 조건을 없애는 시도들이 바로 엄격한 의미에서 율법주의인 것이다. 죄인들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나님의 방법과 상관없는 자기 맘대로의 구원 방법을 만들고 있는 행습들 말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힘으로 자신들의 타락된 심성과 욕구의 충족을 위해 만들어 놓은 우상숭배적인 구원을 성취하려는 율법주의다.
첫댓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율법주의가 되고 만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더럽혀지지 않은 삶을 살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로 정죄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여 그리스도를 닮으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높은 표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주의자가 되고 저질적인 생활을 사는 타락된 기독교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논조이지 않은가? 이러한 논조는 "율법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거짓말도 가끔씩 한다" 혹은 "율법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간음도 조금씩 하련
세상 의 선함과 세상의 법을 신앙에 구분하는 개념이 필요함니다 !
해서 성경의 최종적 행위란 어떤 신앙생활을 말하지 세상의 법과.의 .선함이 않임니다
신앙의 믿는자 임에도 그사람에게서 나오는 세상죄는 세상법으로 다루어 짐니다!
또한 세상법에 않걸리는 마음죄도 양심의 법에 고통 당하지요!
하여 못되게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는 않이지요 세상의을 지키고 않이 지킴은 구원과는 다른 개념이지요!
위의 것을 구분 하지 않이하고 사역자로 또는 선생하는 큰자들이 몽학선생이요 종교 지도자이지요!^^
하여 세상 거룩 거룩 성화론으로 사람의 의 을 세우는 회칠한 무덤이 되지요!
그런것을 주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 하시며 사람에게 좋게보이는 세상 상을 바라는 자들이라 함니다!
믿음의 길에는 걸리는 함정이 참~ 많습니다 세상은 공중권세자 것이니 그래서 주님은 악의 영 을 이기고
분별하여 믿음의 인내로 온전함을 이룬 정결한 처녀를 원하시지요.^^ 음녀 하고는 혼인잔치를 못하시지요!
<<하나님께서 기꺼이 주시는 은혜을 의지해 죄를 극복하려는 간절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나는 못하오니 주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죄의 가림을 받아야지요! # 종교의 열심을 부추기는 교훈임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오해한 부분을 깨닫고 그것까지 성령님께 맡기는 법을 깨달으면 얼마나 평안한지 그 기쁨을 상상할수 없습니다.
율법과 복음 게시판에서 (율법무시믿음과 율법준수믿음의 차이) (율법 준수믿음은 강력한 성령추구) 최근의 (교통법규와 범칙금 )이라는 글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율법과 복음을 가장 잘 조화시킨 사람들 중 하나는 요한 웨슬레 였습니다.
간단한 그의 글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은혜을 의지해 죄를 극복하려는 간절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간단한 글이지만 함축된 뜻을 혜아려 보시기 바람니다.^^
은혜를 간절한 노력으로 이루어야 함니까?
사람들은 '노력'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무조건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 라고 손가락질 해댑니다.
내가 진정 거듭났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면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살기 위하여 때로는 내게
유난히 극복되지 않는 죗된 습관을 가지고
그분의 은혜에 힘입어 노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 노력이 구원을 얻기 위해
생수의 근원되신 분의 우물이 아닌
죄로인해 본성이 타락한 내 의를 의지한
노력이라면 불가능한 노력일 뿐더러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되겠지요.
그것이 바로, 가인의 제사, 하갈에게서 난 자녀, 바리새인의 영이죠.
그러나 그것과 이것은 좀 구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적당한 예를 하나 들어드리죠.
다니엘님은, 우리가 거듭남으로 그분과 언약관계에 들어간 것을 믿으시죠?
한 남자가 있습니다. 한 여인을 너무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녀와
결혼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가지 안좋은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흡연'이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하는 부인은 그가 담배를 끊기 원합니다.
그는 부인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원하지
안는 일은 하고싶지 않습니다. 사랑이 그를 감동시켜
그는 그 담배를 끊는 일에 착수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에
힘을 주는 것은 부인의 '사랑' 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가 한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를 부인으로 삼기 위해,
그녀를 쟁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담배를 끊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은 '행함으로 말미암은 쟁취' 이겠죠.
혹, 그 쟁취가 만약 이루어졌다해도 그는 다시 흡연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또한 자기 행위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해보임으로 )
로 얻어진 결혼이므로, 결혼 그 자체의 목적이 끝난 후에는
그녀에게 감사하지도, 결혼생활을 즐거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결혼쟁취가 목적이었기 때문이죠. 그는 결혼이 목적이었지
사랑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 갔을 때,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배신하기 전에는 절대 우리의 손을
놓지 안으십니다. 흔히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하는 믿음 없는 말의 진실은
사실은 자기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스스로 깨어버린 것일 뿐입니다.
언약관계, 결혼관계는 상호적인 것이라
어느하나가 붙잡고 있다고, 신실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의 소망되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심으로 구원을 얻은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과 언약관계가 유지되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얼마전 내가 떠나온 세상과의 이별입니다.
내가 섬기던 우상과의 이별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주님 한 분만 모시겠다는 서약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심상히 여기지 안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런 것 없이, 갚싼 은혜로 거져 주시는 은혜만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결혼관계에 들어간 남녀가, 결혼관계에서 누리는
안정감과 사랑 뒤에 그들이 더이상 자유로운 처녀 총각이 아니고
상대에게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결혼관계는 깨져버릴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해 주셨고, 은혜로 우리에게 고난의 침례도 받게 하시는 분,
우리는 그분과 언약관계에 들어갈 때,
사실 그리스도의 고난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고난도 같이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 고난은, 자아 부인, 거듭났으나 아직 육체의 소욕이 여전히
건제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 매일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의지하여, 나를 매일 그분께 드림으로써
싸워야 할 싸움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혼자, 스스로, 내 자력으로 하는 것 말고요. 그것은 분명 율법주의 입니다.
그 율법주의의 끝은 대부분 더 위험합니다. 왜냐면 혼자 해보니까
안되거든요. 그 때, 그분이 이렇게 힘든 올무를 나에게 지우실리 없어.
하며 예전보다 못한 타락의 길로 가는 일들이 있지요. 율법주의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본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은혜는 갚없이 주어진 선물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죄의 파워에서 이기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그 능력을 의지하여 나의
죗된 습관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율법주의와 행함으로 구원
얻으려는 것입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분들이 여기에서 속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분 없이는 단 하나의 선도, 의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더러운 우물에서 퍼 올린 물은 흑탕물이며
마실 수 없는 물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근원도 그리스도요, 우리를 성화시키시는 분도
오직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런데 그분과의 언약관계에서
우리 심비에 새겨주신 그분의 율법을 무시하는 삶을 살며,
성령께서 내 안에 있는 죄를 보여주시고 그 죄를 버리기를 원하셔도
무시하면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은총만 바랄 때, 사단은 옳다구나 하고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에게 다시 타락하게 하는 온갖 유혹거리를 제공합니다.
혹시 은혜아래 있다고 하면서, 이 기만에 속고 있으신 분들은
속히 다시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자기 상태를, 가련하고
눈멀고, 헐벗은 상태를 보게 해 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분들이 라오디게야 교회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상태, 예수 그리스도를 문밖에 세워두고도
모시고 있다고 기만당하고 있는 상태,
그러나 그러한 자도 사랑하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7교회 중에 유일하게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권하노니'
하는 교회는 라오디게야 교회뿐이 없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하시는 그분의 지극한 사랑을 깨닫게
되시는 일이 다니엘님에게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님의 댓글의 요점을 성경에서는 육체의 연습이라 합니다 ! 물론 육체의 연습도 약간의 유익이 있다 정의 하지요!
@다니엘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계시군요. 육체의 연습은 거듭나지 않은 상태, 몽학선생 상태에서 자력으로 선을 이뤄보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선을 갈구하기에 그런 노력을 해보기도 하죠. 거듭남은 창조의 역사입니다. 성령으로 새 마음을 받은 것입니다. 육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유리바다 그래요 거듭난자가 또 육체의 연습하는것은 육으로 하나님 기쁘게 하겠다는 것이지요!
@다니엘 님은 닉은 다니엘이면서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깨끗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믿음으로 어떻게 행했나는 연구하지 안으셨나요? 왕의 진미를 거절하기 위해 기도하며 믿음으로 환관장에게 나아갔던 다니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 해결되니 먹고 마시자고 현실에 굴복하였나요? 구약시대도 믿음으로 구원받은 건 아시죠. 설마 구약시대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얻었다 알고 계시면 위의 설명이 의미 없거든요.
@유리바다 님 다니엘서의 계시를 먹고 마시는 걸로 중점 이해 하시니 ㅠㅠ 님의 신앙관을 이해함니다!
@다니엘 그것에 중점을 둔 적 없습니다.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본 분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 자아를 다스리고 본인의 죄성을 이기는 것으로 푯대를 삼으면 성경의 복음의 본뜻을
바로 이해한것이라 볼수없읍니다 !사도들과 주님의 증인들이 자신의 죄성과 싸우다 순교하셨나요?
복음의 비진리와 공중권세 잡은 악 의 영들과의 싸움임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믿음의 푯대가 분명하여야 합니다.
죗성과 싸우기 위해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셨겠지요. 그분들은.....그 결과 순교의 자리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고요.
주님 의지해 자신의 죄와 싸우고 자신을 잘다스리다 순교한다 ㅎㅎㅎ 더무 재미 있네요!
로마서에는 그리스도인의 투쟁과 절망, 믿음으로 구원얻는
도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보세요. 참, 그리고, 순교했다고 다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아시죠?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분이 사랑의 근원되십니다. 인간은 외면을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를
보십니다.
제가 이 글을 정독해보니 매우 훌륭한 글입니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이 제대로 이해하실지는 의문입니다.
본문글 모든 해석이 적절하고 잘 분류되어 있는데 중간 아래쯤에 그냥 (율법주의) 라 쓰인 것을 (일반 교계가 일컫는 율법주의) 라고 하면 더 뚜렷해지지 않나 생각되었습니다.
흡연자와 그 아내의 비유 또한 적절합니다.
믿음은 실천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거기서 진정한 믿음과 입으로만 믿음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 실천은 인내와 순종과 노력을 수반합니다. 믿음으로만읗 강조하다가 종일 기적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글 자체가 나쁘거나 잘못이라 함이 않임니다 ! 성경의 믿음의 푯대을 율법의 행위로 사람의 선함과 의로움으로
말한 내용이 신앙의 본질을 훼손함니다 !
하토브님은 주님의 최종 빼내심을 이해한다면 구약의 바벨론을 나와 돌아온 무리들의 의무를 이해하셔야함니다!
@다니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는 이원론에서 나오세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할 자가 없느니라...
@다니엘 다니엘님은 젊으신 분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저도 젋었을 때는 오해한 부분이 많았고 대신 열심이 많았습니다. 좋은 자산이지요. 역시 그것도 동기와 자세와 인내와 순종의 문제로 귀결될 것입니다.
@하토브 진리의 문제을 사적인 부분과 혼동하시면 문제가 있구요! 신앙의 개인의 경건은 훈련에 해당되지만 훈련의 목적을
훈련에 두는 교훈이라 면 푯대를 보지못하는 신앙이라는 뜻임니다
@다니엘 하토브님 께서 계시록을 열고 이해하는 차원이라면 계시록의 요점이 무엇인가요?
간단 증거을 드리자면 땅의 7 교회의 자칭사도 자칭유대인 이세벨의 교훈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누룩이
땅의 교회을 타락함임니다 음녀교회 의 영혼장상의 심판임니다 현재 주님의 교회를 어떤자들이 이런행위를
합니까? 이런행위에 대항한 전쟁이 주님의 빼내심을 받은자들의 부여된 책무임니다!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은 주님의 소리에 귀를 닫는다 임니다 현재의 적용은 형제회 계열의 영적교만을
표현하지요 나는 부자라 자화 자찬만하며 영적전투의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답답이지요!
이곳도 그 온상 중 한곳 않인가요?
@다니엘 <<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은 주님의 소리에 귀를 닫는다 임니다 현재의 적용은 형제회 계열의 영적교만을
표현하지요 나는 부자라 자화 자찬만하며 영적전투의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답답이지요!
이곳도 그 온상 중 한곳 않인가요? >>
다니엘님이 아시겠지만 저는 형제모임을 무조건 성경에 관계없이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오늘날에는 압도적으로 환난전 휴거를 믿으며 다른 해석을 봉쇄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형제모임에서
다른 모임들보다 성경에 충실한 분야들은 많이있습니다. 예를들면 목사제도가 아닌 성경적 장로제도, 매주일 실행하는 주님의 만찬, 세례가 아닌 침례, 성경적 헌금제도
@다니엘 형제호칭, 성경에서 명한 바 자매들의 너울, 그외에도 교파나 총회 본부가 없는 형태등 많은 점에서 일반교회가 순종하지 않고 있는 바들을 실행합니다. 그것들이 교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 뜻대로 실천하고 순종했을 때 나오는 자랑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안에서 행하는 바일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 더욱 충실하게 행하지 못한다면 지적받아도 됩니다.
그런점을 감안하시고 다니엘님은 좀더 배우는 자세로 참여하시면 1년도 못가서 많은 성장을 누리시리라 믿어집니다.
제가 쓴글 < 형제모임에서 지키는 몇가지들> 이라는 글과 < 목사제도는 성경에서 찾아볼수 없습니다> 글을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하토브 님 < 형제모임에서 지키는 몇가지들> 이라는 글과 < 목사제도는 성경에서 찾아볼수 없습니다> 글을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위내용을 이해못하면서 제가 댓글을 쓰고있다고 생각하신는 하토브님의 영적분별력에 한계를 느낌니다!
제가쓴 댓글의 요점을 다시한번 정독과 묵상으로 읽기를 권면함니다!
밥그릇 계급으로 누르는(권면) 소리는사양하며 하토브님의 허상만 노출 됨니다^^
"율법주의 라는 용어의 곡해"를 이 글보다 더 명료하게 정리한 글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감명을 받습니다. "언어혼잡의 폐단"은 비단 "율법주의"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당>>교회당>>교회", 불과 30여년 전 만해도 지금 "**교회"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자리에는 "**예배당"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디자인하신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 리가 없는 세상사람들은 "**교회"라는 간판을 보고 "교회 다니는 것들"이라고 비하하고, 그 교회당을 들고나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 가?"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생각없이 하고 삽니다. "포이멘"을 "목사"로 딱 한 곳 엡4:11에 번역해 놓고 무소불위하잖습니까.
흡연자와 아내의 비유를 율법과 은혜 사이에서 잘 설명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간판이야 어찌됬든 일요일을 주일,성일,,,로 건물은 주의 성전, 하나님의 집 으로,,,
많은이들이 이런 생각속에 사니 "예수 믿는다면서 교회 안가느냐"는 말이 나오는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 더욱 충실하게 행하지 못한다면 지적받아도 됩니다.>>
하토브님의 결론적 멧세지는 모임안에서 행하는 의레와 행정이 주님께 최종 순종하는 교회의 행위로 정의 하시는군요?
결국 주님 땅에오셨을때의 선민의식과 종교성 으로 쇠뇌된 유대인과 무엇이 다른지요?
이것은 선민 의식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본에 대한 순종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보여주신 본 보다 더 좋은 본을 하나님께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신약성경을 통해서 보여주신 복수장로제도는 이 세상의 어떤 지도체제보다 우수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바빌론 종교의 제사장제도를 들여와서 카톨릭 신부다 목사다 하는 제도로 일인목회제도를 두는 한편 만인 제사장직을 무효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만찬을 자주 실행하라는 것은 명령이었습니다( 고전 11:25-26, 룩 22:19) 그것을 실행하면 됩니다. 그러나 수많은 교회들은 이 단순하고도 명백한 명령을 거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