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곡창수(麟谷昌洙, 1895~1961)】 "어진 마음이 천지를 덮으니 불법 더욱 밝구나"】
인곡창수
어진 마음이 천지를 덮으니 불법 더욱 밝구나
평생 납자로 지내면서 후학을 인도한 인곡창수(麟谷昌洙, 1895~1961)스님은 “물러서지 않고 정진하면 광명이 세간을 비출 것”이라면서 “청정계율을 수호하는 것이 수행의 가장 중요한 인연”이라고 강조했다. 제자들에게 “법의(法衣)를 돌아보고 중노릇 잘해야 한다”고 당부했던 인곡스님의 수행과 삶을 해인총림 해인사에 있는 비문 등 여러 자료를 참고해 정리했다.
“어진 마음이 천지를 덮으니 불법 더욱 밝구나”
만공·보월·용성스님 회상에서 정진
백양사 해인사 통도사서 후학 제접
○…용성스님이 도봉산 망월사에서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을 때 인곡스님이 찾아와 친견을 했다. 범상치 않은 수좌임을 직감한 용성스님이 선문(禪問)을 했다. “심마물(甚物)이 임마래(恁來)오.” 무릎 꿇고 앉은 인곡스님은 머뭇거림 없이 답했다. “편운임마물(便云恁物)이 여시래(如是來)니다.” 이에 용성스님은 “여시여시(如是如是)”라면서 크게 웃으며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인곡이란 법호도 이때 용성스님에게 받은 것으로, 용성스님은 전법게송을 지어 전했다.
“인심(仁心)이 포천지(抱天地)하니,
현곡(玄谷)이 우명명(又明明)이로다.
조화(造花)가 종사기(從斯起)하니,
긍고불생멸(亘古不生滅)이로다.”
<사진>계행을 청정하게 지키면서 평생 수좌의 길을 걸은 인곡스님. 불교신문 자료사진
○…인곡스님이 용성스님에게 인가 받았다는 소문이 제방에 널리 퍼졌다. 각지에서 인곡스님을 만나려고 찾아오는 수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스승의 허락을 받은 후 인곡스님이 법문을 하게 됐다. 법상에 오른 인곡스님이 주장자를 쥔 채 운집한 대중을 바라보았다. 어떤 법문을 할지 대중들은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하지만 인곡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중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인가 받은 것까지 의심하는 듯 했다. 무려 1시간이 넘게 묵언으로 일관한 인곡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왔다. 이때 용성스님이 한마디 일렀다.
“이것이 참 설법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근본 진리이며, 역대 조사의 안목이다.
법계의 모든 영혼이 안심입명할 만하다.”
○…해방 후 가야총림 해인사에서 주석할 때 인곡스님이 법상에 올라 차(茶)를 한 손에 들고 “이 차 한 잔이 옛날 조주스님의 차와 같은가 다른가?”라며 대중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무도 답을 못하자, 스님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전했다.
“여기 한 잔의 조주 차여,
불조(佛祖)를 죽이고 살림이 자유롭도다.
푸른 하늘 밝은 날에 전광(電光)이 번쩍이니,
산하대지가 무너져 티끌이 되도다.”
○…1945년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지만 국가경제는 궁핍했고 국민들의 살림은 어려웠다. 세속은 물론 산사도 ‘먹고 사는 일’이 큰 과제였다. 해방 후 해인사에 주석하게 된 인곡스님은 대중을 잘 봉양해야겠다는 원력으로 장경각에서 1000일 기도를 시작했다. 당시 조실 효봉스님과 각별한 사이였던 인곡스님이 헌식(獻食) 소임을 자처했던 것이다.
불공을 마치고 관음전 뒤에 있는 헌식처(獻食處)로 자리를 옮겨 헌식을 할 때면 어디서 날아왔는지 까마귀들이 몰려왔다. 까마귀들은 스님의 헌식 염불이 끝난 뒤에야 음식에 달려들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같은 일이 매일 반복되자, 산내 대중들은 인곡스님에게 ‘까마귀 도인’이란 별명을 붙였다. 훗날 다른 스님이 칭찬을 아끼지 않자, 인곡스님은 “까마귀가 오는 것이 아니고 까마귀가 있기에 그저 밥을 주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답했다고 한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지낸 인곡스님은 그 어떤 공양물도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았다. 당신에게 들어온 보시나 공양도 그 즉시 대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입적한 뒤에 남은 인곡스님의 물건은 염주.발우.주장자.가사.장삼.<선문촬요>가 각각 하나뿐이었다.
○…“오늘 가리라” 1961년 음력 7월15일 세연(世緣)을 다하기 직전 인곡스님은 문도들에게 원적을 예고했다. 스승의 말씀을 들은 문도들이 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에 인곡스님은 “내 염불을 내가 하는데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가”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가르침을 남겼다.
“몽환공화(夢幻空華) 67년이여,
인곡연몰(麟谷煙沒)하니 유수연천(流水連天)이로다”
“허깨비 꿈과 67년 세월이여
나 이제 가노니 흐르는 물이 하늘에 뻗침이로다”
이때 제자 포공(飽空)스님이 “스님, 명일(明日,내일)이 (하안거) 해제일이니, 기왕이면 내일 선서(善逝, 여래 십호의 하나로 잘 가신 분이라는 뜻. 피안에 가서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하소서”라고 말했다. 이에 인곡스님은 “그것은 삿된 일이라”며 사양하다, 제자의 거듭된 청에 미소를 지으며 “그럴까”라고 답한 후 다음날 원적에 들었다. 입적 무렵 스님은 다음 게송을 전했다.
“일심(一心)이 불생(不生)하며 만법(萬法)이 무구(無垢)니라”
○…조계종 전계대화상을 역임한 일타(一陀)스님은 인곡스님 비문을 쓰면서 세편의 시를 지었다. 비문 말미에 있는 시는 인곡스님의 삶을 살필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한다.
“청정한 법계신(法界身)은 본래 출몰이 없건만 /
대비(大悲)하신 원력으로 시현수생(示現受生)하시니 /
불중(佛中)에 무상(無相)인가 상중(相中)에 무불(無佛)인가 /
강산만리(江山萬里)에 일조풍월(一條風月)은 밝기만 하다.”
■ 운문선원 조실 당시 법어 ■
10여 년간 제방에서 정진한 인곡스님은 30세의 젊은 나이에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로 추대됐다. 조실로 추대됐을 때 지은 게송은 청년사문의 기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多年山中覓鯨魚(다년산중멱경어) 오랫동안 산에서 고래를 찾으니
添得重重碍膺物(첨득중중애응물) 마음 깊이 답답함만 더해 갔다.
暗夜精進月出東(암야정진월출동) 깊은 밤 정진하는데 달이 솟아오르면
忽然擊碎虛空骨(홀연격쇄허공골) 홀연히 허공의 뼈가 부서지는 구나
■ 행장 ■
1895년 2월15일(음력)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에서 박요숙(朴堯淑) 선생과 송씨(宋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 창수(昌洙)는 법명으로도 사용했다. 법호 인곡(麟谷)은 인곡(仁谷)으로 쓰기도 했다.
금강산 오대산서 정진
30대에 운문선원 조실
14세에 고성 문수사에서 금성(錦城)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세에 장성 백양사 강원을 마치고, 율사(律師) 금해(錦海)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후 대서원을 세우고 팔공산 금당(金堂) 탑전(塔前)에서 100일간 용맹정진했다. 이 때 가사를 받아 입는 서몽(瑞夢)을 꾸고 납자의 본분을 지키며 살겠다는 발원을 했다.
<사진>인곡스님이 30대에 조실을 지낸 백양사 운문선원 전경.
이후 만행에 나서 각지의 사찰을 주유하던 인곡스님은 예산 보덕선원 보월(寶月)스님 회상에서 여러철 안거를 마쳤다. 보월스님은 만공(滿空)스님의 제자이며, 금오(金烏)의 은사로 명성이 높았다. 보월스님 회상에 머물 당시 “단정 행직(行直)하고, 예의(銳意, 열심히 잘 하려고 단단히 차린 마음) 정진하여, 대중 가운데 선기(禪機)가 제일”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또한 금강산 마하연 만공스님과 오대산 상원사 한암(漢岩)스님 문하에서 깊이 공부했으며, 수월(水月).혜월(慧月).용성(龍城)스님을 친견하며 정진했다. 용성스님에게 법을 인가받고 인곡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10여 년간 제방사찰에서 정진한 인곡스님은 30세에 백양사로 돌아왔다. 운문선원 조실로 추대된 스님은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여 선열(禪悅)을 맛보라”며 납자들의 수행을 독려했다. 1945년 해방 후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긴 인곡스님은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각에서 1000일 기도를 올렸다. 1953년에는 통도사 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수좌들의 수행을 독려했다.
노년에 해인사에 주석하던 스님은 미질(微疾, 가벼운 질환)을 보이다 1961년 하안거 해제일인 7월15일 원적에 들었다. 세수 67세, 법납 52세.
제자로는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혜암(慧菴)스님을 비롯해 수진(守眞).법행(法行).운문(雲門).강혜(剛慧).법경(法鏡).포공(飽空).대일(大日).봉주(奉珠).봉우(鳳愚).법종(法宗).운성(雲性).동진(東眞)스님이 있다.
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