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이 휩쓸고 간 조선…신음하는 민초를 위해 세워진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
<3> 선비정신의 산실 존애원
복사꽃이 만개한 존애원[存愛院] 지난 23일 오후 복사꽃이 만개한 경북 상주시 청리면 율리 353번지
경북기념물 제89호 존애원[存愛院] 전경. 존애원은 1599년(선조 32) 임진왜란 뒤 질병에 시달리는 주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정죽 성람, 정경세(鄭經世), 창석 이준(李埈), 김각(金覺) 등이 중심이 되어 13개 문중이
계를 모아 설치·운영한 사설 의료기관이다.
꽃 피는 봄 사월 존애원을 찾았다. 흰 구름 산들 바람 향기로운 날이었다. 한적한 들녘엔 논밭갈이가 한창이었다.
경북 상주시 청리면 율리 353번지. 존애원까지 우복 정경세 선생의 14대 손인 정관 박사가 동행했다. 얼마 전 존애원
기념사업회 책임을 맡게 되었다며 어깨를 무거워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정관 박사로부터 전해들은 바 역사에 새겨진 우복 선생의 발자국은 길이 빛날 만했고, 이 나라 최초의 사설의료기관인
존애원의 설립정신과 그 활약상은 더없이 숭고했다. 광화문을 노래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존애원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이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존애원에 들어서자 뒤뜰 어디서 병마에 죽어가는 민초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죽어가는 생명들을 지키려는 선비들의 눈물어린 노력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존애원은 우복 정경세 선생이 중심이 되어 창원 김씨, 여산 송씨, 영산 김씨, 진양 정씨, 무송 윤씨, 상산 김씨,
전주 이씨, 재령 강씨, 장수 황씨, 흥양 이씨, 신천 강씨 등 11개 문중 24인의 낙사계 계원들이 쌀과 포를 출연하여
선조 32년(1599년)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이다.
계유년(1993년) 2월에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89호로 지정돼 갑술년(1994년)에 정부의 문화재보수 계획에 따라
보수공사를 마쳤다. 무인년(1998년)과 계미년(2003년)에 각각 담장 및 주변정비공사, 외부 주차장 및 화장실
시설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존애원의 모습은 그 역사적 의미에 비해 아무래도 초라해 보인다. 네모진 흙 담장, 2단으로 된 마당,
얕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 온돌방 배치, 쌍여닫이문, 온돌방 후편 수납공간인 벽장이 시설의
전부다.
건립 당시 존재했다는 창고와 당우, 혹은 그 이후 본격적으로 건립되었을 시설들은 그 위치와 규모조차 전혀 알
수 없어 안타깝다.
중국의 선비인 정자선생(程子先生)의 존심애물(存心愛物-본심을 지켜 기르고 남을 사랑함) 이란 말을 취하여
존애당이라 이름지었다.
‘대저, 남과 내가 비록 친소는 다르나 한가지로 천지간에 태어나 한 기운을 고르게 받았은즉 만강(滿腔)의 차마
못하는 어진 마음을 미루어 동포를 구활(救活)함이 어찌 사람의 본분을 다함이 아니랴.(중략) 유마힐(維摩詰)은
위(位)가 있는 자가 아님에도 능히 백성의 병을 보기를 자기의 병을 보듯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는 유자(儒者)이며
또 나와 남이 한가지라 여기는 자임에랴.’ (이준, ‘존애원기’)
박애정신에 기초한 공동체 의식을 정신적 주춧돌로 한 존애원의 설립은 애물(愛物)이 곧 제물(濟物-모든 이를 구제함)
로서 이의 실천이 곧 선비의 도리라 여겼던 살아있는 선비정신의 발현이었다. 물론 그것은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존애원이 설립된 상주 땅은 군사 요충지여서 임진왜란의 피해가 여간이 아니었음을 조정은 그의 임란일기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고,
‘오후에 길을 떠나 속리산에 도착하여 자주(慈主)를 뵈었는데, 큰 절에는 역질이 크게 번졌으므로 동암(東庵)으로
사저를 옮겼다. 심중(審中)의 병은 차도가 많이 있으나 다만 원기가 극도로 쇠약하여 소생되기가 쉽지 않으니 염려스러
웠다. 자주께서 부리는 노복과 정자댁(正字宅)의 노비 등 8, 9명이 모두 역질에 걸렸는데 대산(大山)과 검시(儉是)는
이미 작고하였고, 그 나머지도 위석(委席)해 누웠다고 하였다. 병이 위중할 뿐만 아니라 양식이 떨어져 구원할 길이
없었으니, 병이 수월하다 하더라도 굶주리는 것이 뻔한 일이었다. 마음이 아픈 나머지 걱정스러움이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선조 26년 2월 18일)
우곡(愚谷)은 그의 시 ‘亂後還故居(난후환고거)’에서, 당시의 황량한 내면풍경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옛 마을 황량한데 새들만 지저귀고, 뜰 가득 잡초 자라 인적도 적적하네.
내 죽잖아 터럭은 서리 같은데, 나랏일 아직도 위태해 꿈속 혼이 놀라네.
아들 아비되어 살아있음 한스러운데, 손자 없는 자식 묻자니 말 앞서 눈물일세.
진종일 꽃지는 푸른 산 속에, 외로이 창천을 우러러 문을 닫지 못하네.’
그 기막힘을 형언할 길 없다. 조정의 기록과 우곡의 시는 7년여에 걸친 임란의 폐해, 극에 달한 민초들의 굶주림과
대책 없이 죽음에 내몰린 질병의 고통을 핍진하게 말해주고 있다.
비극적 참상에 대한 사실적 기록의 바탕에는 민초에 대한 사대부의, 아니 인간에 대한 인간의 관심과 사랑이 연민의
정조로 자리하고 있다.
인간애의 숨결인 연민의 정조가 박애정신으로 승화되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 존애원이었다.
“저 불쌍한 백성들이 어이 살아 나갈 것인가.” 통탄한 선비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이 존애원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직후 극에 달한 백성들의 폐해를 나라도 어쩌지 못할 때 정경세, 이준, 성람, 김각, 강응철, 기광두, 등
지역의 선비들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시대적 재앙에 맞섰던 선비정신의 실천이 존애원의 설립이었다.
나아가 이는 일찍이 보여준 지역자치, 주민자치의 모범사례이기도 하다.
이 역사적 사건의 주역은 우복 정경세 선생이었다.
한 연구와 존애원기는 아래와 같이 우복 선생의 선비로서의 품격과 지도자로서의 도량을 알려주고 있다.
‘정경세는 서애 류성룡을 통해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대표적 학자이자 관료였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한
후 스승인 류성룡과 정치적 진퇴를 같이 하였는데, 임난 말기에는 경상도 관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어 그 마무리에
공헌한 바 있었다. 하지만 임란 직후 북인의 탄핵으로 인해 고향인 상주에 내려와 있으면서 존애원을 설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후 인조대에는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출사하여 서인 집권기임에도 불구하고
한때 이조판서에 양관대제학을 겸하는 지위에까지 올랐을 뿐아니라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경상도 지역의 의병과
군량 모집의 책임자인 경상도호소사에 임명될 정도로 명망이 두텁고 위상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존애원 설립
당시 37세라는 비교적 젊은 연령대임에도 불구하고 퇴계 학통상의 위상과 당상관이라는 관력상의 명망으로 인근의
사족들을 규합하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인수, ‘존애원의 기능과 역사적 지위’)
‘하루는 그(우복) 친구 성람과 상의하기를 “우리는 혈육을 지닌 몸으로 한서의 침해를 받아 사백가지나 되는 병이
침공해 오는데도 약은 한두 가지도 갖추지 못해 왕왕 비명에 죽으니, 그것이 바위 담장 아래서 질곡에 죽어가는 것과
같지 않은가? 지금 공은 시서와 학문에다 의술에도 통달하였다. (중략)이제 동지들과 대략 약재를 모아 급할 때 쓰고자
하니, 진료하고 투약하는 일은 공의 일이다”라고 하니, 성람이 마땅한 일이라 여겼고, 여러 사우 또한 혼연히 참여를
원하여 협력하려 하였다.’(이준, ‘존애원기’)
안타깝게도 지금 이 땅엔 품격 높은 선비도, 도량 넓은 지도자도 찾아보기 힘들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 저 혼자 잘 살겠다는 천박한 경제, 끝 간 데 없이 경쟁을 부추겨 인성을 해치는 교육,
한 생명이 짐승처럼 살육되는 단말마(斷末摩)의 외침에도 귀 막고 낮잠 자는 사회…. 어느 하나 병들지 않은 곳 없어도
아무도 아프지 않은 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아닌가. 유마힐도 찾을 길 없고, 선비정신 소멸한지
이미 오래인데 누가 있어 이 시대가 요청하는 존애원을 세운다 하겠는가?
존애원이 보여준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한 환난상휼(患難相恤), 인간다운 세상을 지키려 했던 예속상교(禮俗相交),
문장과 학문을 장려했던 교학상장(敎學相長) 등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이자 배워야할 덕목인가.
갈갈이 찢긴 인간관계, 이념적 대립과 계층 사이의 갈등, 무너진 학교 교육, 위태로운 민족공동체로 신음하는 오늘,
이 땅을 위해 선비정신이 살아 숨쉬는 존애원의 재건은 절박한 사안임이 분명하다.
가까이는 신묘년(2011년)에 상주문화원(원장 김철수) 주최로 존애원 설립에 관한 학술발표회를, 상주청년유도회
주관으로 존애원 의료구휼향사를 시연하기도 하고, 만시지탄은 있지만 존애원 기념사업을 서두르고 있다하니 여간
다행이 아니다.
선조들의 숨결이 그리울 때 찾아가서 마음을 추스르고 잃어버린 선현들의 발자취를 체득하는 산 도량으로 다시
태어나는 존애원의 그날이 기다려진다.
강현국 시인ㆍ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사진=황인무 기자 him7942@idaegu.com
<존애원 역사>
정조 6년(1782년) 향민의 무고로 모든 문적이 관아에 몰수되기까지 180여년간 진행되어 온 존애원의 주요 활동을
간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선조 32년(1599년):낙사계 계원들이 미포를 출연하여 존애원을 설립. 약재를 구비하여 성람이 의료시술 시행.
△선조 35년(1602년):강응철을 비롯한 제현이 존애원에 모여 중용을 강론함.
△선조 40년(1607년):정월 보름날 김지복, 정경세, 정광세 등 소장 선비들이 송량, 김각, 정이홍, 윤진 등의 부로
(父老)들을 모시고 백수회를 개최함.
△광해 9년(1617년):이준이 조정 등과 학문을 강론함. 임진왜란으로 산실된 상산향언록을 수정 보완함.
△인조 5년(1627년):이준 선생이 본성대로 살 것을 주제로 한 술훈시(術訓詩)를 지어 젊은 선비들을 교도함.
△영조 원년(1725년):매년 백수회 개최. 견노회를 겸한 시회도 매년 개초함.
△영조 25년(1749년):권상일이 찬한 상산지에 존애원을 학교조에 편집하여 교육기능이 확대되었음을 알림.
△정조 3년(1779년):회원들의 갹출로 토지를 구입, 운영재원을 확충함.
<대구일보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