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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7 - 임신의난으로 백제 왕족이 도피하고 도읍을 나라로 옮기다!
일본의 덴지왕(天指天皇 천지천황)이 되는 나카노오에(중대형) 태자는 660년에 백제가 망하고 복신
등의 부흥군이 일어나자 인질로 와 있던 의자왕의 아들 풍에게 5천 왜군을 주어 백제로 내 보내
왕위를 잇게한후, 수도를 나라현 아스카에서 후쿠오카로 옮기고 왜국의 전 국력을 기울여 3년후
1천척의 배에 2만 7천의 대군을 파병하나 백마강(금강)에서 당나라 수군의 화공을 당해 대패합니다.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에 보면 “백제 주류성(周留城) 이 마침내
당에 항복하였다. 이 때에 국인(國人) 이 서로 말하길 주유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 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
(1) 백제부흥군과 왜 연합군의 주류성(周留城) 함락
“겨울 662년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 에치노하타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 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당진군 신평천) 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
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 ”
“이에 에치노하타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 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 풍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지만 그러나 피성으로 천도한 직후
신라군이 백제 남부로 쳐들어와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피성과 국경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위험해 결국 2달도 안돼 다시 주류성으로
환도하게 되니 이런 의견 충돌과 잘못된 판단은 백제군의 내분과도 연결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백제 부흥군은 나당연합군에 3년간 저항했으나 부흥군의 주 세력인 귀실복신과 도침의
주도권 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나 결국 도침이 귀실복신에 의해 살해당했고 귀실복신
이 부여풍 마저 죽이려 하자 백제왕 부여풍은 선수를 쳐서 귀실복신을 살해하였습니다.
663년 8월 13일 신라군이 주류성(周留城)을 대대적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음이 백제, 왜
연합군에게도 정보가 들어오는데, 8월 17일 주류성을 신라군이 포위했고 부여풍과 왜장
들은 백촌강에서 집결해 싸웠지만(백강 전투) 당나라군의 화공으로 왜선이 불탄지라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했고 9월 7일 결국 주류성이 함락됐는데 아직 임존성에 흑치상지
등이 지휘하는 백제부흥군이 남아있었지만 이들도 곧 항복해 백제부흥운동이 끝나게 됩니다.
호례성 (弖禮城· 전남 보성) 으로 가서 일본 장수들과 만나 어떻게 할지
의논하자.’ 그리고 침복기성 (枕服岐城· 전남 강진) 에 있던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나가려 한다는 마음을 알렸다.” (『일본서기』 663년 9월 7일)
“일본의 수군 과 함께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 와 국민
들이 호례성 (弖禮城· 전남 보성) 에 이르렀다.” (『일본서기』 663년 9월 24일)
“이튿날 비로소 배가 출항해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서기』 663년 9월 25일)
“백제왕 선광왕(善光王) 등을 난파(難波· 나니하, 오오사카) 에 살게 했다. 별이 수도의
북쪽에 떨어졌다.” (『일본서기』), 663년 백제 왕위에 올랐던 부여 풍은 고구려로
망명하고 동생 부여용(선광 善光) 은 패주하는 왜군을 따라 다시 왜국으로 건너
갔으니 백제 유민 2000명에겐 땅도 주는등 선진 기술 이용하려 호의적인 대접을 합니다.
왜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한 후에 신라와 당나라의 보복 침략이 두려우니 서부 일본과 규슈에 왜군과
함께 도주해온 백제인들을 동원해서 산성을 쌓고도 도저히 안심이 안되니 불안한지라 아스카
에서 내륙 지방인 비와호수 오쓰(大津)로 천도를 했는데 그후 죽으니 그 아들이 39대 고분왕 입니다.
(2) 덴무(天武 천무)의 쿠데타 임신의 난(壬申難)
667년 사이메이 여왕의 아들인 나카노오에 태자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도를 나라현
아스카(비조 飛鳥)에서 비와호수 남안의 오쓰노미야(大津宮)으로 천도하고 다음해에
덴지왕(天智 천지천황) 으로 즉위하였으며 아들인 오토모를 후계자로 정하자 동생
오오아마(대해인) 는 10월에 중이 되려는듯 오미를 떠나 요시노(吉野) 로 출가했습니다.
두달후 12월에 텐지가 죽고 오토모가 즉위하자 왜국 조정은 감시를 두어 요시노의 동정을 살피는데
672년 6월 22일 오오아마 는 사인(舍人) 을 자신의 식읍이 있는 미노로 보내 거병 하고 요시노를
탈출하여 이세(伊勢) 로 갔는데 행군 도중에 오미에서 탈출한 다른 황자 및 호족들이 합류해 세력이
불어나자 미노(美濃 기후시) 에 들어가 후와(不破 : 세키가하라)와 스즈카(鈴鹿) 두 관문을 장악합니다.
오오아마 병력은 미노, 오와리, 미카와등 동국(東國) 출신자를 중심으로 편성되었으며 오미의 오츠궁
(大津宮)에 있던 오오토모(고분왕) 는 동국,야마토, 츠쿠시, 기비(吉備) 에 사자를 보내 전국적으로
병력을 동원하려고 했으나 동국으로 보낸 사자는 오오아마에게 붙잡히고 서국으로 보낸 사자도
협력을 얻지못하자 오오아마는 1대는 야마토로, 2대는 오미로 진격시켰는데 오츠궁으로
진격한 군대는 이누카미가와 에서 오미군을 격파하고 야스가와에서 승리하여 대세를 장악합니다.
우리나라의 향가 는 1075년에 혁련정이 편찬한 균여전에 11수, 1282년에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
에 14수등 모두 25수이나 일본은 761년에 편찬된 만요슈에만 4,536수가 실려 있는데, 저자
중에 가장 빼어난 이는 덴무왕(天武天皇) 의 비(妃) 인 누카다노 오키미 額田王 (액전왕) 입니다.
이 여인은 덴지(천지)왕의 동생인 대해인(덴무) 의 처로“십시” 라는 딸까지 두었
는데 형인 중대형(덴지왕) 이 빼앗으니 불화의 시작이라.... 덴지는 왕위를 동생
대해인이 아닌 어린 아들 대우 왕자에게 물려주려니, 동생의 반발을 염려
해서는 대해인과 액전(누카다) 의 딸 “십시” 를 아들 대우의 정비로 맞이합니다.
그러면 아내와 왕위를 빼앗긴 동생 대해인의 분노가.... 장차 “외손주” 가 왕위를
이을 것이니 수그러들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지요? 시가(詩歌)를 수없이 지은
누카다 오키미(액전)는 동생과 형 두 남자를 사랑하고 두 남자의 몸을 받아
들인 기구한 팔자의 여인이었으니 그 두 사람이 모두 일왕(천황) 이 되었음에랴!!!
결혼식후 사냥 연회에서 대해인(덴무)은 두 번째 처인 우노가 있음에도 누카다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가가니 당황한 누카다 가 시가(만요슈에 실림)를 읊습니다!
꼭두서니 자란 밭 인줄 친 밭을
이리 저리 서성대면 밭지기는 안 볼까요
그렇게 그대사 소매를 흔든다면.
그러자 대해인(덴무)이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고 합니다.
꼭두서니처럼 아름다운 그대가 미울라치면
이미 남의 마누라인데도
내 어찌 사랑하리오.
덴무왕(天武 천무천황)은 친 백제에서 친 신라로 정책을 변경하여 한반도에서 변화된 현실을 인정
하였으며 호족들을 눌러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니, 일본에서 천황이란 이름을 처음 사용한 왕(혹
사이메이 여왕?)이고 불교를 부흥시키고 60위계를 정비하다가 죽으니, 황후가 지토왕(천황)에
올라 694년 수도를 아스카의 후지와라에 옮기니 대보율령이 제정되고 불교미술이 중흥되었습니다.
덴무가 반란을 일으켜 조카를 죽이고 40대 왕에 올랐고 41대는 덴무의 왕비이자 덴지(천지)의 딸인 지토
가 왕위를 이은 것인데.... 이후 덴무왕(天武天皇 )의 아들이 42대 몬무왕이 되고 그 후에 44, 45, 46, 47
대와 48대 쇼토쿠등 덴무의 후손들이 왕위를 차지한 후에 덴지(천지)의 손자 고닌이 61세에 49대 천황
(일왕)으로 등극하는데 이때 정략결혼한 백제계인 화신립의 부모 세력의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3) 규슈 남부 미야자키현 히유가의 백제촌
규슈남부 미야자키현 히유가(日向)에서 100리를 들어가면 미카도(神門)면 난고손(南鄕村) 구다라노사토
(百濟の里 백제마을) 가 있으니.... 이곳은 백제가 망한후 의자왕의 아들인 정가왕(禎嘉王) 일행이
왜국으로 이주하였으나 덴지(천지) 의 아들을 지지했던지 임신의 난 정쟁에 휘말려 피란온 마을 입니다.
672년에 임신의난 정변이 일어나자 백제의 왕자들은 야마토(大和) 지방을 떠나 다시 망명
의 길을 떠났으니 정가(禎嘉)왕 일행은 오미(近江) 를 떠나 아게(安藝 안숙) 에
있다가 추적하는 대해인(덴무)의 군대를 피하여 안주의 땅을 찾아 배 2척에 나누어 탑니다.
배는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빈호내해) 를 지나 규슈 동남부의 미야자키(宮崎 궁기) 현 휴가
(日向) 해변에 표착하는데..... 풍랑으로 두척의 배는 서로 헤어져 아들인 복지왕은 남쪽
가쿠치우라 해변가에 상륙해 내륙으로 들어가 기조초(木城町 목성정) 히키에 자리를 잡습니다.
아버지인 정가왕은 가쿠치우라 해변보다는 더 북쪽 해변에 상륙해서는 내륙 지방인
난고손(남향촌) 으로 들어갔는데..... 뒤따라온 덴무(천무)왕측 추격군에 대항하는
중에 소식을 듣고 장남 복지 왕자가 구원하러 왔을 때는 이미 전사한 뒤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백제마을’ 난고손(南鄕村) 에는 정가왕의 무덤이 있고 미카도 신사에서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있으며..... 왕비는 이웃 다나카베 신사에 그리고 장남
은 남쪽 기조의 히키 신사에 그리고 차남은 이사가 신사에 각기 모셔져 있습니다.
미야자키현 히유가(日向)에서 버스를 타고 산속으로 들어가면 1시간만에 미카도(神門)
면 난고손(南向村 남향촌) 에 내리면 백제 마을 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반대편에는 백제 정가왕 신사 와 그 뒤에 서정창원 (백제 보물전) 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구다라노사토에는 나라 도다이지(동대사)에 있는 천황의 보물창고인 정창원(正倉院)을
본떠 서정창원이 지어져서 당화육화경(唐花六花鏡)을 비롯 여러 보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미카도신사에 전해진 瑞花六華鏡(서화육화경) 銅鏡(동경) 은 나라(良) 의
도다이(東大)사 경내 쇼소인(正倉院)에 있는 동경과 같은 틀에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의자왕의 아들(일본서기에는 동생?) 인 풍(豊) 왕자는 631년에 왜국에 온 이래
나라(奈良) 분지에 소재한 미와산에서 벌을 키우며 살았다고 하는데..... 동생
인 선광과 새성(塞城) 에 숙부인 충승(忠勝) 도 왜국에서 오래 거주했다고 합니다.
660년 풍왕자는 5천 왜군의 호위로 한반도로 나가 백제왕에 올랐지만 동생 선광(善光) 은
왜국에 남았으니... 그후 천황(일왕)에 의해 백제 왕씨(百濟王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외에도 백제 귀족들은 대내씨(大內氏)· 화씨(和氏)· 삼송씨 등 주요 성씨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의자왕의 후손들은 백제가 망한 뒤 중국, 일본, 신라 3국으로 흩어져 살았
데, 통일신라에서는 자신들의 성씨까지 부여(夫余) 씨나 서씨(徐氏) 등으로
바꾸면서 숨죽여 살았으나 일본에서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신분을 인정받으며
안정된 생활한 후손들이 많았으니 선광과 정가왕 부자도 그 중의 하나 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연으로 인해 매년 음력 12월 18일에는 기조초 히키에 있는 아들 복지왕자
일행이 90km 나 떨어진 미카도 난고손의 아버지 정가왕을 보러오는 시와쓰 마쓰리
(師徒 まつり 사주마쓰리) 가 장장 1,300여년 세월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걸어서 오가는지라 왕복에 9박 10일이 걸렸으며 정가왕이 상륙한 바다 가네가하마에서
엄동설한에 알몸으로 목욕하고 신악을 올리는데, 부여 은산 별신굿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하며... 난고손은 노베오카 延岡藩(연강번)번이고 기조초는 다카나베(高鍋) 번인 만큼
두 번주 간의 양해 없이는 번과 번을 걸친 시와마쓰리 제례는 유지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순행할 때에는 후쿠로가미라고 부르는 영체(靈體) 를 주머니 모양의 헝겊에 싸서 장대 끝에
달아 왼쪽 어깨에 높게 내걸어 순행하는 작법을 완고하게 지키고 있다는데, 히키
比木神社(비목신사) 에서 어여(御輿) 에 영체를 옮겨 실어 순행하는 형태보다 한층
더 고풍스러운 양상을 전하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히키를 떠난 일행이 미카도싱코 神門神行 (신문신행) 에 나서 섣달에 美美津(미미진) 강에서 목욕하는
등.... 닷새를 걸어 미카도에 도착하면 무카에비 迎え火(영에화) 라고 혼백을 맞이하는 큰 불을
피우고는, 가쿠라 神樂(신악) 라고 해서 미카도 고유의 춤이 펼쳐지고 서로 헤어질 때가 되면
오사라바 おさらば 라고 해서 얼굴에 검은칠 へぐろ(헤구로) 을 하고 이별을 슬퍼한다고 합니다.
이 시와쓰 (師走 사주) 축제는 일본 문화청의 학술조사 결과 일본 내에서도 매우 古式(고식) 으로
남아 있는 예로써 기록 보존 해야 할 문화재 라는 국가 지정을 받았다고 하며, 또한 고대
백제의 풍습이 남아 있어 한국에서 파견된 학술조시단도 1996년에“백제 왕족 전설의
수수께끼를 풀다”라는 제목으로 국제 심포지엄을 난고손 (南鄕村 남향촌) 에서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신예선사에는 백제 왕족의 유품으로 전하는 보물로 아주 오래된 판자지붕 신전이 있는
데, 2000년“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됐으며, 관광시설에 대해서도 남향촌민들이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1990년에 백제 왕궁터에 세워져 있던 객사를 재현한 백제관을
개관하였으니 기와와 포석(鋪石)을 한국에서 들여왔으며 서까래와 대들보를 장식하는
단청은 한국의 단청 기술자 7명이 왔고 현판은 전 총리 김종필씨의 자필로 씌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을 뒷산에는 부여의 백화정을 재현한 육각형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키즈나의 종” 이 매달려 있으니... 부여 전설에 부자지간 또는 연인지간에 이
종을 울리면 맹세가 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연인의 언덕”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4) 아스카에서 나라(奈良) 천도(遷都)
710년 겐메이여왕(천황)때 당나라 수도 장안을 모방하여 아스카 북쪽 나라(奈良)에 수도를 건설
하니 헤이죠코(平城京 평성경, 나라시) 인데 이전부터 9세기까지 260년 동안 15회의 견당사
(遣唐使)를 파견하여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습니다. 또한 가야에 이어 백제가
패망했으며 왜국에서 심혈을 기울려 보낸 원정군도 실패하고 대거 백제유민이 유입되었습니다.
백제 부흥은동은 사이메이여왕(천황)과 나카노에에 태자가 규슈 후쿠오카에 수도를
옮기고 독려하였으나 허사로 돌아갔으니... 겐메이여왕(천황)은 태고 이래 오랫동안
사용해 왔던 왜국에서 “해뜨는 나라 日本”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고 새출발을 합니다.
한반도와의 탯줄을 잘라버리고 홀로서기를 하면서 왜국 (倭國) 이란 국호를 버리고는
일본(日本) 으로 고친 것인데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면 왜국 사신들이 말하기
를 “해돋이 와 가까운 곳이어서 그와 같이 이름을 지었다” 라고 한다고 적혀있습니다.
(5) 새 수도 헤이조쿄(平城京 평성경, 나라)
헤이죠쿄 시대는 서기 710–794년의 기간으로 한반도의 신라와 발해등 남북국시대의
초반기와 겹치는데, 일본 역사상 5번째 여성 천황인 겐메이 덴노가 헤이조쿄
(平城京)에 수도를 세웠으니 이곳이 바로 현재의 나라시 서쪽 외곽 지역에 해당합니다.
헤이조쿄는 짧은 기간 천도했던 5년간을 제외하면 나라 시대 내내 계속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으니... 헤이조쿄(平城京)는 남북 5 km, 동서 6 km 규모로 당에서 유입된 조방제
(바둑판 구획)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작문, 대극전등 수ㆍ당의 영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시 인구는 10만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 중에서 0.7% 가 귀족들과 관료들이었다고 하며 헤이
조쿄(나라)는 강과 너무 멀었기 때문에 배수시설이 나빠서 위생상태가 좋지 않았고, 이 때문
에 전염병이 돌곤 했는데 이것이 후에 평안경(교토)으로 천도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당시 헤이조쿄의 귀족들은 거대한 저택을 짓고 “학과 개를 쌀을 먹여” 길렀으며 빙실을
지어 얼음을 가져다 먹고, 백제에서 들여온 우유를 자양강장제 삼아서 마시는 등 호화
롭게 살았으니... 이 때문에 지금 헤이조쿄에 가면 나라 스타일로 만든 치즈와 우유
전골을 판매하며, 호텔에는 당시 천황(일왕) 가문의 식단을 재현해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헤이조쿄(平城京)의 유명 유적으로는 도다이지(東大寺)와 정창원이 있는데 원래
정창은 모든 절마다 딸린 창고를 의미하는 일반 명사였지만 도다이지(동대사)
의 정창만 남으면서 도다이지(東大寺) 정창을 말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율령시대(律令時代)의 전성기에 해당하며 정치적으로는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적
통치를 추구하였으니 나라 시대, 그리고 헤이안 시대 초기 까지는 일본의 천황(일왕)은
허수아비가 아니라 진짜로 세계 다른 나라들 처럼 왕 노릇을 해봤던 일본사의 얼마 안되는
시기이기도 하며, 각 지방은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을 통해 지배한다는 원칙이 작동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마지막으로 대외교류가 활발했던 시대기도 한데.....
다음 헤이안 시대부터는 신라, 발해, 당나라 등 해외와 교류가 크게 감소하고 국풍
(國風) 문화가 발달하기 때문으로 이 시대에는 신라, 발해, 당과의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특히 수나라와 당나라로는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하는 등 대륙 문화를 받아들이려 하였고
이때 음식으로 면, 나레스시, 볶음밥, 찹쌀떡, 가지, 양배추, 순무, 마늘, 호두, 살구, 차,
당과자가 일본에 전래되거나 고안되었으며 장기와 젓가락이 들어온 것도 이 시기입니다.
신라와의 관계는 초창기에는 좋았으니.......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나빴다는 인식이
퍼져 있지만 이는 백제가 건재하던 삼국시대 말기의 구도나 혹은 일본이 헤이안
시대로 접어든 신라 말기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때는 굉장히 활발한 교류를 했습니다.
가령 조선 통신사 파견이 조선 후기 200여 년간 12회에 불과했지만 신라 때는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 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신라에서 일본으로 사신단이 39
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으며 사신단의 규모도
성덕왕 2년(703년)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00 ~ 500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8세기에 발해가 성장하면서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다시 소원해지기 시작했으니 일본은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인정했고, 고구려 멸망 전에 고구려와 가까운 관계였던
일본은 발해와 친교를 맺기시작했기 때문에 발해와 경쟁관계였던 신라와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생각보다는 교류가 있었지만 일본이 헤이안 시대로 접어드는 것으로 간주하는
9세기경이 되면 당나라가 쇠퇴하는데다가 외래 선진문물을 이미 충분히 흡수했고
일본의 자존의식이 점차 커지면서 신라, 발해, 당 모두와 공식적인 관계가 줄어들게 됩니다.
(6) 가장 오래된 역사 책인 712년의 고사기(古事記)
고사기(古事記 고지키)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680년대에 덴무왕(天武: 678∼686)이 편찬
을 기획하여 지시하였지만 그가 살아 생전에 책은 완성되지 못했고 또 이후 편찬이 중단되었다가
겐메이왕(元明天皇)이 마무리 편찬을 지시하여 712년에 오노 야스마로(太安麻呂)가 저술을 마칩니다.
고사기는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연대기와 계보를 기록한 《제기(帝記)》와 신화·전설 등을 기록한
《구사(舊辭)》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편찬했으니 《고지키》의 편찬사정을 밝힌 서문(序文)에
의하면, 덴무천황(일왕)이 히에다아레(稗田阿禮)에게 자료가 될 《제기》와 《구사》를 읽고 배우게
했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30여년 뒤에 오노 야스마로가 이를 집필하여 712년에 헌상했다고 합니다.
천황(일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 체제를 다지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편찬한 이 책은,
천지창조와 일본 건국등 나라를 세운 신들의 이야기 부터 33대 스이코왕
(推古天皇)의 이야기 까지 신화와 전설을 기록한 것으로 가요도 실려있다고 합니다.
고사기는 모두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은 일본 신(神)들의 이야기, 중·하권은 초대(初代)
진무왕(神武天皇)에서 부터 628년, 즉 제34대 스이코왕에 이르는 계보(系譜)와 천황·
황태자들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한문과 일본어를 혼용하였으며, 한자의 음과 훈을
따서 일본의 고어를 적은 문장이 매우 난해하니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나 문자는 어문학·
역사학뿐만 아니라 신화학·고고학·민속학·문화인류학 등 여러 분야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 고대사와 고대문학 연구, 고대 한일관계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쓰이는 문헌
이니 일본에서 전해지는 역사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720년에 편찬된 《니혼쇼키
(日本書紀 일본서기》와 함께 중요한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한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가 1145년이고 삼국유사는 1282년임에 비추어 오래된 책 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오미와(大神) 신사 가 미와야마(三輪山) 를 모시게 된 연유가
저 712년에 편찬된 고지키 古事記(고사기) 에 나오는데... 저자는 663년에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3살로 왜군을 따라 건너온 오노 야스마로 (太安麻呂)
로, 1879년에 나라시 고노세정 동굴에서 동판 묘지명이 있는 무덤이 발견 되었습니다.
고사기(古事記)의 저자 오노 야스마로 (太安万侶)는 660년생으로 고 최인호 씨는 그가 663년
3만 2천명의 왜군이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해 바다를 건너왔다가 백마강(금강) 에서 당나라
수군의 화공으로 대패하고 철수할 때 왜국으로 따라 도주한 백제 유민의 아들 이라고 말했습니다.
차밭을 일구던 농민 다케니시 히데오 에 의해 동굴에서 발견된 동(銅)으로 된 묘지명
에 “좌경(左京) 4조(條) 4방(坊) 종4위하(從四位下) 훈5등(勳五等) 오노아손(太朝臣)
야스마로(安萬侶) 가 계해년(癸亥年: 723년) 7월 6일에 졸(卒)하였다. 요로
(養老) 7년(723) 12월 15일 을사(乙巳)” 라 적혀있으니 전설이 사실로 판명 됐습니다.
(7) 일본 조정이 720년에 편찬한 일본서기(日本書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720년에 편찬되었으니 고대인들이 고대의 역사를 정리한 당시대 역사서
인데 비해, 『삼국사기(三國史記)』는 1145년인 고려 중엽에 고대의 역사를 최종적으로 정리한
것이니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유학자 김부식 등은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불합리한 것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언어로 바꾸어 놓은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서기는 역대 왕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본기(本紀)' 만 있고, 인물들의 전기를 기록한
부분이나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정리한 '지(志)' 가 없으니.... 삼국사기처럼 김유신,
연개소문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열전(列傳) 그리고 지리지(地理志), 직관지(職官志)
와 같이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한 지(志) 를 세우지 않은 것이 일본서기의 특징 입니다.
1) 주요 내용
한편 일본서기는 일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 이름을 짓고 지배자 이름을 천황(天皇)이라고 정하여
일본국을 왜곡, 과장해서 중국과 대등한 제국(帝國)으로 인식한 한편,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일본국에 조공하는 제후의 나라로 간주하였으니..... 일본서기를 보면 한반도 삼국이 일본국에
종속된 국가로 묘사된, 잘못된 부분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일본서기 전체 내용이 허구는 아닙니다.
백제가 선진 문물을 일본 열도에 전한 사실이나, 가야의 여러 나라가 멸망해가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일본서기』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인데, 우리 고대 역사서인 백제본기, 고구려 유기 및
신라 국사 등이 전하지 않으니 고대사 자료가 없는 우리나라는 부정적인 측면이나 편향성을 고려하는
동시에 그 속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 가운데 우리 고대사 관련 부분은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는 천지창조와 일본의 건국 신화를 담고 있는 신대(神代)에서 시작하여 697년
지통왕(持統天皇)이 사망한 해까지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통사(通史)인데 7세기 이전의 일본
역사를 기록한 사서니 『고사기(古事記)』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핵심적인 사료라고 할수 있습니다.
2) 위서 논란
그 책에는 한반도와 관련된 많은 기록이 있으며 그중에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의
근거가 되는 내용도 들어 있으니 임나일본부설이란, 야마토(大和) 왕권이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는 내용으로서 일본 학계의 해묵은 주장이라 후대에
조작된 사서라 하여 비판하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내용을 담은 이야기책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일본서기』의 학술 번역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알수있으니 텍스트 번역이야
말로 본격적 연구의 출발점 이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학술적인 번역을 내놓지 않는등 냉대받는
책이지만.... 일본에서는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료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고전은 인간의 삶이나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어서 우리에게 감명을 주지만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인간의 과거사를 특정한 의도에 따라 편집하고 정리한
것이어서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경우도 있으니, 다른 사료와 비교하거나 내용의
일관성 및 정합성을 따져 본 연후에, 역사적인 사실인가를 판단하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3) 신라본기와 백제본기가 서로 다른 백제 성왕의 죽음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본서기』는 과연 황당무계하기만 한 사서일까?
몇 가지 예를 통해서 일본서기의 사료적인 성격을 짐작해 보고자 하니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가을 7월에 명활성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왕 명농(明禯 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옥천)
을 공격해 왔다. 군주(軍主)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의 군주 김무력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 삼년산군의 고우도도
(高于都刀)라는 사람이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6백 명의 목을 베니, 한 마리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이 기사와 대응하여,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복병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시호를 성(聖)이라고 하였다.”
이 두 기사의 내용은 같은 해의 일이며 동시에 성왕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스토리
에서는 적잖은 차이가 있으니 신라본기에서는 백제군과 가라군이 합세하여 관산성을 공격
하였고 거기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은 위기에 빠졌으며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김유신 장군의
조부인 군주 김무력까지 관산성 전투에 참여하는등 신라의 위기상황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은 사뭇 다르니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성왕이 동원한 병력은 보병
과 기병을 합해서 50명에 불과했다는데 50명의 병력으로 관산성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었을까?
또 보잘것없는 병력으로 신라를 습격하고자 한 성왕은 제정신인가? 두 가지 기사를 비교해
보면, 성왕의 죽음이 공통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3) 삼국유사 기이 진흥왕편(승성 3년) :
승성 3년(554년) 9월에 백제의 군사가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천명과 말 3천 필을 빼앗아 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
의 멸망을 바라겠느냐." 하고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이 되어서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이 때문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 침범을 한 것이다.
신라본기에는 7월 이후 어느날 성왕이 죽었다는 얘기이고 백제본기에는 7월에 죽었다는데,
삼국유사에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의 죽음으로 대패한 초상집에서 기적같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9월에 신라의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천명과 말 3천필을
약탈해 갔다는 기록이니 이해가 가지 않으며 더욱 고구려 본기에 보면 더 이해가 안갑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양원왕 10년 (554년)에는 “10월 겨울,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라고 나오며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위덕왕 원년 (554년)원년
에 보면 “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웅천성을 침공하였다가
패하고 돌아갔다.” 7월에 성왕이 관산성(옥천) 에 가다가 죽었는데 삼국유사에는
9월에 신라를 공격해 대승하고 10월에는 고구려군이 백제를 침공했다가 패해 돌아갔다니?
성왕은 전쟁을 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고 보는데, 서로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가지 기사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일본서기” 이니 성왕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인데, 다음은 일본서기 흠명(欽明) 15년(554) 겨울 12월
의 기사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성왕이 7월에 전사한 것은
틀린 기록이며 일본서기에 보면 12월에 전사한 것이니 그럼 의문이 풀리는 것입니다?
4) 일본서기 4권 19 欽明天皇(29대 흠명천황) Ⅲ : 성왕의 죽음
서기 554년 : 15년(봄 정월 무자 초하루) 백제가 중부의 목리시덕문차, 전부의 시덕
왈좌분옥 등을 축자(후쿠오카)에 보내 내신·좌백련에게 묻기를 “덕솔 차주·간솔
색돈 등이 지난해 윤달 4일에 와서 신(內臣) 등은 내년 정월에 도착할 것입니다’ 고
하였습니다. 또 군대의 수는 얼마입니까. 미리 군영(軍營)을 쌓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올해의 싸움은 전보다 매우 위태로우니 보내줄 군대를 정월에 도착하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고
하였다. 이에 내신(內臣) 이 “바로 도와줄 군대 1천, 말 1백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
고 대답하였다. 2월 백제가 하부의 간솔 장군 삼귀와 상부의 나솔 물부오 등을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여름 5월 병술 초하루 무자 내신(內臣) 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에 나아갔다.
겨울 12월 백제가 하부의 간솔 문사간노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臣) 명(明)과 안라에 있는
왜신(倭臣)들, 임나 여러나라의 한기들은 아룁니다. 사라(斯羅)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
하지 않고 박(狛 고구려)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미이거(관가 官家)를 멸망
시키려고 합니다. 유지신 등을 보내 군사를 청해 사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천황께서 유지신을 보내시니,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2월 9일에 사라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의 영(領)인 물부 막기무련을 보내 자기 방(方)
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 관산성 管山城 충북 옥천)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유지신이
데리고 온 백성 죽사 물부 막기위사기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위령(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 라고 하였다.
또“만약 신라뿐이라면 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박(狛)이 사라(斯羅)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죽사도에 있는 군사들이 빨리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수 있을 것입니다” 라
하였다. 또 “신이 따로 군사 만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급하여 한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탑등(毾㲪) 1영(領), 도끼 300구,
사로잡은 성(城)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물건이 적어 송구합니다”라 아뢰었다.
여창(餘昌)이 신라를 치고자 꾀하였다. 기로(耆老)들이 간하기를,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고 하였다.
여창이 말하기를, "늙었도다. 어찌 겁이 많은가? 나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 요새를 세웠다. 그 아버지 명왕은 여창이 오랫동안
진영에서 고생하고 또 오랜 기간 잠과 음식을 폐하고 있을 것을 우려했다. 아버지의 자애는 성글기
쉽고, 자식의 효성은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몸소 전장에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신라는 명왕이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나라 안의 병사를 모두 내어 길을 끊고 쳤다.
이때 신라는 좌지촌의 말을 먹이는 노예 고도(苦都)에 말하기를, "너는 천한
노예이고, 명왕은 유명한 군주다. 이제 천한 노예로 하여금 유명한 군주를 죽이게
하고 그 사실을 후세에 전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하겠다" 고 하였다.
드디어 고도는 명왕을 붙잡고, 두번 절하고 말하기를 "청컨대 왕의 목을 치겠습니다"
고 하였다. 명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왕의 머리는 노예의 손으로 자를수
없다" 고 하였다. 고도는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법에 의하면 맹서한 바를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고 하더라도, 마땅히 노예의 손으로 죽일 수 있습니다" 고 하였다.
즉 관산성 전투를 주도 한 것은 성왕이 아니라 성왕의 태자인 여창이었다. 여창이 3만명의 백제군과
가라(가야)군에다가 왜군 원병까지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관산성을 함락했으니.... 이 전투는 백제군
에게 유리하여 신주(한강의 서울) 의 김무력 까지 원군을 이끌고 와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뒤바꾸어 놓은 것은 성왕의 부성애였으니 전쟁터에서 고생하고 있는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50명이라는 소수 호위병만을 거느리고 관산성을 향해 출발한 것이니, 신라군으로서는 성왕
의 출현이야말로 다시없는 기회였으니 성왕은 신라 매복에 걸려 노예의 손에 목이 잘려 죽었는데
『삼국사기』의 고우도도와 『일본서기』의 고도는 성왕의 목을 자른 사람의 이름으로 같은 인물입니다.
『일본서기』의 12월 기사 덕택에 성왕은 7월이 아닌 12월에 죽었음이 밝혀지니 비로소
「신라본기」와 「백제본기」 사이에서 나타나는 불일치가 해소될 수 있는데.....
이처럼 백제사와 가야사에 관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일본 중심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일본서기의 기록이 모두 사실인 것은 아니니 백제와 관련된 기사의 경우에도 그러합니다.
(8) 왕인은 『논어』 와 『천자문』 을 전하였는가?
1) 왕인 전래 : 왕인이 일본 열도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였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내용은 우리의 사서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오직, 다름 아닌
『일본서기』와 『고사기』 등 일본 측의 사료에만 보이는데... 일본서기에 왕인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응신(應神) 15년(404?) 가을 8월 임술삭 정묘에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를 보내 양마 2필을
바쳤다. 그것을 카루(輕)의 사카노우에(坂上)에 있는 마구간에서 기르게 하고 아직기로
하여금 사육을 관장케 하였다. 그 말을 기른 곳을 우마야사카(廐坂)라고 한다. 아직기
는 또한 능히 경서를 읽었다. 그래서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쯔코(菟道郞稚子) 의
스승으로 삼았다. 천황은 아직기에게 "그대 보다도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는, "왕인(王仁)이라는 자가 있는데, 이 사람이 뛰어납니다"고 대답했다. 이때 카미쯔노케누
노키미(上毛野君)의 조상인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칸나키와케(巫別)를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아직기는 아직기사(阿直岐史)의 시조이다. 16년(405년?) 봄 2월에
왕인이 도래하자 그를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쯔코의 스승으로 삼았다. 태자는 여러 전적을
왕인에게서 배웠으며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왕인은 후미노오비토(書首) 등의 시조이다.
저명한 왕인에 관한 기사이지만 이 기사에 대해서는 또 다른 전승이 있으니 바로 『고사기(古事記)』의
기록인데 고사기는 일본서기 보다 8년 전에 완성된 문헌이며 왜국 왕실의 계보와 설화들을
중심으로 일본 고대사를 엮은 책이니 다음은 고사기 중권 가운데 오진왕(應神 응신)에 대한 기록입니다.
또한 백제국주 조고왕(照古王 근초고왕)이 수말 한 마리와 암말 한 마리를 아지길사(阿知吉師)에게 붙여
공상(貢上)하였다. 또한 횡도(橫刀)와 큰 거울을 보냈다(아지길사라는 자는 아찌노후비토(阿直史) 등
의 시조이다). 또한 백제국에 명령을 내려 만약 현인(賢人)이 있으면 공상하라고 하였다. 명을 받아
사람을 공상하였는데, 이름이 화이길사(和邇吉師)라고 하였다.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등
모두 11권을 이 사람을 통해 바쳤다( 화이길사라는 사람은 후미노오비토(文首) 등의 시조이다).
이 두 사료에서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으니『고사기』에서는 아지길사(阿知吉師)를 얻은 뒤에 백제에
더 나은 인물을 바치라고 하여 화이길사(和邇吉師)를 얻게 되었다고 기록했으나, 『일본서기』에서는
아직기에게 물어 왕인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해 놓았으며 또 고사기에는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등 도합 11권의 서적을 명시하고 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왕인이 태자의 스승이 되었
으며 경전에 통달하지 않은 바가 없다고만 하고 책이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논어』와 『천자문』은 왕인 개인이 전한 것이
아니라, 백제 왕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며 다음으로
『고사기』에는 아지길사나 화이길사가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하는 내용은 전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그것은 『일본서기』 를 편찬할 때 새롭게 부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료의 성립 연대를 보면 고사기는 712년이고 일본서기는 720년이며 고사기는 당시 왜국 왕실의
하급 관리 히에다노아레(稗田阿禮)의 암송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문체도 일본어와 한문 혼용체
라고 할수 있는 반면에, 『일본서기』는 그보다 다소 늦게 성립되었으며 순한문체로 중국계
인물이 최종적인 윤문 과정에서 깊이 개입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최근에 제기된 바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오늘날 일본에서 존경받는 왕인에 대해, 그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동시에 태자
의 스승이 되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종합한데
불과한 것으로서 반드시 사실이라고 볼 수 없으니, 사료를 통해 과거의 사실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료가 담고있는 내용 중에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은 허구적인 내용인지를 따져야 합니다.
2) 『천자문』 은 언제 만들어졌나?
중국에는 여러가지 『천자문』이 존재하니 현재까지 잘 알려진 대표적인 천자문으로는 주흥사의 천자문
과 소자범(蕭子範)의 천자문을 들 수 있는데 만약 왕인이 전래한 것이 최초의 천자문이고 그것이
현전하는 것이라면 남조(南朝) 시대 양(梁)나라의 무제 때 만들어진 주흥사의 천자문이라고 생각
할 수밖에 없지만 주흥사는 521년에 사망했으므로 천자문의 찬술은 그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왕인이 천자문을 전래하였다는 시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해당하므로 천자문이 만들어진 시기와 무려 100년 이상의 차이가 나니.... 즉,
왕인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천자문을 일본에 전래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왕인은 『논어』 10권도 전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현재 전하는 논어의 권수보다 많으므로 본문만이
아니라 주석서도 포함한 것임을 알 수 있으니 그러한 주석서 중에서 저명한 것으로는 위(魏)나라
때의 하안(何晏)이 쓴 논어집해와 훗날 남조 시대 양나라의 황간이 쓴 논어의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논어의 소』는 남송(南宋) 무렵에는 중국에서는 없어져 버렸는데 어느 시기인가 일본으로 전래된 책이 청
(淸)나라 때에 중국으로 역유입(逆流入) 되었다고 하며.... 논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데,
또 송(宋)나라 때 형병(邢昺)이 왕명을 받고 지은 논어정의(論語正義)에 중요한 참고서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이처럼 『논어』 텍스트와 그 주석에 있어서는 정현의 논어 텍스트, 이를 바탕으로 한 하안의 논어집해,
다시 논어집해를 바탕으로 한 황간의 논어의소 그리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한 논어정의로 큰
흐름을 정리할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없어졌으나, 일본에 황간의 『논어의소』가 전해졌던 점을
중시한다면, 왕인이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논어 주석서로는 논어집해와 논어의소가 유력합니다.
황간의 『논어의소』와 주흥사의 『천자문』이 중국에서 편찬된 직후 일본 열도에 전해졌다고 한다면
왕인의 역할이 극대화될 수 있는 것인데 두 문헌은 모두 6세기 전반에 완성된 것이니 그렇다면
왕인이 활동한 시기도 5세기 초가 아닌 6세기 전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니, 고사기의
기록대로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준 것은 사실이더라도 후손들이 자기 가계가
유서깊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왕인의 활동 시기를 100년 이상 끌어올린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천자문의 편찬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중국인들이 관여하면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왕인이 천자문을 전했다는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였던 것으로 보이니,
그래서 왕인의 활동 시기는 5세기 초로 그대로 두는 대신에 오히려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
논어와 천자문을 전래하였다는 내용은 없애 버리고 그냥 경전에 능했다고만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일본서기』라는 사료도 그 자체로서 완전한 위서이거나 반대로 완전한 사료도 아니니
다른 사서의 기록과 정밀하게 비교하는 가운데 역사적인 사실을 추출해 내야 할 일반
적인 성격의 사료 중 하나일 뿐인 것이고.... 일본 중심의 편향된 인식이 심한 것은 사실
이지만 다른 나라의 사서들 또한 그런 결점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면이 있습니다.
그밖에도 백제의 성왕이 불교를 전하였다거나 왕인이 유교 경전에 관한 지식을 전하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는 내용 그리고 백제가 단양이 등의 오경박사와 절을 짓는 기술자들을
파견한 이야기들은 우리나라 삼국사기에는 전혀 없고 모두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는 내용인데, 이러한 내용들은 무비판적으로 역사적인 사실로 수용하면서 다른 내용
들은 모두 허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중적인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9) 만요슈 (만엽집 萬葉集)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고대에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말로만 전하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후 중국
에서 한자가 들어오니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표현할 수밖에 없었는데.... 신라에서는 향찰
(鄕札) 이나 이두(吏讀)로 향가(鄕歌)를 적었으니 서동요, 도솔가, 찬기파랑가등이 산국유사
에 14수, 균여전에 11수가 전합니다 (향가집 삼대목 三代目 은 참 안타깝게도 유실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761년에 편찬된 만요슈(만엽집)에 무려 4,536수의 시가가 실려 있는데 630년에서
760년까지 귀족과 서민의 생활상을 노래하고 있으며 덴무왕(천황)의 왕비 누카다노 오키미
(전 천지천황의 왕비)로부 터 야카모치 까지 수많은 저자가 쓴 것을 모은 시가집이고 훗날
속일본기에 500여수를 더하면 시가가 5,000수에 달하니 한국의 25수에 비해 200배나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