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나치 수열은 자연에서 흔히 관찰된다. 고대 그리스나 인도에서부터 많이 연구되어 왔다.
다빈치의 황금비례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의미를 모른다.
대개 자연이 공간을 최적화하여 자원을 절약할 의도라고 설명된다. 빈 공간이 없게 꽉 채우자는 거다. 말이 되는가?
누구 맘대로? 자연에 그런 의도가 있을 리 없다. 최적화 하지 않아도 된다.
암모나이트의 나선고리가 피보나치를 따르지만 실제로 암모나이트 뒷공간은 비어있다. 쓸모없는 공간이다.
공간의 최적화에 실패하여 멸종했다. 빈공간을 이용해 물에 떠다니기는 하나 비효율적이다.
몸통 뒤에 큰 짐이 붙어 있어서 괴롭다. 달팽이도 자라면 껍질를 벗어버리는 종이 많다.
거북의 등껍질은 피보나치 수열이 아니다. 피보나치 수열의 진짜 의도는 대칭/비대칭의 원리로 의사결정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다.
왜? 암모나이트는 그다지 영리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거북은 똑똑해서 피보나치가 아니라도 방법이 있지만, 암모나이트는 진화단계가 원시적이다.
식물에서 피보나치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식물이 똑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하의 형태나 태풍의 꼬리가 피보나치를 따르는 것도 같다. 은하는 그닥 똑똑하지 않다. 내부의 힘이 없다.
우리는 태풍이 자력으로 맹렬하게 진출하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진공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다.
에너지 유입측을 보라. 태풍의 눈은 에너지가 없다.
은하의 나선고리는 새로 생성되는 공간이 만드는 진공의 힘에 끌려 팽창한 것이다. 아니면 만유인력에 의해 붙어버린다.
에너지는 은하계 내부가 아니라 바깥에 있다. 태양을 만드는 것은 태양계 주변의 공간이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있다. 태양계는 우리의 생각처럼 납작하지도 않고, 실상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우리는 사진에 찍히는 태풍의 절반만 보고 있는 것이다.
암모나이트의 바깥에 생장점이 있다. 암모나이트의 몸통이 껍질 밖으로 기어나와 피보나치 수열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채운다.
외부가 내부와 대칭을 이루면서 동시에 비대칭을 이루는 것이다. 시소와 같다.
시소는 양쪽이 대칭을 이루지만 시소의 축이 개입하면 비대칭이 된다.
피보나치 수열은 1, 2, 3, 5, 8, 13, 21로 전개해 간다.
21이 시소의 한쪽 축을 구성한다면 그 이전의 8+13이 21로 대칭을 이룬다. 그림을 그리면 면이나 입체가 되지만 생장은 선을 따른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에서 운동이 생장이다. 운동은 선이므로 자연은 선의 대칭을 이룬다.
구조론은 결과측이 아니라 원인측을 본다. 에너지 공급측을 보라는 말이다. 우리는 완전히 거꾸로 알고 있다.
죽은 암모나이트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앵무조개를 보면 에너지 공급측이 보인다.
에너지 입력측은 언제나 외부에 있고 살아서 움직이므로 잘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정당 바깥에 국민이 있다. 국민이 안중에 없다면 문제다.
야당이 선거에 지는 이유는 국민이라는 배후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은 암모나이트를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의 생장점은 언제라도 바깥에 있고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나무가 접시 모양으로 생겼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나무는 둥글다.
그 보이지 않는 접시의 나머지 절반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언제나 거기서 에너지가 들어온다.
보이는 부분은 반복되는 부분이고, 반복된다는 것은 용도폐기 되었다는 말이다. 나무의 속은 실상 죽어 있다.
살아있는 의사결정으로 보아야 한다. 새로 결정되어 유입되는 부분이 형태를 결정한다.
철학의 최종목적은 미래예측에 있다. 철학의 본질은 권세다. 예측하고 대비하는 자가 권세를 가진다.
피보나치 수열로 주가를 예측하는 사람도 있다. 다음 단계를 내다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조직의 생장하는 방향성을 포착해야 한다. 살아있는 앵무조개를 관찰해야 한다.
답은 에너지가 들어오는 바깥에 있다. 외부와 50 대 50으로 대칭시키므로 피보나치 수열이 만들어진다.
생장에 의해 대칭이면서 동시에 비대칭이 된다.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으므로 대칭이 깨진다.
황금비례도 마찬가지다. 교과서가 위아래로 긴 것은 좌우에 사람의 손이 붙기 때문이다.
가방 손잡이는 위에 있고 모자의 삽입구는 아래에 있다. 거기에 아무 것도 없는게 아니라 뭔가 있다.
스마트폰이 길쭉한 것은 옆에 손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아도 그것은 있다.
손이 길쭉하므로 스마트폰도 길쭉해야 한다. 가방도 길쭉해야 하고 교과서도 길쭉해야 한다.
볼펜의 길이는 손의 한 뼘과 같아야 한다. 얼굴이 길쭉한 것은 뽀뽀할 상대방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굴이 하나라 여기지만 사실은 둘이다. 반쪽은 외부에 있고 반쪽만 내 안에 있다.
정으로 보면 보이지 않고 동으로 보면 보인다.
자동차만 자동차가 아니라 달리는 자동차의 전방 몇 십미터 안쪽은 나의 자동차에 포함된다. 끼어들기 곤란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잘 보면 그 손이 보인다. 전용면적만 내 집에 속하는게 아니다.
엘리베이터와 현관도 돈을 지불하고 구입한 것이다. 다 포함되어 있다. 모르겠는가?
집을 살때 집 앞의 길도 돈 주고 산 것이다. 가게만 양도할 것이 아니라 권리금에 포함된 상권 일체를 양도해야 한다.
가게를 팔고 똑같은 가게를 맞은 편에 내는 얌체 집주인은 박살을 내줘야 한다.
피보나치 수열을 알면 상당부분 미래의 예측이 가능합니다.
피보나치 수열은 내부를 최적화 할 의도가 아니라, 반대로 외부에서 내부를 통제할 의도입니다.
의도는 바깥에 있습니다. 나의 형태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 결정합니다.
여성이 그렇게 생긴 것은 남성의 의도가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희망하는 것은 실제로는 나의 가족이나 이웃의 희망이 내게로 침투된 것입니다.
내부는 언제나 외부와 50 대 50으로 대칭됩니다. 에너지가 들어오면서 그 대칭은 깨뜨려집니다.
이 원리를 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 구 조 이 론 >
첫댓글 어려운 이론이라,,감히 댓글 달기가 주저됩니다,몇번 더 읽어야 할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