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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법사님 무문관 제창)
제21칙 운문시궐雲門屎橛
雲門, 因僧問: “如何是佛?” 門云: “乾屎橛。”
운문에게 한 중이 물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이에 운문이 답하기를, “말라비틀어진 똥 덩어리다!”
無門曰: 雲門可謂, 家貧難辨素食, 事忙不及草書。動便將屎橛來, 撑門拄戶。佛法興衰可見。1
무문이 말하기를,
운문은 집이 몹시 가난해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고, 일에 쫓겨 글 한 줄 휘갈겨 쓸 여유조차 없었다. 기껏해야 똥 덩어리나 들먹이며 가문을 지탱하려고 드니, 가문의 앞날이야 불 보듯 뻔하지 않겠는가!
頌曰: “閃電光, 擊石火。眨得眼, 已蹉過。”
노래하기를,
번갯불이 번쩍!, 불꽃이 탁! 튀더니, 눈 깜짝할 새 지나갔네!
I. 배경背景
운문(雲門文偃, 864~949)은 어려서 출가해 지징志澄 율사律師에게 율장律藏을 배웠고, 선문禪門에 들어서는 황벽희운黃檗希運의 법사法嗣 목주도종睦州道蹤에게 깨달음을 얻었다. 멱살을 잡히고 쫓겨나기를 여러 번, 발이 문에 끼여 부러지는 혈투 끝에 깨달은 것으로 유명하다. 설봉雪峰에게 가서 인가를 받고 행각에 나서, 영수원靈樹院 주지를 지내다 923년 운문산으로 옮겨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었다.
운문은 간단명료한 선문답을 즐겼는데, 본칙의 <간시궐乾屎橛>을 비롯하여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 <운문호병雲門胡餠> <체로금풍體露金風> <수미산須彌山>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등 산뜻하고 독특한 수많은 공안들을 남겼다. 그의 가풍은 향림징원香林澄遠 → 지문광조智門光祚 → 설두중현雪竇重顯으로 이어졌는데, 설두의『송고백칙頌古百則』은 禪의 대중화大衆化를 이끌며 공안선公案禪 시대의 서막序幕을 열었다.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은 설두의『송고백칙』(설두송고雪竇頌古)에 수시垂示, 착어著語, 평창評唱을 붙여『벽암록碧巖錄』으로 편찬하였는데, 이 영향으로 조동종曹洞宗 굉지정각(宏智正覺, 1091~1157)이『굉지송고宏智頌古』를 저술하고, 만송행수萬松行秀이 여기에 시중示衆, 착어, 평창을 붙여『종용록從容錄』으로 편찬하였다.『벽암록』과『종용록』은 선종의 대표적 선종서로 자리매김하며 간화선看話禪 탄생의 초석이 되었다.2
간시궐乾屎橛 I
<여하시불如何是佛> 혹은 <여하시불법대의如何是佛法大意>는 선가의 흔한 질문이다.『무문관無門關』에는 본칙 외에「제18칙 동산삼근洞山三斤」「제30칙 즉심즉불卽心卽佛」「제33칙 비심비불非心非佛」등에 보이고,『벽암록』에는「제7칙 여시혜초汝是慧超」「제12칙 마삼근麻三斤」「제32칙 불법대의佛法大意」, 그리고『종용록從容錄』에는「제5칙 청원미가清源米價」「제65칙 수산신부首山新婦」「제72칙 중읍미후中邑獼猴(如何是佛性義)」「제86칙 임제대오臨濟大悟(如何是佛法的的大意)」등에 보인다.3
“如何是佛, 즉, 어떤 것이 부처냐?”는 질문에 <간시궐乾屎橛>이란 답은 매우 독특하다. 乾屎橛은 마를 건乾(마를 간, 하늘 건, 마르다, 하늘의 뜻), 똥 시屎(앓을 히, 똥, 앓다, 신음함) 그리고 말뚝 궐橛(말뚝, 문지방, 그루터기, 재갈)로, 그대로 직역하면 “마른 똥 말뚝 혹은 무더기”가 된다. 일본어 사전에는 ‘막대기 모양의 마른 대변’으로 되어 있다.
<간시궐>은 ‘똥 막대기’라 하여, 변을 보고 나서 밑을 닦는 막대기나 또는 똥통을 휘젓는 막대기라고 하다가, 근래에는 똥이 말라서 막대기처럼 굳어진 ‘막대기 모양의 똥’이라거나 ‘똥 덩어리’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4
지금까지 乾屎橛을 화장실에서 똥을 휘젓는 나무, 혹은 똥 닦는 나무 주걱, 마른 똥 덩어리 등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어디나 흔히 볼 수 있는 똥 덩어리, 혹은 똥 젖는 막대기를 말한다. 즉 냄새나고 더럽고 보기 싫어하는 하찮은 물건이라는 의미이다.5
2007년 백제 무왕(武王: A.D. 600-641)대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 408호) 발굴조사에서 화장실 유구遺構가 확인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곳에서 길이 25~30㎝, 두께 2~3㎝의 반원형 막대가 다수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고고학계와 민속학계에 따르면, 이는 요즘 화장실에서 쓰는 종이 대신 용변처리를 위해 사용한 ‘뒷나무’로 밝혀졌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이 막대기는 씻어서 재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일종의 <간시궐>인 셈이다.
화장실은 이 배수로 남쪽 가까이서 배수로와 나란히 3기가 확인되었습니다. 그 구조는 제일 큰 것이 깊이 약3m, 폭 약1.8m, 길이 약10m의 긴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좌우벽에 나무기둥을 세워 올려 지상에서는 간단한 구조의 화장실 건물로 결구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화장실은 내부에서 채취한 퇴적토를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여기서 회충, 편충, 간흡충과 같은 기생충 알을 다량 확인하고, 또한 퇴적토에서 당시에 뒤처리용으로 사용되었던 나무막대기를 확인함으로써 그 성격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화장실은 어깨 부분에 작은 배수로가 있어서 오물이 어느 정도 차면 배수로를 통해 오수가 처리되는 즉, 오늘날의 정화조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어 간단한 구조이지만 매우 과학적으로 고안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6
간시궐乾屎橛 II
현대 여성들의 필수품인 “하이힐”의 유래를 보면, 그 중 하나가 당시 유럽의 거리사정과의 관련설이다. 중세 유럽의 각 가정에서는 똥오줌 같은 오물을 그냥 거리에 버리는 것이 당연시 되었는데, 그런 연유로 파리의 귀족들은 오물이 널려있는 거리를 걸어 다녀야만 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조차 별도의 화장실이 없었다고 하니 가히 짐작이 간다. 길바닥이 오물로 가득 하였으니, 걸으면서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이힐을 신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용도상 굽이 높은 하이힐이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이유로 초기 하이힐은 앞굽과 뒷굽이 모두 높았다고 한다.
18세기 중반~19세기 말에는 “이동변소꾼”이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한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에는 공중화장실이 없어 긴 외투와 외투양동이 2개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몸을 외투로 감싸고 일을 보게 하는 직업이었다.7 더러워지는 도시의 오물처리문제로 골치를 앓던 왕실의 총애를 받으며 호황을 누린 인기 직종이었다고 한다.
몇 십 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에도 길에서 흔하게 똥을 볼 수 있었다. 공중화장실이 일반화되기 전이라 길거리에서 변을 보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도 않았고, 실재 소변보는 사람들은 흔하게 발견되었다. 애들은 바지를 벗겨서 길에 내놓는 일도 흔했다. 지금 인도에 가면 실제로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인데, 인도 여행을 할 때 기차를 타고 가다 보니 옷을 잘 입은 중년의 신사가 철로가로 오더니 점잖게 궁둥이를 까고 앉아 변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천천히 달리는 기차에서 그 광경을 보고 놀란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놀랄 것도 없이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인도 여행의 첫 번째 난관은 더러움이다.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인도 초보의 경우, 공항에서 내려 도심을 들어서면 그 더러움에 많이 놀라게 된다. 곳곳에 널린 쓰레기 더미, 미처 치우지 못한 소똥은 물론, 골목골목에 뱉어놓은 타액들과 인간배설물들이 냄새까지 진하게 풍겨낸다. 큰비가 찾아오기 전인 건기에는 심지어 사람 것인지 축생 것인지 알 수 없는 마른 똥[乾屎]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거기에 더해 박시시, 박시시, 달려들어 구걸하는 천민들의 더러운 모습은 몸에 닿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다. 도착한지 며칠 되지 않은 초짜 여행자들은 마치 지뢰밭을 지나듯 묘기를 부리며 걷거나, 물구덩이 징검다리 건너듯이 묘한 걸음을 걷게 된다.8
어쨌든 길에 널린 똥은 또 하나의 <간시궐>인 셈이다. 운문 당시 똥막대기가 보편적이었는지 길가에 똥이 더 일반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간시궐>은 선어록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 가장 더러운 물건을 가리킨 말로 이해하면 되겠다.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똥 막대기로 보느냐 혹은 똥 덩어리로 보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닌 듯하다.
간시궐乾屎橛 III
그럼 운문은 왜 하필 부처를 <간시궐>이라고 했는가? 거기에는 간절한 이유가 있으니, 부처라고 하면 위대하고 성스럽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고정관념을 깨기 위함으로 보인다. 종달 노사님의 의견을 들어보자.
세상은 더럽고 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운무 스님이 말한 ‘간시궐’도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불’이란 어떤 것인가? 고 물으니 더럽고 추한 것을 우정 골라내서 대답했다. 그러면 운문 스님이 왜 하고 많은 가운데서 하필이면 가장 추한 ‘간시궐’을 내세웠을까? 여기가 구명究明되지 않으면 아니 될 점이다.
우선 중이 ‘불’이라면 가장 신성하고 청정하고 거룩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래서 운문 스님은 그중의 배짱을 알고 제일 더럽고 추항 ‘간시궐’이라고 쏘아 붙였던 것이다.
이를 반어법反語法 혹은 도어법倒語法이라고 하는데,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여 성스러움에 집착하는 인간의 편견을 운문은 <간시궐>이라는 한 마디로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장자莊子』에 보면, 장자가 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에 “도道는 똥오줌 속에 있다.”고 대답하는 것과 같은 구조이다.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이른바 도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두루 없는 곳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땅강아지와 개미에게 있습니다.”
“어찌하여 그처럼 하찮은 것에 있습니까?”
“돌피나 피9에도 있습니다.”
“어찌 더 하찮은 것에도 있습니까?”
“기와나 벽돌에도 있습니다.”
“어째 점점 더 심해지십니다.”
“똥오줌에도 있는걸요.”
이에 동곽자가 아무 대꾸가 없자 장자가 다시 말했다.
“당신의 질문은 처음부터 본질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시장 관리인이 감독하는 이에게 돼지의 살찐 정도를 알아보게 할 때도, 살찌기 어려운 쪽으로 밟아 내려갈수록 그 정도를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는 도가 꼭 어디에 있는가라고 한정짓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것도 도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극한 도는 이와 같은 것이며, 위대한 말씀 또한 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두루[周], 고루[遍], 모두[咸] 이 셋의 이름은 다르지만, 실재로는 같은 뜻으로 한 가지를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10
깨달음의 도道는 나무든, 돌이든, 소든, 어디든지 내재한다.11 道는 귀하든 천하든 어떤 것에도 두루 내재하기 때문에 만물은 평등하다. 그러므로 사물을 고상하고 천박한 것으로 나누는 것은 편협한 사고다. 장자 또한 道는 어디에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장자가 구지 똥오줌까지 들먹인 데는 道의 “무소부재無所不在”한 성질性質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동곽자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깨려는 의도가 더 커 보인다. 동곽자의 질문이 도는 높고 성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눈높이에 맞추어 적절하게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운문 또한 눈높이 교육인 것이다.
홈즈(Holmes) 대법관은 머리의 기능(인식 능력)이 창자의 활동보다 더 큰 우주적 가치를 지녔는가에 대해 종종 회의를 표시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장자나 선사들은 창자의 활동이 두뇌의 기능보다 결코 못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대뇌 운동, 즉 사고가 갖지 못하는 우주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중략)
조주에게 있어서는 마조나 남전과 마차가지로 ‘도’나 ‘진리’라고 하는 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 만 가지 사물 속에 편재해 있다.12
인간은 잠재적으로 선악善惡, 미추美醜, 고저高低, 장단長短, 시비是非를 가리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무엇을 판단하는 데 그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큼 또 확실하게 인간을 괴롭히는 단초가 되는 것도 드물다.
감지승찬(鑑智僧璨, ?∼606)은『신심명信心銘』첫 줄에서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도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느니, 다만 분별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임제 또한 ‘무위진인無位眞人, 차별 없는 참사람’이 되라고 하고 있다. 선사들의 설법이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데, 차별심이야말로 도로 가는 가장 큰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운문도 언젠가 이런 말을 한다.
“무엇이 잘못되어 이토록 어려우냐?”
하더니 대신 답했다.
“분별하기 때문이다(辨).”13
『열반경涅槃經』에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영평도원永平道元14 선사는 이것을 “모든 것은 불성이다.”로 이해 하였다. ‘모든 것은 불성이다.’는 모든 것이 불성 그 자체라는 것이다.15 모든 것이 불성 그 자체라는 것은 삼라만상이 모두 부처라는 것이고, 이는 삼라만상에 어떤 차별이나 구별이 없다는 뜻이다. 똥오줌을 더럽다고 여기는 것도 중생심에서 나오는 차별일 뿐이다. 더구나 도는 청정할 것이라는 생각은 도의 본질과는 멀고도 먼 것이다. 부처도 마찬가지이다. 운문이 의도하는 바로 깨달음이란 그런 우리의 관념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인식의 전환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종달 노사님의 말씀이다.
세계에서 제일 귀중한 것으로 ‘다이아몬드’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를 400도 내지 450도의 고열에 태우면 결국 ‘탄산가스’로 화한다고 한다. 그러면 뒷간의 뒷쓰개 작대기를 태우면 역시 남는 것은 ‘탄산가스’라고 하니 진체(眞體)에 있어서는 ‘다이아몬드’나 ‘간시궐’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가체(假體)로서 천차만별로서 예쁘고 추한 구별이 있을 뿐이다. 전 우주의 어떤 물체를 막론하고 모두 가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이 가체이니 만큼 어느 땐가는 사라진다고 해서 전연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체인 원소(元素)로 되돌아갈 따름이다. 그러니까 가체이건 진체이건 그 구성원은 두말 할 것 없이 원소라는 얘기가 된다. 이 원소가 어떤 인연에 의하면 ‘다이아몬드’가 되고 ‘간시궐’이 되는 것이다.
간시궐乾屎橛 IV
운문은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외친 부처를, “내가 만일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일격에 쳐서 개밥으로 던져주었을 것이다.”16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살벌함에 비하면 <간시궐>은 오히려 나은 편이다. 과격하긴 하지만 운문의 이런 언행은 일체의 모든 성스러운 존재나 깨끗하다는 망념에 사로잡혀 자신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간절함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신비적이고 공허한 생각들을 혐오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우상偶像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이 같은 성향은 조주(趙州從諗, 778~897)가 먼저다.
한 중이 물었다.
“신령한 자는 누구입니까?”
“깨끗한 땅 위에 눈 한 무더기 똥이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노승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17
조주도 신령한 자를 묻는 중에게 신령한 것이란 한 무더기 똥이라고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신령을 논하는가? “나는 이렇게 밥 먹고 차를 마시고 있네, 물론 화장실에도 가고.” 널린 것이 모두 신비고 신령이다. 진리란 그런 것이다. 풀 한포기 이상의 신비는 없는 것이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신령스러움’을 높이 떠받든다. 불교에서는 주로 사리의 영묘함을 선전하고 있고, 타 종교에서는 성모가 눈물을 흘린다거나 성자가 부활하였다는 것을 실제적인 사건으로 강조하면서 신령스러움을 높이 부각하여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사람을 끌어 모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모두 한 무더기 똥을 예쁘게 포장하여 사람을 속이는 일 밖에 될 것이 없다.
사람들은 새롭고 신비함에 잘 이끌리고 동경하여 따르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 그런데 신령스러움이란 잘 살펴보면 모두 보잘 것 없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자세히 보면 이 넓은 우주 속에서 사람의 눈동자처럼 신비롭고 신령스러운 것은 또 없다. 또 사람의 마음보다 더 신령스러운 것도 없다. 자신 속에 있는 신령스러움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유혹되는 것이다. 이참에, 적어도 21세기에 사는 사람이라면 똥을 포장한 것에 제발 이끌리지 말기 바란다.18
불교는 애초에 부처를 섬기는 종교가 아니고 부처가 되는 종교다. 성스럽고 위대한 부처에 대한 생각은 부처를 대상화하고 이원화하여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다. 부처든 선사든 법사든 무엇이든 신성시하고 교조화하면 불법하고는 멀어진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신앙信仰, 즉, 믿고 받들거나 복종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연기緣起’ 같은 근본 원리를 말할 뿐이다.
운문의 우상파괴는 과거의 부처들을 숭배하느라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제자를 깨우려는 사자후였던 셈입니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려고 발원한 놈이 다른 놈을 흉내 낸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지금 운문의 제자는 주인공, 그러니까 주연의 자리를 버리고 조연을 선택하려고 했던 겁니다. 다른 것을 숭배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인공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삶은 조연의 삶으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중략)
“마른 똥 막대기!”라는 호통으로 운문 스님은 평범한 신도가 되는 길, 그러니까 초월종교로 가는 길 자체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운문이 얼마나 그의 제자를 사랑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이제 제자에게는 스스로 부처가 되는 해탈의 길, 즉 내재종교로의 길만이 남겨진 셈입니다. 이처럼 초월종교인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내재종교입니다. 초월종교는 인간을 조연으로 만들지만, 내재종교는 인간을 주연으로 긍정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이것은 과연 불교만의 생각일까요. 위대한 정치철학자 바쿠닌(Mikhail Bakounin, 1814~1876)도 자신의 주저 ‘신과 국가(Dieu et l’E´tat)’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적이 있으니까요.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인 이성과 정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자유를 가장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인간들을 명실상부한 노예 상태로 이끈다.” 아마 바쿠닌이었다면 교회나 성당에 들어가서 십자가를 보고 “녹슨 쇳덩어리”라고 이야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숭배 대상이 파괴되어야, 우리는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녹슨 쇳덩어리”라고 바쿠닌이 외쳤다면, 교회나 성당에서는 난리가 날 것입니다. 바쿠닌은 이단이나 사탄의 취급을 받고 화형에 처해질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결코 이를 수 없는 절대적인 초월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우리는 운문 스님이 파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불교가 아무리 초월종교의 색채를 띠고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내재종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21번째 관문을 지나다보니 젊은 시절 어느 사찰에서의 경험이 떠오릅니다. 당시 패기만만했던 저는 어느 스님에게 말했습니다. “불상에게 경배한다면, 불교가 어떻게 기독교와 달라지겠습니까?” 그러자 노스님은 미소를 띠면서 제게 말했습니다. “불상은 선생님이 되어야 할 모습이니, 경배한다는 것이 무슨 허물이 되겠습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셈입니다. 노스님이 살아 계신지 궁금해집니다. 이제 스님께도 제대로 경배하고 싶으니까요. 합장!19
한 마디 덧붙인다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이미 부처다. 만물은 평등하고 도는 두루 할 뿐이다. 그러나 다만 거기에 머무르면 그 또한 고정관념이 된다. 변화와 대기대용의 쓰임에도 능해야 한다. 조주가 그의 시자 문원文遠과 한 내기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스님께서 문원사미와 입씨름을 하였는데, 이기면 안 되고 이긴 쪽이 호떡을 내기로 하였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한 마리 나귀다.”
“저는 나귀 새끼입니다.”
“나는 나귀 똥이다.”
“저는 똥 속의 벌레입니다.”
“너는 그 속에서 무얼 하느냐?”
“저는 그 속에서 여름을 지냅니다.”
스님께서는 “호떡을 가져 오너라!” 하셨다.20
조주는 다만 떡이 먹고 싶었다. 누가 이기든 무슨 상관이랴. 떡을 먹으면 그만이다. “무집착의 집착”이다. 더구나 선객다운 풍류도 있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대 자유인의 초탈한 모습이다. 거기에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분별이 있다. 그러나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분별이 있을 뿐, 깨끗한 것이 좋다거나 더러운 것이 나쁘다거나 하는 선호選好는 없다.
도겐 선사께서는 “비록 모든 것이 불성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꽃은 사랑하고 잡초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성의 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아름다운 것에 집착하는 것은 그 자체가 부처의 활동입니다. 우리가 잡초를 좋아하지 않는 거 또한 부처의 활동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안다면, 어떤 것에 집착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부처의 집착이라면 그것은 무집착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속에는 미움 또는 무집착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움 속에는 사랑 또는 용납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과 미움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사랑에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미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잡초를 어떻게 느끼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잡초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마십시오. 잡초를 사랑한다면 사랑하십시오.21
순수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순수하게 생각되지만 순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장 순수한 것까지 더럽게 생각될 뿐이다.22 더럽고 깨끗하고 는 단지 마음의 조작이고 자신이 만든 것이다. 선종은 거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진리의 카멜레온 같은 모습으로, “바른 사람이 사악한 법法을 말하면 사악한 법까지도 바르게 되고, 사악한 사람이 바른 법을 말하면 바른 법까지도 사악해진다[正人設邪法 邪法亦隨正, 邪人設正法 正法亦隨邪].23”
간시궐乾屎橛 V
<간시궐>에 대한 또 하나의 견해는 무견해의 견해이다. <간시궐>은 그대로 <간시궐>일 뿐 다른 의도는 없다는 것이다. 만물이 평등하다든지 부처는 어떤 것에도 두루 내재한다든지 하는 등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어떤 말에 의미를 부여하다보면 혼란만을 야기할 수 있다. 무엇으로 자꾸 포장하려 들면 의문만을 키울 뿐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다. 처음 의도하고는 점점 더 멀어질 수도 있고 그로 인해 또 다른 논쟁을 낳을 수도 있다.
운문의 똥막대기는 그러나 범신론의 제창이 아니다. 그리고 장자처럼 무슨 생태학적 전망을 표명한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똥에도 신(神)이 있다거나 똥도 밥처럼 귀한 존재라는 것을 설득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똥막대기라는 말에는 아무런 심오한 뜻이 없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똥막대기다.24
마찬가지로 ‘부처는 똥막대기’라고 규정하는 순간에 부처는 오직 ‘똥막대기’이다. 다른 무엇이 될 수가 없다. 일단 ‘이것이 부처이다’고 정의하게 되면, 곧 부처와 부처가 아닌 것을 구별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처일까? 이것은 ‘똥막대기’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뿐, 다른 망상을 일으키지 말라’가 된다.25
다른 의도는 없고 다만 <간시궐>을 망상 번뇌를 없애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보자는 것이다. 일종의 충격요법이다. 운문은 <乾屎橛>이란 표현을 수시로 사용하였는데,『운문광진선사광록雲門匡眞禪師廣錄』에는 ‘乾屎橛’ 뿐만 아니라 ‘멱십마간시궐覓什麼乾屎橛, 간시궐을 찾고 있는가?’ 혹은 ‘멱십마건시궐교覓什麼乾屎橛咬, 간시궐을 씹고 있는가?’ 등 <간시궐>이 들어간 예를 종종 볼 수 있다.
“무엇이 석가모니의 몸입니까?”
“마른 똥 무더기[乾屎橛]!”
問:“如何是釋迦身?” 師云:“乾屎橛。”
언젠가는 말씀하시기를, “불법에서는 말할 것이 없겠지만, 세간에서는 무슨 물건이 가장 귀한가?” 하고는 말하기를, “‘이것은 천하고 싸구려다.’라고 말하지 말라.”하고는 “마른 똥막대기[乾屎橛]!”하고 말했다.
或云: “佛法不用道著, 世間什麼物最貴。” 代云: “莫道這箇是賤底。” 又云: “乾屎橛。”
“요즈음 제방에는 세상에 나와서 떠들썩하게 허세를 부리면서 사기 치는 놈들이 많은데 그대들은 어째서 그리 가지 않고, 여기서 마른 똥막대기[乾屎橛]나 찾고 있느냐?” 그리고는 아래로 내려와 주장자로 후려쳐 일시에 내쫓아버렸다.
“如今諸方大有出世紐捏, 爾何不去彼中, 在這裏覓什麼乾屎橛。” 師便下地, 以柱杖一時打趁下去。
하루는 말하기를,
“옛사람은 문을 닫고 들어 앉아 면벽하였다. 이것으로부터 얻을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대신 대답하였다.
“이것이 무슨 마른 똥막대기[乾屎橛]냐?”
그리고는 다시 말했다.
“하나로다.”
一日云: “古人面壁閉卻門, 還透得這裏麼。” 代云: “這裏是什麼乾屎橛。” 又云: “一。”
상당하여 말했다. “도道는 道일뿐이다.” 그러자 한 중이 나와 절을 하고나서 무언가를 물으려고 하였다. 그 순간 운문이 주장자로 후려치며 말했다.
“좋고 나쁜 것이나 알겠느냐, 이 썩은 나무 등걸이나 지는 놈! 모두 이런 중들뿐이라면 신도들 시주나 제대로 받겠느냐? 악업 중생들이 모여 똥 막대기[乾屎橛]나 씹고 있구나!”하고는 주장자로 모두를 쫒아 내었다.
上堂云: “道即道了也。” 時有僧出禮拜欲伸問次。師拈拄杖便打云: “識什麼好惡, 這一般打野榸漢。總似這個僧, 爭消得施主信施。惡業衆生總在這裏, 覓什麼乾屎橛咬。” 以拄杖一時趁下。
스님께서 새로 온 납자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느냐?”
“임주郴州에서 왔습니다.”
“여름 한 철은 어디에서 났느냐?”
“형주의 남쪽에서 금金을 나누었습니다.”
“얼마나 나누어 가졌느냐?”
스님이 양손을 펴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기와조각이로구먼.”
“스님께선 별것이라도 가지고 계십니까?”
“마른 똥[乾屎橛]이나 씹어라.”
그리고는 대신 말했다.
“옥에 티를 말하지 않고 어떻게 옥을 굴릴 수 있겠는가?”
師問新到: “什麼處來?” 僧云: “郴州。” 師云: “夏在甚處。” 僧云: “荊南分金。” 師云: “分得多少?” 僧展兩手。師云: “這個是瓦礫。” 僧云: “和尚莫別有麼?” 師云: “乾屎橛一任咬。” 代云: “若不言瑕爭得玉轉。”
<乾屎橛> 외에 다음과 같은 간시궐류의 비슷한 표현들도 보인다.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만법은 어디에서 나오느냐?”하더니 대신 말했다.
“똥더미[糞堆頭]!”
一日云: “萬法從甚處起。” 代云: “糞堆頭。”
스님이 큰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받침대를 들어 올리더니 말했다.
“찐빵과 만두는 마음대로 먹도록 하여라. 그렇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한 번 말해보라.”
그리고는 대신 말했다.
“이 무슨 마른 개똥[乾狗屎]이냐!”
하고는 다시 말했다.
“차나 마시게!”
師在僧堂中喫茶, 拈起托子云: “蒸餅饅頭一任汝喫, 爾道這箇是什麼。” 代云: “乾狗屎。” 又云: “茶又喫了也。”
열거한 예문들을 보면 <간시궐>은 특별히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 말에 어떤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대화할 때 습관적으로 내뱉는 어떤 추임새로 들린다. 시쳇말로, “똥 씹는 소리 하고 있네!” “뭐 같은 소리 하지 마!” 정도로 들린다. 판소리 공연 중간 중간에 종종 등장하는 “염병헐!”과 같은 별 뜻 없이 내뱉는 맛깔 나는 욕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간시궐>은 그 의미 보다는 운문의 대화 습관의 하나로 그의 평상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다른 표현인 ‘똥무더기[糞堆頭]’나 ‘마른 개똥[乾狗屎]’에서도 드러난다. <간시궐>이 그냥 의미 없이 내뱉는 일종의 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특별히 부처를 <간시궐>이라고 정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 자체로 “망상떨지 말라!”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겠지만 <간시궐>은 그대로 <간시궐>인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편집되어 공안으로 되는 순간 몹시 유명해졌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요즘 말로 굉장한 “유행어”가 되었다. 이후 모든 선객들이 이 말에 매달려 방석을 닳게 하고, 선사들은 이 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뜻을 설명하느라 침을 튀기고 있다. 물론 <간시궐>에는 운문의 선적 철학적 견해가 그대로 녹아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찾기 보다는 앞서 열거한 <간시궐>에 대한 논의는 뒤로 한 채 태연히 혹은 무심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운문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간시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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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사설辭說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운문은 “부처란 바로 쓰레기 같은 존재”라고 질러 버린 것이다. 역사상 어느 종교도 창시자에 대해 이처럼 적나라한 모욕을 던진 적은 없었다. 드디어 불교는 여기까지 왔다. 선은 지금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위태롭게 밟고 있는 것이다.26
선禪이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대승불교가 중관과 유식, 화엄과 천태의 심오한 철학과 더불어 정토종淨土宗의 종교적 열망을 훌륭하게 결합하였지만 대중들은 자력自力의 교설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불보살들에 의한 가피加被와 외호外護에만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진리의 등불은 패배주의와 말세의식의 거친 바람 앞에서 위태롭게 깜박이고 있었던 것이다. 禪은 이 위기에 대한 혁신으로 등장했다.27 그럼 불교는 지금까지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가!
불교의 탄생
인도는 4대 문명 중 인더스문명(B.C. 3,000-B.C. 2,000)의 발상지이다. 주로 드라비다Dravida 人들로 구성된 이들은 대부분 각지에 작은 촌락을 이루며 모계적인 사회를 이루며 살았지만, (강줄기의 변화로 폐허로 남았지만) 인더스 강가에 잘 설계된 도시를 건설하고 청동기 시대 화려한 문명을 일으킨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인도 서북부 인더스 강 유역 펀잡 지방에 아리아인Arya들이 유입되는데, 그들은 농사를 지으며 점차 동쪽으로 번져나간다. 이들은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농경을 하며 경제적인 발전과 사회적인 안정을 누리면서 베다Veda-우파니샤드Upanishad28 시대를 여는데, 태양, 불, 나무 등 자연을 신격화하고 찬미하는 베다 문헌을 낳았을 뿐 아니라 이를 성전으로 하여 브라만교를 탄생시킨다. 이 시대를 통상 자연현상을 신으로 숭배하는 다신교 사상의 리그베다 시대(B.C. 1,200 - B.C. 1,000)와 갠지스 강 상류로 진출하여 종교 의례, 카스트 제도 등을 확립한 아타르바 ․ 브라흐마나 시대(B.C. 1,000 - B.C. 800), 그리고 우주의 근본원리, 범아일여, 업, 윤회, 해탈 등의 사상이 나타난 우파니샤드 시대(B.C. 800 - B.C. 500)로 나눈다.
B.C. 7 ~ 6세기 무렵에는 농촌의 성장과 함께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면서 군소국가 들이 일어나고 또 합병하면서 16대국으로 발전하는데, 국가를 통치하는 왕족과 경제적인 실권을 가진 장자長者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급격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전통적 종교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종교, 새로운 사상을 주장하는 반 베다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도 나타난다. 당시 불교 문헌에 의하면 62가지, 자이나교에 따르면 363가지 다른 견해들을 가진 사상가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 중 대표적인 여섯 사람을 육사외도六師外道29라고 부른다.
이들 신흥 종교사상가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브라만교의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자유로운 사상가들로,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 또한 신흥 혁명가들 중 하나였다. 석가모니는 35세에 깨달음을 얻은 뒤, 80세에 입멸入滅할 때까지 45년 동안 인도 북부 갠지스 강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가르침을 폈다.
불교의 흥망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인도불교는 원시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로 나눈다. 원시불교는 초기 불교로서 석가모니가 불교를 창시한 때부터 입멸 후, 각 부파部派로 분열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이른다.
근본불교와 원시불교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석가모니가 교화활동을 했던 45년간을 근본불교라고 하고, 석가모니의 입멸 이후부터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의 근본분열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원시불교라 한다. 둘째, 석가모니 및 그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의 시대(불멸 후 약 30년)를 근본불교라 하고, 이후부터 교단의 근본분열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원시불교라고 한다. 셋째, 원시불교의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석가모니의 설법을 따로 지칭하여 근본불교라고 하고, 석가모니의 생존시부터 불멸 후 근본분열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통틀어 원시불교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들이 비록 근본불교와 원시불교를 구별하고 있지만, 원시불교시대에 결집된 불경을 주된 연구자료로 한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그것은 한역漢譯 아함경阿含經 및 팔리 삼장三藏 등이다. 원시불교의 중요 교리는 중도中道와 연기緣起에 근거한 사성제四聖諦·팔정도八正道·오온설五蘊說·십이처설十二處說·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삼법인三法印 등이다.30
석가모니 사후 그가 설한 교리나 규율이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보니 그것들을 정리하는 “결집結集Samgiti”이 필요하게 되었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그해 라자가하(王舍城)교외의 칠엽굴에서 가섭을 사회자로 하여 우팔리Upali가 율律을, 아난다Ananda가 경經을 외우면 이를 참석한 500비구들이 검토하고 함께 암송하였다. 이를 “제1차 결집”이라고 하는데, 이때 불교 교법이 사상적으로 처음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함경, 숫타니파타, 법구경 등이 이때 확립되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계율戒律을 고스란히 지키고자 하는 전통적 보수파와 계율 해석을 유연하게 하고자하는 진보적 자유파가 대립하게 되어, 석가모니 사후 100년 경, 700명의 비구들이 모여 집회를 연다. 이것을 “제2차 결집”이라고 하는데, 이때 ‘10사비법十事非法’31이 논의 되었다. 이때 젊은 비구들은 진보적 입장을 취했으나 장로들은 보수적 입장을 취해 교단은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분열하게 된다. 이것을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고 한다.
근본분열이 있고부터는 교리상의 견해차이나 지도자간의 대립이 더욱 심화되어, 석가모니 사후 약 200년 뒤부터는 파생적인 분열이 촉진되는데, 이를 지말분열支末分裂이라 한다. 이들은 서력기원을 전후하는 시기까지 약 20개의 부파로 나누어져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는데, 이 시대의 불교를 총칭하여 부파불교라 한다. 부파 불교는 300년 동안 이어지면서 복잡하게 분파하였으나 그 세력을 계속 유지한 것은 상좌부, 설일체유부, 정량부, 경량부, 대중부 등이다.
한편, 불멸 후 약 200년경인 아쇼카 왕 대에는 외도들을 정리하고 교법을 바로 잡기 위한 “제3차 결집”이 있었다. 천여 승려들을 선출하고 결집시킨 이때 구전口傳되어 오던 부처님 말씀이 비로소 문자화되었으며, 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내용도 경經, 율律, 논論 등 삼장三藏으로 정리되었다.
기원 후 2 세기경 불교를 숭상하였던 쿠산 왕조의 카니시카 왕은 각 부파의 교의가 다름을 알고, 이를 통일코자 500명의 스님들을 선출 결집하게 하는데, 이를 “제4차 결집”이라고 한다. 이때 삼장을 주석하여 경장, 율장, 논장, 각각 10만송씩, 도합 30만송의 대 주석을 만들고 동판에 새겨 석함에 넣고 큰 보탑에 안치하였다. 현재 그 중 논장의 주석이 남아 있다.
4세기 초에 이르면 힌두적 색채가 매우 짙은 굽타왕조가 등장하여 불교가 쇠퇴하고 불교도가 급격히 줄어든다. 이 시기는 부파와 중기·후기의 대승이 병행하였는데, 7세기 후반을 지나면 밀교密敎가 성행하여 그 위치를 대신하게 된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침입이 시작되었고, 1,203년 비크라마실라 대사원이 이슬람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면서, 1,600여 년의 전통을 지닌 인도불교는 막을 내리게 된다.
대승불교와 정토사상의 출현
아쇼카 왕 이후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출가자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나, 승려 중에는 왕이나 대신의 스승이 되는 사람도 있게 되었다. 자기 스승을 예우하기 위해서 많은 보시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탁발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그런 분위기 속에 수행과 포교가 분리되고 개인의 출가수행만을 위주로 하는 이기적, 독선적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 이런 소승불교의 잘못을 반성하고 붓다의 본래의 뜻을 살려 자비를 이 세상에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난다. 이것이 “대승불교大乘佛敎” 운동이다.
불교의 궁극은 누가 뭐래도 스스로 부처가 되는 데 있다. 창시자께서는 누워 열반을 맞으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나를 경배하려 하지 말고, 법(法)을 등불로 삼아 생사의 고리에서 벗어나라.” 소승은 이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켰다. 대승은 그러나 아라한(阿羅漢)의 이상이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고 비판하면서 대중을 함께 태울 수 있는 너른 수레[大乘]를 만들겠노라고 공언했다. 거기에는 일반적 믿음과는 달리 대중에 대한 타협과 아부의 혐嫌이 있다. 아쇼카 왕이 받쳐주던 국가적 지원이 끊기면서 승단은 대중의 재정적 후원과 유대를 절실히 필요로 했고, 승가는 그 반대급부로 대중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내세를 이끌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관음과 미륵, 지장 등의 수많은 부처와 보살(菩薩)들이 그래서 생겨났다.32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절대적 존재에 의해 구원될 수 있다는 타력신앙他力信仰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부처님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정토의 왕생을 실현하는 정토사상淨土思想이다. 정토사상은 타자의 구원에 의지하는 “이행도易行道”33로 대승의 일반적인 수행 관과는 상반되지만, 불교가 대중적인 종교로 발전하면서 대중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도의 약 600부의 대승경전 가운데 정토사상을 설하고 있는 경전이 200여부에 이른다고 하니 정토사상이 대승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인도의 정토사상이 중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후한과 삼국시대, 정토관련 경전들이 번역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중국 정토종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토사상이 하나의 교파나 종파로 형성하게 된 것은 중국에 이르러서이다. 송나라 이후 정토사상은 크게 융성하여 민중 사이에 깊이 침투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태․화엄․선 등 거의 모든 종파에서도 이를 수용하였다. 이들은 대개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唯心淨土)라는 방식으로 아미타불과 정토를 주체적인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아미타경이 번역된 이후 혜원(慧遠, 334-416)은 염불결사(念佛結社)를 실천하였고, 북위의 담란(曇鸞, 476-532)은 칭명염불(稱名念佛)을 최초로 시도하였다. 특히 담란은 혼탁한 세상에서 자력으로 보살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토로하였다. “타력에 의해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자력으로 가려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결코 부처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후 정토교는 도작(道綽, 562-645)으로 계승된다. 도작은 그의 시대를 말법(末法)으로 규정하고 ‘응당 마땅히 참회하고 복을 닦으며, 진정 부처의 명호를 불러야 할 시기’라고 하였다. 한편 도작의 법을 이은 선도(善導, 613-681)은 칭명염불을 중심으로 삼는 정토교를 대성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말법 시대에 사는 이로서, 어리석고 더러운 몸을 지닌 이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토교를 신앙하는 것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는 진실한 마음인 지성심(至誠心)과, 자신은 범부이며 아미타불에 의해 구원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믿는 심심(深心), 그리고 스스로 닦은 일체의 선을 중생에게 회향하고 왕생을 기원하는 회향발원심(廻向發源心)의 세 마음을 갖추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가재(迦材, ?-648)는 도작의 학설을 계승하면서도 유식이나 여래장 계통의 경론을 토대로 정토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는 수행자의 자질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나누고, 후자의 경우 첫째 참회할 것, 둘째 보리심을 일으킬 것, 셋째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칭을 생각할 것, 넷째 정토를 관찰할 것, 다섯 째 모든 공덕을 왕생을 위해 회향할 것 등의 다섯 가지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들을 거치면서 정토교는 바야흐로 다만 이행도(易行道)로서의 실천, 대승의 한 단편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 대승 중의 대승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34
정토종과 선종禪宗의 관계
단순한 명상의 실천으로서의 선禪이, 습선習禪의 과정을 거쳐 현실적인 중국인의 일상생활 속에 들어가 융합된 것이 중국의 발명품 선종禪宗이다. 인도에서는 다만 깨달음의 방편으로 이해되던 선이 삼매의 영역을 벗어나 전혀 새로운 종교적 실천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선이 스스로를 변호하고 정당화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대승의 난만한 형이상학>과 <말류의 기복적 정토의식>이었다. 전자에 나타난 대결의식은 다음과 같은 캐치프레이즈에 잘 나타나 있다. “경전과 문자에 의지하지 아니하고(不立文字 敎外別傳), 마음의 본질을 곧바로 드러내어(直指人心), 궁극적인 열반을 열겠다(見性成佛).” 이에 비해 후자에 대한 선의 비판적 태도는 아무래도 덜 알려져 있다. 선의 정신을 간명하게 정식화한 <돈오점수(頓悟漸修)>는 특히나 정토의 의타(依他) 불교를 의식하고 제창한 것이다.35
선종이 산만해져버린 대승불교와 기복적인 정토 사상의 타파를 위해 나섰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고 실재로 선의 발흥은 그런 능동적인 자각과는 거리가 있다. 안사의 난이나 황소의 난 등 반란과 이후 일어난 대규모의 회창폐불會昌廢佛(845∼847)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도시 지역에 뿌리를 두었던 정토종을 비롯한 교종계열의 종파들은 이 법난法難으로 초토화 되었던 것이다. 산악 불교의 성격을 지닌 선종은 교학을 중시하는 다른 종파의 쇠퇴를 틈타 오히려 크게 세력을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선종교단禪宗敎團은 종래의 전통적인 율원律院에서 독립 새롭게 제정된 선원청규禪苑淸規에 의해 수행생활을 하였을 뿐 아니라 출가승들이 직접 생산노동에 참여하여 자급자족하는 생산적인 교단이었다. 이것은 불교 역사상 그 유례가 없었던 일로 일종의 종교개혁宗敎改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선종의 사상적인 입장을 한 마디로 하자면 ‘인간관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500여년 뒤 서양에서 일어난 “르네상스Renaissance”36를 연상시키는 일종의 “인문주의人文主義” 운동인 것이다. 종래의 전통적인 왕실 및 귀족사회의 형식적인 의례나 권위주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인간에서 부처로 그리고 다시 인간으로
부처에서 인간으로 그 축이 이동하면서 운문의 <간시궐>은 굳이 부처를 폄하하려 하였다기 보다는 그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이라는 자각에서 자연스레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부처라는 절대자의 문제이기 보다는 인간의 문제라는 불교 초기 석가모니의 고민으로의 회귀라고 볼 수도 있는데,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현란한 사상들을 털어내고 석가모니의 본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철저한 부정이 있을 때 우리는 진짜 부처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III. 참구參究
운문은 부처를 똥 막대기쯤으로 여겼다. 부처는 더럽고 지저분한 물건이라고 한 것이다. 그럼 과연 부처란 무엇인가?
운문대사의 이 같은 대답은 가장 청정한 것을 가장 부정(不淨)한 것으로 대치한 것이 되어 신성모독이라고도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승의 정통적 견해인 ‘번뇌 즉 보리’ 바로 그것이라 할 수도 있으니, 간시궐이 번뇌의 비유인 데 대해 보리의 실현자는 곧 부처님이기 때문이다.37
이어 일체의 분별을 배제하고 <간시궐>을 참구參究하여, <간시궐>이 바로 부처님이어서 온몸으로부터 방광하고 있음을 실증實證할 때에만 이 공안은 풀릴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런 논리적인 문제는 접어두고 <간시궐>에 대한 여러분의 즉각적인 견해를 밝히시라. 막망상莫妄想!
IV. 감상感想
1.
남문 서문 동문
ASH Rise Against
기타로 오토바이를 탄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춤추는 군중 속에
훅훅 진한 여름 무더운 땀 냄새가 인다.
무의식이 열기를 뚫고 파도친다.
그들은 왜 그곳에 서 있는가?
Enter the Sandman
바람이 분다.
2.
잔디 사이로 풀들이 자란다.
어느새 풀들 속에 잔디가 자란다.
우리는 간간이 잊는다.
우리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누구나 아는 일을 비비꼰다.
우주의 모습!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
乾屎橛!
V. 참고한 책과 글
1) 탱문주호撑門拄戶는『무문관無門關』17칙에 나온 ‘탱문병주호撑門幷拄戶’와 같은 말로 ‘撑拄門戶’의 뒤바뀐 표현이다. ‘撑拄’는 떠받치다, 의지하다, 지탱하다는 뜻이고, ‘門戶’는 문, 당파, 출입문을 뜻한다.
2) 선도회 금수산 영하산방, [무문관 無門關 읽기]「제15칙 동산삼돈洞山三頓」.
3) 선도회 금수산 영하산방, [무문관 無門關 읽기]「제18칙 동산삼근洞山三斤」.
4)「乾屎橛」은 “막대기 모양의 똥”이란 뜻. 예전에 “똥 휘젓는 나무 주걱”으로 해석했으나 이리야(入矢)선생의 새 해석에
따른다. (秋月龍珉 · 秋月眞人 著, 慧謜 譯, 『선어록 읽는 방법』 p. 141).
5) 無門慧開, 鄭性本 譯註,『무문관無門關』 p. 189.
6) 김용민,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 학예연구관 실장.
7) EBS 지식채널e, 2012.03.16.방영,「인기 직업」.
8) www.himal.kr/林玄潭,「간시」에서 인용.
9) 제패稊稗: [식물]볏과에 속한 한해살이풀. 높이는 1미터 정도이며, 잎은 벼와 비슷하여 좁고 길다. 여름에 담녹색 또는 자갈색의 이삭으로 된 꽃이 피고, 가시랭이가 있는 열매는 먹거나 사료로 쓴다. 환경 적응성이 커서 척박한 땅에서도 잘 견디므로 옛날에는 구황 작물로서 많이 재배하여 왔지만 최근에는 그 재배를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아시아 원산으로 우리나라, 중국, 일본, 인도, 유럽, 미국이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재배되고 있다. 학명은 Echinochloa crusgalli var. (국어사전). 여기서는 앞의 예에서처럼 대구로 보아 두 글자로 나누어, 稊는 볏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인 돌피나 가라지 또는 기장으로, 稗는 논에 자라는 피로 해석하였다.
10) 東郭子問於莊子曰: “所謂道, 惡乎在?” 莊子曰: “无所不在.” 東郭子曰: “期而後可?” 莊子曰: “在螻蟻.” 曰: “何其下邪?” 曰: “在稊稗.” 曰: “何其愈下邪?” 曰: “在瓦甓.” 曰:“ 何其愈甚邪?” 曰: “在屎溺.” 東郭子不應. 莊子曰: “夫子之問也, 固不及質. 正獲之問於監市履狶也, 每下愈況. 汝唯莫必, 无乎逃物. 至道若是, 大言亦然. 周遍咸三者, 異名同實, 其指一也.”(『莊子』「知北遊篇」).
11) 도올 김용옥 지음,『話頭, 혜능과 셰익스피어』 p. 87.
12) 오경웅吳經熊 지음, 류시화 옮김,『선의 황금시대』 pp. 139~141.
13) 或云: “過在什麼處, 得與麼難。” 代云: “辨。” (『雲門匡眞禪師廣錄 卷中』)
14) 영평도원(永平道元, 1200. 1. 19 교토[京都]~ 1253. 9. 22 교토) 선사는 일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92-1333)의 유명한 승려다. 조요 대사[승양대사承陽大師], 기겐 도겐[희현도원希玄道元]이라고도 한다. 선禪을 조동종曹洞宗의 형식으로 일본에 소개했다. 창조적인 개성의 소유자로서 좌선과 철학적 사색을 결합시켰다. 황실 귀족 출신으로 7세에 고아가 되었고 13세에 출가하여 천태종의 중심지인 히에이 산[比叡山]에서 불경을 공부했으나 그의 영적 갈망을 채우기에는 불충분했다. 1223~1227년에는 중국에서 선을 공부했고 선승 여정如淨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여러 사찰을 전전하면서 좌선을 전파했으며, 나고야[名古屋] 북서쪽에 에이헤이 사(永平寺)를 짓고 거기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첫 저작인『보권좌선의普勸坐禪儀(후칸자젠기, 1927)』에서 좌선을 소개하였으며, 그밖에 지침서도 많이 썼다. 대표작인『정법안장正法眼藏(쇼보겐조, 1231~1253)』은 총 95장으로 20년 이상 걸려 집필한 것인데, 불교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책이다. 그는 지관타좌只管打坐, 곧 좌선전수坐禪專修를 열심히 할 것을 가르쳤으며 수행과 깨달음의 합일을 강조했다.
15) 스즈키 순류 지음, 최세만 옮김,『禪으로의 초대』 p. 64.
16)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선언하셨다. 이에 운문은 말했다. “내가 만일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일격에 쳐서 개밥으로 던져주었을 것이다. 그래야 천하가 태평하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공헌을 했을 것이다.” 問, 世尊初生下,一手指天,一手指地,周行七步,目顧四方, 云, “天上天下,唯我獨尊” 師曰, “我當時若見, 一棒打殺與狗子吃卻, 貴圖天下太平.”
17) 問: “如何是靈者。” 師云: “淨地上屙一堆屎。” 學云: “請和尙的旨。” 師云: “莫惱亂老僧。”
18) 무불선원無不禪院 석우石雨 스님의 조주록 강의에서 인용.
19) 강신주「10. 운문시궐(雲門屎橛)」, 법보신문 1187 호 / 발행일 : 2013-03-20.
20) 선림고경총서 18, 백련선서간행회 편,『조주록趙州錄』 p. 164. 師與小師文遠論義,不得占勝,占勝者輸胡餅。師云: “我是一頭驢!” 遠云: “我是驢胃。” 師云: “我是驢糞。遠云: “我是糞中蟲。” 師云: “你在彼中作麼?” 遠云: “我在彼中過夏。” 師云: “把將胡餅來。”
21) 스즈키 순류 지음, 최세만 옮김,『禪으로의 초대』 p. 168.
22) 오경웅吳經熊 지음, 류시화 옮김,『선의 황금시대』 p. 140.
23) 오경웅吳經熊 지음, 류시화 옮김,『선의 황금시대』 p. 147.
24) 한형조 지음,『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p. 128.
25) 인경, [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63. 운문화상의 마른 똥막대기」, 법보신문 1056 호 / 발행일 : 2010-07-13.
26) 한형조 지음,『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p. 128.
27) 한형조 지음,『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pp. 129~130.
28) 베다Veda는 고대 인도의 브라만교의 근본 경전.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신의 계시를 시적詩的으로 저술한 것이다. 음역어는 ‘폐타吠陀’이다. 우파니샤드Upanisad는 가장 오래된 힌두 경전인 베다를 운문과 산문으로 설명한 철학적 문헌들. 실재의 본성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어 최고의 유일한 존재에 대한 관념이 형성되고 있으며, 지식은 그것과 재결합하는 데 있어서 직접적 수단으로 중시된다. 인도 철학과 종교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음역어는 ‘우바니사토優婆尼沙土’이다.
29) 6세기경 인도에서는 전통적인 브라만교에 대항하는 다양한 혁신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숲속에서 수행하였는데 그들을 사문(沙門, 遊行者)라 불렀다. 부처님 당시의 대표적인 사상들을 흔히 六師外道라고 부른다. 한자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섯의 다른 스승들이 가르치는 불교 밖의 가르침들을 뜻한다. 6사라고 해서 '사邪 '자를 떠올리며 그릇된 가르침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 푸라나 카삿파(Purana Kassapa)는 도덕 부정론자이다. 그는 아무리 몹쓸 행동을 해도 그것이 악이 아니며, 그 행동의 결과 죄의 과보를 받는 일도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 아지타 케사캄발라(Ajita Kesakambala)는 유물론자로 유명하다. 그는 사람도 지, 수, 화, 풍 사대가 일시적으로 모여 있을 뿐이므로 죽으면 지수화풍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고 주장했다. 인간에게는 선악업에 따르는 과보도 없고, 현세와 내세도 없으며, 심지어는 부모도 없고, 태어나서 죽는 존재도 없다. 오직 사대라는 물질적 요소의 이합집산만 있을 뿐이다.
㉢ 파쿠다 캇차야나(Pakudha Kaccayana)는 기계적 불멸론을 주장했다. 아지타의 사대설에 의하면 고락의 감정이나 인간의 생명현상은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그렇다면 고락의 감정이나 생명현상을 이루는 요소는 없다는 것이 된다. 파쿠다는 없는 것은 생길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苦, 樂, 生命을 사대와 마찬가지로 요소로 보고 7요소설을 세웠다. 이 세상은 불멸하는 7요소가 기계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세계를 요소들의 우연한 결합으로 우연론(무인무연론)은 허무주의적이고 윤리관을 상실한 채 쾌락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막칼리 고살라는 이런 윤리관 상실과 쾌락추구적인 요소를 해결하려고 했다.
㉣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는 결정론적 숙명론자이다. 그에 의하면 이 세상은 요소가 우연히 이합집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이합집산하므로 인간의 삶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일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막칼리는 7요소에 물질이 이합집산할 수 있는 공간과, 이들이 모이는 법칙과 得과 이들이 흩어지는 법칙인 失, 그리고 사람이 태어나는 법칙인 生과 죽는 법칙인 死의 다섯 가지를 추가하여 12요소설을 세웠다. 인간의 운명이나 사물의 생멸은 자연법칙에 의해 이들 요소가 결합된 것이기 때문에 생기고 없어지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자연법칙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막칼리 고살라가 바로 그와 같은 사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 산자야 벨라티풋타(Sanjaya Belatthiputta)는 회의론자이다. 그는 철저하게 감각적인 경험만으로 판단했다. 당시의 사문들은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경험에 의지하여 업보와 내세를 부정하고 있었는데, 산자야는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논의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세를 경험할 수 없는데 어떻게 내세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철저하게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경험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진리 그 자체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회의론에 빠져 있었다. 그는 그런 문제는 알 수 없으므로 어떤 주장을 하든지 관심이 없었다. 누가 이런 문제를 물으면, 그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는 괴변으로 문제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이런 문제로 고민하기 보다는 현실에서 어떻게든 쾌락을 얻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 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 Nataputta)는 고행주의자이다. 그는 자이나교의 창시자로서 세존과 같은 왕족 출신이다. 그는 세존처럼 혼란한 사회를 구원할 생각으로 출가하여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전생의 업에 의해 현생에 받을 괴로움이 결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생에서 받을 괴로움을 미리 받아버리고, 새로운 업을 짓지 않으면 생사의 윤회에서 저절로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따라서 그는 고행을 통해 해탈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업실체론) (근본불교, 이중표, 민족사)
30)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인용.
31) 붓다가 입멸한 후 100년경에 바이샬리(vaiśālī)에 거주하던 비구들이 내세운 계율에 대한 열 가지 그릇된 주장으로, 제2차 결집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됨. 열 가지 항목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1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 염정鹽淨. 비구는 어떠한 음식도 비축해서는 안 된다는 계율에 대하여, 소금만은 비축해도 된다는 주장.
2) 이지정二指淨. 정오가 지나면 먹어서는 안 된다는 계율에 대하여, 정오가 지나 그림자의 길이가 손가락 두 마디 이내에서는 먹어도 된다는 주장.
3) 취락간정聚落間淨. 한 취락에서 탁발하여 한 번만 먹어야 한다는 계율에 대하여, 식사를 끝내고 다른 취락에 가서 탁발하여 또 먹어도 된다는 주장.
4) 주처정住處淨. 정해진 곳에서만 포살布薩을 행해야 한다는 계율에 대하여, 임시로 다른 곳에서 그것을 행해도 된다는 주장.
5) 수의정隨意淨. 정족수定足數에 미달될 때는 갈마羯磨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계율에 대하여, 정족수에 미달되더라도 나중에 불참한 비구의 승낙을 예상하고 갈마를 행해도 된다는 주장.
6) 구주정久住淨. 선례先例에 따른다는 뜻으로, 스승의 습관적인 행위를 따르면 계율에 위배되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
7) 생화합정生和合淨. 오후에는 먹지 말라는 계율에 대하여, 오후에 우유는 마셔도 된다는 주장.
8) 수정水淨. 술 마시지 말라는 계율에 대하여, 채 술이 되기 전의 야자즙은 마셔도 된다는 주장.
9) 불익루이사단정不益縷尼師壇淨. 이사단尼師壇은 산스크리트어 niṣīdana의 음사로 좌구坐具를 말함. 좌구에 테두리를 붙이지 않고 마음대로 좌구의 크기를 정해도 된다는 주장.
10) 금은정金銀淨. 어떠한 것도 비축해서는 안 된다는 계율에 대하여, 나중에 옷이나 약을 구입할 용도로 금이나 은을 받아 비축해도 된다는 주장. (십사비법十事非法, 시공 불교사전, 2003.7.30, 시공사)
32) 한형조 지음,『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pp. 128~129.
33) 행하기 쉽고 깨닫기 쉬운 교법.
34) 권오민,『인도철학과 불교』에서 발췌.
35) 한형조 지음,『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pp. 131~132.
36) ‘르네상스’라는 명칭은 16세기 이탈리아 문학사가였던 조르지오 바사리가 그의 저서『위대한 예술가들의 생애』에서 처음 사용한 이래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유럽의 문화현상을 지칭하는 명사로 정착되었다. 르네상스는 어원학적으로 볼 때 ‘다시 태어남’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명사인 ‘Rinascimento’로서 이는 ‘태어나다nascere’라는 이탈리아어 동사인 ‘다시’라는 의미의 접두사인 ‘ri’를 붙여 이를 명사화 한 것이다. 14~16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 혁신 운동으로 중세기의 기독교로부터의 속박에서 벗어나 개인과 개성의 해방, 자연인의 발견 등을 추구하였고,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으며, 근대화의 원류가 되었다.
37) 이원섭 지음,『깨침의 미학』 p. 63.
첫댓글 무상총무님!그저 꾸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