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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6 편(다윗의 믹담) : 조각, 편, 단가(짧은 노래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다섯 단계의 믿음 중에 최고경지의 믿음을
시110편의 다윗의 믿음으로 예시하셨고(마22:44) 또 베드로도 오순절 성령의
그 실제적인 의미를 설명할 때에 이 시편 두 곳을 인용했습니다(행2:25-28,34-35)
따라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 제사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를 항상 앞에 모시는 믿음은 다윗의
믿음을 따르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로마서를 통해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은 믿음의 복을 얻었다면(롬4장) 히브리서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따라 은혜의 보좌로 향하는 길을 확보하여 다윗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될 겁니다.
1절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주님 품에 안기듯 피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고 그 분께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뛰어 들면서 안기듯 신자가
다윗처럼 하나님의 품에 나아가는 것은 큰 복입니다. 만약 이렇게 되고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안 되면 말씀을 듣고 또 들어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신의 믿음을 고정시키고 어디 한 번
들어보자는 식으로 말씀을 들어서는 평생 이와 같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되어 그 믿음으로 다윗처럼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아야 제대로 된 들음 곧 Hearing이 아니라 Listening이 됩니다.
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는
여기서 복은 ‘좋고 귀한 것, 보배, 선한 것’ 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복이란
추상명사이기에 어떤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일 뿐 무엇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은 이미 중심을 잃은 믿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다윗처럼 아주 평범한 말이 진실하게 나오면 찬송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하는 찬송을 보면 하나도
고급스러운 말이 없으나 많은 이들이 자주 부르는 찬송입니다. 부부간에도
당신이 최고야, 멋있어, 난 당신밖에 없어 등의 꾸밈없는 말들이 더 정답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기도가 평범해지고 소탈해 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해들은 말로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미국에 있는 한 장로가 한명회
테이프를 6개 구해서 하루 저녁에 다 보고 난 다음 그 다음 주일 날 대표기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여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과거 대구의 S장로도
대표기도에 ‘하나님 아버지 만수무강하옵소서’라고 해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런 어휘를 써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1절과 같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면 2절과 같이 오직 복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복을 받고 하나님이 복이십니다 하고
찬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은 고요하고 평온함을 하나님 품안에서 누릴 수 있음이 곧 복입니다(시131)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칭찬할 수 없으니 찬양을 드리는 겁니다.
3절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성도는 1절과 같이 하나님의 품으로 피하는 자들입니다. 의인들의 모임, 장자들의
총회,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 참 존귀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주시며
모든 나의 모든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관심이 있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가는 것이 곧 성령의 사람입니다. 지체의식입니다.
성령 체험한 증거 중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선교성과 그리스도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임재성과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다 하나임을 아는 지체성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의 성도들이 다 하나에서 난 자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4절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이는 3절과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들에게는 괴로움이 옵니다. ‘피의 전제를 드리며’ 심청이처럼 통째로 던지는
제사를 말합니다. 다윗은 이런 것은 입도 벙긋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좋은 것이 다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큰 기쁨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옛 성경에는 극락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시43:4)
그러나 교회에 오면 하나님이 최고인 양하지만 교회 문을 나서면 세상과 세상의
것들이 즐거워서 죽겠다고 말하는 하이브리드 신앙이 이 세대에 가득합니다.
5절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이라는 말씀은 상속이나 유산 또는 기업이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인생의 총 자산은 여호와뿐입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업이라고 말합니다(엡1:11,14)
그 다음 '나의 잔'은 이익, 배당금 또는 소득을 말합니다. 상속은 받은 것이고
소득은 내가 얻은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는 밑천이고 남긴 다섯은 소득인 것과
같습니다. 한 므나는 자본이며 남긴 므나는 소득인 것과 같은 말입니다.
바울에게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총자산이고 그로 인해 남는 소득도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는 확보된 기업, 땅 등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지파 별로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누듯이 그 제비
뽑은 땅은 이미 확보된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확보한 것은 구원, 영생,
거룩한 백성, 천국시민권, 새 예루살렘,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몫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신앙의 분깃을 챙겨 주신 것들입니다. 단, 하나의 조건은
그 분 곧 주께 피하는 길을 알고 그 분 안으로 피하는 자에게 이런 복이 주어집니다.
여호와는 나의 상속이며 나의 소득이요, 나의 인생 중에 획득한 총 소득이시며
장래의 분깃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의 영원한 보장이십니다.
나의 퇴직금도 주님이시고 나의 은퇴자금도 주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우리의 신앙의 목적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6절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줄로 재어준 구역'은 분깃, 곧 몫을 말합니다. 유목민족에게 있어서 분깃은
바로 생명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영토 문제로 분쟁하는 것을
보면 이 분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농사의 비중이 절대적일 때에
농촌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전옥답과 같은 것이 바로 줄로 재어 준 구역입니다.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너무 너무 좋고 아름답고 만족스럽다는 의미입니다.
찬송가 중에도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또 ‘저 밝고도 묘한 시온성
향하여 가세 내 주의 찬란한 성에 찬송하며 올라가세’ 그리스도 안이라는 줄로
재어 준 구역 안에 우리가 있고 그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시고
항상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다운로드 받으며 섬길 수 있는 것이 큰 복입니다.
6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점점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말씀을 받은 이후부터 기도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계시의 영은 점진적으로 밝아지기 때문입니다.
7절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시도다"
나를 훈계 곧 징계하고 책망하시는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 한다는 말씀은 성령의 책망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이와 같을 일을 하시는 여호와를 송축하고 있습니다. 가정교사인 성령의
가르치심과 생각나게 하심을 귀중하게 받아들이는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도
이와 같습니다. 항상 깨어서 근신하여 주께 순복하며 주님을 따릅니다.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시고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따라 가므로 닮아갑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편이 되어 주십니다. 우편은 하나님의 의나 권세를 의미합니다.
사실 하나님께 의로 인정하시는 그 자체가 우리의 권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면 성령께서 역사하여 그 힘과 능력으로 붙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9절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한다고 노래합니다.
한 마디로 Everything is Ok입니다. 완전한 구원과 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예수의 날까지 영과 혼과 육이 온전히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전인간적인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0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8절과 같은 영적인 상태가 오면 9절의 복이 따라오고 그 다음 10절과
같은 강한 확신이 섭니다. 주님이 ‘아버지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고백하신 것처럼 다윗도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 우리의 믿음의 선배입니다(요10:27-30, 롬8:31-39참조)
이와 같은 다윗의 확신이 우리의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1절부터
전체 맥락을 자세히 따라가면 신앙의 발전이 계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1절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 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생명의 길은 곧 영생의 길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이를 알도록
계속 빛을 비추십니다. 그래서 점점 밝게 봅니다. 주의 앞에는(얼굴 앞에는)
기쁨이 넘치고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생명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성도가 그 노중에서 받는 복입니다. 따라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분의 품으로 피하는 방법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다시 한 번 요한복음과 로마서 히브리서를 파악하라고 강력하게 추천을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영광을 입히신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