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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산(九山秀蓮, 1909~1983) 스님 >
구산(九山) 스님은 1909년 전북 남원군 남원읍 내척리에서 부친 소재형(蘇在衡), 모친 최성녀(崔姓女),
두 분 사이 4남 2녀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소봉호(蘇鋒鎬), 어려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한학을 공부하다가,
1923년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가사를 책임지기 위해
남원 용성보통학교 정문 앞에서 명치(明治)이발관을 운영했다.
부처님 10대 제자로 이발사 출신인 지계제일(持戒第一) 우바리 존자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법명은 수련(秀蓮), 법호는 구산(九山), 별호(別號)는 석사자(石獅子), 타우자(打牛子),
별명은 우바리 존자이다.
20대 후반에 병고가 찾아와 생사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 방법을 찾고자 했다.
지인(知人)의 권유로 지리산 영원사(靈源寺)에서 100일 동안 천수기도(千手祈禱)를 드린 뒤 병이 나았다.
1937년 28세에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효봉(曉峰, 1888~1966)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사미계를 받았다.
1940년 31세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해담(海曇, 1862~1942)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그 뒤로 송광사 삼일암 선원, 운문사 선원, 통도사 백련암, 청암사 수도암 등에서 정진했다.
1946년 해인사에 가야총림이 개설되고, 은사 효봉(曉峰) 스님이 방장으로 추대되자 도감 소임을 보았다.
※도감(都監) ― 사찰에서 돈이나 곡식 같은 것을 맡아보는 직책.
1951년 효봉 스님에게 전법게를 받고 법맥(法脈)을 이었다.
1953년 통영 미래사(彌來寺)를 창건해 은사 효봉 스님을 모시고 수행하며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정화불사의 당위성을 알리는 500자 혈서(血書)를 쓰기도 했다.
이후 전남 종무원장(1955), 조계종 중앙감찰원장(1956, 1967), 중앙종회의원(1960~1967),
팔공산 동화사 주지(1962년) 등의 소임을 보면서 정화불사를 완성하고
종단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 헌신했다.
1957년 광양 백운산(白雲山, 1222m) 상백운암(上白雲庵)에서 안거를 하고,
1966년에는 세계불교승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69년 5월 30일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개원되자 초대 방장으로 추대됐으며,
같은 해 불일회(佛日會)를 창립해 총재 겸 총회장을 맡는 등 불교대중화에 적극 나섰다.
1973년에는 조계총림 불일국제선원(佛日國際禪院)의 문을 열고,
미국 LA 고려사(1979), 스위스 불승사(1982)를 창건하는 등 한국불교 세계화에 기여했다.
특히 송광사에 있었던 불일국제선원에는 많은 외국인 수행승들이 다녀갔다.
2023년 10월 조계총림 송광사 초대방장 구산 스님 열반 40주기 추모 행사를 펼치면서 제자들은,
구산 스님의 가르침에 수많은 외국인이 출가한 사실에서 간화선 세계화⋅대중화의 답이 있을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스님의 선사상과 행적을 집중 조명하는 학술대회 및 심포지엄에
미국, 독일, 덴마크 등 8개국 출신 구산 스님의 외국인 제자 12명과
그분들의 제자를 포함해 총 30명이 이번 행사에 참여했고,
이들 제자들이 직접 구산 스님과의 인연담을 발표하고 학술적으로 조명하는 귀한 자리를 만들었다.
그만큼 구산 스님의 간화선의 세계화에 기여한 공로가 빛났다.
또 송광사 여름수련회는 대입시를 방불케 할 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합격 통보를 받기 위해서는 왜 참석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연과 얼마나 깊은 불심을 지녔는지를 읍소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을 재수한 끝에 겨우 참가할 수 있었다.
반세기를 지난 지금도 1971년에 시작한 송광사 여름수련대회가 여전히 열리고 있으니,
이것은 재가자 교육을 위해 수련회를 시작한 구산수련(九山秀蓮) 스님의 법력이자 원력으로 볼 수 있다.
1983년 은사 효봉 스님의 유훈을 계승해 제2 정혜결사운동을 발원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구산 스님은 조계총림 삼일암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납 47년이었다. 살아서는 은사이신 효봉 스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음에 칭송이 자자했으니,
아마 원적에 드신 후 또한 가까이 가셨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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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간화선에 밝으신 구산 스님의 참선에 대한 간명한 해설이다.
수행자에겐 많은 도움이 될 것임을 굳게 믿고, 귀한 자료라서 가감 없이 그대로 옮겼다.
― 구산(九山) 스님의 <화두 참구법(話頭參究法)> ―
◇ 초심자(初心者)에게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육단심(肉團心)이 동(動)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욱"하는 마음인 육단심이 동하면 상기병(上氣病)이 나기 쉬우니
상기가 되지 않도록 기식(氣息)을 잘 조절해야 한다.
입지여산立志如山) 하고 안심사해(安心似海)라
그 뜻은 태산과 같이 굳게 세우고도 마음은 바다와 같이 안정(安靜)해야 한다.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에 움직이지 아니하고 천 가지 만 가지의 의심을
오직 "이 뭣고"라는 화두(話頭)에 집중시켜 되돌려야 한다.
이렇게 하여 공부가 점차 깊어지면 정식(情識)이 자연히 희박해진다.
정감(情感)은 망상이요 화두는 진성(眞性)이기 때문에 화두가 순일(純一)해지면 망상이 자연히 사라진다.
이 경지에 이르면 여롱여치(如聾如痴)라,
귀머거리와 같고 바보 같아서 봐도 보는 것이 아니요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경계가 오면 기뻐하지도 말고 자나 깨나 앉으나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오직 화두(話頭)만을 일념(一念)으로 참구해야 한다.
깨달음을 얻기란 광석(鑛石)을 제련(製鍊)하여
순금을 잡아내는 것처럼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약간의 두통이 생겨도 참고 육체적으로 피로나 고통이 와도 참고 견디어야 한다.
화두를 잡을 때에는 흐르는 물에 배를 거슬러 밀고 올라가듯 전력을 다해야 한다.
망상만 심하게 끓어오를 때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포행(布行)하라.
그러면 망상이 저절로 가라앉고 화두가 다시 성성(惺惺)해진다.
이때에 화두가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느 때는 얼음 위에서 배를 밀듯 술술 나가고,
어느 때는 우물 안에 소를 몰아넣는 것처럼 화두를 잡으면 다시 빠져 나가고
또 잡아도 자꾸만 빠져 나간다.
이렇듯 어려울 때도 그저 끊임없이 화두를 잡고 나가면서
죽을 판 살판 애써 정진(精進)하게 되면 화두는 점점 익어진다.
익은 망상은 설어지고 설었던 공부는 익어져서 화두가 서서히 수중(手中)에 들어오게 된다.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선근(善根)이 익어지고
어느덧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오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옛 부처나 조사(祖師)들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이토록 갖은 노력을 다 했던 것이다.
석가세존은 싯달태자(悉達太子)라는 왕자였다.
그러나 그는 부귀와 영화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야수다라와 같은 아내도 버리고
영원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 히말라야 설산(雪山)으로 들어갔다.
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갖은 고행(苦行)을 하면서 하루에 보리알 하나로 연명(延命)하기도 했다.
드디어 보리수나무 밑 금강보좌(金剛寶座)에 앉았다.
그리고 한번 앉은 자리에서 6년간 고행했다.
이것은 한번 먹은 마음을 변치 않고 정진(精進)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그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신 것이다.
이분을 석가모니 부처님이라 한다. 석가세존(釋迦世尊)은 인간뿐만 아니라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요 삼계(三界)의 스승이신 대도사(大導師)가 되신 것이다.
우리도 이와 같이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달아 완전(完全)한 인격을 성취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정진해야 하지 않겠는가?
◇ 화두참구법(話頭參究法)
옛날 중국 당(唐)나라 때 조주(趙州)라는 스님이 계셨는데 고불화현(古佛化現)이라 칭송받았다.
그는 눈을 뜨면 안광(眼光)이 사천하(四天下)를 비추는 스님이었다.
어느 날 운수납승(雲水衲僧)이 방장실(方丈室)에 잦아가서 조주(趙州) 스님에게 물었다.
“불교의 참뜻이 무엇입니까(如何是佛法 的的大意)? ”
조주 스님이 대답하시기를,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했다.
그러면 불교의 참뜻을 물었는데 어째서 "판자 이빨에 털이 났다"하는고?
판치는 위 앞 이빨 넓적한 것을 말한다. 거기에 털이 났다는 말이다.
참선(參禪)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화두를 들고 정진할 때에 불교의 참뜻을 물었는데,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으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려야 한다.
불조(佛祖)는 언제나 직설(直說)을 한다.
그러나 이 직설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의심을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우주의 대진리를 터득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조주 스님이 "판치생모"라 말하기 이전에
무슨 생각이 있어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 한마디에 척! 깨치면 그 순간 부처의 경지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하고,
이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부처와 조사를 잡아 거꾸러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깨치지 못한다면 의심을 하지 않으려야 않을 도리가 없다.
모르면서 의심마저 하지 않으면 이것이야말로 큰 병이다.
판때기 이빨에 털이 났다니 이 무슨 뜻인고?
간절히 의심을 일으키면 온갖 생멸심과 분별심이 여홍로일점설(如紅爐一點雪)이라,
불 속에 떨어진 눈송이같이 사라져 버린다.
다시 말하자면 천만 가지 번뇌 망상이 용광로에 한 점 눈이 떨어진 것처럼
다 녹아 버린다는 말이다.
"판치생모[(齒生毛)"를 들 때에 마음을 잡도리하되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갔으니 잊어버리고,
앞으로 다가오지 않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앞과 뒤가 딱! 끊어지면[전후제단(前後際斷)] 마음이 텅 비게 된다.
그러나 공(空)한 것 또한 일으키지 말라. 지키지 않는다는 생각도 잊어버리고,
잊어버린다는 그 생각마저도 벗어나라. 그리하여 벗어난다는 그 생각도 두지 말라.
다만 "판치생모"가 무엇인고? 하는 의심만 계속하게 되면
머지않아 화두(話頭)가 명백하게 들리면서 환하게 자기 본래의 영광이 나타난다.
평생에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영광(靈光)이 환하게 드러나니
온 몸이 허공에 뜬 것처럼 가볍고 깨끗해진다.
그러나 이 상태를 깨친 줄로 착각하기 쉬우니 그때에 씽긋이 미소(微笑)할 뿐 계속하여
공부를 하되 "이러한 것도 있구나" 짐작하고 입을 봉해라.
그때부터 가도 의정(疑情)이 가고, 와도 의정(疑情)이 오고,
밥을 먹고 옷을 입어도 그대로 온 우주가 의정 한 덩어리로 돼야한다.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 등 우주 전체가 그냥 의정 한 덩어리로 되어갈 때가
"생사(生死)" 이 두 글자를 떼어 놓고 용맹정진으로 공부하는 때라,
한 시간 두 시간 내지 너덧 시간을 앉아 있어도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화두는 흩어지지 않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느니 이때가 바로 좋은 시절이다.
얼굴도 청백(淸白)해지고 자득기묘(自得其妙)라, 도(道)에 들어가는 맛을 스스로 알게 된다.
그러나 그때가 마침 좋은 시절이기는 하나 알았다는 생각을 하고
함부로 말을 하거나 미친 짓을 하면 도리어 공부에 큰 마장(魔障)이 온다.
그때에 식심(識心)이 맑아져서 무슨 말이 터져 나오려고 해도 참고,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오직 화두만을 밀고 들어가되
처음으로 공부를 배우는 것처럼 화두를 간절히 참구하라.
늙은 쥐가 쇠뿔 속에 밀고 들어가듯이 뽀드득 뽀드뜩 마음으로 조이며 들어가기를
한 7일 내지 2·7일 또 3·7일이면 홀연히 칠통(漆桶)은 타파되고 언어도(言語道)가 끊어지며
심행처(心行處)가 멸해 본지풍광(本地風光)이 환하게 드러나게 된다.
조주(趙州) 스님이 이래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면서 불조(佛祖)를 잡아 거꾸러뜨리는 때가 바로 이때이니라.
아무리 확철대오(確徹大悟)했더라도 무식한 사람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말고
눈 밝은 본분종사(本分宗師)인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고 탁마(琢磨)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석류수불유 월명조처유
石流水不流니 月明照處幽로다
화소불면홍 조제연법구
花笑佛面紅하니 鳥啼演法謳로다 돌! ---- 啼 울 제, 謳 노래 구
돌은 흘러가도 물은 흐르지 않고
달이 밝아 비친 곳마다 그윽하네.
꽃이 피어나니 부처님 얼굴이 붉고
새 우는 것이 그대로 법문일레라.
사람마다 모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자성(自性)은 부처님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각기 다른 업연(業緣)을 따라 육도(六途)에 윤회(輪廻)하기 때문에
다른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근본 이치에서 본다면 일체가 본래불(本來佛)이며 본래청정(本來淸淨)인 것이다.
세존께서 우주가 본래청정하여 차별이 없는 불이법(不二法)을 설하시니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물었다.
“본래 그렇게 청정하다면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생겼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본래 그렇게 청정하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생겼으리요.” 하셨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르기를,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인데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하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니라.
‘만일 누구든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 싶으면
먼저 마땅히 자기 마음의 체성(體性)을 요달(了達)해보아라
모든 것이 마음의 조화(造化)임을 알게 되리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
心佛及衆生이 是三無差別이라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고 했다.
<원각경(圓覺經)>에 이르기를,
차여소금광 금비소고유 종이소성취
此如銷金鑛하야 金非銷故有나 終而銷成就로다.
일성진금체 불부중위광
一成眞金體하면 不復重爲鑛이로다.
참선(參禪)하는 것은 마치 번뇌의 광석을 제련(製鍊)하는 것과 같다.
금(金)을 용광로(鎔鑛爐)에 제련한다고 없는 금이 생긴 것은 아니다.
결국 광석을 제련해야 순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번 제련하여
순금을 얻게 되면 그 순금(純金)이 다시는 광석(鑛石)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금강경金剛經>에 이르기를,
범소유상 개시허망
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若見諸相非相하면 卽見如來니라
‘무릇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허망하기는 하나
만일 모든 상(相)을 비상(非相)으로 보면 곧 여래(如來)를 본다.‘고 했다.
여래(如來)]란 무슨 말인가? 여여래래(如如來來)란 말이다.
이렇게 왔다는 말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이러하다는 말이다. 이러하다는 말은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부처님을 여래(如來)라고 부른다.
우주가 생기기 그 이전부터 한 물건(一物) 있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자성自性이니, 구시인(舊時人)이니, 무위진인(無爲眞人)이니,
무저선(無低船)이니, 격외인(格外人) 등 갖가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십세고금수시친 담연일물본래진
十世古今誰是親가 湛然一物本來眞이라
개화낙엽근유일 일월거래절왕환
開花落葉根唯一이나 日月去來絶往還이로다
십세 고금에 어떤 것이 참된 나인가 청정한 한 물건이 진정한 나일세
꽃피고 잎 지나 그 뿌리는 하나라 해가 뜨고 달이 져도 오고감이 없구료.
과거 삼세(三世)와 현재 삼세(三世)와 미래 삼세(三世)와 삼세를 통한
일세(一世)를 십세 고금(十世古今)이라 한다. 이 길고 긴 세상에 누가 나와 가장 친한 사람인가?
내 마음속의 담박한 이 일물[一物]이야말로 어디에도 비유할 수 없는
"참 나"인 것이다.
세월 따라 산천초목(山川草木) 잎과 꽃이 피어나고 열매가 여물었다
다시 떨어지고 올 봄에도 또다시 피고 지고 변하여도
그 뿌리 언제나 변함이 없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떴다 지니 밤과 낮이 반복되어 하루 이틀 헤아리네.
낮과 밤이 바뀌며 세월이 흘러가나 일월(日月)에는 본래로 주야(晝夜)가 없어
해와 달은 허공을 떠난 일 없네.
◇ 무자화두(無字話頭)의 십종병(十種病)
대개 수도(修道)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자신이 정안(正眼)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누가 이상한 말을 하면
그것이 진리인 양 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예(例)가 허다하다.
옛사람은 공부(工夫)하는 납자(衲子)를 제접(提接)하는 것을 가을철 풋밤을 까는 것에 비유하였다.
밤이 익으면 밤송이가 저절로 벌어진다. 그때는 밤을 까려고 하지 않아도 밤알은 자연히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익지 않은 밤을 억지로 까게 되면 밤알이 으깨어진다.
공부도 이와 같아서 깨치지 못할까 염려하지 말고 제반사(諸般事)를
일도양단(一刀兩斷)하여 애를 쓰다 보면 알밤이 터지듯 자연히 툭 터지게 된다.
그러나 간혹 요행수를 바라기도 하고 선지식(善知識)이라는 사람이
말을 실수하여 공부를 그릇되게 하기도 한다.
또 날개 안 돋은 새끼 새가 날아가려고 퍼덕거리다가 떨어져 죽듯
공부가 딱지도 떨어지기 전에 조실[祖室]이나 선지식 행세를 하려다가 망신당한 사람이 허다하다.
이런 선병禪病을 방지하고 자기가 자신의 꾀에 속아 넘어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무자화두(無字話頭)의 십종병(十種病)을 열거하여 후인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무자화두(無字話頭)의 열 가지 병(病)은 보조국사께서도 분명히 가려 놓았으니
구도인(求道人)은 신중히 살펴보고 또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유(有)와 무(無)의 견해(見解)를 내지 말라.
공부하는 사람은 마땅히 조사공안(祖師公案)인 화두를 깨치고 생사해탈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조주 무자화두(趙州 無字話頭)를 식심(識心)으로
"무(無)"는 "유(有)"에서 "유(有)"는 “무(無)"에서 나왔다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이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절대적인 진리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치만으로 따지고 분별하여 이 "무"자 화두를 알았다고 떠들어 대며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술책을 쓰는 것이 병이다.
둘째, 진무(眞無)의 무(無)로 헤아리지 말라.
인간만이 불성(佛性)이 있고 개는 불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다.
불성은 우주에 충만하거늘 꿈틀거리는 미물뿐만 아니라
천삼라(天森羅) 지만상(地萬象)에 이르기까지 불성이 없는 곳이 없다.
어디에는 불성이 있고 또 어디에는 불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병이다.
셋째, 이치로 따져서 알려 하지 말라.
불법(佛法)은 깨치는 것을 근본 종(宗)을 삼는다.
이치 “理"자로 불교를 아는 체하는 것은 불교를 비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道)는 깨치는 것이요, 상식적으로 알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상식적으로 따지고 이치로 헤아려 알려 하는 것이 병(病)이다.
넷째, 오직 식정(識情)으로써 이러하고 저러하다 하지 말라.
식심(識心)으로 따지거나 경장(經藏)과 율장(律藏)과 논장(論藏)과 조사어록(祖師語錄) 등에서
문자(文字)에 집착하여 배운 지식으로 사량(思量)하지 말라.
깨칠 것이 따로 없다며 불법을 사랑 분별로써만 이해하려는 것을 선문(禪門)에서는 지해병(知解病)이라 한다.
다섯째, 눈을 꿈적거릴 줄 아는 바로 이것이라 하지 말라.
불법(佛法)은 알고 모르는 것에 속하지 않고 자기의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요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공안을 결택한 장부가 깨칠 것은 생각지 않고 눈썹을 찌푸리고
또는 꿈적거리는 이것인 줄 알면 자성(自性)을 어둡게 하는 별몽병이다.
여섯째, 말재주만 부려서 아는 체하지 말라.
선(禪)은 깨달음으로 근본을 삼는데 조금 알았다고 쓸데없이
맹갈(盲喝-깨닫지 못한 사람의 할/喝)이나 하고 구두선(口頭禪)으로 일삼지 말라.
본분납자(本分衲子)가 열심히 정진하다가 공부가 어느 정도 익어가 식심이 동하면
불조(佛祖)의 공안(公案)을 아는 체하거나 약간의 혜안(慧眼)이 열리면
남을 능가하여 말을 잘하는 것으로 자기의 장기를 삼는 것이 허다한데
이것은 선문(禪門)의 구두선병(口頭禪病)이라 한다.
일곱째, 공공적적(空空寂寂)한 데서 공(空)을 지키지 말라.
처음 공안(公案0을 참구할 때에는 망상(妄想)이 아니면 혼침이요 혼침(昏沈)이 아니면 망상이다.
망상, 혼침(昏沈), 화두(話頭), 이 세 가지가 뒤범벅되어 싸움을 할 때가 가장 어려운 고비이다.
이때를 당해서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한 사람은 아무리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포기하지 말라.
공부가 안 될수록 화두를 생명과 같이 귀중하게 생각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근고(勤苦)하여 정진하면
홀연히 화두도 망상도 혼침도 없이 적적하게 몇 시간을 넘기는 때가 있는데 이것은 무기공(無記空)이다.
이 역시 일종의 무기공병(無記空病)이니 경계해야 한다.
여덟째, 공안을 생각할 줄 알고 봉(棒)을 들 줄 아는 이놈이라 하지 말라.
공안이 순숙(純熟)해져서 자기 마음이 해태굴(懈怠窟)에 빠지면 올바른 경지에 나아가지 못한다.
언제 어디서나 취모리(吹毛利)를 일으켜서 온갖 역경을 돌파하고
활연히 깨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한 생각 방황하여 털끝만큼의 차이가 있으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 도무지 진취가 없게 된다.
이때에 생각하기를 도(道)라는 게 별것 아니며 환경 따라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 것은 인적위자(認賊爲子)라, 도둑놈을 아들 삼는 것과 같은 병(病)이다.
아홉째, 문자(文字)로 인증하거나 인용하지 말라.
대도(大道)는 유식(有識)과 무식(無識)을 초월한다. 요즈음 공부하는 사람들이
간혹 문자에 집착하여 박학다문(博學多聞)하고 의리(義理)로 따지고
생각으로 헤아려 아는 것이 부처라고 인정하지만
이 같은 사고방식은 바로 부처님과 그 경전(經典)을 비방(誹謗)하는 것이다.
종문(宗門) 중에서는 ‘천계만사량(千計萬思量)이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모든 사량분별이 불 속의 한 점 눈과 같아서 설사 깨쳤다 하더라도 그 깨친 곳에 심천(深淺)이 있는 것이다.
깨친 후에도 깨달았다는 생각인 각견(覺見)과
내가 부처라는 생각인 불견(佛見)과 중생이라는 생각인 중생견(衆生見) 등을 깨끗이 씻어 버려야만 한다.
그런데 하물며 사량계교와 의리로써 깨달음을 이해하려는 치견(痴見)은
입해산사(入海算沙)니 소지장(所知障)이요 문자병(文字病인) 것이다.
열째, 미정(迷情)을 가지고 깨쳐질 때를 기다리지 말라.
수행(修行)을 스스로 가장하지 말라. 미정(迷情)을 가지고 깨쳐질 때를 기다리지 말라 함은
공부한다는 납자가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잡고서 죽을판 살판 노력하여도
무시겁래(無始劫來)로 익힌 습기 때문에 업력(業力)은 강하고 혜력(慧力)은 약하여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어렵거늘 애써 정진하는 마음은 희박하고
일상수용(日常受用)에만 팔리고 혹은 안일주의에 빠져서야 어찌 공부하는 자세라 하겠는가?
설사 결제(結制)중에 약간의 정진을 했다손 치더라도 해제(解制) 석 달 동안에
동분서주하는 십자가두(十字街頭)의 생활을 하니 자연 결제중에 익힌 정력(定力)이 약화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다음 결제 때는 공부를 새로 시작하는 셈이 되고 만다.
오늘도 이만 내일도 그만, 금년도 이대로 명년도 그대로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에 잠깐 사이에도 누구나 죽음의 문에 이르는 것이다.
미심(迷心)으로 오도(悟道)를 기다렸는데 사문(死門)에 먼저 이르니 그때야 후회한들 무엇하랴.
이것이 미정(迷情)을 가지고 깨쳐질 때를 기다리는 살림살이인 병(病)이다.
생사고生死苦 벗어남에 알음알이로 미치랴
금싸라기 눈에 들매 허공꽃이 쏟아지네.
만 길 벼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걸림 없는 법 연설하고 남의 눈을 저울질하리.
◇ 공부점검(工夫點檢)
선(禪)을 닦는 사람은 공부할 자세를 갖추고 수행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자기의 수행처를 점검해 왜곡된 일이 없어야 부지중(不知中)에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게 된다.
옛사람의 말씀 가운데서 귀감이 될 만한 몇 가지를 소개하니 참고하기 바란다.
이 몸은 오물(汚物)을 담고 있는 가죽 주머니로
시각을 두고 순간순간 썩어 가는 줄을 아는가?
인생백년(人生百年)이 먼 것 같으나
숨 한번 내쉬고 들이쉬는데 있는 줄을 아는가?
타인을 상대할 때에 잡담을 금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가?
남의 시비를 일삼지 않고 마음을 안정하여
공부만을 생각하고 있는가?
남과 이야기할 때도 화두가 간단(間斷)없이 연속되는가?
팔풍(八風), 이익 볼 때나, 비난받을 때나, 칭찬받을 때나, 추켜올리거나, 희롱하거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내 마음이 모든 경계(境界)에 사로잡혀 흔들리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참선하는 이들은 스스로 자기의 공부를 점검하고 살펴야 한다.
[출처] 화두참구법[話頭參究法] / 작성자 향수선사
[출처] 블로그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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