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쟁이
정성화
한 달 후에 보자며 남편은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육만 톤의 광탄선이 대어있는 부두
앞에서였다. 대사를 잊은 남녀 주연배우처럼 우리는 그냥 말없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 때 멀리서 차 한 대가 우리를 보았는지 더 속력을 내어 달려오고 있었다. 나를
시외버스 주차장으로 데려다줄 차였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이럴 때면 남편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봐두는 게 좋을지, 아니면 잡고 있는 남편
손의 감촉을 똑똑히 기억하는게 더 나을지 나는 허둥대고 있었다.
나를 태운 차가 쏜살같이 내달리는 동안, 나는 뒷유리창으로 남편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는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까만 근무복을 입은 그의 뒤편으로 푸른 바다가 점점 넓어지고 있었고, 이제 그는
물 위에 떠 있는 소금쟁이처럼 작아 보였다.
소금쟁이는 '소금장수'라고도 불린다. 무거운 소금자루를 지고 일어서기 위해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채 힘을 쓰는 소금장수의 모습과,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다리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것의 모습이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소금쟁이처럼 수면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소금쟁이처럼 물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남편, 내 앞에서는 마치 수상 스키 선수처럼 한껏 폼을 잡지만, 바다 위에서는 한시도 긴장을 늦춘 적이 없었을 것이다. 눈앞의 바다뿐 아니라,
외로움과 쓸쓸함의 바다,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바다 등, 그의 앞에는 언제나 건너야할 바다가 있었으므로.
남편은 헤어지면서 내 손을 꽉 잡았다. 아기를 낳아 처음으로 품에 안았을 때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배냇저고리 소매 안으로 보이는 아기의 손을 조심스레 만져보는데, 아기가 눈을 감은 채 내 손가락을 잡았다. 의외로 강한
힘이었다. '엄마를 믿고 이 세상에 왔어요'라는 의미로 느껴져 나는 그 때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의 손도 아마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내 당신을 믿고 이제 저 바다로 달려나가겠다는 말을.
오래전의 일이다. 추적추적 늦가을 비가 내린다. 어느 날, 부산 외항外港에 정박중인
남편의 배에 가기 위해서 통선상에 갔을 때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처마 밑에 러시아 선원으로 보이는 세 사람이 쭈그리고 앉은 채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비에 젖은 몸을 덥혀보려는지 그들은 연신 뜨거운 국물을 들이켰다. 그저 자신의 그릇만을 들여다보면서, 그들은 비에 젖어 떨고 있었고,
나는 삶의 뒷모습이란 저토록 애절하고 허기진 것이던가 싶어 몸이 떨렸다. 마음속으로 '주여, 부디 저 국물이 천천히 식게 해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올렸다. 내 남편도 이국 땅 어느 낯선 거리의 처마 밑에 저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더운 국물을 들이켰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소금쟁이 남편을 만나러 갈 때가 되면, 나는 한마리 물방개가 된다. 생긴 내 모습이
둥글둥글 올록볼록 한데다, 마음까지 한껏 부풀어 오르니 영락없는 물방개다. 찰밥을 한 통 담고, 떡은 쉬지 않게 얼려서 넣으며, 밤과 땅콩은
삶아서 넣고, 고구마는 날거로 몇개 집어 넣는다. 그리고 식혜까지 한 병 보따리에 찔러 넣으면 제법 큰 부피가 된다.
남편에게로 가는 길은 꽤 긴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보따리를 보면 힘이 난다. 내가
보따리를 들고 가지만, 때로는 보따리가 나를 달래며 먼 길을 함께 가기도 한다. 살아가는데 자식이 짐이라고 말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자식
때문에 힘을 낸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늦은 밤 업무를 마치고 선실에 올라온 그가 출출할 것 같아 생고구구마를 깎아 건네
주었더니, 어머니가 다시 살아 돌아오신 것 같다고 했다. 그럼 다음에는 머리를 길러 아예 비녀까지 찌르고 오겠다고 했더니, 마음대로 하라며
남편이 소리내어 웃었다. 어머니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금새 얼굴이 환해지는 사람이다.
아내의 역할 중에는 남편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주는 부분이 들어있지 않을까
싶다. 불교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전생에서 친정엄마와 딸의 관계였다고 한다는데, 그렇다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조금씩 닮아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라 하겠다. 닮았다는 것보다 닮아간다는 것에 나는 큰 의미를 둔다. 그것은 어떤 노력 없이 되는 일이 아니며, 투박한 내
자신을 조금씩 다듬어가는 일이므로.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소가 닭 보듯 데면데면한 부부 사이는 마치 안전핀이 낡은
폭탄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나와 상대방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살기가 편하겠지만, 만일 나와 영 다른 사람이라면, '내게 없는
부분을 그가 갖고 있어 다행이구나. 이래서 우리는 서로의 짝이 되었구나'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인내란 가장 훌륭한 기도라고 하지
않는가.
잠든 남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발목이 왠지 시려 보인다. 가족이라는 사슬, 밥벌이라는
사슬이 걸려 있는 자리여서일까. 잘난 남편, 강한 남편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그에겐 또 하나의 사슬이었으리라. 빗물에 젖은
소금쟁이의 지친 발목을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쇠사슬 철렁이는 그의 발목을 이젠 두손으로 감싸 주어야 할 것 같다.
이런 저런 말로 남편의 기를 꺾는 것은 소금쟁이의 다리 하나를 부러뜨리는 일이다. 더
빨리 달려보라고 자꾸 다그치게 되면 멀쩡하던 다리도 힘없이 뚝 떨어져 나가게 된다. 다리를 잃은 소금쟁이는 걷지도 달리지도 못한 채 흔들리는
물살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혼탁한 세상 속으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뛰어들지만, 더러운 웅덩이를 보면 발을
담그지 않으려고 가끔은 더러움을 피해 먼길을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의 것이면서도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다리 때문에 절망할 때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도는 소금쟁이가 아닌가 싶다.
동요<달마중>에 나오는 소금쟁이는 행복하다. 비단 물결이 남실남실 어깨춤을
추고 머리 감은 수양버들이 거문고를 타는 밤에, 소금쟁이는 달빛을 받으며 냇가에서 즐겁게 맴을 돈다고 했다. 무엇이 그토록 소금쟁이를 행복하게
할까. 그것은 바로 내가 알아내어야 할 소금쟁이의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