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가의 독서법] 다양성이라는 말
랠프 엘리슨(Ralph Ellison)
<보이지 않는 인간(Invisible Man)>(1952)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랠프 엘리슨의 1952년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니, 나는 에드거 앨런 포를 사로잡은 것과 같은 유령도 아니고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심령체도 아니다.” 화자는 계속해서 말한다. “나는 물질, 즉 살과 뼈, 섬유질과 액체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이 나를 보길 거부하기 때문이다. 서커스의 사이드쇼(서커스 등에서 손님을 끌기 위해 따로 보여주는 소규모 공연)에서 때때로 볼 수 있는 몸뚱이 없는 머리처럼, 나는 마치 나를 왜곡시키는 단단한 유리 거울에 둘러싸인 것같다.” 사람들이 그를 볼 때면 “나를 둘러싼 것들, 그들 자신, 또는 그들의 상상이 꾸며낸 것들을, 다시 말해 실로 무엇이든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볼 뿐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건 미국에서 흑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은유이다. 무시와 핍박과 비하를 당하고, 기준이 다른 정의의 적용을 받으며, 인종에 대한 조악한 고정관념으로 낙인찍히는 것의 은유이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다는 건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추측을 떨쳐버리고 우리 자신을 한 개인으로 정의하려 할 때 우리 모두가 맞닥뜨리는 존재 상태라고 엘리슨은 넌지시 이야기한다.
현실적이면서 우화 같고 잊을 수 없을 만큼 초현실적인 <보이지 않는 인간>은 미국의 인종과 다문화 유산에 대한 선견지명 있는 사색인 동시에 강렬한 모더니즘 성장소설이다. 다시 말해 순진함에서 앞으로, 소극성에서 행동으로, 맹신에서 이해로 가는 화자의 여정을 담은 카프카풍 이야기이다.
이 여정은 악몽과도 같다. 화자의 생애 마지막 20여 년은 배신의 연속이었다. 작은 마을의 고등학생으로, 겸손의 미덕을 배운 그는 마을의 백인 실력자들에게 굴욕을 당한다. 그들은 그와 다른 십대 흑인들에게 눈을 가린 채 권투 링 위에서 서로 싸우라고 명령한다. 화자는 흑인들이 다니는 주립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지만 이곳에서도 의기소침해지는 일에 맞닥뜨린다. 대학 총장인 블레드소 박사는 백인 기부자들에 영합해서 권력을 유지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는 “내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아침까지 이 나라의 모든 흑인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을 것”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화자는 블레드소에 의해 대학에서 쫓겨나 뉴욕으로 이사하는데, 여기서도 불행이 계속된다. 그는 “세계 최고의 흰색 페인트”인 “옵틱화이트”를 제조하는 공장에서 일하지만 폭발 사고로 공장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 일자리를 잃고, 그곳에서 기억을 지우는 전기 충격 치료를 받는다. 이후 어렴풋이 공산당같아 보이는 좌익 단체인 형제회에 가입해서는 이 단체의 지도자들 역시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를 이용하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환멸을 느낀다.
엘리슨은 머리말에서 자신의 주인공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화자와 어떤 특성을 공유하며 화자가1,369개의 전구가 켜진 지하실에 살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화자는 “동면 상태”로 살면서 자기 삶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행동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사회에서 책임져야할 역할”이 있으며,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긴 여정을 지나오면서 자신이 배운 것에 대해 설명하기로 마음먹은 상태다.
화자가 배운 것은 자신이 “나 자신 외에 그 누구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규정짓는 일을 더 이상 용납지 않을 터이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 격분하기는커녕 “증오 못지않게 사랑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삶을 흑백으로, 다시 말해 ‘예 아니면 아니오’의 관점에서 보는 대신에 모든 것을 포용하기로 결심한다. “다양성”이라는 말은 “무색이 되려는” 게 아니라 “미국이 많은 가닥으로 엮여 있으며” “우리의 운명은 하나이면서 여럿이 되는 것”임을 이해한다는 뜻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는 사실 엘리슨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는 언젠가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희망과 인식과 즐거움을 주는 뗏목”과도 같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우리가 뜻하지 않은 장애물과 소용돌이를 넘어가려 할 때, 이 나라가 흔들리며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할때 계속 떠 있도록 도와줄 뗏목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