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봄이 깊어졌다. 기온이 섭씨 20도를 넘나드는 오후다. 간단한 차림에 스틱과 카메라가 든 작은 가방을 메고 학산을 올랐다. 나는 틈이 나면 등산이나 자전거 타기를 원칙으로 삼았다. 절실하게 운동이 필요하고 수필의 글감을 찾을까 해서다.
한 번 수필이라는 올가미에 걸려든 뒤로 자나 깨나 생각하는 건 ‘맘에 드는 수필 한 .편’이다. 글감을 찾아내서 어설픈 솜씨로 애면글면 얽어놓고 보면 그럴 듯해 보이지만, 며칠 뒤 다시 읽으면 뭔가 부족하여 맘에 들지 않는다. 언제쯤 ‘이만하면’이라는 글을 써볼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동네 골목을 돌아가다 보니 어느 집 담 안에 자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만개한 목련은 흰 꽃이나 자색 꽃이 모두 아름답지만, 나는 자목련을 더 좋아한다. 흰 목련은 우아한 귀부인을 보는 듯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이 있고, 자목련은 은근한 염기(艶氣)를 뿌려 설레게 하는 여인의 허릿매처럼 마음을 흔드는 매력이 있다. 석양 무렵이어서 사진의 색온도가 부족하지만 일단 사진을 찍고 골목을 나서서 학산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산만 바라봐도 글감 생각에 절로 흥이 난 나는 산길에 들어서며 김삿갓의 죽장망혜(竹杖芒鞋) 대신 등산스틱에 운동화 차림으로 신바람을 낸다.
동네 근처 산이어서 시간만 나면 오르는 산인데, 요즘 시간을 내기 어려워 거의 3주가량 멀리했더니, 나무도 풀도 만나는 것마다 반갑고 정겹다. 위쪽으로 올라가는 산길로 들어가니 까치 한 쌍이 나무 위 까치집 주변을 날며 요란하게 깍깍거린다. 봄이 왔으니 짝짓기 구애를 하는지, 아니면 알을 낳아 낯선 불청객을 경계하는 몸짓인지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자주 찾아오지 않아 야단치는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서둘러 산을 오르는 까닭은 지금쯤 활짝 피었을 진달래를 역광으로 찍어보면 그런대로 볼만한 사진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30분가량 열심히 산을 오르니 땀이 제법 나고 숨이 가쁘다. 몇 해 전까지는 어쩌다가 산에 올라도 숨이 차오르지는 않았는데, 요즘은 가끔 산을 찾는데도 불구하고 오르기가 버겁다. 오늘은 학산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않고 5시 즈음까지만 오르다가 돌아 내려올 작정이다. 요양병원에 있는 아내가 기다리기 때문에 마음이 쓰여서이다.
조금 더 올라가니 포근한 날씨여서 땀은 계속 흘렀지만, 숨이 고르게 안정되고 다리가 적응되는지 발길이 가볍다. 학산 봉우리가 코앞에 보이는 작은 봉우리 주변에 이르자 진달래꽃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어서 빛이 조금 약하지만 포토샵으로 조정할 생각으로 여러 컷을 찍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색이 진한 꽃들이 보였고 촬영하기 좋도록 무리지어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어릴 적에 진달래꽃을 따먹던 생각이 나서 꽃잎 몇 장을 따 입에 넣어보았다. 아련한 기억 속에서 풋풋하고 애절한 짝사랑의 기억이 문득 나를 일깨운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봄날, 전주 이목대(梨木臺)에 올라가 진달래꽃을 따 입에 넣으며 저 아래 대밭 집에 살던 여학생을 기다리던 일이 생각난 것이다. 끝내 말 한마디 못했고 수 없이 많은 편지와 시를 적었다가 보내지도 못하고 떠나보낸 첫사랑의 아픔이 떠올랐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 오리다./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전문이다. 진달래꽃을 보면 쉽게 떠오르는 아름다운 서정시이다. 나 보기 싫어서 간다면 붙잡지 않고 보내드리겠다는 순종의 의미에 더하여, 진달래꽃을 가는 길에 뿌려 환송하렵니다. 나 보기 싫어 가실 때에는 죽어도 울지 않겠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시인은 가는 임의 발 앞에 자신의 간절한 사랑을 뜻하는 약산 진달래꽃을 뿌리는 것으로 가려는 임을 붙드는 절실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당신이 여리고 아름다운 진달래꽃을 차마 밟고 가지 못할 터이니, 떠나지 못하고 돌아오도록 붙잡는 수단으로 가는 길에 꽃을 뿌린 것이다. 마지막 연의 죽어도 눈물을 안 흘리겠다는 반어법으로, 가시면 죽도록 울어버릴 것이라는 애교 있는 엄포였을 것이다. 가는 임을 붙잡는 소월의 약산 진달래꽃이 오늘은 학산 진달래꽃으로 곱게 피어 내 가슴에 아련한 추억을 일깨우고 있다. 말 한마디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는 일이 좋았던, 정말 풋풋한 그런 마음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당기간 남아 나를 어렵게 했었다.
진달래꽃을 흔히 참꽃이라 하고, 철쭉을 개꽃이라고 불렀다. 꽃의 아름다움이나 다양함으로 보면 철쭉이 진달래보다 우월한데도 철쭉을 개꽃이라고 한 까닭은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꽃이고 철쭉은 먹을 수 없는 데서 그런 호칭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모양보다는 먹는 일이 더욱 중요했던 가난한 시절의 생각이니 마땅한 호칭이 아닐까? 진달래꽃은 전을 부칠 때 얹어서 화전(花煎)을 부치거나, 샐러드에 넣어서 풍미를 즐길 수 있고, 오미자 물에 띄워 화채를 만들거나, 꽃잎을 많이 따서 약간의 설탕과 버무려 단지에 넣어 술을 담기도 한다. 진달래꽃으로 담근 술을 두견주(杜鵑酒)라고 하는데, 잘 담그면 맛과 향이 좋고 혈압을 내리고 여러 가지 병에 효과가 있다고 했다. 7~80년대에는 시골 장날에 진달래꽃을 광주리 가득 담아 파는 아낙네들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두견주를 담가볼 수 있었는데 요즘엔 찾아볼 수가 없다.
진달래의 꽃말은 절제(節制), 첫사랑이라고 한다. 붉은 마음을 지닌 진달래는 시인의 노래에 실려 사랑으로 태어났다. 어느 봄꽃보다 정겹고 친숙한 꽃, 숱한 젊음들의 가슴에 사랑을 피워 올렸던 진달래꽃이다. 오늘은 이 칠순의 가슴에도 한 무리 분홍빛 진달래꽃이 피어, 애잔한 향기를 멀리 멀리 보내고 싶다.
(2014.03.31.)
첫댓글 학산은 어드메인가요 신덕 거기 학산마을이 있는데요
학산은 전주 평화동 사람들이 운동삼아 다니는 산입니다.
305미터 이지만 가파르지요.
아 거기도 학산이 있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