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종교적 상상력> 강의자료
나희덕 (시인,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1. 문학과 종교의 만남
흔히 문학과 종교는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져 왔다. 실제로도 종교적 화해와 귀의에 가까워질수록 세계에 대한 역동적인 감정이나 인식은 상당히 이완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또는 종교적인 차원이 어느 정도 지닐 수밖에 없는 초이성적인 면모는 대상에 대한 합리적 인식을 포기하거나 유보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엘리아데는『성과 속』에서 ‘거룩함’이라는 현상을 비합리적인 측면에서만 파악하지 않고 그 전체적 복합성을 두루 드러낼 것을 제안한다. 거룩함과 세속성이라는 두 가지 경험을 갈라놓는 심연과 대면하고, 거기서 선험적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경험적 실재를 만나라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모든 삼라만상이 거룩한 것의 드러남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풍요로운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고 그는 말했다.
시쓰기와 종교 사이에서 고민하던 청년기에 나는 이 책을 만나면서 종교와 문학의 이분법적 인식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문학적 자아는 줄곧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종교성을 억압으로 느끼게 되었고, 결국 양자의 통합보다는 어느 한쪽의 승복을 요구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한 줌의 시를 위해 오랫동안 뿌리내려온 종교적 모태로부터 멀어졌던 내가 두 세계의 공존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시인이 된 지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부끄럽게도 그러한 화해는 치열한 정신적 싸움을 통과한 것이라기보다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베풀어준 문학적 방임과 종교적 방임이 내면의 어떤 지점에서 해후한 것에 가깝다. 그리고 80년대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적인 자장(磁場)에서 다소 자유로워진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뒤늦은 화해 속에서 새삼 발견한 것은, 그동안의 시적 추구가 보이지 않게 종교적 차원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내 시에 대한 수식어로 자주 등장하는 모성성(여성성)이나 생태적 지향 등도 실은 영성(종교성)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엘리아데 역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나의 정신적 균형―즉, 어떤 창조성을 위해서도 불가결한 조건―은 학문적인 본성의 탐구와 문학적인 상상 사이를 오가는 진자운동(振子運動)에 의하여 확실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정신의 낮의 양태와 밤의 양태를 번갈아 살고 있다. 물론 나는 정신적 활동의 이 두 범주가 상호 의존적이며, 그들이 깊은 차원에 있는 일치성을 드러내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이중적인 소명’이 이제 내 운명의 일부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와 종교적 경험을 갈등 없이 일치시킨다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해 보인다. 또 그렇게 손쉬운 일치란 일방적인 귀의는 될지 몰라도 깊은 차원의 문학성이나 종교성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종교적인 신념을 일방적으로 표출하지 않으면서도 내면적으로 종교성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와 종교적 경험은 어떻게 만나고 어디쯤에서 갈라지는가.
2. 시, 새로운 신성(神性)의 창조
옥타비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동서양의 사상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고대로부터 아방가르드에 이르는 시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시론을 전개한다. 시와 역사의 모순관계를 통해 근대시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파스는 단절로 이루어진 근대적 전통 속에서 개인이 처한 고독을 어떻게 다시 근원적 질서와 연결시킬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러면서 아이러니와 아날로지의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리고 그는 시가 종교적 신성과는 다른 새로운 신성을 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파스는 ‘시’와 ‘사랑’과 ‘종교적 체험’을 일정한 동형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하나의 대상을 가지고 시를 쓰는 과정은 사랑을 통한 강렬한 일치의 경험이나 신적인 존재가 현현(顯現)하는 순간과 매우 유사하다. 사랑의 경험은 대립되는 것들이 순간적이지만 완전하게 합일되는 것을 섬광처럼 엿볼 수 있게 한다. 사랑은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행위이며, 보이지도 않고 끝내 가닿을 수도 없는 어떤 존재를 향한 일종의 ‘들림’(쏠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좇는 자, 일종의 사로잡힌 상태, 일상적 경험으로부터의 이탈, 목숨을 건 도약의 순간, 낯선 것을 접할 때의 신성한 공포…… 아마도 이런 ‘타자성의 경험’을 공통점으로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낯선 기미나 힘이 도래하는 순간은 비슷하다 해도 시와 사랑과 종교는 각기 독자적이거나 대립적이기까지 한 영역을 지니고 있다. 때로 이 세 가지 경험은 한 인간의 내면 속에서 거세게 충돌하기도 한다.
모태신앙으로 기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란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종교적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그 시절에는 기도를 하다가 내 말이 알 수 없는 방언으로 바뀌는 것을 자주 겪었고, 때로는 그 말에 저절로 리듬이 실려 노래가 되고는 했다. 방언을 외는 목소리는 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어떤 존재가 나에게 부여해 준, 또는 잠시 빌려준 목소리로 나는 말하고 노래하고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 그 노래, 그 언어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지만, 성화(聖化)된 순간이 남긴 기억에 대해서는 부정할 도리가 없다.
해독할 수 없는 종교적 방언과 문학적 방언으로서의 시. 그런 점에서 시적 계시와 종교적 현현을 하나로 보는 파스의 설명은 내게 많은 것을 해명해 주었다. 그는 인간을 지상과 천상의 모든 힘들이 서로 어울려 투쟁하는 장소로 이해했다. 이때 ‘활’과 ‘리라’는 ‘의식’과 ‘자유’라는 인간의 양면을 상징한다. 활의 시위가 앞으로 나아가려는 ‘역사성’의 표상이라면 리라의 현은 신성한 ‘우주적 질서’의 회복을 의미한다.
시인은 그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양자의 결합이 이루어낸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파스는 말한다. 그 긴장 위에서 시는 모든 시간성과 공간성을 넘어, ‘나’라는 존재의 한계를 넘어 세계와 화해하는 극적인 순간에 태어난다. 그런 순간의 성화를 역사 속에서 이루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쪼개지고 파열된 근대시의 운명을 치유하는 길이다. 『흙의 자식들』의 번역자인 김은중도 지적했듯이, 파스가 말하는 시적 계시란 ‘초월적 신학’이 아니라 ‘배리(背理)의 인간학’에 가깝다. 시의 목소리는 종교적 초월로 이월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신성의 창조를 통해 현실에 뿌리를 굳건하게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