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 기사.zip
얼마 만인가?
손해보상이 아닌 형사보상을 먼저 신청하기 위해 5년이란 세월을 보냈습니다.
2014년 부마민주항쟁 관련 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신청자 접수1호로 2015년5월경에 시작하여
피해자로 인정받기까지 10개월이 지난 2016년 3월15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신청까지또 2년이 지난 2018년 7월 면소판결을 받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형사보상을 부산지방법원에 신청하였으나 6개월이 지난 2019년 3월 형사보상신청이 기각당했습니다.
그러나 오기(?)가 나서 2019년 3월25일 부산고등법원에 형사보상 기각결정에 대한 항고를 접수했습니다.
그리고 11개월만에 2020년 2월 7일 부마민주항쟁 41년만에 형사보상 결정되었습니다.
결정문 수령이 2월12일이었고, 1주일이 지난 2월20일 형사보상결정을 확정받은후
그날 즉시 부산고등검찰청 보상금(300만원)을 신청접수하였으나 3개월을 기다려야 지급 된다고 합니다.
1979년10월18일 부마민주항쟁 그 당시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은 광분하여
순수한 시민 민주항쟁동지들, 필자를 비롯한 선량한 시민일부를 북한의 지령을 받고
"순진한 부산대,동아대 학생들을 선동하여 적화통일 목적으로 민란을 일으켰다."는
엄청난 불온 배후세력으로 조작 할려는 표적수사를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중 타켓을 통일사회당 간부경력과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그리고
재일조총련 공작금수령 무기징역 피고인(임동규)와
연관시키기 위해 전라도출신인 필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구금48시간 인권(?)을 지키기 위해 조작낸 내용으로10월20일, 유어비어 날조로 20일간 구류로 유치시킨후
부산법대 3학년생 이호철(전 노무현청와대 마지막 민정수석)군과 함께 격리수감시켜 조작수사를 계속 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1979년10월26일, 차지철 장본인이 박정희대통령과 함께 김재규의 권총에 암살당하자,
모든 조작수사가 중지 되었고, 그 후 11월 6일, 20일만에 석방된 것입니다.
그런 세월이 지난후, 1980년 봄 부산야구협회는 야구명문 광주일고(투수 선동렬)를 초청하여
고교4강 야구대항전을 구덕야구경기장에서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필자는 전두환 합수부장의 계속된 대공사찰로 부산생활이 힘들어
1980년 7월에 광주운암동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정권의 부산시경 대공사찰반의 집요한 공작에도
필자는 1981년 서울 영동에서'청동왕오리'를 서중29회 선배와 창업하였고
성남시에 둥지를 옮기고 새 생활을 시작했고 1982년7월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부산시경 대공사찰반은 광주서부경찰 대공반으로 이첩하는 과정에서
전국 경찰에 수배령이 내렸고 결국 1983년 3월10일경 영등포경찰 불심검문에 잡혀
광주서부경찰서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3월11일부터 10일간 강도 높은 국가보안법 연관수사가
진행되었으나 결국에는 무협의로 풀려 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런 사건이 41년간 수차례 반복되었으나 오늘 날까지 끈질기게 버티어 냈습니다.
이제는 41년만에 멍에를 벗고 명예회복이 된 것입니다.
김대중,노무현정권때는 필자에게는 경찰사찰이 전혀 없다가
이명박정권때는 국정원사찰로 다시 감시대상이 되어
필자가 중국 북경에서 재중동포를 위한 한국어교육과정을
법범행위로 몰아 옥고를 치르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지 않했습니다
MB는 17년선고로 다시 법정구속의 인과응보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모처럼 신라호텔2층 다이너스티홀,친구 아들 결혼식장에서
친구들의 위로를 받으며 기쁜 시간을 갖였습니다.
아! 이제 75세 나이에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모든 친구가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모든 지인들의 가족이 편하시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