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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군인이 왜 우리나라 국민을 죽일까
증 언 자 : 이지형(남)
생년월일 : 1962. 10. 27(당시 나이 18세)
직 업 : 전남대 사대부고 3학년(현재 대학생)
조사일시 : 1988. 7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나는 고3인데다 중간고사 기간이어서 집에서 시험공부를 했었다. 전대 캠퍼스 내에 있는 부속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데모로 인하여 공부를 제대로 못 할 때가 많았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사회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전무한 상태였고 선생님 몇 분이 데모를 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데모는 나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5월 19일 중간고사를 보려고 다른 날보다 아침 일찍 학교에 등교했는데 시험 때문에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 없었다. 아침 묵상을 하고 시험시간이 되었을 때, 선생님께서 교실로 들어오셨다, 나가셨다를 몇번 반복하셨다. 굉장히 분주했던 느낌을 받았다. 우리 반 친구들도 당황했다. 한 시간 정도를 시험도 안 본 채 그러한 상태로 기다렸다가 3교시 쯤 되니까 선생님께서 청소만 대강 하고 집에 돌아가라는 말씀만 하셨다.
영문을 몰랐으므로 시험을 보지 말고 집에 돌아가라는 선생님 말씀에 그저 속으로 좋아하며 10시 30분경 사레지오고등학교 앞 사거리로 버스를 타러 나왔다. 사레지오고등학생, 전남대 사대부고생, 전대 캠퍼스를 거쳐서 자전거 타고 오는 농고생들로 차를 타는데 굉장히 큰 혼잡을 빚었다. 신호등을 건너 20번 버스를 타고 산수동을 거쳐 집에 오는데 법원 거의 다 왔을 즈음에 시내버스가 못 다니게 되었는지 법원 밑으로 빠지는 길로 해서 집에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가보다 생각했다. 그전에 전남대 캠퍼스에서 데모하는 것을 봤는데 보통 데모하고는 틀리다는 느낌을 받았다. 집에 와서 누님으로부터 "주의해라"는 말만 들었다.
오후 5, 6시경 집 앞이 너무 시끄러워 나가보니 전남기계공고 삼거리에서 시민, 학생들 50-60명과 군인 50-60명이 서로 돌을 던지고 최루탄을 쏘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에도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는데 얼마나 많이 쏘았는지 방안에 앉아 있어도 눈물을 줄줄 흘릴 정도였다.
20일 오후 누나가 피난을 가자고 했다. 우리 집 부근에 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피난을 간 상태였고 우리 옆집에 살았던 사돈네도 영암으로 피난가고 없었다. 옆집 할머니는 6·25를 겪어보셨기 때문에 총을 쏘면 솜이불을 덮으라고 일러주셨다. 우리는 곧 끝날 거라고 여기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나가 도청 부근에 있다가는 죽게 된다는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었다. 일단 피하기로 하고 지산동 사레지오여고 후문 관동이발관 골목에 사는 사촌누나 집으로 갔다. 군인들 3, 4명씩 서 있는 것을 살살 피해 가며 7시 30분경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 좀 있으니까 "농장다리로 나오라"는 어떤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농장다리로 나가보았더니 2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나처럼 머리를 짧게 깎은 고등학생들, 아저씨들, 대학생인 듯한 청년들이 서서히 줄을 맞추며 도청으로 향했다. 그때 난 세번째 줄을 서게 되었다. 장동 로터리 가까이 오니 MBC 방송국이 불타고 있었다. 건물이 빨갛게 밑에서부터 타올랐는데 건물 전체가 빨간 불덩이처럼 보여 비극적인 사태만 아니었다면 멋있는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동 안 너무 허위 방송만 해왔으므로 불태우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열이 장동 로터리에 막 이르렀을 때, 사방에서 데모하는 소리가 들리고 방송국 있는 곳에서 와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앞에서 총알이 날아왔으므로 대열은 흩어지고 말았다. 나는 도망을 쳐 누나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10시 넘었는데 2층 옥상에 올라가 매형과 같이 MBC 방송국이 불타는 것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옥상에서 보니까 왼쪽, 오른쪽 등 3곳에서 불꽃이 타고 있었다. 다른 집 옥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또한 전남대병원 옥상에서 전남대 쪽으로 포물선을 그으면서 불꽃이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불꽃놀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요소요소에서 총소리가 요란했고 그때부터는 최루탄이 완전히 없어지고 실탄만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광주시내 부근에 올라오는 차가 있었다고 들었고 주위에서 피난가려면 효천, 송암 근처 어디를 가면 차를 탈 수 있다고 들었다. 세무서 쪽에서도 불길이 솟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나는 우리 집에서 자취하는 영혁이와 함께 가보았다. 1층에 불이 붙어 타고 있었고 사람들이 세무서 안에 60여 명쯤 있었다. 호기심에 나와 영혁이는 세무서 1층으로 가보았다. 옆에는 자가용 2대가 완전히 불에 타 있었고 자전거도 있었다. 세무서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불에 타지 않은 물건을 끄집어내었다. 시계, 전자계산기, 호치키스, 사무기기, 라디오 등 갖가지가 있었는데 각자 한두개 씩 물건을 갖고 갔다. 나도 나중에 전자계산기와 라디오를 가져왔다. 어떻게 보면 도둑이라 할 수 있는데, 지금도 빈터를 보면 아, 내가 그랬었지 하는 생각이 든다. 왜 세무서에 불을 내었는지, 왜 사람들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물건을 가져왔는지? 다른 사람들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듯 보였다. 나도 그 당시엔 그랬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인들이 그토록 잔인하게 행동한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임을 확실히 몰랐으면서도.
그날 밤은 2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하룻밤을 누나집에서 자고 21일 아침 9시경에 광주세무서 앞으로 나가보았더니 중학교 동기동창생인 이중연, 임준택, 용혁이도 나와 있었다. 차도에서 데모하는 학생들은 100여 명 정도였고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은 500여 명쯤 되었다. 군용 포크레인이 있었는데 그 포크레인 위 높은 곳으로 오르려다 청년 한 명이 떨어져서 발을 못써 급히 전남대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보았다. 그때까지 나는 데모를 하는 이유도 제대로 몰랐다. 차 위에서 대학생인 듯한 청년이 타라고 부추기는 말을 했다. 고민 끝에 나와 중연, 준택, 용혁이 넷이서 우리도 타자면서 같이 타이탄 군용차를 탔다. 우리가 탄 차에는 약 15명쯤이 있었는데 차에 타고 있었던 대학생인 듯한 사람이 '전두환은 물러가라 좋다 좋다', '김대중을 석방하라', '최규하 정부는 무능하니 자유화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밝히고 물러나라(최규하 정부는 조속히 민주화의 일정을 밝히라)'는 구호를 외치라고 가르쳐주었다. 내가 탄 차는 광주세무서를 출발하여 공원다리를 거쳐서 월산동으로 갔는데 차들이 어찌나 빨리 달렸던지 씽씽 소리가 났다. 나는 지금의 송정리 가는 사거리에서 내가 데모를 하게 된 동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시민들이 인도에 서서 우리 차량이 지나가면 태극기를 흔들어 주고 멈춰서게 해서 20여 명의 아주머니들이 김밥, 아이스크림, 콜라, 쭈쭈바, 빵 등을 차에 올려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 고생하네. 잘하소!" 하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우리 먹을 양만큼만 챙기고 "이제 되었습니다. 뒷차 주십시오" 하면 다음 차도 그런 식으로 나눠주었다. 2, 3대 가량의 차량이 있었는데 어찌나 빨리 달렸던지 총 몇 대 정도였는지는 알 수가 없고 약 100-200미터의 간격을 두고 군용차량이 쏜살같이 달렸고 광주고속은 속도를 느리게 해서 사람을 많이 태웠다. 광주고속에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군인 장교들이 타고 다니는 지프차들도 나왔는데 그 때부터 일반차는 볼 수 없었다. 우리가 탄 차는 송정리 쪽으로 가는 사거리에서 일신방직 쪽으로 꺾어서 공용터미널로 쏜살같이 달렸다. 차량시위를 한두 시간 했을 즈음 공용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전남대로 가자고 차 안에서 구호를 선창했던 형님이 말했다. 우리 고등학생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기사와 대학생처럼 보이는 형님들은 음식을 나눠줄 때 연결이 되어 어디로 갈 것인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차량은 광주역을 거쳐 전남대로 갔다.
12시쯤 전남대 정문에 이르렀다. 정문다리 부근에 있는 시민들로부터 마치 군대 지원병력 같은 호응을 받았다. 차에서 내려 학교 안으로 들어가니 인사대 아래 잔디에서 군인 10명이 학생,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이리 도망가고 저리 도망가고 있었다. 나도 시민들 대열에 끼였다. 다리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던 반면 학교 안에서는 많지 않은 사람들이 산발적으로 군인들과 서로 포위작전을 하며 아옹다옹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군인들이 많이 몰려와 최루탄, 공포탄(총구에서 불이 나왔다)을 쏘면서 시민, 학생들을 흐트려놓고 정문으로 밀어내었다. 사레지오고등학교 '만남의 집' 들어가는 곳까지 이르렀을 때 학생, 시민들은 돌을 던지고 군인들은 최루탄을 쏘고 공방전이 치열했다. 그때 나는 맨 앞줄에서 있었는데 아저씨 한 분이 달려오다가 군인에게 걸려 푹 꼬구라졌다. 쓰러져 있는 아저씨를 군인들이 달려들어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밟고 하더니 도로에 피를 뿌린 채 전남대 정문으로 끌고 갔다. 그 광경을 본 나는 이제까지의 모든 사고방식이 확실하게 바뀌었다. 함께 지켜보고 있던 500여 명의 시민들은 너무 지나친 진압에 울분이 났다. 나는 그 모든 행위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야! 우리 나라 군인이…… 야! 우리 어렸을 적에는 국군 아저씨께 편지도 써주고 참 좋게 봤는데 어쩌면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의아심을 가지게 되었고 데모를 더욱 필사적으로 하게 되었다.
얼마 후 당시 건축중이던 삼익맨션 뒤쪽과 광주은행 골목에서 한 떼의 군인들이 사정없이 최루탄을 쏘면서 달려왔다. 너무 당황한 학생, 시민들은 앞뒤로 포위해 오는 군인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달릴 수 있는 데까지 달아났다. 난 그제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있는 힘을 다해 사레지오고등학교 정문 못 미처까지 달려왔다.
광주세무서에서 함께 차량시위를 했던 중연, 준택, 용혁이는 정문에서 내렸을 때부터 시민, 학생들 사이에서 각자 흩어져버렸다. 난 겨우 군인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으나 많은 사람들은 군인들에게 잡혀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오로지 차만 타면 안전할 것 같은 생각에 사레지오고등학교 정문 못 미처에 대기하고 있던 군용트럭에 올라탔다. 전남대 정문까지 함께 차량 시위했던 3, 4대의 차들도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탔던 차는 차량시위를 할 때까지만 해도 15명 정도였는데 그 때는 30-40명이 되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차에 타니까 서방 쪽으로 직진하면서 광주고 쪽으로 달렸다.
그런데 기사나 대학생 형님들은 어떻게 해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알고 있었는지 교도소로 가자며 다시 차를 돌려 교도소로 향했다. '전두환 물러가라' 하는 구호를 외치며 2, 3대만 육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렸다. 서방주유소를 지나서 교도소 문을 볼 수 있는 곳까지 갔는데, 군인들이 교도소 정문, 담양 가는 도로를 열을 지어 막고 있었다. 우리 차가 앞으로 가니까 손을 흔들면서 안 된다고 했다. 그때 우리 차에서 구호를 선창했던 형님이 무전기도 없었는데 "교도소는 안 되겠다"며 도청을 3시에 탈환하니 가자고 했다. 그 시각이 오후 1시가 넘었을 때였는데 교전은 전혀 없었고 다시 돌아서 서방, 광주역, 시외 버스공용정류장으로 다른 차들과 함께 왔다.
차들이 시외버스공용정류장을 지나서 광남로 사거리에 가니까 인도에 빽빽히 서 있던 시민, 학생들이 잘 왔다며 박수를 쳐주어 힘을 얻었다. 우리는 지금의 스카라극장 앞에서 내렸다. 다른 차에 탔던 사람들도 거기쯤에서 모두 내렸다. 왜냐하면 앞에서 군인들이 금남로 분수대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고 관광호텔, 전일빌딩 위층에서 차도를 향해 총을 쏘았으므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금남로에 차 유리만 깨진 채 아직도 쓸 만한 자가용, 영업용 차가 여러 대 놓여 있었고 한 대는 전일빌딩과 가톨릭센터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그때 나는 부영약국 앞 차도에 세워져 있는 택시를 가지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5·18 당시만 해도 군대에 갔다 오지 않아서 총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고 전남대 정문에서 피흘린 사람을 질질 끌고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싸우기 위해선 차가 있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혼자 부영약국 앞 차도로 갔다. 그때 인도의 건물에 딱 붙어 있던 아저씨가 "야! 이놈아, 너 거기 있으면 죽는다"고 외쳤다. 그때는 운전도 못 하는데 어떻게든 가져와 야만 싸움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총을 차도로 쏘고 있었지만 총 맞으면 죽는다는 의식도 없이 단지 군인들을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아무리 소리쳐도 내가 가까이 가니까 나중에는 아저씨가 욕을 하며 안 된다고 말렸다. "너! 빨리 비켜"라고 너무 다급하게 소리쳐서 나도 모르게 인도 쪽으로 얼른 물러섰다.
그때 내 뒤에서 총알이 핑핑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전쟁터를 연상케 했는데 나는 키가 159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어른들에게는 더욱 애숭이로 보여서 살아나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때 어떤 아저씨가 지금 전경들이 가지고 있는 트럭보다 조금 작은 차에 기름 2, 3깡통을 싣고서 실탄이 날아오는데도 차도 한 가운데를 달렸다. 그러면서 진격해 버린다고 울분 섞인 목소리로 외치면서 달리더니 차가 갑자기 옆으로 픽 꺾였다. 총을 맞은 것 같았다.
그런 상황들을 보다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대략 3, 4시가 되었을 즈음인데 김밥은 별로 안 먹고 음료수만 먹었던 탓인지 굉장히 배가 고파옴을 느꼈다. 그래서 데모대를 이탈하여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가톨릭센타 골목으로 해서 전일빌딩과 YWCA 사이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YWCA를 다 왔을 즈음에 나보다 한두 살 더 위인 듯한 청년이 YWCA 1층 건물 안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야! 새끼야, 군인들이 죽이니까 피해야"라고 외쳤다. 반사적으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지금 상무관 옆에 있는 전경들 주둔지인 2층 옥상에는 M16총을 들고 군인 두 명이 이쪽을 겨냥하고 있었고 뒤를 돌아보니 청년 두 명이 카빈 총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너무 겁이 나서 YWCA 건물로 쏜살같이 뛰어들어갔다. YWCA에 있던 청년이 뒤에서 걸어오고 있던 청년들에도 "야! 앞에 군인들이 있다. 피해"라고 외쳤다. 그들도 순식간에 옆 건물들로 피했다. 그제야 난 학생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고 도청을 탈환하기 위해 몰래 숨어들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YWCA에서 2시간 정도 오도가도 못하고 묶여 있었는데 그 곳에는 약 1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화순 이서에 사신다는 한 할아버지께서는 광주에 약을 사러 왔다가 집에도 못 가고 이렇게 되었다며 6·25 때도 이렇게 잔인하지는 않았다고 어이없어 하셨다.
약 2시간쯤 지났을 때 군인들이 물러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거기 묶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나는 도청 뒤쪽에 있는 집으로 가려고 전일학원 쪽으로 갔다가 군인들을 보고 다시 피해서 장동 로터리와 과학관을 거쳐 상당히 왔는데 노동청 앞에도 군인들이 서 있었다. 도청 민원실과 노동청 사이 보이스카웃연맹 앞에 버스 두 대가 검게 불 타 있었고 도청 민원실 앞에는 군인들이 비료부대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민원실 부근에 서 있는 군인을 부여잡 고 '우리 자식 내놓아라'고 소리치며 울고 있었다.
나는 되돌아서 서석국민학교를 지나 전남기계공고를 거쳐 우리 집으로 향했다. 집 대문을 들어서는데 경찰,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날 잡으러 온 것으로 착각하고 골목으로 도망을 쳤다. 그랬더니 큰방 아주머니께서 경찰, 군인들이 나올 때 날 본 것이지 잡으러 온 것이 아니라며 데리러 오셨다. 땅거미가 질 무렵 집에 와서 밥을 맘껏 먹고 나니 누나가 절대 못 나가게 했다. 나는 어렸지만 너무 울분이 복받쳤다. '아! 우리나라 군인들이 어떻게 우리를 죽이려 한단 말인가?' 겁도 났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분이 나고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때부터는 잡아도 소용이 없었다.
22일 아침 9시경 어떻게 되었나 궁금하여 노동청으로 왔는데 우리 동네 사는 나보다 2년 선배인 박근수 형님이 노동청 앞 사거리 광장에서 무기를 나눠주는 틈 속에서 무기를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나도 총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총을 한 번도 쏘아보지 않아서 망설이며 서 있었다. 그 형은 카빈 하나를 들고 있었고 20여 명 청년들은 카빈총과 수류탄을 들고 서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탄광에서 사용하는 TNT가 3, 4박스가 있어 서로 나눴다. 그들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시민들은 산발적으로 50여 명이 인도에 서서 망설이며 지키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도청은 시민군들이 지키고 있던 때였다. 노동청 앞에서 웅성웅성하는 사람 가운데 어떤 아저씨들이 상당히 선동적인 말을 했는데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북에 대해서 찬양하는 말을 했다. 그것이 시민들을 많이 자극했던것 같다. 나도 그때 그런 말을 듣기 위해서 귀를 쫑긋했다. 대개 모이는 곳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한 명씩 끼었는데 40대 정도로 굉장히 잘생겼고 회사원같이 보였다. 무기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요소요소에 2, 3명씩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도청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지프차를 탄 주력부대만 들어가는 상태였다. 시민군에 의해서 행정기능이 수행되었다.
그때부터는 날짜가 확실히 기억되지 않고 사건별로만 기억에 남아 있다.
시민들은 시내 요소요소에 대열을 지으며 돌아다녔는데 내가 태평극장 있는 곳으로 나가보니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어린 아이,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약 100-200미터 정도의 대열이 천변 위를 향해 자율적이면서도 질서정연하게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도 그때의 인상적인 광경이 기억에 남아 있다. 나도 해야겠다 싶어서 그 대열에 끼어들어갔다. 19, 20일의 데모와는 달리 그때부터는 무리를 형성해 가면서 구호를 외쳤는데 내 용도 격한 것이 아니었고 상당히 부드러웠으며 선창하는 사람도 따로 없었다. 10여 분 정도 따라가다가 수피아여고 가는 다리 부근에서 빠져나와 도청으로 가 보았다. 시민들이 분수대 주변에 빽빽히 들어서 있었고 앞에서는 연설을 하고 시민들은 듣고 있었다. 연설을 할 때 분수대 단상에서 말한 사람은 목소리가 굉장히 좋은 좀 뚱뚱한 편인 여자분이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굉장히 진지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상로 나간다고 해서 집 앞에 나갔더니 상무관에 있던 시체 한 구를 리어카에 싣고 가며 우는 것을 보았다.
우리 앞집에 렌트카처럼 차를 빌려주는 집이 있었다. 그런데 그 집에서 남의 차를 서석동 어디에서 갖다놓았다는 소문을 듣고 옆방에 사는 2년 후배인 영혁이와 함께 쫓아가 "아저씨! 우리 학생들은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아저씨는 남의 차를 훔쳐다놓을 수가 있습니까? 차 주쇼" 했다. 둘이서 차를 밀고 나오니까 40대 중반의 렌트카 주인 아저씨는 우리가 키가 작은데다 머리도 스포츠 형으로 어려 보였는지 "이놈의 새끼들이 왜 가져가냐"고 했다. 한참을 승강이하다가 결국은 아저씨가 "학생들 미안하네. 차 가지고 가서 부숴버리면 국가적인 손해 아닌가? 그리고 차 끌고 나가면 자네들 죽기 십상이니 다음에 돌려 줄 방법을 찾자"고 말해 어느 정도 이해도 되고 그러기로 약속하고는 집에 돌아왔다. 그 당시 시민들이 무장한 상태였으나 무엇을 잃어버렸다느니하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차사건을 듣고 흥분해 쫓아갔던 것이다.
무기를 반환하던 날 오전 9시경에 도청으로 나갔더니 도청 지하실에 TNT를 갔다놓았는데 잘못하면 다 죽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도청 앞 분수대 부근에 시민들이 꽉 차 있었고 도청 앞쪽에서는 시위대들이 무기를 반환하고 있었다. 질서와 평온을 되찾고 있었고 나름대로 광주시민군에 의해서 광주가 유지되고 있음을 느꼈다.
오후 1시경 윤성민 씨가 헬리콥터를 타고 공중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전남 무안출신 육군 중장 윤성민입니다"하면서 자제를 호소했다. 그 헬기는 전남기계공고 옥상 위에 내리려고 했는데 시민들이 돌을 던져 내리지 못하고 그냥 갔다. 그 곳에서 나는 홍남순 변호사가 계엄사령관을 만나러 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26일 저녁 누님과 함께 집에서 자고 있는데 새벽 2시쯤 노동청에서 전남대병원 사이의 길과 골목을 2번 정도 왔다갔다하면서 "군인들이 약속을 위반하고 오고 있습니다. 총을 쏘실 수 있는 분은 나오십시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갈까말까 생각하다가 낮에 너무 뛰어다녀서 피곤해 그냥 들어와 잤다. 2시간쯤 잤을까 무슨 소리가 우당탕탕, 우당탕 해서 일어나보니 총소리가 드르르륵, 탕탕 하면서 너무나 요란스러웠다. 솜이불을 둘러쓰고 공포에 떨었다. 길을 통해서만 도청을 습격한 것이 아니라 담을 넘어서도 포위망을 좁혀가는 듯 이곳저곳에서 요란했다. 날이 밝자 총소리가 들리지 않아 골목으로 나가보았더니 노동청에서 전남대병원까지 군인들이 5, 6미터 간격으로 길옆 양쪽에 쭉 서 있었다. 꼭 군인들이 남의 나라 군인들처럼 싸늘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들 나름대로 수습을 하고 있었다.
아침 8시경에 큰방 아주머니께서 군인들도 똑같은 사람이고 우리나라 군인이라며 김밥을 해서 갖다주셨다. 먹으라고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니까 군인들이 "아니! 괜찮습니다" 하며 밥에 약을 탄 줄 알았는지 먹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주머니께서 괜찮다고 먹으라고 하니까 나중에 좀 집어먹었다.
해가 막 솟아오르려 할 즈음에 나는 도청에 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도청으로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YMCA 근방 건물이 불타 있었고, 수협 충장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탱크가 있고 광주우체국 들어가는 길 어귀에 군인들이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전일빌딩 쪽으로 해서 YWCA 쪽으로 갔더니, 골목에 총알 탄피가 널려 있다시피 하였다. 탄피를 5개 주워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집에 왔다. 그리고 책상 위에다 올려놓고 '5·18 기념'이라고 써두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나왔더니 누가 청소를 했는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다시 등교하던 날 교실에 들어섰더니 "야! 이놈 살았었구나"하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와 다른 친구 한 명이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고 했다. 우리 반은 72명이었는데 30명 정도는 집 앞에서라도 부분적으로 가담했었다고 했다. 얼마 후 담임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불러서 갔더니 살아와서 좋은 기분은 제쳐두고 경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다음부터 선생님께 경계의 인물이 되었던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하면 안타까운 것이 내가 한 행동은 무엇이 좋았고 무엇은 나빴으며, 그 운동의 성격은 어떠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지도 않은 채 색안경을 끼고 보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번은 내가 자리를 옮겼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나오라고 해서 뺨을 때렸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 손목을 잡으며 "선생님! 자리 한 번 옮겼다고 그러십니까?" 그랬더니 "그렇게 반항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난 반항한 것도 아니었고 선생님을 참 존경했는데 너무 실망스러웠다. 왜 진실을 이야기해 주실 수 없으셨는지? 광주 5·18항쟁 때 나는 정의파도 아니었고 의식도 없었으나 벌어진 상황이 부당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시위를 했지만 그렇게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 다. 대입을 준비하면서 생활이 다시 바빠져 어떻게 지내왔는지 모르겠으나 알게 모르게 상당히 애로를 겪었다. 뭔가 그전과 같지 않았다.
5·18 이후 근 한 달 남짓 공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밤 10시까지 공부를 시켰다. 우리는 고3이란 이유와 광주에 산 사람이면 누구나 겪었으므로 이야기 할 필요도 없이 5·18 이전과 달리 더욱 공부에 매달렸다. 그 당시 내 행동에 대한 타당성이나 부당성에 대하여 선생님께서 한마디만 해주셨어도 내가 대학에 와서 그렇게 심하게 방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그 후유증 때문에 '왜, 우리나라 군인이 우리나라 시민을 죽였는가?', '왜 선생님들께서는 그렇게 행동하시는가?' 선과 악의 구분이 애매해지고 '세상엔 절대적인 선이 없구나' 하면서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 2학년 때 어떤 선배를 만나서 전남대학교에서는 상당히 일찍 학회(법대 행정학회)를 구성하여 활동했다. (조사.정리 김문주)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