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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일맥)
진짜 성도와 가짜 교인 행4:1-12 이태종 목사
옛날에는 결혼 시즌이라는 것이 있어서 결혼 시즌에 많이 결혼을 했지만 요즘은 시즌이 따로 없습니다. 결혼 시즌은 아니지만 어제도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결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왜 반지를 다이아몬드로 하나? 생각이 많이 듭니다.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죠. 한번도 다이아몬드를 만져 보지 못했으니 이때가 기회라든가, 상징적인 의미로 다이아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이 다이아를 혼수품으로 장만했지만 끼고 다니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구요? 그 비싼 것 잃어 버릴까해서요. 그래서 모조 기술이 발달한 것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끼고 다니는 반지 대부분도 가짜라는 것입니다. 진짜와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요사이 이런 모조품의 기술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얼마 전 음식점에 갈 기회가 있어 가 보았는데 모조 장미꽃을 보았는데 얼마나 똑 같은지 모릅니다. 벌이 혼돈할 정도입니다. 향기까지 나게 되어 있고, 물방울이 조금 있습니다. 정말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교인들의 믿음을 쉽게 구별했습니다. 왜냐면 당시에 교회를 나오려면 목숨을 걸고 나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거는 신앙생활을 하니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도 북한 교회는 순수한 진짜교인들의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북한 교회에 말씀을 들어보면 대단합니다. 겉으로 들어난 봉수 교회가 있기도 하지만 지하교회는 예배를 드리려면 지하로 들어가는데 서로 얼굴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손을 잡고 예배를 드립니다. 서로 얼굴을 모르게 하는 것이죠. 피차 교회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문을 받을 때 아는 사람을 댈까봐 서로 얼굴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초대교회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섬기게 되면 가정에서, 사회에서 ,집단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참으로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 진짜 그리스도인들만 모였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분간이 힘듭니다. 자신도 하나님께 진짜 성도인지 아닌지 구별을 하지 못합니다. 누가 양인지 염소인지 구분이 되질 않습니다. 목사인 제가 구별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힘도 없습니다. 자신이 진짜라고 하면 가짜일 수가 있고 가짜라고 생각하면 진짜일 수 있습니다. 왜 저희들이 믿음생활을 하면서 혼돈에 빠지고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종교를 믿고 있지만 종교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이라는 말은 우리의 노력으로 열심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 니다. 이 출발점이 잘못된 것입니다. 오래 전에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를 조계종 스님들이 단체로 보러 가신 것 같습니다. 그 당시 200만 명 관객 동원으로 인해 감격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불교 영화가 성공을 했다고 기뻐합니다.
인터뷰에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저는 무슨 철학적인 이야기라도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것입니다. "아! 제목 기가 막히게 지었습니다" 이게 불교입니다. 종교입니다. 예전에 성철스님이 살아 있을 때에도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부처님 오신날 메시지에서 '오 사탄님 어서 오십시오.' 라고 초대한 글을 기억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왜 이렇게 종교들이 유치한 줄 아십니까? 내가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기독교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모든 것을 종교적 사고를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셨습 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역을 할 때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기독교에서 믿음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만이 하셔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진짜 신앙생활을 구별되어서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진짜 믿음 생활하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첫째, 잘못된 교리를 조심해야 합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아시지 않습니까? 지은 분이 갑골학을 연구하신 대 가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 책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잘못된 교리가 세상을 바꾸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제사를 지내면 유교는 효자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호로 자식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교리예요. 그래서 죽은 사람을 위해서 3년 이상 자식들이 애를 써야 합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사는 효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사회를 망치고 있다는 것 이죠. 물론 교리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믿음생활에 정리를 해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 입니다. 금번 저희 교단에서 몇 가지 교회 용어를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사용하라고 권장한 것입니다.
기도할 때 대표기도라는 말이 기도인도란 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헌금이란 말이 봉헌으로 바뀌었고요. 성가대는 찬양대로 소천은 별세로 대예배라는 말은 주일예배로 바뀌게 됩니다. 또한 기도할 때 하나님께 '당신'이란 말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기도하실 때 "기도하였습니다."라고 하는 과거형이 "기도 드립니다. 기도합니다"등의 현재형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성도님들이"라는 말이 "저희들이"라는 말로 "주여"라는 말 대신 "주님"이라 는 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기도한 것이 무효입니까? 아니지요. 그러나 명료화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는 것도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교리가 중요하지만 도리어 믿음을 죽이는 교리가 팽배해 있습니다. 저는 기억하고 있어요. 옛날 어른들이 그러셨거든요. "목사님! 그림자 밟으면 큰일나!" 그래서 정말 조심했습니다.
목사님을 만나면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방법이 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 강대상을 만지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물론 함부로 할 수 없지만 이런 내가 알지 못하는 교리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본문 전장인 3장에 어떤 사건이 나옵니까? 미문에 40년 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기적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감격 속에 있습니다. 축하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리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것을 축하하기는 커녕 교리에 매여 주님께 여쭈어 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있었습니다. 이때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이 사람의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잘못된 교리를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영적인 해석을 해줍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앉은뱅이에 대해 저주하고 무시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것을 보면 부모가 많은 죄를 지었구나!" 그런 교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일어난 것에 대해 관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핍박을 합니다. 잘못된 교리가 우리를 가짜 로 만든단 말입니다. 한국교회 교인들 어떻습니까? 교회 나오면 죄책감만 가득합니다. 교회는 회개하라고만 합니다. 사실 회개할 것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월요일부터 다시 죄를 짓습니다. 그러니 힘이 들지요.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지 못하잖아요.
가끔 우리가 생각할 것은 세상에서 잘 노는 것도 은혜입니다. 세상에서 잘 노십시오, 대신 세상에서 잘 놀다가 교회 와서 더 잘 노십시오. 분명히 잘못된 교리를 잡아 능력 있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 이기적일 때 가짜가 만들어집니다.
믿음에 있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마음대로 정리해서 '내가 복음'을 쓰는데 있습 니다. 여러분! 조종사들을 훈련시킬 때 무엇을 먼저 가르치는 줄 아십니까? 조종 계기판을 의지하는 것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나침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라는 마음을 포기하게 한다고 합니다. 사실 한국교인들처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있어서 따라올 민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적이 어떻습니까? 믿음이 이기적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복받기 위해서입니다. 십일조를 드릴 때 사업이 더 잘되기 위해서 드립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목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우리가 이야기합니까? 다시 자기가 복음을 씁니다. "십자가는 믿음 없는 사람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마음에 말입니다. 다 가짜입니다. 왜 이 수지에 이 교회를 세워주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기회가 닿으면 온 에너지를 수지 지역 복음화를 위해서 뛰어 들것입니다. 이것은 아무교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능력을 의지하고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는 교회가 영혼 사랑하는 저희교회에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러기 위해 복음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진짜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지도자! 그들은 평생 예배만 드리던 자들이었습니다.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이상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갑자기 이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둡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간단합니다. 수십 년간 예배를 인도하고 맡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성전 앞에 앉은뱅이가 40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와주질 못했습니다. 돈이나 몇 푼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교 출신도 아닌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고 하였더니 걷고 뛰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가 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보세요. 3장 15절, 16절 "너희는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렇게 예수 이름을 가지고 이 사람이 나았다고 막 소리를 치고 베드로가 증거하니까 그 것 때문에 붙들려 가지고 영창에 들어갔어요. 하룻밤을 잔 다음에 그 다음날 재판석에 끌려 나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재판석에 앉았어요. 재판을 담당한 대제사장들은 궁금했어요. 도대체 갈릴리의 어부 출신인데 무슨 이름을 가지고, 누구 권세를 가지고 이런 기이한 일을 행하느냐? 그걸 알고 싶어 가지고 그들을 신문했습니다.
여러분 본문 7절을 봅니다. '사도들 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10절에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기가 막히지요. 이만큼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예수의 이름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예수요, 예수 이름 빼놓고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예수 이름을 증거 했습니다. 위협을 당하고 핍박 을 만날 때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싸웠습니다. 병자를 앞에 놓고 예수 이름으로 그들을 일으켰습니다. 귀신과 악령의 역사 앞에 예수 이름으로 대적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그들은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이 이름의 존귀함과 권세를 초대 교회 성도들이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나 예수 이름이요. 무엇을 해도 예수 이름으로 했어요. 이렇게 대단한 예수 이름의 존귀함과 권세를 제일 정확하게 아는 자가 누구냐? 사탄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리고 이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을 싫어해요.
여러분, 4 장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까?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 환자를 살렸다고 하니까 나중에는 어떤 공갈을 쳤습니까? 본문 17절에, '이 예수 이름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이 두 사람을 불러서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그 두 사도를 불러 경계하여' '경계하여', 이 말은 협박하는 것입니다. '협박해서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 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공갈쳤어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20절에, '우리는 보고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지 아니하면, 말하지 아니하고 는 못 견딘다.' 결국 영적인 대결을 했어요. 누가 이겼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이겼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오늘도 예수의 이름을 우리 입에 담지 못하도록 갖은 공작을 다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 예수 이름을 쑥스러워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이름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예수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존귀히 여기는 마음이 약해요.
그런 분들이 교회 안에 꽤 되는 것 같아요.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마귀가 와서 입을 틀어막는데 그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기 때문에 그래요. 정말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가를 알면 그럴 수가 없지요. 성경을 바로 공부하면 많이 알면 알수록 믿음이 단순해집니다. 이게 성경을 바로 공부하는 사람이예요. 단순하다는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단순하다는 말은 유치하다는 말도 아니요, 무식하다 는 말도 아니예요. 단순한 믿음이다. 하는 말은 순결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잡것이 가급적 이면 섞이지 않은 순도가 높은 믿음, 이것을 단순한 어린아이의 믿음이라고 그래요. 성경을 제대로만 공부하면 많이 공부할수록 믿음이 아브라함처럼 단순해집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성경을 좀 이상하게 공부했는지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복잡한 사람이 되어 버려요. 그래 가지고 계속 머리 굴려요. 그래 이 말하면 성경에 있는 저 말을 생각하고, 이것을 설명 하면 '성경 어디에는 안 그렇던데' 하고 나오고, 이래 가지고 복잡해지니까 믿어야 될 것을 제대로 못 믿는 것입니다.
그거 성경 공부 잘못한 사람이예요. 마귀가 이것을 이용해요. 이 용해서 '너 성경 공부 많이 해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좀 복잡하게 믿어라.' 이렇게 유혹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거기에 끌려 들어갑니다. 이거 불행한 이야기입니다. 자기 문제입니다.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본문의 제사장들의 실수는 무엇입니까? 이기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이들은 가짜입니다. 결국 가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공로를 내세우려고할 때 그런 범죄를 하는 것입니다. 기쁨이 있어야 할 때 죽이려고 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은 어떻습니까? 진짜 맞습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살면 진짜가 틀림없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부활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은 부활을 믿습니다. 안 믿는다고 하면 천국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부활을 믿고 계십니까? 네!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래요. 여기까지도 훌륭합니다. 이것이 율법적인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부활한 것입니다. 골고다의 십자가의 사건이 예수님만의 십자가가 아니라 내 십자가의 사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하고 느낀 십자가의 사건이 될 때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고 사는 것을 믿음 안에서 경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한 사람은 여기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고는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성도들이 여기에서 멈추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과거의 부활을 믿고, 다가올 미래의 부활도 믿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문제는 '현재의 부활'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주일날이 피곤한데 교회 나와서 예배만 드리는 것도 다행한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되시 죠? 그것을 마귀는 원하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로 살아라. 오히려 걷고 뛰는 것에 대해 거부 감을 가지고 싸우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가짜들은 "믿음 생활 그렇게 하면 안돼"라고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교회에서 비디오를 통해 '고구마 전도왕' 과천 교회 김기동 목사의 간증 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지사시절에 아주 탄탄한 중소기업 두개를 경영하는 아주 성공적 인 기업인이었습니다. 이분의 간증인데 10여 년 전만 해도 이분 이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반지하에 집을 얻어 가지고 어렵게 사는데 1년만 지나면 전세를 자꾸 올리는 주인 때 문에 못 견뎌서 싼 집을 구하러 다닙니다. 과천에 살아야 되니까 과천 지역을 다녔나 봐요.
어느 복덕방에 들어갔습니다. '집 하나 구해주십시오. 할 수 있으면 쌀수록 좋습니다.' 한참 복덕방 주인이 생각을 하더니 '싼 집이 하나 있기는 있는데 이걸 선생님한테 소개를 해야 될 지 안해야 될 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요. '어떤 집인데요?' '폐가가 하나 있습니다.' '그래요? 왜 폐가가 되었는데요?' '예, 그 집에 사람이 들어가면 3개월도 안되어서 식구 중에 한 사람이 죽어 나옵니다. 2년 동안 4가정이 들어갔는데 4가정 다 한 사람씩 죽고 나왔어요. 그래 가지고 지금은 아무도 안 들어갑니다.' '그 집이 어디 있는데요?' 그랬더니 '과천 주공 아파트 404동 605호 입니다.' 이러더래요. 난 아파트에 폐가가 있다는 것, 처음 들었어요.
가만히 듣고 보니까 30평 짜리인데 좋거든요. '선생님, 그것 우리 주이소. 우리는 예수 믿는 사 람이기 때문에 괜찮아요. 값은 얼마인데요?' '원래는 8400만원인데 6천만 원에 주인이 내놨 어요.' '됐네요. 우리 돈하고 거의 비슷하니까 주이소.' 복덕방 주인이 쇼크를 받았어요. '당신 아직 젊고, 애가 둘이나 된다 면서 되겠소?'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 니까요. 주이소.' 그랬더니 복덕방 주인이 연락을 해 가지고 집주인이 대전에서 올라왔어요.
그 주인이 당신 정말 괜찮겠느냐고 몇 번 다짐을 하더래요. 괜찮다고 집이나 가보자고 그랬 어요. 집으로 인도했는데 그 605호 실에 들어가 봤더니 진짜 사람이 살지 않아 가지고 문은 덜렁거리고 유리창은 깨어지고 싱크대는 내려앉았고 왕거미가 9마리나 온 사방에 줄을 쳐 놓고 있고 진짜 귀신, 잡신 나올 만한 그런 집이었대요. 그래서 주인이 1주일 안에 다 고쳐 수리해 줄 테니까 이사 오라 그러더래요. 신이 나가지고 집에 와서 부인과 아이들보고 '야, 귀신 나와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집이래.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집에 이사가는 거야. 알겠지?' 이사를 와 놓으니 그 주변에 있는 아파트 사람들 이 신기한 눈으로 염려 반 호기심 반하고 쳐다보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를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보는 사람들마다 만나면 '안녕하십니까? 저는 과천 교회에 김기동 집사라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 집에 어떤 집인지 알고 들어 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3개월 내지 반년을 지켜보는 거예요. 저 집에 틀림없이 무슨 일이 일어날 텐데. 김 집사님이 이사 간 첫 날은 진짜 무섭더래요. 저녁에 화장실을 들어갔다 나오는데 뒤에서 뭐가 콱 잡는 것처럼 머리끝이 바짝 서더래요. 그럴 때 뭐라고 했겠어요?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반년이 지났는데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 아파트 사람들이 눈초리가 달라졌어요. 그리고 1년이 지났어요. 1년 반이 지났어요.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복주셔서 기업을 하루아침에 얼마나 불티나게 일으켜 세웠는지, 종업원이 몇 백명이 되는 큰 기업의 사장이 되버리고 그 다음에 우연히 신청을 했는데 40평 아파트가 당첨이 됐어요. 그래 가지고 2년 만에 이사를 가게 됐다네요. 이사 간다고 했더니 그 집주인 부부가 올라와 가지고는 그 집사님 앞에 넙죽 큰절을 올리더래요.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도 예수 믿으면 당신처럼 될 수 있습니까?' 그러더래요. '예수 믿으십시오. 믿으면 저처럼 대담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 예수 믿었지요. 복덕방 부부가 예수 믿었지요. 그리고 자기가 이사 간다고 하니까 그 아파트, 404동에 있는 아파트 주민들이 40여명이 모여 가지고 잔치를 베풀어주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지요. 폐가가 옆에 있으면 아파트 집 값이 다 떨어졌잖아요. 그런데 아파트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어 놨으니까 너무 기뻐 가지고, 그리고 죽지 않고 식구들이 무사하게 나오게 된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해 가지고 자기들이 잔치 를 베풀었어요.
그러니 그 자리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김 집사가 그들을 앉혀 놓고 전도를 했어요. '예수 이름이 가진 능력을 알면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 앞에서 두려워 하거나 걱정할 것이 전혀 없어요. 예수 이름 부르면 귀신이고 잡신이고 다 도망갑니다. 자, 여러분 중에서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까? 예수 믿고 싶으신 분 손 한번 들어보세요.'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손 들었어요. 그래서 과천에서는 한 동이 거의 다 예수 믿는 동은 그 동이 유일한 케이스래요.
여러분, 어떤 사람은 예수 이름 때문에 이렇게 팔자를 고치는데 우리는 도대체 뭡니까? 왜 똑같은 예수 이름 부르고, 똑같이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 앞에 기도하고 예수님의 말씀 을 들고 다니면서 사는데, 우리는 왜 비실비실 하는데, 그 사람은 그렇게 신나게 살아요? 우리 곰곰이 생각을 해야 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믿음이 단순하지를 않아서 그래요. 아브라함처럼 절대적으로 믿어야 돼요.
예수의 이름, 그 영광스러움과 그 이름의 권세를 우리가 믿어야 돼요. 이 이름 믿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 문제가 문제 될 수가 없어요. 어떤 문제도 예수 이름보다는 더 크지 않습니다. 어떤 위협과 어떤 고통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갖는 권세보다 더 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이름 가지고 믿음으로 대처하면 모든 것이 예수 이름 앞에 무 릎을 꿇게 되어 있고, 해결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다. 나는 돈은 없다. 돈 같은 것은 나는 믿지도 않아.' 하는 배짱이 좀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서 지금까지 '돈, 돈' 하면서 돈만 기대다가 망신한 사람 많이 있지요? 믿을 것이 됩디까?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돈, 굉장한 것 같지만, 믿을 것은 못 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만 믿다가 절망한 사람, 가정 망친 사람, 신세 망친 사람,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다. 나는 돈 같은 것 안믿는다. 나에게 꼭 하나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나는 이것을 의지하고 이 세상을 살며 이것을 내가 너에게 주기를 원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더욱 윤택해 질 것입니다.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정말로 매력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가짜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앉은뱅이로 평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일어서야 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변화를 가지길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변화됩니다.
진짜 교인은 교회 나와서 가정이 바뀝니다. 주변이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성도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에게 고백하십시오. "주님 제가 앉은뱅이입니다. 변화가 있게 하십시오,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가짜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진짜 신앙생활 하는 자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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