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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9 이리 구시장(일명 남부시장) 1만보를 도보로 걷다.
자유인 인생 나그네는 익산역을 출발, 익산의 작은 명동이라 불리던 곳 영정통 문화예술의 거리를 지나 구시장(일명 남부시장)을 걷다.
인화동에 위치한 구시장(남부시장)은 철도교통이 발달하면서 일본인과 중국화교들이 들어와 번성했던 시장으로 익산지역 김제군, 옥구군 일부의 주민들이 모여 각종 일상생필품을 거래하고 농사에 필요한 농구를 사갈 수 있는 정기시장이 5일 간격으로 구시장 부근에서 음력 4일과 9일에 정기적으로 열리게 되었으나, 90년대 이후 시장은 급격히 쇠락하여 지금은 상권이 거의 무너진 상태다.
남부시장을 중심으로 주단 60여년 역사와 40여개 익산 유일의 주단상가가 형성되어 번성하였지만, 요즈음은 결혼할 때 한 벌씩 해 입는 혼례복 이외에는 일상적으로 한복을 입는 사람들을 찾을 수 없는 시대인지라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모습이다.
남부시장 일대는 일제 강점기 당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에 1919년 문용기 열사 등이 주도한 4.4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이를 기리는 순국열사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교통의 도시 익산은 1960년대 "낮에는 10만, 밤에는 5만"이라는 찬사가 있었던 익산,
내가 1960년대 이리중학을 통학하던시절, 익산역앞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말 구루마, 소구루마가 참으로 많았다.
당시 익산역에서 하역한 화물과, 철도관사 부근에 연탄공장과 목재소 공장이 있어 우마차가 성업을 이룬듯하다.
그시절 육상 교통수단이 말과 소구르마였으니 많기도 많았지.
뜻도 모르고 말구르마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일본말로서 우리말로 하면 “차” 또는 ‘수레’라는 뜻이라네요.
걷는 것은 아주 평범한 일상이지만 두다리에 힘이 있어 구시장이 쇠락하여 옛영화는 찾아볼수 없으나 상설시장으로 변한 모습을 구경한것에 만족하고,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운 나그네는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은 심정으로 변화무쌍하게 흐르는 세월의 여정속에 감사한 마음으로 세월을 낚으니 행복하였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도보시간 및 거리 : 8:30-11:00(2:30) 도보1만보
☛도보코스 : 익산역-문화예술의거리(영정통)-이리극장-이익수리조합-목공소거리-허영근약국-주단거리-구시장-중국화교학교-순국열사기념비-귀로
➡익산시의 변천과정
1931년 11월 1일 익산읍을 이리읍(裡里邑)으로 개칭
1947년 2월 23일 익산군 이리읍을 이리부로 승격
1949년 8월 15일 이리부를 이리시(裡里市)로 개칭
1995년 5월 10일 이리시와 익산군의 합의에 의해 익산시가 됨
➡2018현재 익산시 인구 : 305,354명
※솜리의 어원 공부 : 솜리는 한자 “이리”의 속리가 변화된 말
솜리는 안쪽 마을이란 뜻입니다.
'이리'의 '이'는 속, 안을 뜻하는 한자어입니다.(속→솜으로 부르기 좋은 발음으로 됨)
이리를 언제부터 솜리라 한지는 자세히 모르나 나의 어머님이 이리가 친정인데 동네아주머니들이 솜리떡이라고 부릅디다.
구시장(일명 남부시장)
남부시장은 예전부터 ‘구시장’으로 불리며 100년이 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구시장(남부시장)은 조선시대에는 솜리장이라 불리었으며, 호남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가축시장과 수산시장, 농산물시장으로 나누어져 활기가 넘치었으나 5일장의 폐쇠로 쇠락하였다.
남부시장은 현재도 한복거리를 중심으로 주단포목점의 상점가가 있으나 사람들이 한복을 별로 입지않아 경기가 뜸한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장날이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이곳에서 1919.4.4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구시장 옆에 이승만 대통령 휘호의 순국열사기념비(殉國烈士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모현동에서 익산서부역가는 소방도로이다.
첫머리에 예지미용실이 보인다.
동네여자분들이 미용하는곳이며 사람들이 사랑방처럼 모이는곳이다.
미용실사장은 수십년을 이곳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며 동네아주머니들의 머리를 이쁘게 해주고 있으며, 이동네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로 호적계장 노릇을 하고 있다.
솔뫼마을은 팟죽집으로 가마솥에 팟을 넣고 죽을 만들어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고 있다.
10여년 전 개업했을때는 손님이 별로 없었는데 근래에는 항상 손님이 북적이며 자리가 꽉 차 만원이며, 예약해야 할 정도로 기다려야 된답니다.
장사의 비법은 손님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음식을 맛있게 하면 소문이 나서 걱정없이 영업을 할수 있을 것 같네요.
옛 영정통거리 익산문화예술의 거리를 지나다.
60-70년대 사람들로 꽉 찻던 영정통 문화예술의거리는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고 승용차의 모습도 거의 보이질 않는다.
대부분의 점포들은 문을 닫았거나 사람들의 모습은 별로 눈에 않띤다.
익산문화예술의 거리의 옛 이름 영정통은 일제 강점기에 익산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서, 1912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익산역 바로 앞인 이곳 영정통 즉 중앙동에는 일본상점들이 자연스럽게 형성이 되고 화교들이 중국집을 개업을 하고 양장점과 양복점들이 들어서고 먹자골목이 생겨나면서 익산에서 제일 번화한 영정통 대전이남의 명동타운이 형성 되었다.
시간이 나서 문화예술의 거리를 거닐때면 옛 동인의원 자리에 자리잡은 유희성작가님이 운영하는 “인사동갤러리전통카페”에 들려 6천원에 쌍화차를 마신다.
조성곤회장과 다사모회원들이 익산에서 모임을 할때면 들러 쌍화차를 주문하여 먹으며 이야기하는곳 인사동카페가 기억에 남는다.
유희성 작가님이 명필로 가훈을 써 주어 방에 걸어놓았지.
⇒유희성(010-7169-6128) 작가님이 써준 나의 방 가훈 :
1. “평범한 일상이 행복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살자.”
2. “거북이처럼 한걸음씩 걷다보면 어느새 이만큼 와 있을거야 최선을 다하자.”
유희성작가님은 익산문인화연구회 이사장으로 왕성히 활동하며 후진양성에 노력하고 있다.
익산시 등록 문화재 180호 익산근대역사관
중앙동 우체국옆에 있었던 삼산의원 건물이 ‘익산 문화예술의 거리’內
로 이전 익산근대역사관으로 2019.3.26. 정헌율 익산시장, 이춘석국회의원을 포함하여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복원 개관되었다.
(구) 삼산의원은 일제감점기 독립운동가이신 三山 김병수선생님께서 1922년 당시 삼산의원을 운영하던 곳이었다.
연면적 289.26㎡의 2층 건물로 당시로서는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인 김병수(1898~1951)는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재학 중에 1919년 3월 5일의 군산 지역 독립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같은 날 서울 남대문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1983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병수의 생애
(金炳洙, 1898-1951)
의사. 본관은 김해(金海)로 호는 삼산(三山)이다. 김제군 백구면 유강리 출생이나 이리시에서 살았다. 군산 영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1년을 앞두고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익산에 전달하여 궐기대회에 선봉이 되어 행진하다가 왜경에 잡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3개월을 복역했다. 출옥 후 1921년에 의전을 졸업하고, 군산 ‘야소교병원’을 거쳐 다음해 익산에 삼산의원(三山醫院)을 개원하여 인술을 베풀고 사재를 털어 ‘광희여숙’을 설립하여 여성교육에 공헌하였다. 28세에 익산 제일교회 장로가 되어 교회에 유치원을 설치하고 익산 청년회관도 건립하였다.1945년 수복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 동년 9월에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자 이에 항쟁하기 위하여 동년 12월에 ‘이리,익산 독립촉성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전북지부 부위원장이 되고, 동년 9월에는 세브란스 재단법인 이사에 피선되었다. 1947년 3월 ‘대한농민총연맹’ 전북위원장이 되고, 동년 4월 이리읍이 부(府)로 승격되자 초대부윤(初代府尹=현재의 이리시장)에 취임하였고, 4월에는 ‘대한농민총연맹’ 전국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동년 12월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이리시당 부위원장, 1949년 ‘민주국민당’의 전북당지부 최고위원이 되었다. 6.25사변을 당하여 부산에 피난 중 동래 ‘제5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활약하다가 UN군의 진격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구국총력연맹(救國總力聯盟)’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이리극장옆 삼천리자전거, 옛 송수당부근을 지나다
해방후 설립된 이리극장옆 삼천리자전거는 세월과 함께 폐업의 길에 들어서다.
삼천리자전거포는 선대로부터 아들이 이어받아 운영하였으나 두어달전 심근경색으로 70의 나이에 이세상을 떠나 저승에 떠나시었다하여 유심히 가게를 살펴보니 가게문은 굳게 잠기여 있었으며,
바로 옆 건물의 옛 송수당(빵종류 및 팟빙수)은 수입상품 간판으로 변하여 있었다.
송수당은 언제나 학생들로 자리가 꽉 찻으며 여름철에 팟빙수 맛이 좋아 종종 사먹은 기억이 있다.
익산 옥구 수리조합 사무실
⇒위치 : 전라북도 익산시 평동로1길 28-4(평화동)
⇒등록문화재 제181호
익산 구 익옥수리조합 사무실 및 창고는 2005년에 등록문화재 제181호로 지정되었다. 1930년에 익옥수리조합 사무소 건물로 지어져 1996년까지 전북농지개량조합의 청사로 사용된 건물이다.
정면 중앙의 출입구와 그 위쪽 창호 부분은 테두리에 꽃잎 무늬 형상의 인조석으로 치장하여 붉은 벽돌과 대비를 이룬다.
외벽의 독특한 장식적 조적수법 및 맨사드 지붕의 목조트러스 가구법에서 수준 높은 건축기법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의장 및 기술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바닥 콘크리트에 대한 공사기록이 ‘조선과 건축’지(1922-45)에까지 실렸다고 전하며 외관의 원형도 잘 남아 있다.
철근콘크리트조에 목조트러스의 구조로 되어 있다.
이 건물은 일본인 농장 지주들이 쌀 생산량을 늘리고자 창설한 익옥수리조합의 사무소이다. 토지 개량과 수리 사업을 명분으로 설립되어, 과다한 공사비와 수세(水稅)를 부담시켜 지역 농민을 몰락시키는 등 일제에 의한 우리나라 근대 농업 수탈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등록문화재 181호로 지정된 익옥수리조합사무실에 진열된 사진 중 익산사람들이 춘포 일본인 농장가옥을 답사하는 사진에 내가 아는 지인들이 있어 소개합니다.
김귀진님, 신귀백님, 손인범님이 사진에 나와 있군요.
구시장(일명 남부시장)
남부시장은 예전부터 ‘구시장’으로 불리며 100년이 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구시장(남부시장)은 조선시대에는 솜리장이라 불리었으며, 호남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가축시장과 수산시장, 농산물시장으로 나누어져 활기가 넘치었으나 5일장의 폐쇠로 쇠락하였다.
남부시장은 현재도 한복거리를 중심으로 주단포목점의 상점가가 있으나 사람들이 한복을 별로 입지않아 경기가 뜸한편이다.
일제시절 익산군에는 이리시장(구시장) 이외에도 목천시장, 황등시장, 함열시장, 금마시장, 여산시장, 웅포시장 등이 있었는데 이리시장(구시장)이 규모면에서 익산군의 가장 중심적인 시장구실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장날이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이곳에서 1919.4.4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구시장 옆에 이승만 대통령 휘호의 순국열사기념비(殉國烈士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허영근약국을 지나 한복거리의 에덴주단은 중학동창 최성림안식구가 운영하며, 성호심야보일러는 중학동창 유인구친구가 운영하는데, 유인구친구와 통화하니 집에 있길래 방문하여 깨죽을 내 놓아 한그릇 먹고 남부시장을 답사하였다.
화교소학교로 사용되었던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농장 대교농장 사무실
⇒등록문화재 제209호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대교)농장 사무실은 전라북도 익산시 주현동에 있는 옛 일본인의 농장 사무실이다. 이곳은 2005년 11월 11일에 등록문화재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대교)농장 사무실은 1914년에 건립된 일본인 오하시 농장에 소속된 사무실로 전북지역 농업수탈의 현장 및 농장사무실을 알려주는 건물이다. 건축면적 41.32㎡, 연면적 75.2㎡인 이 건물은 지붕의 망와에 ‘대교(大橋)’라는 글자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오하시(大橋) 농장은 호남지역 최대 쌀창고였다. 당시 농장의 모습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며 전라북도 농업 수탈 지역이었던 이곳의 상황을 잘 나타내는 역사적인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8·15광복 뒤 이리화교소학교 교사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는
익산시화교협회 창고로 쓰인다.
전북지역 농업수탈의 현장이라는 점과 농장사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현존 건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생활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이 농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당해서였는지, 익산지역의 3.1운동은 교통이 편리한 시장입구의 대교농장의 사무실 바로 앞에서 시작되었다. 우연찮게도 주현동 105-19번지에 ‘순국열사비’가 있으니 대교농장 사무실과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익산순국열사비
1919년 3월 1일은 우리 온 겨레기 부른 대한민국 독립만세는 한일합방에 항거하는 통렬한 민족의 함성이요 자주독립을 찾으려는 비장한 절규요,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국권을 유지 계승하려는 당당한 주장이었으며 남녀노소 구별없는 한덩어리로 뭉쳐진 거대한 불길의 폭발이었다 이와같은 함성은 삼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요원의 불길처럼 타 올랐다. 이러한 정당한 평화적인 궐기에 대하여 왜적은 잔인하고 악독한 살육과 탄압을 가하였다 이 해 4월 4일 이리시에서는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서정만을 중심으로 이곳 장터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앞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지휘하던 중 무자비한 총칼아래 장렬한 순국의 영령이 되었다.
이 숭고한 3.1정신을 이어 받아 애국심으로 승화시킨 순국열사의 고귀한 정신을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1949년 4월 25일 이리시민 일동의 명의로 이 비를 건립하여 보존하고 있다
순국열사비 바로 옆에 주현동 천주교회가 위치하고 있으며 뒤편에는 익산중국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기념비는 1949년 문용기 선생과 순국열사들을 기리기 위해 익산시에서 세웠고, 기념비의 휘호와 비문은 이승만 대통령이 썼습니다.
문용기선생과 이승만대통령과의 인연은 다음과 같다.
문용기 열사는 1878년 5월 19일 익산군 오산면 오산리 310, 관음마을에서 태어났다.
남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24살이란 늦은 나이에 군산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 문용기는 신학문을 배우는 소학교 학생이면서 한문 선생을 겸했다. 30세가 된 1908년에는 목포의 짠 왓킨스중학교(영흥학교로 개명)에 입학, 재학 중 이승만과 만나게 된다. 당시 YMCA 총무였던 이승만이 전국을 다니면서 강연활동을 하던 중 문용기와 만난 것이다.
세 살이 적었던 문용기는 이승만과 의기투합한 인연으로 4.4운동때 순국한 문용기선생의 비문과 휘호를 쓴 것으로 사료된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직접 친필로 순국선열 비문을 써서 하사했는데, 밑 부분이 많이 훼손된 모습은 1960년 4.19혁명 당시 자유당이 몰락할 때 항거 차원에서 시민들이 손상한것이라 합니다.
4.4익산만세운동과 문용기열사
1919년 4월 4일 오산남전교회 장노였던 문용기선생과 도남학교 학생들이 중심되어 4월 4일에 만세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놀란 일경은 무차별 사격을 가해 문용기, 박도현(叅奉),장경춘, 박영문, 서공유, 이충규 열사가 순국했습니다.
1919년 4월 4일, 장날을 맞아 300여 명의 군중이 모였습니다. 군중들은 한 남자의 지휘 아래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행진했습니다. 만세 소리가 횟수를 더해갈 때마다 점차 군중들이 늘어났고 그 수는 어느덧 1천 여 명이 되었습니다. 그 기세가 오르자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습니다.
헌병대는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들까지 동원하여 각종 흉기로 진압을 시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지휘를 하던 문용기열사는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당황한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문용기선생의 오른손을 잘랐습니다. 하지만 문용기선생은 쓰러지지 않고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였습니다. 이에 일본 헌병이 왼팔마저 베어 버리자,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격분한 헌병은 쫓아가 그의 몸을 난자하였고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남자는 외쳤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新)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으로 하여금 대한의 독립된 국민이 되게 하겠소.” 결국 문용기선생은 순국하고, 이에 분노한 시위대는 무자비한 총격에도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남전교회에 4.4만세운동 추모비가 있으며, 익산시는 1949년 당시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남부시장에 순국열사비를 건립하였고, 오산면 관음마을에 생가가 있어 오산면사무소안에 충혼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하였습니다.
일제시대 온몸을 던져 독립을 외쳤던 익산의 선구자 문용기선생을 추모하며 치를 떨면서 그날을 기억해보자.
문화유씨 열려문
유씨(柳氏, 文化柳氏)
열부. 문화 유씨는 무주의 참봉 유현의 딸로 18세 때 남평문씨(南平文氏) 홍재(洪宰)에게 시집을 가서 부도(婦道)를 극진히 하던 중 부군 홍재가 병석에 있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며 부군이 죽자 바로 그날 부군의 곁에서 음독순사(飮毒殉死)를 하였다. 고을 유림의 통장(通狀)과 무성서원(武城書院) 및 서울 대성학원 모성공회(慕聖公會) 경학원(經學院)과 각 군(郡) 유림 측의 표려(表閭)의 포장이 있다. 열부 문화유씨의 열부에 대한 비각이 익산시 주현동(珠峴洞)에 있고, 그 열부에 대한 행적이 그 비에 새기어 있다.
김씨(金海金氏)
효부. 김 씨는 옥구의 김장호(金張浩)의 딸로 20세 때 남평문씨 일권(一權)에게 시집을 와서 가산의 융성을 도모하고 부도(婦道)를 다하여 시부모를 섬겼다. 매일 혼정신성(昏定晨省)과 지체의 봉양을 극진히 했으며 구고(舅姑)의 병이 위급하였을 때에 열지주혈(裂指注血)을 한 효부로 유림의 천상(薦狀)과 서울 대성학원(大聖學院) 등의 표려상(表閭狀)이 있다. 그녀의 효부정려(孝婦旌閭)가 익산시 주현동에 있고 그 효행의 행적이 비(碑)에 새겨져 있다.
건강글
소금3%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마음 안에 있는 3%의 좋은 생각이
우리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향기롭고 맛깔스러운
산해진미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지 모르겠지만
건강에는 아주 해롭다.
● 남을 미워하지 마세요. 미움은 피에 독성물질을 만들어 냅니다.
● 웃으세요.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입니다.
사는일
사는 일이 너무 바빠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네
청춘도 이와 같아
꽃만 꽃이 아니고
나 또한 꽃이었음을
젊음이 지난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네
인생이 길다 한들
천년만년 살 것이며
인생이 짧다 한들
가는 세월 어찌 막으리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칠월과 같은 사람들아
피고 지는 이치가
어디 꽃 뿐이라 할까...
자유인 인생 조동화는 강원도 인제 현리에서 군시절을 보내다.
7971부대 125야전공병대대 의무과 위생병으로 군인으로서 사명을 다하고 만기 제대하였지.
7971부대 125야전공병대대는 현리 진다리에 있다가 가리산으로 부대가 이동 하였지.
125야전공병대대는 3군단 소속으로 3여단 휘하 부대로서 1972년 한계령을 개통한 부대라합니다.
1972년 당시 3군단장은 김재규장군이었으며, 내가 3군단사령부 대기병으로 갈 때 연병장에서 전역식이 있었다.
유격-기초훈련장-그네타기, 가리산 유격대 올빼미들도 모두들 제대하여 어디선가 노후를 보내겠지.
125야전공병대대는 주로 겨울에 한계령에 눈이 오면 제설작업을 하였으며 군사도로공사도 하였다.
당시만해도 카메라도 귀하던 시절이었는데 군시절 위생병으로 복무하던 사진이 남아 있어 추억을 느끼게 되어 감회가 새롭답니다.
구굽낭을 멘 사진은 유격대에 파견나가 복무하던 사진이네요.
긴급 응급환자 발생시 조치하라고 파견 나간 것 같소이다.
호랑이 담배피던 이야기 같은데 구급낭속에 별약이나 들어 있다고, 겨우 소독약, 소화제, 해열진통제, 핀센트, 압박붕대, 상처에 바르는 연고등이 고작있지요.
내가 복무하였던 125야전공병대대가 한계령을 개통한 부대로서 한계령에 대하여 요약해 봅니다.
한계령(1,004m)을 오르는 입구의 108계단은 1971년부터 군사 도로를 개설, 정비하여 1973년에 완공하였습니다.
한계령에 도로공사 중(1971~1973년 한계령-양양간)희생된 7명의 군 장병의 추모와 명복을 빌기 위해 한계령 위령비를 세우고 위령비를 오르는 108계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1981년 확포장공사로 인하여 원래의 계단은 없어졌다고 합니다.
한계령 위령비 뒷면에는 희생 장병 이름과 함께 당시 공사를 관장하고 준공했던 제3군단장 김재규 중장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군단장 이름만 지워진 채 희생 장병 이름이 새겨져 있어 세상사가 무상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공병125대대 기념비가 한계령-양양간 흘림 4교부근에 세워져 아래와 같이 세겨져 있다.
개척의 완결점
개척정신은
깊고 험한 설악에 도전하여
동서를 잇는데
승리하였노라!
육개성상의 대 역사는
오늘 여기서 완결되나니
자연의 신비속 여기에
우리의 개척 정신을
영원히 기념하노라
-최후의 연결점에서-
1971. 11. 30
125야전공병대대 개척자
한날 35사단에 입대하여 훈련소에부터 현리, 가리산까지 군생활을 하였던 강경일은 이발사였고, 배정수는 보안부대장 식사당번이었지. 제대기념으로 사진까지 같이 찍었지만 제대하여 김제의 배정수는 만나보았지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강경일은 연락이 않되여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세월은 무심히 흘러갔네.
추억으로 남은 사진중 본부중대 병사들과 같이 현리 진다리찍은 사진이 남아있네.
세상사는일이 바빳는지 자유인 조동화는 그들을 기억은 하였지만 찾아 보지는 못했지.
행정과 안영휘, 장비과 박경원 두명만 이름이 선명하네.
장비과 박경원은 함열이 집이었는데도 찾아보지를 못했으니, 이만큼 세월이 흘러 그냥 추억으로 잊혀진 이야기가 되어 버렸도다.
그도 어디에선사 황혼의 인생을 보내고 있으리라.
나의 초년인생 경험담
1970년 鐵道에 入門하여 40여년을 철도에 젊음을 불사르고, 무엇하나 만족스럽게 이룩 한 것 하나 없이 흘러간 歲月!
1970년2월20일 목포기관차사무소 기관조사 초임발령으로 사회 초년생이 되어 목포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철도는 증기기관차(영국의 조지스티븐슨 1829년발명)의 운행에서 디젤전기기관차로 동력이 바뀌어가는 과정에 있었으며, 목포-광주간을 운행하는 몇 개열차는 증기기관차사업이 있었으므로 신규발령된 기관조사에게는 증기기관차승무로 지정되어 기관사1인 본무기관조사1인 보조기관조사1인 3명이서 하는 근무형태로 기관사는 운전만담당하고 기관조사는 교대하여 석탄을 투척하여 증기를 가열시켜 증기기관차가 움직이므로 석탄을 투척하는 작업이 기술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힘을 쓰는 작업이었기에 어려운 작업이었다.
칙칙폭폭, 철컹철컹 한밤의 정적을 깨며 기적소리를 직접울리면서 달렸던 추억어린 시절이 있었음을 추억삼아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시골의 어른들은 기차소리에 깨어 많은 자손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허구한 이야기는 아닐것이요, 그래도 인정있고 살기가 좋았던 시기는 그때 그옛날이 좋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순천철도국 목포기관차사무소 기관조사의 사회초년생은 2년6개월의 반복되는 임무후 1972.8.29. 군에 입대, 전주 35사단에서 6주간 훈련을 마치고 후방기 교육을 춘천에서 2주간의 훈련후 강원도 인제 현리 공병부대 의무실 위생병으로 자대 배치되었다.
군생활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35사단 훈련병때 모악산KBS송신소 건설 작업시 모악산아래에서 세멘 한포대씩 등에 메고 정상까지 오르던일이 가장 내인생에서 힘들었던 일이었답니다.
자유인 趙東和는 黃金萬能主義의 核家族 개인주의 세상에서 옛시절의 인정은 찾아볼수 없고 하루면 수도없는 갖가지 사건사고 홍수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속에 나자신도 예외가 될수 없듯 바쁜일상으로 어영부영 하루가 흘러간다.
자유인 조동화 그는 누구인가?
전쟁의 포성이 한창인 6.25 시대에 태어나, 인생의 삶이 무엇인가 고뢰하며 즐거운 인생을 꿈꾸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쉼없이 흘러가는 세월속에 지나온날들이 아쉬움만 가득하지만 흘러보낸 세월은 다시오지 않기에 지나간 시간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무상한 삶의 여정을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인간의 삶이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왔으니 삶에 이유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동화의 벗님들!
자유인 조동화의 신조는 삶의 여로에서 이세상 살아가는 것이 모두가 “부질없다” 하면서 그냥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뭐 별거 있습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을거 하면 그게 행복입디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happiness)이란 무엇인가?
안병욱 교수는 행복이란
첫째는 낙천적 인생관이다.
인생의 모든 것을 밝게 긍정적으로 보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생활 태도다.
인생은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가짐에 달렸다.
극락과 지옥은 내 마음 속에 있다.
감사와 기쁨의 눈으로 인생을 보면 모두 즐겁고 기쁘다.
둘째는 사랑이다.
사랑은 인생의 주성분이다.
인간의 주성분은 사랑으로 되어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때, 우리는 견딜 수 없는 허무주의와 고독감과 절망감에 빠져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동물이 아니고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셋째는 보람있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일하는 것이요, 일 하는 것은 사는 것이다. 일을 하되,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아무 보람을 못 느낄 때, 인생은 참을 수 없는 고역으로 변한다.
건강, 돈, 명예, 성공, 신앙,지혜, 자유도 물론 중요하지만, 행복의 핵심적 요소는 아니다.
부자의 대부분은 불행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낙천적 인생관, 사랑, 보람있는 일.
3가지 행복관을 가지고 살면 행복하다.
중국속담에 행복은
할 일이 있는 것,
바라볼 희망이 있는 것,
사랑할 사람이 있는 것, 이 세가지다.
할 일이 없다는 것,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없다는 것,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만큼 비참한 사실은 없을 것 같다. 죽을때까지 일을 놓지 않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은 행복의 필수조건 중 하나다. 존 록펠러 3세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두 가지 단순한 원칙이 있다. 먼저, 당신이 관심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그 일을 찾았다면 당신이 가진 에너지, 야망, 능력 등 모든 영혼을 쏟아 부어라."
행복( happiness)은 어디에!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4.22-1804.2.12)는
" 인간 행복의 3가지 조건으로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라고 했다."
그 세 가지를 충족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일생을 보낸 대철학자가 제시한 행복의 세 가지 조건이 범인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과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선 놀라게 되고, 그러면서도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 세가지 조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노동뒤의 휴식은 순수한 기쁨 행복의 원천
노동 뒤의 휴식이야말로 가장 편안하고 순수한 기쁨이다.- 칸트
근로는 매일을 풍부하게 하며, 휴식은 피곤한 나날을 더욱 값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근로 뒤의 휴식은 높은 환희 속에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보들레르
휴식은 단순히 일을 중단하고 노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많은 일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재충전의 기회가 바로 휴식이라는 사실을 우리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휴식과 행복은 그대가 바라는 것,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근로의 결과에서 얻을 수 있다'- 토마스 A. 캠피스 -
★누구나 올 때는 알몸 갈 때는 빈손★
조금 양보하는 미덕으로 살면 될 텐데
조금 배려하고 용서할텐데
조금 덜먹고 나누면 행복할 텐데
무엇이 그리 길고 질기다고 움켜만 쥐나
갈 때는 너나 나나 보잘것없는 알 몸뚱이뿐인데
누구나 올 때는 알몸 갈 때는 빈손
누구나 이 름만 대면 알만한
억만장자도 알몸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북망산천 갈 때에는 국화꽃 수백 송이와
삼베 몇 필 감고 가는 그것이 고작인 것을
인심이나 쓰고가지 쌓놓으면 무엇하리
우리가 영생을 살 것처럼
아둥바둥 지지고 볶다
욕심이 골마 쥐어짜고 해봐야
산천 초목이 70~80번 바뀌면
그대나 나나 노병에는 이기는 장사 없으니
누우라면 눕고 오라면 가고 힘없으니
세상 순이대로 살아가는 이치가 아니던가
우리는 길 떠나는 나그네인데
언제 떠나는지 서로 몰라도 가다 보면
서로 만나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애절한 사연 서로 나누다 갈림길 돌아서면
어차피 헤어질 사람들
더 사랑해 줄 걸 더 베풀 것을 후회할 것인데
웬 욕심으로 무거운 왜 그리 못난 자존심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하고 미워했는지
사랑하며 살아도 너무 짧은 시간
베풀어 주고 또 줘도 남는 것들인데
웬 욕심으로 무거운 짐만 지고 가는
애절하고 고달픈 나그네 신세인가
천 년을 살면 그리할까? 만년을 살면 그러리오
사랑한 만큼 사랑받고 도와준 만큼 도움받는데
심지도 않고 거두려고만 몸부림쳤던 부끄러운 나날들
우리가 서로 아끼고 사랑해도 허망한 세월인 것을
어차피 저 인생의 언덕만 넘으면 헤어질 것을
그날이 오면 다 벗고 갈 텐데 무거운 물질의 옷도
화려한 명예의 옷도 자랑스러런 고운 모습도
더 그리워하면 더 만나고 싶고 더 주고 싶고
보고 또 보고 따뜻이 위로하며 살아야 하는데
왜 그리 마음에 문만 닫아걸고 더 사랑하지 않았는지
아니 더 베풀지 못했는지
미워하고 싸워 봐야
상처 난 흔적만 훈장처럼 달고 갈 텐데
이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이제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사랑해야지
우리는 다 길 떠날 나그네들 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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