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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4일 목요일.
직장 동료들과 강원도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를 찾아가는 날.
서울 강서구 공항동 김포공항입구에서 아침8시 30분에 출발.
영동고속도로 진부나들목(IC)에서 빠져나와 월정사로 가는 국도 길.
날씨는 너무나도 화창했다.
길 옆으로 늘어서 있는 식당과 민박집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곧 다가올 봄을 맞이하느라 분주해 보인다.
이번 겨울에 나는 많은 곳을 여행했다.
강화 석모도 보문사등을 둘러보고 하룻밤을 숙박한 뒤 해명산 산행, 춘천 남이섬을 둘러보고 하룻밤을
숙박한 뒤 아침고요수목원 둘러보기, 당일 강촌 문배마을과 검봉산 산행, 당일 태백산 산행, 1박 2일간의
제주도 여행 , 2박 3일간의 변산반도 여행과 내변산 산행 그리고 가까이는 북한산과 관악산 산행.
참으로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직장과 일로부터의 탈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은 그만큼의 업무가 밀리는 대가를 치른다.
그러다보니 겨울 내내 블로그와 카페에 여행사진을 한장도 올리지 못하는 결례를 범하고 말았다.
앞으로 밀린 겨울 여행기를 쓰려면 한참 애를 먹을것 같다.
상원사(上院寺)와 함께 월정사(月精寺)를 품에 안고 있는 오대산(五臺山).
백두대간이 힘찬 기세로 금강산, 설악산을 지나 대관령, 태백산, 소백산으로 이어지는데 백두대간이 대
관령을 넘기전에 곁가지 하나를 늘어뜨린다.
이것이 바로 차령산맥으로 이 산맥은 치악산을 걸쳐 충청남북도를 관통해 서해의 대천 앞바다로 이어지
는 성주산에서 마감한다. 백두대간이 차령산맥으로 갈려나가는 지점, 즉 차령산맥의 발원지가 되는 곳에
우뚝 솟은 산이 바로 오대산이다.
오대산은 예로부터 삼신산(금강산, 지리산, 한라산)과 더불어 국내 제일의 명산으로 꼽던 성산이다.
오대산은 해발 1,563m의 비로봉을 주봉으로 동대산(1,434m), 두로봉(1,422m), 상왕봉(1,491m), 호령봉
(1,561m) 등 다섯 봉우리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동쪽으로 따로 떨어져 나온 노인봉(1,338m) 아래로는
천하의 절경 소금강이 자리한다.
원래 오대산은 중국 산서성 청량산의 별칭으로 신라시대에 자장율사가 당나라 유학 당시 공부했던 곳이
다. 그가 귀국하여 전국을 순례하던 중 백두대간의 한가운데 있는 산의 형세를 보고 중국 오대산과 너무
나 흡사하여 이 산을 오대산이라 이름붙였다고 옛문헌에 전하는데 이것이 지금의 오대산국립공원이다.
강원도 강릉시, 홍천군, 평창군 등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오대산은 1975년 2월 1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
었으며, 그 면적이 303.929평방 킬로미터에 달한다.
연간 100만명의 탐방객이 찾아오는 이 산은 월정사 입구의 전나무 숲을 비롯해 온 산이 아름드리 전나무
로 빽빽이 들어차 수목군락의 절경을 보여주며, 병풍처럼 둘러선 봉우리를 잇는 능선의 완만한 곡선은
한국의 미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노인봉을 시발로 동쪽으로 펼쳐진 소금강은 기암들의 모습이
금강산을 보는듯하다고 해서 소금강이라 부르고, 또 학의 날개를 펴는 형상을 했다고 해서 일명 청학산
이라고도 불리운다.
(자료출처: 다음 백과사전)
오늘 우리의 목적은 오대산 비로봉 밑에 있는 적멸보궁에서 기(?)를 받기 위한 산행이다.
겨울의 막바지에서 1미터 높이로 쌓여 있는 눈도 싫컷 밟아보고...
오대산 월정사의 일주문이 보인다.
그 안쪽으로는 너무도 유명한 전나무 숲길이 길게 이어져 있다.
오대산이 품고 있는 사찰과 유적들은 알아볼 것이 너무도 많다.
그만큼 유명하다고나 할까.
월정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신라시대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로 강원도 중남부에 있는 60여 개의 절을 관리하고 있다.
서기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얻은 석존 사리와 대장경 일
부를 가지고 돌아와서 통도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자장이 창건할 당시에는 초암(草庵)으로
엮어 만든 임시암자에 불과했지만, 그뒤 신효(信孝)·신의(信義)·유연(有緣)이 차례로 이곳에 머물면서 점
차 사찰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사적기 寺蹟記〉에 의하면 1307년(충렬왕 33)에 큰 불이 일어나 불
타버렸으나 이일(而一)이 중창했고, 1833년(순조 33)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844년(헌종 10)에 영
담(瀛潭)·정암(淨庵) 등이 재건했는데, 1·4후퇴 때 군사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해 칠불보전(七佛寶殿)
을 비롯하여 10여 채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이때 양양군 서면 선림원지(禪林院址)에서 출토되어 이 절에
서 보관하고 있던 통일신라시대의 선림원지 동종(804)도 함께 불타 녹아버렸다. 그뒤 1964년에 탄허(呑
虛)가 적광전을 중창한 이래로 만화(萬和)가 계속 중건하여, 현재는 대강당·삼성각·심검당·승가학원·용금
루·일주문·요사채 등이 있다.
(자료출처: 다음 백과사전)
유적과 유물로는 현존하는 건물로 적광전과 삼성각, 대강당, 심검당(尋劍堂), 승가학원, 범종각, 용금루
(湧金樓), 일주문, 요사채, 창고 등이 있다. 원래 적광전에는 대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것이 통례이지만,
이 절의 적광전 내에는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형식의 대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협시불도 모시지 않았다.
문화재로는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39호)과 세조가 친필로 쓴 상원사중창권선문(上院寺重創勸善文; 보물
제140호),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 등이 있다. 팔각구층석탑은 이 절의 제일 성보로서 10세기 또는 11
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고구려풍을 띠고 있어 이채롭다. 이 밖에도 유물들을 모아 놓은
전시실 보장각(寶藏閣)에는 팔각구층석탑과 같은 모양의 축소판 목조탑이 있고, 대장경을 넣었던 경궤,
<금강경> 3권, <범음집(梵音集)> 2권, <진언집(眞言集)> 1권, <보권문(普勸文)> 1권, <지장경> 2권,
인도불상, 인도패엽경, 난초족자 2폭, 독성탱화, 관음보살변상도(觀音菩薩變相圖), 신중탱화, 바라 1쌍,
조선시대 의상, 기와, 고려시대 궤짝 13개, 구리거울인 무문경.파문경.쌍룡경.사룡경, 향낭, 향합, 수정사
리병, 진신사리병, 은합, 청동합, 청동갑옷을 쌌던 보자기, 목향 등이 소장되어 있다.
(자료출처: 다음 백과사전)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 아래에 눈이 쌓여 있다.
전나무 가지는 그늘로 뻗는다고 한다.
적막한 전나무 숲속에서 햇살은 나무 어깨 틈새로 비껴든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오면 숲에서 "쏴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인가.
그 소리를 타고 향긋한 나무 냄새가 풍겨온다.
월정사 전나무 숲은 어찌보면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산문(山門)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이는 1.2km의 이곳에서 중생은 속세의 때를 벗고 부처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곳을 우리 일행은 그냥 자동차로 스쳐 지나가고 있다.
만약 산행이 아닌 여행을 할 시에는 반드시 걸어봐야 할 곳이다.
전나무 숲길을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걸어보았는가?
깊은 심호흡과 동시에...
누가 보든 말든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걷다보면 내가 잠시 나를 잊는다.
월정사 전나무에 얽힌 설화 한 토막.
고려 말 오대산의 북대암(北臺庵)에서 수도하던 나옹 혜근(懶翁 慧勤; 1320-1376)은 매일 월정사로 내려
가 부처님께 콩비지국을 공양 올렸다.
어느 겨울 날 혜근이 비지국을 받쳐들고 눈길을 조심스레 가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무 가지 위에 쌓여 있
던 눈이 떨어져 혜근을 덮쳐 비지국을 쏟고 말았다.
혜근은 격노하여 "네 이놈, 소나무야, 너는 부처님 진신(眞身)께서 계신 이 산에 살면서 언제나 큰 은혜를
입고 있거늘, 어찌 감히 네 마음대로 움직여 공양물을 버리게 하느냐"라고 꾸중했다.
마침 산신령이 이 소리를 듣고 "소나무야, 너희는 큰스님도 몰라 보고 부처님께도 죄를 지었으니 이 산에
살 자격이 없다.
멀리 떠나거라.
이제부터는 전나무 아홉 그루가 이 산의 주인이 되어 오대산을 번창케하리라"하고 말했다.
그 뒤부터 오대산에는 지금까지 소나무가 없고 전나무가 번성한다고 하며, 지금도 당시의 아홉 그루 전
나무 중 두 그루가 일주문 가까이에 유독 큰 키로 서 있다고 한다.
자동차로 상원사까지 올라 본격적인 산행을 나선다.
시간을 보니 낮12시 30분.
서울에서 4시간이 걸렸다.
장비를 갖추고 본격적인 산행길을 나서는데 제일 먼저 관대걸이라는 돌비석이 우리를 맞는다.
오대산 상원사는 조선시대 세조와 문수보살의 전설이 깃든 사찰이다.
부스럼을 치료하기 위해 오대산을 찾은 세조가 월정사를 참배하고 상원사로 가던 도중 물이 너무 맑아
목욕이 하고 싶어졌단다.
혼자 물속에 들어가 몸을 씻고 있었는데 동자승 하나 지나가길래 불러서 등을 밀게 했다.
세조가 동자승에게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주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이르자, 동자승이 “대왕께
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세조가 목욕할 때 옷을 벗어놓았다는 ‘관대걸이’ 비석이 상원사 입구에 덩그러니 서 있다.
오대산은 다섯 봉우리가 만드는 거대한 연꽃 봉오리다.
흙산인 오대산은 둥글면서도 후덕하다.
그 넓디 넓은 산에 온통 전나무다.
전나무 숲길은 월정사 부도 밭을 지나 신작로 흙길(지방도 446호선)로 이어진다.
상원사∼북대 미륵암∼두로령∼명개리까지 60여 리 길(25km).
평상시라면 걸어서 6시간쯤 걸리지만 겨울 눈길은 훨씬 더 걸린다.
길은 가장 낮은 골짜기를 따라 가르마처럼 나 있다.
아스팔트길이 아니어서 좋다.
눈 밝은 스님들의 굳은 ‘소신’ 덕분이다.
오대산 일대 1770만 평의 땅이 월정사 소유인 것도 큰 힘이 됐다.
여름엔 그 흙길을 맨발로 걷는 사람도 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는 걸어서 두 시간 정도면 닿는다.
진부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1시간 간격으로 있지만 이 길을 차 타고
가기엔 아깝다.
우리 일행은 급하다는 핑계로 지금 이 길을 자동차로 오르고 있는 것이다.
길옆에는 오대천이 흐른다.
상원사가 햇살 아래 파란 하늘을 이고 서 있다.
절에 절을 하러 온 이 할머니.
무거운 봇짐을 등에 매고 이곳까지 올라 부처님전에 어떤 소원을 빌지 자못 궁금하다.
어딘가로 급히 외출을 나가시는 스님 말고는 경내는 사뭇 고요하다.
눈 쌓인 오대산 줄기와 시린 하늘 아래 상원사는 언제나 수도승처럼 거기 그대로 서 있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에 있는 절 상원사.
이 절은 705년(성덕왕 4)에 성덕왕이 창건했다. 효소왕(692~701 재위) 때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가 오대산에 입산하여 동쪽에 있는 만월산(滿月山)에는 일만관음보살을, 서쪽에 있는
장령산(長嶺山)에는 일만대세지보살을, 남쪽에 있는 기린산(麒麟山)에는 일만지장보살을, 북쪽에 있는
상왕산(象王山)에는 일만미륵보살을, 중앙에 있는 지로산(地盧山)에는 일만문수보살을 첨례(瞻禮)했다.
그뒤 성덕왕이 된 효명이 다시 이 산을 방문하여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하고, 문수보살상을 조성하여 봉
안함으로써 이 절이 창건된 것이다. 그뒤 1376년(우왕 2)에 영암이 중창했다. 1464년(세조 10) 왕이 이곳
에 행차했다가 문수보살을 배알한 후 고양이 덕분에 자객으로부터 목숨을 건졌다고 하는 일화가 전하는
데 이로 인해 다음해에 중창하고 전답을 하사했으며, 이것을 영산부원군 김수온(金守溫)에게 기록하도록
했다. 〈상원사중창권선문 上院寺重創勸善文〉이 남아 있다. 1469년(예종 1)에 세조의 원찰(願刹)이 되
었다. 1904년에 선원(禪院)을 개설하고 1907년에 수월화상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현존 당
우로는 선원인 청량선원(淸凉禪院), 승당인 소림초당(小林草堂), 종각인 동정각(動靜閣), 영산전 등이 있
다. 중요문화재로는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 문수동자좌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 23점(보물 제
793호), 동종(국보 제36호) 등이 있고, 〈상원사중창권선문〉은 한문과 한글이 병기되어 있어 한글연구
에 귀중한 자료이다.
(자료출처: 다음 백과사전)
신라 신문왕의 두 아들 효명(孝明)과 보천(寶川)은 여기에 와서, 세속의 모든 욕심을 잊고 평생을 살아가
리라 다짐했는데, 진여원(상원사)을 중심으로 다섯 군데 봉우리에 있는 암자를 찾아가며 차를 끓여 바치
고 정성을 다하였다. 그 자리들은 지금 그대로 남아 있다.
오대산의 비로봉(1563.4m)-동대산(1434m)-두로봉(1422m)-상왕봉(1491m)-호령봉(1561m)의 다섯 봉
우리가 한 송이 거대한 연꽃을 이루고 있다.
월정사와 전나무 숲은 그 밑을 받치는 푸른 연잎.
연꽃잎으로 둘러싸인 부처의 나라인 성안은 동서남북 산허리와 그 한가운데에 보살들이 살고 있는 다섯
"대(臺)"가 있다.
그래서 오대산이다.
"대(臺)"는 불상을 받치고 있는 좌대나 같다.
동대 관음암에는 일만 관세음보살, 서대 염불암에는 일만의 대세지보살, 남대 지장암에는 일만의 지장보
살, 북대 상두암에는 미륵불이 산다.
중대 사자암엔 일만의 문수보살이 있는 곳이며 비로자나불을 모신다.
그럼 적멸보궁은?
연꽃의 꽃술이며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중대에서 비로봉을 향해 20분쯤 올라가다보면 나온다.
부처님 사리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선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는다.
상원사를 출발해 중대, 적멸보궁을 거쳐 오대산 최고봉인 비로봉에 오른 다음 다시 길을 나서 상왕봉을
거쳐 북대사로 내려오는 눈꽃 산행은 환상적인 코스라고 알려져 있다.
평상시엔 5시간 정도 걸리지만 눈길에서는 2∼3시간쯤 더 잡아야 한단다.
오늘 이 코스를 갈 수 있으려나?
일단은 비로봉까지만 오르기로 했다.
눈이 많이 오면 입산이 통제될 때도 있다니 미리 오대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T. 033-332-6417)에 문의
하여야 한다.
동쪽(동대) 관음암, 남쪽(남대) 지장암은 월정사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서쪽(서대) 염불암(미타방 또는수정사)은 그 뒤에 호령봉이 버티고 있고 북쪽(북대) 미륵암(상두암)은 두로봉 아래에 있다.
가운데(중대) 사자암과 그 위 적멸보궁은 오대산의 제일봉인 해발 1563m인 비로봉 바로 아래에 있다.
상원사의 이 많은 눈을 치우느라 스님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새삼 군대 시절 눈을 치우면서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스님들은 평상심을 유지하며 때로는 즐거운 마음으로 눈을 치운다고 한다.
수행의 일환이기 때문이라고...
국보 제36호인 상원사 동종은 나무창으로 철저하게 가려져 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카메라를 들이 밀어 어렵게 사진을 찍을 수가 있었다.
소원을 담아 던진 동전 위로 무심히 매달려 있는 동종.
그 동종에 새겨져 있는 비천상.
구름을 타고 앉아 하프처럼 생긴 "공후"와 파이프처럼 생긴 "생항"이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어서
"주악천인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상원사에서 10여 리쯤 눈길을 밟아 올라가면 바로 왼편에 북대 미륵암(1300m)이 나오는데 두 스님이 동
안거 묵언정진 중이라고 한다.
그 부근엔 고려 말 나옹선사(1320∼1376)가 좌선을 하던 나옹대도 있다.
큰 바위에 작은 돌을 쌓아 평평하게 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았다고 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선사의 선시다.
우리는 오늘 이곳을 향해 가지 못한다.
언젠가는 이곳을 찾아보리라 마음먹는다.
상원사를 둘러 본 뒤 중대 사자암을 향해 길을 나선다.
계속 이어진 가파른 돌계단 길에서 숨이 가빠 허덕일 무렵 드디어 사자암이 나타난다.
사자암 입구 이정표에서 기념사진 한 장.
중대 사자암.
조선 태종 1400년경 중창.
세조가 적멸보궁에 올랐다고 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이후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적멸보궁을 지키는 암자로 사세를 유지한다.
또한 월정사는 오대산 사고를 지키는 승영사찰로 왕실의 보호를 받는다.
근현대사를 통해 많이 손상이 되었고 2000년 새로운 모습으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적멸보궁으로 향하는 길에 중대 사자암이 있다.
층층이 네칸으로 된 건물이 경사를 따라 서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비로전은 4층으로 된 향각의 맨 위에 위치하여 오대산의 오대를 뜻하는 모양으로 위치한다.
비로전 내부는 가운데 비로자나불을 모셨고 좌우 협시불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셨다.
사자암도 서둘러 둘러보고 적멸보궁을 향해 나아간다.
비교적 늦은 산행에 마음만 조급해졌다.
나무사이로 보이는 산세가 제법 웅대하다.
아직까지는 전체적인 산세 조망이 어렵다.
비로봉을 향해 더 올라가야 오대산의 웅장한 산세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드디어 적멸보궁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의 3대 적멸보궁은,
양산 영취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그리고,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
정선 고한 정암사 적멸보궁을 합쳐 우리나라의 5대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적멸보궁은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그러니까 적멸보궁이라 함은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사찰인 것이다.
적멸보궁의 공통된 특징은 진신사리를 곧 부처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찰과는 달리 대웅전 내부에 불
상이 모셔져 있지 않다고 한다.
대신 그 자리에 유리를 설치하여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탑이라던가, 금강계단 등이 직접 보이도록 해
놓았다. (유리가 설치되어 있지 않더라도 대웅전은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곳을 향해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적멸보궁의 탑, 계단 등은 다른 사찰의 불상을 대신하는 것으
로서 타 사찰의 탑보다 그 종교적, 미술적 가치가 높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적멸보궁에서 처음 마주친 장면.
이름모를 보살님이 손바닥에 한줌 쌀을 올려 놓고 가만히 서 있자 어디선가 날아 온 산새들이 순서대로
그 손바닥 위에 앉아 쌀을 먹고 있다.
이런 산새들은 산행을 하면서 계속 볼 수 있었는데 등산객이 점심 식사를 할 때면 그 옆에 날아와 앉아 자기도 좀 달라고 내내 보챘다.
오대산 풍경소리.
임영석.
오대산 山中,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허공을 헤엄치며 사는 물고기 한 마리가.
입에 문 세월을 흔들어.
등과 배가 납작 하도록.
적멸보궁 앞에서.
千 拜, 萬 拜 큰 절을 하며.
부처님 말씀을 엿듣고 산다.
바람이 제 몸을 흔들면 흔들수록.
千 拜, 萬 拜 더 큰 절을 하고.
말로는 다 못하는 깨달음.
허공에 층층 쌓아놓고.
고개를 끄덕이면 끄덕이는 몸짓까지.
푸른 나뭇잎이 따라한다.
얼마나 오랜 세월.
적멸의 뜻을 배워왔으면.
바람만 먹고 살아갈까.
오대산 적멸보궁 풍경소리는.
항상 등과 배가 납작하다.
적멸보궁을 세 바퀴 돌며 기를 담뿍 받은 후 다시 길을 나선다.
비로봉을 향해 오르는 가파른 길에서 만난 노스님과 노송.
스님의 덥수룩한 수염에서 고행의 흔적이 엿보이고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는 깊게 파인 전나무에서 세월
의 흔적이 엿보인다.
내가 가고 있는 길.
눈이 와서 온통 하얀 산.
길이란 길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 눈 위에 누군가가 발자국을 남겨 놓았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 발자국 위를 다시 밟는다.
그 발자국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길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지금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내가 가고 있는 길은 어디를 향해 뻗어 있는가?
나는 그 길을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렇게 내 삶의 자취를 찾고 반추하면서 길을 걷는다.
직장 동료인 공수부대 중사 출신의 이 아저씨가 적극 추천한 오대산 적멸보궁.
근무 중 대뜸 "기 받으러 가자"는 제의가 오늘 산행으로 이어졌다.
제대 후 운동을 너무 안해서일까?
비로봉을 오르는 내내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입에서는 간혹 육두문자도 나오고...
자기가 제안을 했으니 누굴 탓하랴.
잠시 쉬었다 가면 어떨까?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눈을 들어 휘 둘러보니 노인봉이 아스라이 보인다.
머리에 희 눈을 이고 서 있는 봉우리가 아주 인상적이다.
드디어 오대산 최고봉 비로봉에 올랐다.
저 멀리 설악산 줄기 마루금이 파란 하늘 아래 마치 열병하듯 늘어서 있다.
상왕봉과 두로봉 그리고 노인봉이 생선뼈처럼 그 산세를 이어가고 있다.
시간을 보니 오후3시 10분.
그냥 내려가기가 아쉽다는 일행들.
내쳐 상왕봉을 거쳐 두로령으로 하산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더 깊은 오대산.
전승선.
산문을 열어 보니.
눈 쌓인 기슭엔.
늙은 소나무 졸음에 겨워 면벽한다.
숲은 숲으로의 큰 세상을 풀어놓고.
낮게 익어가는 시간들을 하나하나 꺼내 놓는다.
심심한 발걸음에.
맑게 씻기어 가는 마음이.
겨울해살 속으로 산빛같은 무늬를 새기면.
계곡에서 뒤집힌 하늘이 내려와 뒤를 따라온다.
서성이던 바람이.
그대 등뒤에서 가벼워진 후.
고요가 되어 날아가 앉은.
저 참나무 가지 끝엔 빈 맘이 걸려있다.
귀를 닫고도 겁을 사는 바위를 바라보며.
약수에 목축이는 그릇으로.
산에서 산처럼 살으련다.
한낮의 짐승들과 벗하는.
아무일 없는 일상으로도.
즐거이 사는 것을 아는데.
세상 밖 익명의 고달픔이야.
버려도 그만이다.
어깨에 걸린 짐 지고 와.
푸른 하늘 올려다보니.
어느새 가벼워졌다.
덩달아 산도 가벼워졌다.
발만 찍어주겠다며 농담하던 아주머니의 솜씨가 의외로 좋았나보다.
멋진 사진 감사드립니다.
비로봉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상왕봉을 향해 길을 나선다.
이때부터 우리는 약2시간 30여분 동안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하게 된다.
저 멀리 보이는 설악산의 웅장한 산세는 우리를 연신 감탄케했다.
늦은 점심은 시장이 반찬이었다.
허기진 배는 떡라면을 순식간에 동나게 했는데 반주로 마신 쐬주는 마치 꿀물을 마시는 듯 달콤했다.
덜어 놓은 라면이 순식간에 식으면서 얼어붙는 모습에서 추위를 실감할 수 있었다.
바람이 그다지 세차게 불지 않아 그나마 다행.
점심 식사 후 다시 나선 길.
우리는 산길을 뛰기 시작했다.
시간에 쫓기다보니 피곤함도 잠시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등산로 옆은 약1미터 높이의 눈이 쌓여 있어 거름(?)을 줄때도 등산로를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대 어디로 걸어 가시는가?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을것만 같다.
하늘 들어가는 문을 몰라 새들은 늘 나뭇가지에 앉는다던가?
중생들은 늘 산문 밖 저잣거리에서 "길 없는 길"을 찾아 헤맨다.
눈 덮인 오대산 길.
우리는 걷고 또 걷는다.
우리 또한 하늘 들어가는 문을 모르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상왕봉을 거쳐 마침내 하산길.
두로령 신작로 흙길(지방도 446호선)은 월정사∼상원사∼북대 미륵암∼두로령∼명개리까지 60여리 길
이다(25km).
그 중 상원사∼명개리(16.2km) 구간은 눈이 발목까지 쌓여 차량은 봄이나 돼야 오갈 수 있다.
오직 사람만이 다닐 수 있다.
그만큼 걷기에 호젓한 길이다.
눈을 밟으면 발밑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길을 한참 걷다 보면 눈이 머릿속으로 들어와 가슴속까지 채운다.
발은 눈이 되고, 눈은 길이 된다.
길은 몸속으로 들어왔다가, 몸 뒤로 사라진다.
길은 내가 되었다가, 내가 다시 길이 된다.
눈길은 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시금 상원사 입구에 다다른 나 자신을 발견한다.
길은 떠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새삼 실감나는 순간이다.
오대천에 놓여 있는 섶다리.
우리는 잠시 차를 세우고 이 길을 걸어 보았다.
월정사를 향해 가다보면 월정사 입구 길 왼쪽에 있는 기와집 식당 경남식당.
이곳에 도착하니 날이 어두워져 있다.
4대째 이어져 온다는 이 집 여주인(033-332-6587, 2482. 011-375-1849)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따뜻한 나무난로 옆에서 잠시 몸을 녹인 후 자리를 잡는다.
이 집은 토종닭도리탕과 산채정식이 유명하다고 한다.
닭도리탕을 안주 삼아 메밀꽃술로 하루의 산행을 마무리 한다.
걷는 길이 즐겁고 먹는 입이 즐거우니 이 아니 좋을쏘냐.
오대산 입구에 밤이 깊어 간다.
집으로 귀가하기 위해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든다.
다음 산행지를 생각하며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달콤한 휴식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