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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에는 많은 공원이 있는데 그중 '사적공원'이란 명칭을 가진 공원이 두곳이 있습니다^*^
이 두곳 역시 매년마다 역사문화 관련축제가 열리는데 수영구에서는 "광안리어방축제", 동래구에서는 "동래읍성
역사축제"가 열려서 한번씩 가곤 했는데 축제행사 구경하느라 정작 이 두곳의 사적공원 전체를 둘러본 적이 한번도 없어서 이번에 마음먹고 탐방하고자 부산으로 Go Go!!
(기행코스)
*수영사적공원(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성로 43)
안용복장군 사당~좌수영성지 푸조나무와 곰솔~수영성 남문~수영민속예술관과 야외마당
~독신묘와 수영산신당~25의용단
*동래사적공원(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산26-1)
동래문화회관~북문언덕~동래읍성 북문~서장대~북장대~장영실 과학동산
~동래읍성역사관~복천박물관~복천동고분군 야외전시관
1.수영사적공원(水營史蹟公圓)
뒤로는 산세가 수려한 금련산이 있고 앞으로는 광안리해수욕장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해의 명승지로서 현재는
성은 없고 좌수영성지 관련유적만 남아 있습니다.
경상좌수영성지와 수영성남문 내외에 조성된 공원으로 수영사람들의 혼이 담겨있는 역사와 교육의 장으로 부산의 해양민속을 한자리에서 볼수 있는 대표적인 문화유적공원입니다^^
이곳은 수군군영인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자리로 수영이란 지명도 수군절도사영의 준말이었는데 현재의 지명으로 굳어졌으며 공원안에는 시지정 유형문화재인 경상좌수영성 남문, 시지정 기념물인 25의용단, 수영야류 등 무형문화재 3종, 좌수영성지 천연기념물 2종, 안용복장군 사당 등 비지정 문화유적 5종이 있고 이를 보존 관리하고 있는 (사)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경상좌수영성지(慶尙左水營城址) :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경상좌수영이 있었던 곳에 설치되었던 군사적 방어시설이며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으로 한양에서 보았을때 낙동강의 왼쪽을 지키던 수군의 최상위 군영이며, 낙동강의 동쪽에서부터 경상도 남.동쪽 해안방어의 총책임.
무관 정3품인 수군절도사가 맡아 관리했으며 그 아래 1개의 첨사영(수군첨절제사가 머물던 군영)을 두었고,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와 수군 등이 소속되었는데 다시 그 아래 10여개의 만호영(종4품무관 만호가 머물던 군영)을 둠.
*경상좌수영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약2,147m, 높이는 4m로 우물3개, 성문4개, 수구4개가 있었고, 성의 바깥에는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옹성3곳, 치성7곳을 두었고 동문을 영일문, 서문을 호소문, 남문을 주작문, 북문은 공진문이라 했는데 이들 성문에는 각각 문루가 딸려 있었음.
*경상좌수영은 본래 부산포에 있었으나 여러번 옮겨가며 운영되었고 세조5년(1459)에 울산 개운포로, 중종39년
(1544)에 동래 해운포로, 인조14년(1636)에 동래의 감만이포로, 효종3년(1652)에 다시 동래 해운포의 옛 자리로
옮겨졌고 고종32년(1895) 7월에 군제개혁에 따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음.
1)수영사적공원 초입 전경과 입구에 설치된 25의용(義勇)중 3인 조형물
2)안용복장군 사당(安龍福將軍 祠堂)
조선 숙종(1675~1720)때 동래출신 어민으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의 수군인 능로군이었는데, 당시 왜인들이
우리 울릉도와 독도를 죽도라 부르면서 자주 침범하자 동료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땅임을
확인시키고 일본의 에도막부로부터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울릉도와 독도수호에 큰 업적을 세워 후세사람들에 의해 장군이란 칭호를 받았고, 장군의 업적을 후세에
오래도록 기리고자 부산시민의 뜻을 모아 이곳에 사당과 동상을 건립했으며 1967년 건립된 수영공원 정상의
충혼탑을 이전하여 새로이 단장하였습니다.
*수강사(안용복장군의 사당)와 부속건물
*안용복장군 충혼탑과 동상
3)좌수영성지 푸조나무(천연기념물 제311호 : 1982.11.9 지정)
느릅나무과에 속하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던 당시 수령이 500년정도로 추정되었는데 높이18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8.5m, 가지퍼짐은 동서로 23m로 마치 두그루의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띄며 팽나무와 비슷하여 곳에
따라서는 개팽나무 또는 검팽나무라 불리기도 합니다.
나무의 유래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않으나, 마을사람들은 나무에 신성한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이 나무를 마을을 보호해주는 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4)좌수영성지 곰솔(천연기념물 제270호 : 1982.11.9 지정)
높이23.6m, 둘레4.5m로 소나무과에 속하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당시 수령400년 정도로 추정했으며, 소나무의
겨울눈은 대개 붉은색을 띠는데 반해 곰솔은 회백색을 띠는 것이 특징으로 바닷가를 따라 자라기 때문에 "해송"
으로도 부르며 줄기껍질의 색이 소나무보다 검다고해서 "흑송"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 당시 이곳의 군사들은 이 나무를 군영을 보호해주는 신성한 존재라고 생각하여 나무에게 자신이 무사하기를 기원했다고 합니다.
5)수영성 남문
6)(사)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수영민속예술관
*수영역사문화전시관
대표적인 무형문화재로 수영지신밟기,수영농청놀이,좌수영어방놀이,수영야류가 있습니다.
(수영지신밟기)
땅의 좋지않은 잡귀잡신을 밟아서 제자리로 돌려보내어 집과 마을의 평안과 복을 비는 의식으로, 한해 시작하면서 마을 곳곳을 돌고 집집마다 방문하여 나쁜 기운은 물리치고 좋은 복만 오기를 바라면서 한해 마을의 안녕과
모든 사람의 만복을 기원하는 민속전통놀이입니다.
(수영농청놀이)
수영지역은 대대로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농삿일은 아주 고된 일이어서 혼자는 힘이 들어 여럿이 모여 농삿일을
했고 서로 돕고 효율적으로 농삿일을 하기위해 농청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농청의 남자들은 힘든 중노동
위주로 하고 여자들은 밭농사위주로 하였으며 모내기철에는 모두가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선조들은 힘든 일을 할때 노래(소리)를 부르며 고단함을 달랬는데 특히 농삿일을 하면서 부른 노래를 농요
라 하며 수영지방의 농요를 향토예능으로 승화시켜 수영농청놀이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좌수영어방놀이)
수영은 조선시대에 외적을 막기위해 수군이 있었던 중요한 지역으로 경상도 좌측에 수군이라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라 하고 줄여서 좌수영이라 했는데 수영지역은 바다가 가까워 고기잡이를 많이 하였고 좌수영 수군들은
식량이 필요하여 고기잡이기술이 있는 어민들과 노동력(힘)이 있는 수군들이 서로 힘을 모아 협동을 하여 "어방"
조직을 만들고 전통적인 고기잡이가 힘든 일이어서 고단한 작업을 하면서 힘을 내고자 노래를 불렀는데 이 어로요를 후리소리라 하며 좌수영어방놀이는 고기잡이를 하면서 부른 노래를 공연으로 만든 전통민속놀이입니다.
(수영야류)
수영지역에 이어져 내려오는 탈을 쓰고하는 전통민속가면극으로 새해 정월대보름날 저녁에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 즐기던 축제였는데 즐겁게 동네를 한바퀴 도는 길놀이, 다같이 어우러져 한바탕 춤을 추는 군무, 탈을 쓰고
민속극을 하는 탈놀음으로 구성되는데, 양반과장,영노과장,할미 영감과장,사자무과장으로 이루어진 민속가면극
으로 옛조상들의 해학(한국적 유머)과 풍자(비꼬아 표현해 웃음을 만드는 것)가 담긴 훌륭한 문화유산입니다.
*연습과 공연을 위한 야외마당
#수영팔경(水營八景) 서사(序詞) : "수영유사"에서
기구한 세상사는 무운에 무쳐두고
호수서풍(皓首西風) 남래객(南來客)이
수북산남(水北山南) 지진두(地盡頭)에
일준주(一樽酒) 일표자(一瓢子)로
첨이대(臺)상(上) 높이앉아
현해탄을 바라보니
불편한 강성(江聲)이요 호호(浩浩)한 창해로다
경개(景漑)도 좋거니와 수영팔경 기관(奇觀)이다
7)독신묘(纛神廟)와 수영산신당(水營山神堂)
2018년2월 건축된 수영동 363 소재의 사당으로, 오른쪽이 독신묘, 왼쪽이 수영산신당입니다.
이곳은 1922년3월에 건립된 "조씨할배당"이라는 산신당이 있던 부지였는데 조씨할배당이 수영동 233에 있던
"송씨할매당"이라는 산신당과 성격이 흡사하여 같은 신당에 산신을 모심이 적합하고 종래 독신묘(경상좌수영의 군기(軍旗)를 모시는 사당)는 독립하여 또다른 신당에 모심이 적합하다 한 문화재전문위원의 의견에 따라 독립된 2개의 사당을 신축하였습니다.
8)25의용단(義勇壇)
*25의용단 소개안내판
*25의용단 정문
*의용사(義勇祠)로 들어가는 정문
*의용사(義勇祠) 전경
*의용제인비(義勇諸人碑) 안내판
*의용제인비 모습
2.동래사적공원(東萊史蹟公圓)
1997년 동래읍성 북장대, 복천동고분군의 일부를 복원하며 재개장한 후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대회 당시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전통수목 4천그루를 심었고 꿩,산토끼,다람쥐 등 야생동물을 방사하였으며 2007년
3월에는 지난 40~50년동안 무허가건물,경작지 등으로 방치되어 온 동래사적공원내 동래읍성지 문화재보호구역을 정비하고 그 자리에 동래읍성역사관을 건립했으며 2009년6월에는 동래출신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이 만든 옛 천문기기를 동래읍성 북문광장에 배치하였습니다.
옛날 동래읍성에는 3개의 장대와 6개의 문루가 있었는데,
*3개의 장대 : 서장대,북장대는 산성에 있고 동장대는 동래시내에 있음
*6개의 문루 : 암문과 북문은 산성에 있고 동래시내에 인생문과 동문터,서문터,남문터로 남아 있음
##동래의 지명과 역사
1)동래라 함은 동쪽의 내산을 말하는 것으로 내산은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을 줄여서 부르는 말로 동래는 삼한
시대 변진독로국, 내상국, 장산국, 거칠산국 등으로 불린 작은 나라가 있던 터였으나 신라에 포함되면서 거칠산군으로 되었다가 신라 경덕왕16년(757)에 동래군으로 고쳐 부르게 됨.
2)고려 현종9년(1018) 동래현으로 되었으나 조선 태조6년(1397) 동래진이 설치되었으며 명종2년(1547) 국방과
대일외교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도호부로 승격되어 당상관인 정3품 문관이 도호부사로 부임하였음.
3)임진왜란 최초의 패전지라는 이유로 일시 현으로 격하되었다가 선조32년(1599)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914년 동래부가 부산부와 동래군으로 나누어져 현재의 동래구 지역은 동래군이 되었다가 1942년 부산부에
편입되어 동래출장소로 바뀌었다가 1957년 구제 실시로 부산시 동래구가 되었고 일부지역이 1975년 남구,
1976년 해운대구, 1988년 금정구, 1995년 연제구로 각각 나누어져 오늘에 이름.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 :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중심지를 둘러싸고 있던 읍성으로,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형식으로 쌓았음.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으로 삼한시대이후 동래에는 독로국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때 이미 성을 쌓았을 것으로 짐작되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현종12년(1021)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으로 나와 있음.
*조선시대 동래부는 대일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으며 정삼품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방어의 제1관문이었고 1592년(선조25년)음력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최대격전지이기도 함.
*임진왜란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년(영조7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고 그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있는 읍성의 기원으로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3.8km였으며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 및 암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는데, 동문(지희루),
서문(심성루), 남문(무우루), 암문(은일루)이며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과 뒷쪽의 주조문의 이중구조였으며 나머지 3개문에도 옹성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수 없게 하였음.
*일제시대에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는데 지금 성내에는 북문,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과 여장 등을 부분적으로 보수,복원중임.
1)동래문화회관(부속건물로 생활문화관/대극장/소극장 등이 있음)
2)북문언덕(전투재현장)
"동래읍성 역사축제"때 임진왜란당시 동래읍성전투를 재현하는 장소로 언덕 양옆에 관람석이 마련되어 있음.
(동래읍성전투 이야기)
임진왜란때 동래부사 송상현과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읍성에서 싸운 전투로, 1592년4월14일 일본군이
동래읍성을 포위한 후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을려면 길을 빌려달라'라고 쓴 목패로 최후통첩을 하였으나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목패를 던지고 적에 대항하여 싸울 의지를 표명
하였고 송상현과 군관민이 격렬히 맞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군을 이기지 못하고 동래읍성이 함락됨.
3)북문 및 문루전경
4)서장대방향으로 가는 읍성로 및 서장대 모습
5)북장대방향으로 가는 읍성로 및 북장대 모습
#북장대에서 바라본 부산시가지 전경
##동래에 전해내려오는 옛이야기
(1)동래부사 이안눌의 유감(有感) : 1608~1609년 동래부사로 재임한 당대의 문장가
임진왜란때 동래읍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송상현부사와 선열을 그리며 읊은 시
"사월 십오일 천명 백명에 한둘이 살아남았다네
평명인데 집집마다 곡을 하네 이날을 맞이한 까닭으로
천지가 소슬하게 변하였고 제사상을 차리고 죽음을 곡하는 것이라
처량한 바람이 나무를 흔들었도다 아버지는 혹 그 아들을 곡하고
놀랍고 해괴하여 노리에게 물었노라 아들은 혹 그 아버지를 곡하고
곡소리가 어찌 그리 처참한가? (중략)
임진년에 왜적들이 들이닥쳐 살아잇는 것들은 모두 이들을 곡하니
이날에 성이 함락되었다 하네 얼굴을 찡그리며 들기를 마치지 못하고
오직 그때 송부사께서 눈물 콧물이 홀연히 턱에 흘러내렸도다
굳게 벽을 치고 충절을 지켰는데 이속은 바로 앞에 나와 말을 마치고
닫힌 문으로 몰아 입성하자 곡을 하였지만 오히려 슬프지 않네
동시에 피바다가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가? 시퍼런 칼아래
몸을 던져 밑바닥에는 주검이 쌓이고 가족을 모두 잃어 곡이 없는 사람들"
(2)의적 정봉서와 그 아내
옛날 동래부 몹시 가난한 집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정봉서는 효성이 지극하고 힘이 장사였다.
어느날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의원에게 물었더니 개 천마리를 먹여야 나을수 있다하여 개를 닥치는대로 잡았다.
이것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되어 나중에는 큰 도둑이 되었다.
어느날 동래성내의 사람들이 기장의 쌍다리 험한 고개에서 도둑떼를 만나 산중에 끌려가 떨면서 "저희들은 모두
동래성내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니 두목은 너그러운 표정으로 부하들을 시켜 맛난 음식을 후하게 대접하며
더날대 노자까지 주었는데 이렇듯 도적질의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깊은 산중에 본거지를 두고 도적의 두목이 된
정봉서는 부잣집의 재물을 뺏어다 가난한 집을 도와주는 의적이었다.
의적으로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정봉서도 말년에 동래 포졸에게 잡혀 먹을 것을 주지않아 15일째 되는 날
굶어죽자 정봉서의 아내는 동헌으로 달려가 그 앞의 하마석을 번쩍 들고는 "이놈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관헌이라고 하지만 너무 심하지 않느냐? 내가장이 비록 도둑이지만 의적이라는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그렇게 죽이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고함치며 동헌 대문을 때려쳐서 판자가 날아갔다고 함.
(3)박권농의 아들
임진왜란 직전 동래에 살았던 박권농은 하루살이의 비천한 몸으로 술마시는 일이 오직 그의 즐거움으로 어느날
너무 취해 오늘날 도시철도 동래역 강변 모래밭에 쓰러져 잠을 자는데 도둑이 자기를 흔들어 깨우고 남루한 옷을
벗기고 있어서 역마차를 타고 순찰하던 순라꾼이 이 광경을 보고 "박권농이 아니냐? 이 밤중에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소리치자 박권농은 "이분은 우리마을에 사는 사람이온데 술에 취한 저를 집가지 업고 가려고 한다"라고
대답하니 도둑은 감격한 어조로 "감사하오.당신이 만약 나를 도둑이라고 말했으면 내손에 맞아 죽었을 것이오" 라고 말하며 쥐고있던 돌을 던지고 "제가 집까지 모셔드리죠"하고 권농을 업고 집으로 갔다.
권농은 "자식이 하나뿐이니 아들이 되어달라"고 하자 도둑은 "아버지로 모시겠습니다"하고 사라졌다.
며칠후 밤늦게 권농을 찾아온 양아들은 안부를 여쭙고 돈 200냥을 구포 만덕고개에 묻어 두었으니 오늘 밤중으로 집에 옮겨 쓰시라고 말함에 권농은 그 돈을 가져와 잘 살았다고 함.
임진왜란후 동래 명문 서동 김씨댁에는 출생시부터 얼굴에 보자기를 쓴듯 껍질로 덮혀 입만 내어놓고 숨을 쉬던
괴물같은 노처녀가 있었는데, 이 딸에게 박권농의 아들이 청혼하였고 결혼시날 신랑은 대나무를 칼모양으로 예리하게 만들어 신부의 몸을 덮고있던 껍질을 벗기니 놀랍게도 아주 예쁜 미인이 탄생하였으며 그후 이 부부사이가
좋았거니와 서동 김씨세력으로 박씨 후손들이 잘 살았다고 함.
(4)동래부사 한배하의 젓가락 설화
동래부사 한배하가 부임해 왔을때 가뭄이 극심하자 부사는 자신의 부덕에서 왔다며 장작더미위에 앉아 하인
에게 불을 붙이라고 명하여 옷깃에 불이 붙을까 말까 할때 갑자기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들어 연 이틀동안
비가 내려 백성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고 그후에도 한부사는 백성을 위하는 부사로서 이름이 높았고 나중
재상이 되었다.
당시 나라에서는 백성들에게 술을 금지했고 정치적 싸움 또한 심한 때였는데 하루는 조회에 들어온 한재상의
얼굴이 홍당무같이 술에 취한 모습을 보고 반대파들은 나라에서 금지한 술에 취해 이 엄숙한 조회에 나오니
마당히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상소하니 한재상은 "매년 9월9일에는 꿈속에서 옛 부사로 있던 동래에 가서 술과 음식을 대접받는데 지난 밤에도 꿈속에 동래에서 마신 술의 취기가 아직 덜 가신듯 합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나라에서 제사에만 술을 쓰게 했으므로 반대파들은 제사를 핑계하는 비겁자라고 비난하였으나 한재상은
"어젯밤 제사에 갔다가 젓가락이 없어 옷에 찼던 첨저(양반이 옷에 차고 다니던 작은 칼집안에 함께 꽂아두는
작은 젓가락)을 뽑아 먹었으나 돌아올때 그 젓가락을 두고 그냥 왔다"는 꿈이야기를 하고 동래부에 사람을 보내
확인해 달라고 한 바, 이때 마침 동래에서는 제사에 차렸던 제물을 치우다 보니 한재상 자리에는 젓가락을 놓지
않았는데 첨저가 놓여있어 동래부에서는 이 신기한 일을 한재상에게 전하러 한양으로 출발하려는 참이라고 하며
한양에서 내려온 사람에게 그 첨저를 내놓았고 첨저를 받은 사람은 왕에게 그것을 올리고 사실대로 고하니 한배하가 청렴결백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왕은 더욱 그를 신임하여 정승자리가지 주었다고 한다.
(5)학소대 터
오래된 소나무가 우거져 동산을 이루던 곳으로 그 주변 일원에 학이 집단적으로 서식하며 자리잡고 살던 터로
오늘날 동래구 칠산동에 있는 법륜사와 그 주변 일원인데, 옛날 동래에는 학이 많이 살았고 그 모습을 단 이름도
많아서 복천동고분군이 학의 몸통, 동래읍성지 서장대가 왼쪽날개, 동장대가 오른쪽날개로써 학이 날개를 활짝
펴고 목을 쭉 뽑아 구월산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다.
학소대는 동래중심지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중요하고 비밀스런 회의를 할때 많이 이용하였고 야외회의장소로도
인기가 많았으나 오늘날에는 일부 소나무와 법륜사만 있고 학은 볼수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6)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 : 북문 바로앞에 위치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은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735년에 세운 것으로, 화강암재질의 높이 422cm, 폭 108cm로 다른 축성비에 비해 큰편에 속하는데, 머릿돌
에는 한쌍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고 받침돌에는 연곷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몸돌의 앞면에는 성을 쌓은 것에
관한 사실, 뒷면에는 공사에 참여한 책임자 등의 이름이 각각 새겨져 있는데, 비문에는 1731년1월 성터측량,
4월 성벽, 5월 성문, 7월 성문의 누각을 각각 완성했다고 적혀 있음.
원래 남문밖에 세워져 있다가 몇차례 옮겨진 후 2012년10월 지금의 지리로 옮겨짐.
7)장영실 과학동산
동래출신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인 장영실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과학 대한민국의 꿈을 키우기 위해 선생이
관여하여 만든 해시계 등고천문의기 19점을 동래구의 위도와 경도에 맞게 설치해 2009년11월 개장함.
*과학동산 전경
*설치된 천체관측기중 가장 큐모가 큰 간의(簡儀)
8)동래읍성 역사관
9)복천동 고분군(사적제273호)
옛 동래읍의 주산인 마안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내린 낮은 구릉위에 있는데, 6.25전쟁이후 복천동 고분군이 위치한 구릉에는 판잣집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는데 1969년 주택개량공사중 우연히 무덤이 확인되어 긴급조사가 이루어졌고 수차례의 수습 및 시굴조사와 8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2세기전반부터 7세기초반에 걸친 200여기의 무덤을 확인하였고, 구릉의 정상부에는 주로 4~5세기에 속하는 딸린 덧널을 갖춘 대형 덧널무덤과 구덩식 돌
엇널무덤이 있음.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철기류,장신구류 등 10,000여점에 이르며 철제유물이 많은데 특히
단일유물로는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수량의 철제갑옷이 출토되어 가야의 우수한 철기문화를 잘 보여줌.
주요유물로는,
7호분출토 도기말머리장식 뿔잔(보물제598호)
10,11호분출토 금동관(보물제1922호)
21,22호분출토 청동칠두령(보물제2019호)
38호분출토 철제갑옷 일괄(보물제2020호)
10,11호분출토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보물제2059호)
*복천박물관 전경
*복천박물관에서 야외전시관으로 건너가는 다리
*복천동고분군 야외전시관
야외전시관 내부에는 구덩식 돌덧널무덤(53호)와 딸린 덧널이 있는 덧널무덤(54호)의 내부를 발굴한 모습 그대로
전시하고 있어서 당시 가야의 매장풍습을 엿볼수 있음.
*야외전시관의 발굴고분 전시물들
*복천동 고분군 야외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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