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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대 박상진 교수의 나무 이야기
가죽나무(참죽나무)
경상도와 일부 전라도 지방에서는 참죽나무를 가죽나무라고 부르고, 표준말의 가죽나무는 개가죽나무라고 부른다. 가죽나무란 이름은 가짜 중나무란 뜻의 가중나무에서, 참죽나무는 진짜 중나무란 뜻의 참중나무에서 유래된 것이다. 채식을 하는 스님들이 나물로 먹던 참죽나무와 비교하여 이름만 비슷하고 먹을 수 없다는 뜻으로 가죽나무라고 하였다.
세종14년(1432) 봄 과거에 새로 급제한 사람들이 임금님께 감사의 글을 올린 내용에는 "가죽나무 같은 쓸모 없는 재질로 남다른 은혜를 입었으니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하기 어렵습니다"라 하였고, 성종20년(1489)에는 김흔이란 이가 "가죽나무처럼 쓸모 없는 재목이 천지의 큰 은혜를 입어 자라날 수 있게 되었으니 감격한 마음을 뼈에 새긴들 어찌 다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라 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가죽나무는 재질(材質)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형편없는 나무는 아니며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과장하다 보니 죄 없는 가죽나무가 도마 위에 오른 것 같다. 그래서 가죽나무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자란 것이 아니라 아무데나 팽개진 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으나 그 강인한 생명력은 종자로, 뿌리로 왕성하게 뻗어 웬만한 빈터가 생기면 가죽나무는 군말 없이 모여들어 자라기 시작한다.
인가 근처라면 자라는 곳을 가리지 않고 모양새도 제법 품위를 갖추고 있어서 요즈음은 가로수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경복궁 건춘문 앞의 가로수는 지름이 거의 한 아름이나 되며 자태가 웅장하여 기록에 있는 것처럼 쓸모 없는 나무가 아님을 실증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들어온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록이나 자람새로 보아 적어도 수백년전에 중국에서 온 나무이다. 나무 껍질은 회갈색이며 어릴 때는 갈라지지 않으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거의 흑갈색으로 진해지고 얕게 세로로 갈라진다.
가죽나무의 잎은 한 대궁에 여러 개가 달리며 아주 큰 톱니가 2-3개 생겨있다. 이 톱니의 끝을 만져보면 딱딱한 알맹이가 만져지는데, 이름하여 선점(腺點)이라고 하며 간단히 사마귀라고 생각하면 알기 쉽다. 가죽나무에서 나는 약간 고약한 냄새의 근원지가 바로 이 사마귀이다.
필자는 가죽나무의 사마귀를 만지는 촉감이 너무 좋아 보기만 하면 습관적으로 잎사귀를 떼어내어 살살 비벼본다. 죽어서 가죽나무 목신(木神)에게 혼이 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나쁜 손버릇을 고쳐야할 것 같다.
가죽나무와 참죽나무는 식물학적으로는 한참 거리가 있는 나무이나 생김새가 아주 비슷하다. 잎에 사마귀가 달리고 나무껍질이 갈라지지 않는 것이 가죽나무, 잎 가장자리의 톱니가 일정한 간격으로 얕게 나 있으며 이순신 장군 갑옷 같은 껍질을 가진 것이 참죽나무이다.
감나무
"고향 마당 감나무"향수 설사.배탈 멎는 효과에 문갑목재까지 용도 다양 갈증해소.술독에도 그만
돌담으로 둘러쳐진 사립문, 마당 구석의 감나무 한 두 그루, 나지막한 초가집이 옛 우리 농촌의 풍경이다. 가을이 되어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리고 지붕 위에 달덩이 같은 박이 얹혀지면 짙어 가는 가을의 풍성함이 돋보인다. 더더욱 수확이 끝난 감나무 가지 끝에 한 두개씩 까치도 먹고살라고 남겨 놓은 '까치밥'은 우리 선조 들의 따뜻한 속마음을 보는 것 같다.
감에는 타닌이 들어있어서 단감이 아닌 이상 그대로는 먹기 어렵다. 껍질을 벗겨 말린 곶감(乾枾)으로 먹거나 따뜻한 소금물에 담가서 삭히기도 하고 아예 홍시를 만들기도 한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곶감은 몸의 허함을 보하고 위장을 든든하게 하며 체한 것을 없애준다. 주근깨를 없애주고 어혈(피가 모인 것)을 삭히고 목소리를 곱게 한다'하였으며 '홍시는 심장과 폐를 눅여주며 갈증을 멈추게 하고 폐와 위의 심열을 치료한다. 식욕이 나게 하고 술독과 열독을 풀어주며 위의 열을 내리고 입이 마르는 것을 낫게 하며 토혈을 멎게 한다'고 하여 감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옛 사람들의 중요한 약제이었다.
민간에서는 감이 설사를 멎게 하고 배탈을 낫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이유는 바로 타닌 성분인데 수렴(收斂)작용이 강한 타닌은 장의 점막을 수축시켜 설사를 멈추게 한다. 과음한 다음날 아침 생기는 숙취의 제거에도 감은 좋은 약이 된다. 이는 감속에 들어있는 과당, 비타민C 등이 체내에서 알코올의 분해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갈중이' 혹은 '갈옷'이라 부르는 옷을 무명에 감물을 들여 만든다. 감물이 방부제 역할을 하여 땀 묻은 옷을 그냥 두어도 썩지 않고 냄새가 나지 않으며 통기성이 좋아 여름에는 시원할 뿐만 아니라, 밭일을 해도 물방울이나 오물이 쉽게 붙지 않고 곧 떨어지므로 위생적이다. 갈옷의 정확한 역사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중국 남쪽에도 갈옷을 입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몽고의 지배를 받던 고려 충렬왕 때 전래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감나무의 쓰임새는 과실 만에서 끝나지 않는다. 목재가 단단하고 고른 재질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굵은 나무 속에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것을 먹감나무(烏枾木)라 하여 사대부 집안의 가구, 문갑, 사방탁자 등에 장식용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또 골프채의 머리부분은 감나무로 만든 것을 최고급으로 친다.
열대지방에도 감나무 무리가 자라고 있으나 과일을 맺지는 않는다. 이 중에서 흑단(黑檀, ebony)이란 나무는 마치 먹물을 먹인 것처럼 새까만 나무이다. 그 독특한 색깔 때문에 멀리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침상가구에서 오늘날 흑인의 얼굴을 새기는 조각품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알려진 고급가구재, 조각재이다.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열매가 달리지 않을 때는 구별에 약간 어려움이 있으나 감나무는 잎이 두껍고 작은 손바닥만하고 거의 타원형이다. 고욤나무는 잎이 조금 얇고 작으며 약간 긴 타원형이다. 고욤은 작은 새알 만한 크기인데 먹을 육질은 별로 없고 종자만 잔뜩 들어 있어서 식용으로는 잘 쓰지 않고 감나무를 접붙일 때 주로 밑나무로 쓴다.
느릅나무
뿌리껍질 위장병. 불면증에 좋아 옛날에 흉년 들면 식용으로 잎 밑 부분 좌우 비대칭 특이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얻기 위하여 일부러 남천으로 뛰어 들어 빠졌던 그 다리의 이름이 유교(楡橋)이다. 곧 느릅나무 다리란 뜻이다. 몇년전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바로 그 다리로 짐작되는 나무다리를 남천가에서 발굴했다. 재질을 알아보았더니 실망스럽게도 참나무였다고 한다. 아마 다리옆에 느릅나무가 있어서 유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느릅나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목재로서의 쓰임새도 많지만 나무껍질은한약재로 유명하다. 뿌리의 껍질은 유근피(楡根皮)라 하여 동의보감에는'대소변을 잘 통하게 하고, 위장의 열을 없애며, 부은 것을 가라앉히고,불면증을 낫게 한다'고 한다. 나무껍질은 유백피(楡白皮)라 하여 역시 약재로 쓰일 뿐만 아니라 소나무의 속껍질처럼 예부터 흉년때 허기를 달래는데도 요긴하게 쓰였다.
삼국사기 온달 장군 이야기에는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내용이 있다. 평강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온달의 집까지 찾아가서 시집을 가겠다고 청하였다. 눈먼 온달의 노모가 이르기를,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어서 귀인이 가까이 할만한사람이 못 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내 자식은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지 오래입니다" 라고 거절했다.
마침 산에서 내려오는 온달과 마주쳤다. 그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필시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끈질기게도 온달의 초가집 사립문 밖에서 노숙하면서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 드디어 허락을 받았다.
혹시 온달을 부러워하는 이가 있다면 꿈을 깨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공주라는 신분에다 글 모르는 신랑을 교육시켜 장군으로 출세까지 시켰으니온달 입장에서야 평생 평강 공주에게 큰 소리 한번 낼 수 있었겠는가.
전국 어디에나 자라고 잎의 밑 부분이 좌우 대칭이 안되고 어긋나 있는것이 느릅나무 종류의 특징이다. 여러 느릅나무가 있으나 주변에서 흔히보는 종류는 느릅나무와 참느릅나무다. 나무 껍질이 오래되면 흑갈색으로세로로 깊이 갈라지며 잎이 크고 겹 톱니가 있는 것이 느릅나무, 나무 껍질이 오래되면 회갈색으로 두꺼운 비늘처럼 떨어져 나오며 잎이 메추리 알크기 만하고 단순 톱니가 있는 것이 참느릅나무다.
열매는 크기가 손톱 만하고 종이처럼 얇은 데 한 가운데 납작한 종자가들어 있어서 바람에 날아가기 쉽게 되어 있다. 모양이 동전과 비슷하여 옛날에는 동전을 유전(楡錢) 혹은 유협전(楡莢錢)이라고도 하였다.
박목월의 '청노루' 시에도 나오는 우리에게 낯익은 나무다.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굽이를 /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
느릅나무에 봄이 찾아오는 모습이 눈앞에 잡힐 듯하다.
느티나무 : 언제나 같은 자태로 한민족의 영욕 굽어봐 나무 장점 두루 갖춰
시골 동네 어귀에는 어김없이 정자나무 한 그루가 초가 지붕과 어우러져 서정적인 우리 농촌 마을의 마스코트 역할을 한다. 이 같은 정자나무는 대부분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천년을 손쉽게 훌쩍 넘기는 장수목이다. 짧게는 조선왕조, 길게는 고려나 신라인과 삶을 같이 해오면서 민족의 비극도, 애달픈 백성들의 사연도 모두 듣고 보아오면서 오늘도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는 나무가 바로 느티나무이다.
그래서 전설을 간직한 느티나무는 수 없이 많다. 전북도 임실군 오수면에는 술에 취하여 잔디밭에 잠자는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견(義犬)을 기리는 '개나무'란 이름의 큰 느티나무가 자란다.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의 현고수(懸鼓樹)나무는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곽재우 장군이 이 나무에 북을 매달아 놓고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유서 깊은 나무이다.
느티나무의 목재는 나무 결이 곱고 황갈색의 색깔에 약간 윤이 나며 썩거나 벌레가 먹는 일이 적은데다 다듬기도 좋다. 그러면서도 물관의 배열이 독특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갖고 있으며 큰 나무가 될수록 비늘모양, 구슬모양, 모란꽃 모양의 무늬와 함께 기름 끼가 약간 배어있는 듯한 광택도 있다. 건조를 할 때 갈라지거나 비틀림이 적고 마찰이나 충격에 강하며 단단하기까지 하다.
느티나무가 갖는 바깥모양의 고고함을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나무의 여러 가지 속 성질만을 종합해 보아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나무라고 단정할 수 있다. 한마디로 나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장점을 다 가지고 있는 '나무의 황제'이다.
나무 다루는 기술이 남달랐던 우리의 선조 들이 느티나무를 그대로 썩혀 둘 리가 없다. 경산 임당의 원삼국시대 고분과 부산 복현동 가야고분 및 천마총 관재, 완도 어두리에서 인양된 고려 초 화물운반선의 배 밑바닥 판자 등을 모두 느티나무로 만들었다.
건축재로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전, 조선시대 사찰건물인 강진 무위사, 부여의 무량사, 구례 화엄사의 기둥은 전부 혹은 일부가 느티나무이다. 또 흔히 스님들이 '싸리나무'로 만들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구시(행사때 쓰는 큰 나무 밥통), 기둥, 나무 불상도 사실은 대부분 느티나무이다. 기타 사방탁자, 뒤주, 장롱, 궤짝 등의 조선시대 가구까지 느티나무의 사용범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정자나무로서 느티나무만 상상하여 키가 그리 크지 않고 둥그스럼하게 퍼지는 나무로만 알면 큰 잘못이다. 숲 속에서 다른 나무와 경쟁하여 자라는 느티나무는 곧바르고 우람하게 자란다. 그것도 적당히 자라다 그만 두 는 것이 아니라 키가 20-30m, 지름 너덧 아름은 보통이므로 임금님의 관재로도, 사찰의 기둥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이다.
산림청은 새 천년을 맞아 밀레니엄나무로 느티나무를 선정하였다. 느티나무는 역사성과 문화성을 지니고 있으며, 새 천년동안 강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장수(長壽) 나무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름만의 새 천년 나무 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는 느티나무가 되었으면 한다.
닥나무
질기고 튼튼한 세포 ,종이 재료로는 '최적'
흔히 된발음으로 딱나무라고 한다. 나뭇가지를 분지르면 '딱'하고 소리가 나지 않는 나무가 어디 있으련만 왜 이 나무만 '딱나무'가 되었는지 그 사연이 궁금하다. 닥나무의 목질부가 쉽게 꺾어지는 것과는 달리 껍질에는 인피섬유(靭皮纖維)라는 질기고 튼튼한 짧은 실 모양의 세포가 들어있다.
이들은 종이를 만들기에 다른 어떤 나무보다 질이 좋아 우리나라 옛 종이는 거의 닥나무로 만들어졌다.
기원전 170년쯤 전한(前漢)시대부터 중국에서 사용되던 종이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록으로는 610년에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제지기술을 전수했다는 일본서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6-7세기에 상당히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증적 자료로는 1933년 일본에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문서(755년쯤으로 추정)가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고려에 들면서 종이의 쓰임새는 한층 넓어졌고, 고려인들이 만든 종이는 기술이 탁월하여 중국에서조차 고급종이로 귀하게 여겼다. 공양왕 3년(1391)에는 닥나무 껍질로 저화(楮貨)를 만든것이 최초의 지폐로 알려져 있다. 조선에 들면서 제지산업은 더욱 활성화되어 세종 2년(1420) 지금의 세검정 부근에 관영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하고 여러 종류의 종이를 만들었다.
종이 제조는 예로부터 중요한 산업으로서 원료인 닥나무의 확보가 시급한 문제이었다. 닥나무를 백성들에게 재배하도록 권장하였으나 태종 10년(1410) 승정원의 상소문에 "대소 민가에 닥나무 밭이 있는 자는 백에 하나 둘도 없다"고 하여 자원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정에서는 재래종 닥나무의 재배 독려에 그치지 않고 세종 29년(1447) 전라.충청.경상도 감사에게 왜닥나무(倭楮, 지금의 산닥나무)의 종자를 수입하여 널리 심도록 하는 등 좋은 원료 확보에 정성을 기울였다.
닥나무 가꾸기는 일반 백성들에게만 권장한 것이 아니다. 정조 17년(1792) 비변사는 "닥나무를 심는 것은 원래 중들의 업(業)이었으나 삼남 지방의 사찰이 모두 황폐해지면서 닥나무 밭도 묵어버렸습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핍박받던 스님들은 오래 전부터 닥나무 재배를 강요당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며 작은 관목처럼 보이나 자르지 않으면 지름 20여cm에 다다르기도 한다. 나무 껍질은 회갈색이며 거의 갈라지지 않는다. 잎은 어긋나기하고 달걀모양으로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표면은 거칠다.
잎에 따라서는 두세 군데가 움푹 패고 한 나무에 달걀모양 잎과 팬 잎이 같이 달린다. 암수 한 나무로 늦봄에 꽃이 피며 암꽃은 씨방에 실같은 암술대가 있다. 열매는 여름에 공처럼 둥글고 주홍색으로 익는다.
단풍나무
겨울 무사히 넘기려 잎 떨어뜨리는 "작업" 피아노, 볼링핀 등 나무 쓰임새 많아
계절은 우리에게 풍경의 변화로 다가오거나 불어오는 바람의 느낌에서 금세 알아차린다. 겨울을 바람으로 만난다면 가을은 아무래도 나뭇잎의 색깔 변화와 함께 마주한다. 평지에는 늦더위가 채 가시기도 전에 금강산의 바위틈새기 단풍나무들이 온통 붉어져 이름마저 풍악산(楓嶽山)으로 불려지면서 설악산을 거쳐 백두대간의 산줄기를 타고 파도처럼 밀려 내려온다. 내장산에서 그 자태를 뽐내는 것으로 가을을 마감하면서 온통 우리의 산은 살아있는 수채화가 된다.
꿈 많은 소녀의 책갈피에서는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소년을 향한 사랑의 메시지가 있고, 아름다운 내일을 그리는 청춘에게는 내년의 푸르름을 연상하면서 가버리는 한해를 아쉬워하는 것이 단풍잎이다. 비에 젖은 후줄근한 단풍잎에서 고개 숙인 장년의 서글픔을 읽게 되고, 청소부의 빗자루 끝에 이끌려 쓰레기통으로 미련 없이 들어가버리는 도시의 단풍 잎에서 노년의 아픔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자기만 갖는 단풍의 느낌이 있게 마련이다.
단풍이 생기는 과정을 잠깐 알아보자. 잎의 엽록소에 붙어 있던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변하면서 함께 생성된 당(糖)이 가을엔 뿌리로 옮겨간다. 가을밤 기온이 떨어지면 당 용액이 약간 끈적끈적해져 뿌리까지 못 가고 잎에 남아 붉은 색소인 안토시아닌(anthocyanin)과 황색계통의 카로틴(carotene) 및 크산토필(xanthophyll)로 변한다. 이들 성분에 따라 붉은 단풍 혹은 노란 단풍이 들고 참나무처럼 갈색 단풍은 더 복잡한 생화학적인 반응으로 만들어진다.
단풍은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 위한 준비로 애지중지 키워온 잎에다 떨켜를 만들어 과감하게 잘라버린 것이다. 냉엄한 자연의 법칙이지만 섬뜩하기까지 하다.
가을 단풍으로 대표되는 단풍나무 종류에는 외국에서 들어온 나무를 포함하여 약 20여종이 있다. 이들은 독특한 색깔의 단풍 이외에도 가지나 잎이 정확하게 마주보기로 달리며 열매는 시과(翅果)라 한다. 잠자리 날개처럼 생겨서 종자가 바람에 멀리 날아 갈 수 있도록 한 설계이다. 단풍나무 종류에 따라 날개의 크기나 마주보는 각도가 다르다.
흔히 말하는 단풍나무는 잎이 5-7갈래로 깊게 갈라져 갓난이 손바닥을 펼친 것처럼 생긴 나무이다. 이와 아주 비슷한 나무에는 당단풍이라 하여 단풍나무보다 잎이 조금 더 크고 가장자리가 덜 깊게 갈라지며 9-11갈래인 것이 다르다. 또 당단풍은 보다 추운 지방에 자라므로 높은 산의 단풍은 대부분이 이 나무이다.
단풍나무 종류는 단풍을 감상하는 것으로 용도폐기가 되는 나무가 아니다. 옛날에는 가마, 소반 등에 이용됐고 요즈음은 피아노의 액션 부분을 비롯하여 테니스 라켓, 볼링 핀으로 쓰이며 체육관의 바닥재로는 최고급품으로 친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일부도 단풍나무 종류로 글자를 새겼다.
대추나무
계획 없이 주위사람에게 돈을 빌려 여기 저기 빚이 걸리면 "대추나무 연 걸리듯 한다"고 말한다. 겨울 대추나무는 잔가지가 많고 가시까지 달려 빚쟁이에게 줄 돈 뭉치처럼 걸핏하면 연이 잘 걸렸던 탓이다. 그 만큼 인가 근처에 흔히 심었고 열매에서 나무까지 쓰임새가 너무나 광범위하다.
벼락맞은 대추나무로 부적을 만들어 지니면 불행을 막아주고 병마가 범접할 수 없는 상서로운 힘을 갖는다고 믿었다. 이는 나무가 벼락을 맞을 때 번개의 신이 깃들여져 잡귀가 달아나며 나무의 색깔이 붉고 가시까지 달렸으니 못된 귀신이 범접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재앙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단단해지기까지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벼락은 수분 많은 키다리 나무의 몸체를 순간적인 전기의 도체(導體)로 이용하였을 따름이지 나무 재질에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벼락을 맞지 않아도 너무나 단단한 대추나무에 벼락까지 맞았으니 더더욱 단단해지지 않았겠느냐는 착각일 따름이다.
전해오는 우리의 세시풍습에 가수(嫁樹)라 하여 말 그대로 '나무 시집보내기'가 있다. 설날이나 보름에 Y자로 벌어진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남근을 상징하는 적당한 돌을 힘껏 끼워 둔다. 지름이 커지면서 나무껍질이 눌리게되어 영양분들이 다른 줄기나 뿌리로 가는 것을 막고 과일 쪽으로 많이 가라고 이런 풍속이 생겼다. 선조들의 기막힌 경험과학은 오늘날 환상박피(環狀剝皮)라 하여 과일을 많이 달리게 하는 한 방법으로 발전하였다.
나무에 달리는 열매 중에 대추만큼 쓰임새가 넓은 열매도 없다. 설기떡과 증편을 비롯한 떡, 계절 음식인 절식(節食), 별식으로 먹는 찰밥, 십전대보탕 등 대부분의 탕제(湯劑)에도 대추가 빠지지 않는다. 그 외 염병이 나돌 때 대추를 실에 꿰어 사립문에 걸어두거나 대추씨앗을 입에 물고 다니게도 한다. 이것은 붉은 대추가 귀신을 물리친다고 여긴 때문이다.
폐백 드릴 때 신부가 펼친 치마에 시부모가 대추를 던져주는 것도 대추나무처럼 아들 딸 많이 낳으라는 염원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지금처럼 던진 것이 아니었다. 세종17년(1435) 1품으로부터 서민들까지의 혼례의(婚禮儀)에 이르기를, 폐백을 드릴 때 "신부가 시아버지께 절하고, 올라가 대추와 밤이 담긴 소반을 탁자 위에 드리면, 시아버지가 이를 어루만진 다음에 시중드는 이가 들여간다"고 하였으며 시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 대추나무를 심기 시작한 기록은 고려 때부터이나 중국의 시경이나 주역에 벌써 대추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심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나 조선조의 왕실 제사에 대추는 빠지지 않으며 오늘날 제사상의 앞줄을 차지하는 조율시이(棗栗枾梨)의 첫 과일이다.
왕안석의 조부(棗賦)에 보면 대추나무에 네 가지 득이 있다고 했다. 심은 해에 바로 돈이 되는 득, 한 그루에 많은 열매가 여는 득, 나무의 나무질이 단단한 득, 귀신 쫓는 득이 그것이다. 대추나무의 특징을 잘 나타낸 말이나 열매가 당년에 달린다는 것은 과장이고 3-4년은 기다려야 한다.
북한의 아주 추운 지방 이외에는 전국에 걸쳐 자라는 낙엽활엽수로 키가 10-15m, 지름이 거의 한 아름에 이를 수 있는 큰 나무이다. 비슷한 종류로는 산에 관목상태로 자라는 한약이름 산조인(酸棗仁)이라는 묏대추가 있다.
돌배나무
봄의 정취 더하는 나무 목판 재료로 널리 쓰여
"배꽃에 달빛 내려 비추고 은하수 흘러가는 깊은 밤/한가닥 나뭇가지에 걸린 춘심(春心)을 두견새가 어이 알랴마는/다정도 병이련가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 말의 문신 이조년의 다정가(多情歌)이다.흐드러지게 피는 새하얀 배꽃 위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걸려있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시 한 수 읊조리고 싶어진다. 여기에 배꽃 필 무렵 쌀로 빚는다는 이화주(梨花酒) 한잔을 곁들인다면 그야말로 '주상첨화(酒上添花)'이다.
배나무는 꽃으로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복숭아, 자두와 함께 대표적인 옛 과일로서 제사상의 맨 앞 과일 줄 조율시이(棗栗枾梨)에 들어갈 만큼 먼 옛날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만해 한용운이 1920년대에 쓴 '해인사 순례기'를 보면 환경(幻鏡)이란 스님은 가을에 돌배를 따두었다가 즙을 내어서 그릇에 넣고 밀폐하여 공기를 통하지 못하게 하여 두었다가 차로 만들어 먹었다 한다. 이 차는 돌배에서 이름을 딴 석차(石茶)라고 하며 수년을 두어도 그 맛이 조금도 변치 않는다니 한번쯤 만들어 먹어 볼만하다.
배나무의 목재는 은은한 황갈색에 재질이 골라 예부터 여러 용도로 쓰였다. 대표적인 것이 벚나무와 함께 목판(木板)의 재료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은 산벚나무 다음으로 돌배나무가 많이 쓰였으며 조선시대의 양반가에 보관되어 오고 있는 문집의 목판도 배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배나무 세포는 배열이 고르고 물관의 크기가 적당하며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아 글자를 새기기에 알맞다.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 양원왕 2년(546) '봄 2월, 서울에 가지가 서로 맞붙은 배나무 연리(連理)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연리란 나무와 나무를 맞붙여 묶어두면 껍질이 파괴되고 서로의 부름켜가 연결되어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이다. 연리목이 알려지면 나라에서는 상서로운 조짐으로 받아들였고 백성들은 이 나무에다 빌면 금실이 좋아지는 것으로 알았다.
태조 이성계는 배나무와 인연이 많다. 왕업을 일으킬 꿈을 꾸고 토굴 속에 있는 신승(神僧) 무학에게 그 뜻을 풀어보게 하였고, 즉위한 뒤에는 토굴이 있던 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석왕사라 하였으며 배나무를 손수 심었다.
전북 마이산의 은수사에 있는 천연기념물 386호 청실배나무는 태조가 명산인 마이산을 찾아와 기도를 마친 뒤 그 증표로 씨앗을 심은 것이 싹이 터 자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 태조실록 총서에는 '백 보(步) 밖에 서로 포개어 달려있는 수 십 개의 배를 한 번에 쏘아서 손님을 접대하였다' 하여 활 솜씨 자랑에도 능수버들과 함께 배나무를 이용하였다.
그냥 우리가 배나무라는 것은 돌배나무, 산돌배나무, 참배, 백운배나무, 문배나무, 청실배나무 등 엇비슷한 배나무 종류를 통 털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우리나라에는 금화배, 함흥배, 봉산배 등이 예부터 토종 배로서 널리 알려졌으나, 일제 침략과 함께 들어온 개량품종들에 밀려 현재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두릅나무
산채의 제왕 '두릅' 살짝 데쳐 초고추장에 푹~
풋풋함과 쌉쌀함 가득 봄날 좋은 안주는 금상첨화
농가월령가 오월령(五月令)에 보면 “앞산에 비가 개니 살찐 향채 캐오리라/ 삽주, 두릅, 고사리며 고비, 도라지, 으아리를/ 절반은 엮어 달고 나머지는 무쳐 먹세/ 떨어진 꽃 쓸고 앉아 빚은 술로 즐길 적에/ 산채를 준비한 것 좋은 안주 이뿐이다”라고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두릅은 이처럼 산채의 왕좌이이다. 봄의 따사로움이 대지에 퍼질 즈음, 물에 살짝 데친 두릅나무 순을 빨간 초고추장에 찍어 한 입에 넣어본다. 풋풋하고 쌉쌀함이 입안 가득히 퍼져 나갈 때의 그 기막힌 맛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정다운 님이 따라주는 이화주(梨花酒) 한잔이라도 곁들여진다면 나라님 부럽지 않다.
두릅나무 순은 사람뿐만 아니라 초식성 동물들도 좋아한다. 두릅나무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세워서 순이 붙은 작은 가지마다 날카로운 가시를 촘촘히 박아 놓았다.
덕분에 자손을 널리 퍼트려 수 천년을 무사히 이어 왔지만 수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는다. 바로 요즈음, 있지도 않은 불로초를 찾아 온산을 헤매는 신판 ‘진시황 특사’들 때문이다. 싹을 내밀자마자 잎을 펴볼 틈도 없이 싹둑싹둑 잘려나간다. 저장한 양분으로 다시 한번 싹을 내미는 안간힘도 써보지만 두 번 세 번 싹둑질을 당하고서야 목숨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 봄날의 산골마다 시목(屍木)이 가득하여 자칫 식물원에 가서야 두릅나무를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렵다.
두릅나무의 한자 이름은 송목이라 하며 두릅순은 목두채(木頭菜), 가지 끝에 달리는 산채란 뜻이다. 그외 늙은 까마귀발톱 같은 가시가 있다하여 자노아(刺老鴉), 용의 비늘과 같다하여 자룡아(刺龍芽) 등 여러 이름이 있다. 그만큼 쓰임새가 많았던 나무임을 말한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양지 바른 산자락에 흔히 자란다.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활엽수로 키가 3∼4m 남짓한 작은 나무이다. 가지가 그렇게 많이 갈라지지 않아 전체적으로 듬성듬성하며 싹을 보호하기 위하여 생긴 가시는 오래 되면 떨어져 버린다. 아예 처음부터 가시가 생기지 않는 민두릅을 산림청에서 개발하여 보급하고 있는데, 인공재배할 때 가시가 없으면 훨씬 취급이 쉬워지는 탓이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한 대궁에 새 날개처럼 달린 잎이 또 한번 더 갈라지는 모양이 특별하다. 잎 전체의 길이가 어른 팔 길이에 이른다. 작은 잎과 잎 대궁이 마주치는 곳에도 가시가 있다. 작은 잎은 달걀모양으로 큰 톱니가 있고 뒷면은 회색으로 잎맥 위에 털이 있다.
가지 끝에서 나오는 꽃차례는 우산모양으로 벌어지고 많은 꽃이 달린다.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걸쳐 흰빛으로 피며, 검은 열매가 10월에 익는다.
한방에서는 송목피( 木皮)라고 하여 주로 뿌리나 나무껍질을 이용하는데 위와 신경계통의 병을 비롯하여 수종, 당뇨병 등에 썼다고 한다. 두릅은 나무두릅 이외에도 흔히 독활(獨活)이라고 하여 풀로 분류되는 땅두릅이 있다. 예로부터 한약재로 널리 쓰였다. 고려 문종 33년(1079) 중국에서 보내준 약재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목민심서 관질(寬疾)에도 전염병에 독활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종류는 다르지만 두릅이란 이름을 가진 나무는 높은 산꼭대기에 자라는 땃두릅나무가 또 있다.
모감주 나무
단아하게 뻗은 가지 눈부신 황금빛 꽃 초롱 모양 새까만 열매
만질수록 손때묻어 더욱 반질 큰스님 아끼던 염주재료
녹음이 짙어 가는 6월말이나 7월초가 되면 화려한 꽃으로 우리를 유혹하던 나무들은 짙푸른 잎으로 뒤덮여 지난 꽃 세월은 흔적도 없어져 버린다.
이때쯤 진한 노랑꽃이 임금님의 왕관을 길게 장식하는 깃털 마냥 우아하게 꽃대가 올라와 자그마한 꽃들이 줄줄이 달리는 나무가 바로 모감주나무이다. 따가운 여름 태양에 너무 바래버린 듯 모감주나무의 꽃은 노랑꽃이라고 하기 보다 오히려 고고한 금빛에 가까워 동화 속의 황금궁전을 연상시키는 꿈의 꽃이다. 영어 이름은 아예 'golden rain tree'라 하여 황금의 비가 쏟아지는 것 같다는 뜻을 갖고 있다. 꽃대의 아래는 길이가 한 뼘이나 되는 잎자루에 아카시아 잎 마냥 작은 잎이 10-15개 씩 다닥다닥 달려있다. 가장자리에는 크고 깊은 톱니가 나있는 잎이 약간 탁한 푸르름을 갖고 있어서 금빛 꽃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작열하는 여름 태양과 경쟁하듯 버티고 있던 수많은 황금 꽃은 수정이 되고 나면 세모꼴 초롱모양의 앙증맞은 열매가 익어 가는 가을과 함께 크기를 부풀려간다. 햇달걀크기 만큼이나 부풀려지면 얇은 종이 같은 껍질이 셋으로 길게 갈라지면서 속에는 금빛 꽃과는 엉뚱하게 새까만 씨앗 3개가 얼굴을 내민다.
굵은 콩알만하고 윤기가 자르르한 이 씨앗은 완전히 익으면 돌처럼 단단해진다. 만질수록 손때가 묻어 더욱 반질반질해지므로 염주(念珠)의 재료로 안성맞춤이다. 그것도 감질나게 몇 개씩 달리는 것이 아니라 54염주는 물론 108염주도 몇 꾸러미를 만들 수 있을 만큼 풍부하게 매달린다.
모감주나무의 씨앗은 금강자(金剛子)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금강이란 말은 금강석의 단단하고 변치 않은 특성에서 유래되었겠으나 불가(佛家)에서는 깨달은 지덕이 굳고 단단하여 모든 번뇌를 깨뜨릴 수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고려 숙종4년(1099) 임금은 상자사(常慈寺)에 머물면서 금강자와 수정염주 각 한 꾸러미를 시주하였다 하고, 조선 태종6년(1406)에는 명나라 사신이 금강자 3관을 예물로 바쳤다 하며 태종9년(1409)에도 기록이 있다. 이처럼 예부터 왕실에서도 사용하는 귀중한 염주재료임을 알 수 있다.
염주를 만드는 구슬은 피나무 열매, 무환자나무 열매, 율무, 수정, 산호, 향나무 등도 사용하나 금강자 염주는 큰스님들도 아끼는 귀한 애장품이었다.
모감주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서 우람한 모양새를 자랑하는 나무는 아니지만 단아한 가지 뻗음과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한 잎, 황금 깃처럼 솟아오른 금색 꽃, 초롱 속의 새까만 열매 , 가을에 만나는 루비빛 혹은 연노랑 단풍 등 다른 나무가 엿보기 어려운 독특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은 도로 옆이나 공원 녹지대의 조경수로 흔히 심는다.
옛날 중국에서는 임금에서 서민까지 묘지의 둘레나무로 심을 수 있는 나무를 정해 주었는데, 학덕이 높은 선비가 죽으면 모감주나무를 심게 할 정도로 품위 있는 나무이다.
물푸레 나무
가지 꺽어 물에 꽂으면 푸른 물 우러나 껍질 우린 물은 눈 핏발 등 안질 낫게 해
질기고 휨 좋아 도리깨. 곤장으론 '그만' 이승엽 야구방망이. 애거시 라켓 재료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란 뜻으로 물푸레나무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우리 이름이다. 한자이름 수정목, 수청목도 같은 의미이다. 실제로도 가지를 꺾어 하얀 종이컵에 맑은 물을 받아 살그머니 담그면 가을 하늘이 연상되는 맑고 파란 물이 울어난다.
동의보감에는 물푸레나무 껍질을 진피(秦皮)라 하여 눈병 약으로 쓰이는데 '두 눈에 핏발이 서고 부으면서 아픈 것과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계속 흐르는 것을 낫게 한다. 우려내어 눈을 씻으면 정기를 보하고 눈을 밝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이 나무는 질기고 휨이 좋아 도리깨 등의 농사용 도구에 쓰였고 서당의 훈장 님은 물푸레나무나 싸리나무 회초리로 아이들의 게으름을 다스렸다.
예부터 신장(訊杖)이라 하여 죄인을 심문할 때 쓰는 몽둥이는 대부분 물푸레나무이었다. 고려사 열전을 보면 임견미 등이 못된 종놈들을 시켜서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덮어놓고 수정목(水精木)으로 곤장 질을 하여 강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 예종 때도 형조판서 강희맹이 임금께 올린 글을 보면 '지금 사용하는 몽둥이는 그 크기가 너무 작아 죄인이 참으면서 조금도 사실을 자백하지 않으니 이제부터 버드나무나 가죽나무를 없애고, 단지 물푸레나무만을 사용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있다.
눈이 많이 오는 강원도의 산간지방에서는 눈 속에 빠지지 않은 덧신으로서 설피를 만들어 쓰는 재료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관청에 불려가 매맞을 때도 농사에 쓰이는 기구를 만드는데도, 고달픈 삶을 이으려 눈 위를 오갈 때도 애환을 함께 한 서민의 나무가 물푸레나무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쓰임새는 통쾌한 홈런을 날리는 타자의 야구방망이에서 정구채까지 각종 운동구를 만드는 나무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어디를 가나 산 속의 크고 작은 계곡 쪽에 아름드리로 자라는 큰 나무이다. 회갈색의 어린 가지는 정확하게 마주나기하며 제법 굵어져도 껍질은 거의 갈라지지 않고 띄엄띄엄 흰 반점이 생겨 있다. 그러나 가는 세월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아래 부분부터 조금씩 세로로 갈라지기 시작하다가 큰 나무가 되면 흑갈색의 깊은 골이 생긴다.
달걀모양으로 생긴 잎이 하나의 잎자루에 대여섯 개가 붙어있으며 서로 마주난다. 잎 표면은 초록빛으로 털이 없고 뒷면은 흰 빛이 돌며 털이 있다. 꽃은 암수 딴 나무가 보통이며 초여름에 새 가지 끝에서 하얗게 핀다. 열매는 납작한 주걱모양의 날개가 붙어 있는데 길이나 너비가 싸인 펜 뚜껑만 하다. 단풍나무 날개가 두 개가 맞붙어 있는 것과는 달리 한꺼번에 수 십 개씩 무더기로 달린다. 겨울에서 봄까지 열매는 세찬 겨울바람을 놓칠세라 제각기 갈 길을 찾아 멀리 나라가 버리고 열매 대궁이 마치 연속극에 나오는 간신배 수염처럼 볼품 없이 달려 있다.
비슷한 나무에 들메나무가 있는데 한 대궁에 달려있는 여러 개의 잎 중 꼭대기 잎이 가장 크며 금년에 자란 가지에서 꽃대가 나오고 잎맥 겨드랑이에 털이 있는 것이 물푸레나무, 잎의 크기가 모두 같으며 작년 가지의 끝에서 꽃대가 나오고 큰 잎맥의 밑에 갈색 털이 있는 것이 들메나무이다. 또 잎이 작고 좁으며 거의 작은 나무 형태로 자라는 쇠물푸레나무가 있는데 야산이나 산등성이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박달나무
다듬이 방망이부터 도깨비 방망이까지 생활속에 뿌리 박힌 나무
단단하고 힘센 것 상징 '남성심벌'로도 비유
단군신화를 보면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세상을 다스린다. 단(檀)은 박달나무를 의미하므로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단수를 박달나무로 생각하고 있다. 5천년전의 신화에 나오는 나무의 종류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겠다는 자체가 무리이겠으나 선조 들과 가까이 있었던 나무만은 틀림이 없다.
옛 가옥의 생활필수품으로 안방마님의 공간인 대청마루 한쪽 구석에는 어김없이 다듬이 돌과 다듬이 방망이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명주옷감을 감아 다듬이질 할 때 쓰던 홍두깨와 함께 시집살이 고달픔의 상징물이다.
가을밤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에 맞추어 방망이질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하던 옛 여인의 애환이 서린 생활도구였다. 또 빨래방망이나 디딜방아의 방아공이와 절구공이, 아름다움을 가꾸던 마님의 얼레빗, 백성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나졸들의 육모방망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도깨비를 쫓아내는 상상의 방망이도 바로 박달나무다.
지금도 단단하고 힘센 것을 말할 때는 박달나무 방망이로 대표된다. 남성의 심벌을 은유적으로 비유하는데서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무명의 시민으로부터 얻어맞는 방망이도 역시 박달나무다. 나무를 찍으면 오히려 도끼가 부러질 정도로 단단하다 하여 일본인들은 아예 도끼 분질러지는 나무란 뜻으로 오노오레(釜折)나무라고 한다.
우리나라 어디에나 잘 자랐으므로 박달고개란 지명도 흔히 있다. 대표적인 곳은 충북 제천시 봉양면 원박리와 백운면 평동리 경계에 있는 작은 고개인데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이어지는 옛 노래 가락으로 익숙해진 곳이다.
고려사에 보면 지금의 박달재와 동일한 곳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종 4년(1217) 김취려 등이 충주, 원주 사이로 거란군을 추격하다가 맥곡에서 교전하였으며, 박달재까지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는 기록이 있다.
박달나무가 많이 나는 곳은 박달재에서 머지 않은 문경새재가 흔히 알려져 있다. 어느 시인은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애기 손목에 놀아난다/ 문경새재 넘어 갈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고 읊조리고 있다.
이렇게 박달나무가 유명한 탓에 박달이란 이름이 붙은 나무도 많다. 개박달나무, 물박달나무는 진짜 박달과 사촌쯤은 되나 까치박달은 서어나무에 가까워서 열 촌도 넘고 가침박달은 장미과(科)에 속하므로 아예 족보가 다르다. 사람들이 이름이 헷갈린다고 투덜대지만 이름을 붙여준 사람 탓이지 나무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잎이 떨어지는 큰 나무로 한아름이 넘는 큰 나무가 되기도 한다. 어린 가지에서 제법 팔뚝만한 굵은 가지도 벚나무처럼 가로 숨구멍이 있으나 차츰 굵어지면 줄기는 큰 조각으로 벌어져 비늘처럼 떨어진다. 잎은 손바닥 반 만하고 달걀모양으로 밑은 둥글고 끝은 뾰족하며 톱니가 있다. 잎 뒷면을 손으로 만지면 약간 끈적끈적한 것이 박달나무의 특징이다. 꽃은 암수 한 나무로 암꽃은 위로 서서 피며 수꽃은 내려 숙여서 초여름에 핀다.
밤나무
6월 중순 시큼한 밤꽃 내음 남자의 정액냄새와 똑 같아 과부의 외출을 막았다는데 밤알 3개는 3정승의 의미 후손 출세 비는 祭物로 쓰여
여름의 발걸음이 차츰 빨라지는 6월 중순쯤 윤기 자르르한 초록 잎이 달린 큰 나무에 잿빛 가발을 쓴 것 같은 밤꽃은 산자락에서 쉽게 눈에 띈다.
꽃이 한창 피어 있을 때 코끝을 스치는 꽃 냄새는 향기로움으로 가득 찬 다른 꽃들과는 달리 살짝 쉬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맡으면 시큼하기도 한 묘한 냄새가 난다. 바로 인간 생명의 근원인 남자의 정액냄새와 영락없이 같단다. 그래서 이 냄새를 부끄러워한 옛 부녀자들은 밤꽃이 필 때면 외출을 삼갔고 과부는 더욱 근신하였다 한다.
그러나 꽃이 흐드러지게 많이 피고 꿀을 충분히 갖고 있어서 밤꿀을 생산하는 꽃이기도 하다.
밤 속에는 전분과 단백질이 풍부하고 달큼함을 느낄 만큼의 당분도 들어 있어서 예부터 식량자원으로 재배를 장려하였으며 낙랑고분 및 가야고분에서도 밤알이 출토된 바 있다.
밤은 제물(祭物)로서도 중히 여긴다. 밤알이 보통 3개씩 들어 있으므로 후손들이 출세의 대명사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대표되는 3정승을 온 집안에서 나란히 나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보다 구체적인 해석은 밤이 싹이 틀 때의 모양에서 찾는다. 밤 껍질을 땅속에 남겨두고 싹만 올라오는데, 껍질은 땅 속에서 오랫동안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는 까닭에 밤나무는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는 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밤송이는 '고슴도치야 게 섰거라' 할 만큼 완벽해 보이는 방어구조를 갖고 있다. 날카로운 침만으로도 충분하련만 안에는 두껍고 단단한 껍질로 싸고 그 안에는 또다시 떫은맛이 잔뜩 든 안 껍질이 있다.천려일실(千慮一失)이랄까? 이렇게 어마어마한 방비를 하고도 벌레침입을 억제하는 물질을 껍질에 살짝 섞어두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생밤을 치다 보면 토실토실(?) 살이 오른 밤벌레에 사람들은 질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밤을 수확할 무렵부터 껍질에 붙어 있던 벌레 알이 보관 과정에 부화되어 껍질을 뚫고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진한 소금물을 만들어 4~5일 담가두었다가 꺼내어 얼지 않는 음지에 모래와 함께 묻어두면 다음 해 까지도 밤벌레 공포 없이 보관할 수 있다.
밤나무 목재는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조상숭배의 상징성 때문에 사당의 위패(位牌), 제상(祭床) 등 조상을 숭배하는 기구의 재료로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가장 널리 쓰였다.전국 어디에나 자라며 지름이 두세 아름까지 이르기도 한다. 경산 임당의 신라초기 무덤에서 밤나무로 만들어진 나무 관이 나온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더 널리 쓰인 것 같다.
갸름하고 길쭉하게 생긴 잎 가장자리의 톱니 끝은 짧은 침처럼 생겼다. 꽃이나 밤이 아직 달리지 않은 숲 속의 밤나무는 상수리나무와 잎 모양이 비슷하여 찾아내기 어렵다. 밤나무는 녹색의 엽록소가 잎 가장자리 침 끝까지 들어있어서 침이 파랗게 보이는데 비하여 상수리나무의 잎 침에는 엽록소가 들어 있지 않으므로 연한 갈색으로 보인다.
벽오동나무
봉황이 깃들이는 나무 옛 선비들 정성껏 심고 가꾸어 콩알 크기 열매모양 '신기'
훌쩍 훌쩍 자라...악기재로 사용
벽오동나무는 봉황과 관련이 있다. 고대 중국 사람들이 상상하는 상서로운 새로 기린.거북.용과 함께 봉황은 바로 영물(靈物)이며, 덕망 있는 군자가 천자의 지위에 오르면 출현한다고 한다. 그밖에 뛰어나게 재주가 있는 사람을 상징하는 말로도 쓰이는가 하면 고귀하고 품위 있고 빼어난 것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봉황은 식성이 꽤나 까다로운 새여서 벽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이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한다. 대나무는 50-60년 만에 어쩌다 꽃이 피니 식성이 고상한 것은 좋으나 자칫하면 굶어죽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어쨌든 벽오동나무는 봉황이 앉는 나무이어서 옛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심고 가꾸어온 행복한 나무의 하나이다. 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는 옛 시조에,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잣더니/내가 심는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밤중에만 일편명월(一片明月)이 빈 가지에 걸려있네'라고 하였다. 태평성대를 몰고 온다는 봉황새가 벽오동나무에 내려않기를 기원하는 애절한 바람을 엿볼 수 있다. 식어버린 임금의 사랑이 다시 찾아오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라는 해석도 한다. 그래서 나라를 정말 사랑하였거나 적어도 사랑하는 척이라도 하여야 하는 선비들은 그들의 모임방인 서원이나 사랑채의 앞마당에 한두 그루의 벽오동이 필요하였다. 더더욱 이 나무의 고향이 중국이고 두보의 시에도 등장할 만큼 중국시인들의 작품에 오르내렸으니 모화(慕華)사상에 물든 선비들이 이 나무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주로 중부이남 지역에 심고 있으며 한 아름을 훌쩍 넘길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란다. 잎은 어른 손바닥을 편만큼이나 크고 3-5갈래로 갈라진다. 초여름에 이르러서는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노란빛의 작은 꽃들이 수없이 달린다.
가을로 접어들면 익어 가는 열매의 모양이 너무 신기하다. 작고 오목하여 마치 조그마한 장난감 보트처럼 생긴 껍질(心皮)의 가장자리에 쪼글쪼글한 콩알 크기의 열매가 3-4개씩 붙어있다. 건드리면 금세 톡! 떨어질 것처럼 불안정하게 보이지만 껍질이 바람에 멀리 날아가도 땅에 닿을 때까지는 꼭 붙어있다. 벽오동나무는 잎이 크며 오동나무와 잎이 매우 닮아 있고 줄기의 빛깔이 푸르기 때문에 벽오동(碧梧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벽(碧)자는 벽공이라 하듯이 하늘빛에 가까운 색이나 벽오동의 줄기는 녹색이 더 강하다. 북한에서는 청오동이라 하는데, 훨씬 친근감이 있고 한자로도 청오(靑梧) 혹은 청동목(靑桐木)이라고 하니 벽오동보다는 청오동이 더 어울린다.
옛 문헌에는 벽오동이라고 명확하게 오동나무와 구분하여 쓰지 않고 그냥 오동(梧桐)이라고 하였다. 본초강목에서와 같이 오동은 벽오동을 말하고, 동(桐)은 오동이라 하여 따로 설명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문헌에는 그 구분이 엄밀하지 않았다. 빨리 자라고 악기재로 쓰이며 잎 모양새가 오동나무와 비슷한 벽오동나무를 옛 선비들이야 복잡하게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식물학적으로는 벽오동나무와 오동나무는 사돈의 팔촌도 넘는 거의 완전한 남남이다.
벚나무
무리 지어 피었다가 한꺼번에 散花 일본 꽃이란 이미지 남아
목판 재료로도 이용
벚나무는 크다란 나무에 잎도 나오기 전, 화사한 꽃이 구름처럼 나무를 완전히 덮을 정도로 피는 아름다운 나무이다. 꽃봉오리가 열리기 시작하여 일주일 정도면 한꺼번에 피었다가 져버리는 꽃이다. 동백이나 무궁화처럼 통째로 꽃이 떨어져 나무 밑에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라 벚꽃은 5개의 작은 꽃잎이 한 장씩 떨어져 산들바람에도 멀리 날라 가 버린다. 그래서 벚꽃이 떨어지는 모양은 산화(散花)란 말이 어울리고 비슷한 어감의 산화(散華)는 꽃다운 나이에 전쟁에서 죽은 젊은이와 비유한다. 벚나무는 천년을 거뜬히 넘기는 은행나무나 느티나무와는 달리 백수(白壽)를 채 넘기지 못하여 인간의 수명과 그게 그것이다. 꽃이 한꺼번에 피느라 정력을 너무 소모해 버렸고 유달리 갑각류 곤충의 피해를 받기 쉬운 탓이란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벚꽃의 느낌은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불행히도 이 아름다운 꽃이 일본을 대표하는 꽃으로서 일제강점기에는 그들이 사는 곳은 벚나무로 치장하였으며 더욱이 우리의 전통 궁궐인 창경궁에 동물원을 조성하고, 그도 모자라 벚나무를 줄줄이 심고 시민의 휴식처란 이름으로 꽃구경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벚나무로 상징되는 치욕의 역사를 우리는 쉽게 지울 수 없다.
벚꽃이 피는 나무에는 벚나무, 왕벚나무, 산벚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섬벚나무, 꽃벚나무, 능수벚나무 등 많기도 하다. 이들 서로의 차이점이란 암술대와 꽃자루에 털이 있느냐, 꽃잎의 길이가 기냐 짧으냐 등이 고작이어서 오랫동안 식물분류학을 공부한 전문가만이 구별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가 벚나무 심기의 최대 명분으로 삼는 제주도 자생의 왕벚나무나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에 심는 벚나무나 보는 사람은 그냥 '벚나무'일 따름이다.
바람에 약하고 단풍이 질 때 지저분하며 오래 살지도 못하고 일년에 겨우 10여일의 꽃세상을 보기 위하여 남의 나라 국화, 그것도 우리의 현대사를 망쳐놓은 일본꽃 심기에 열을 올린다. 옛 문헌에 보면 벚나무와 자작나무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다 같이 화(樺)자를 쓸 만큼 꽃에는 관심이 없었다. 꽃보다는 껍질의 이용이 더 중요하였다.
벚나무 껍질은 화피(樺皮)라는 이름으로 활을 만드는데 필수품으로 들어가는 군수물자이었다. 세종실록의 오례에 관한 내용 중에 '붉은 칠을 한 활은 동궁이라 하고, 검은 칠을 한 것은 노궁이라 하는데 화피를 바른다' 하였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화피 89장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병자호란을 겪고 중국에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은 그 때를 설욕하려고 대대적인 북벌 계획을 세우고 활을 만들 준비로 서울 우이동에 많은 벚나무를 심게 하였다.
벚나무는 꽃과 껍질의 쓰임새로 끝나지 않는다.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옛 목판(木板)인쇄의 재료로서 배나무와 함께 가장 사랑 받는 나무이었다. 팔만대장경판에 쓰인 나무의 60%이상이 산벚나무로 만들어 졌음이 최근 현미경을 이용한 과학적인 조사에서 처음으로 밝혀졌다.
비목
전쟁으로 죽어간 젊는 넋 상처 그린 노래 '비목' 노래완 달리 튼튼한 나무
황해이남 어디서나 자라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선구자, 반달 등과 함께 우리 국민 모두의 사랑을 받는 가곡이다. 한국전쟁 때 처참하게 죽어간 젊은이들의 초라한 무덤을 두고 한명희씨가 그린 ‘비목’은 지나간 우리의 아픈 상처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비목나무는 가곡의 비목과 발음이 같아 사람들은 초연 속에 사라져 버린 비극의 주인공들을 상징하는 나무로 떠올리게 된다. 일반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나무는 보얀목이라고도 불리며, 황해도 이남의 산이라면 어디에서나 곧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는 흔한 나무의 하나이다.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활엽수이며 높이 10여m, 거의 한 아름까지도 자란다고 하지만 대체로 지름 한 뼘 정도를 흔히 만난다. 나무 껍질은 어릴 때는 황갈색이고 오래되면 얇고 커다란 비늘조각으로 떨어진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거꾸로 세운 피뢰침 모양이다. 날씬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약간 배가 나오면서 길쭉하다.
꽃은 암수 다른 나무로 한창 봄이 무르익을 때 핀다. 연노랑 빛으로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작은 우산 모양의 꽃차례에 달린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깔끔한 꽃 모양이 품위가 있다. 열매는 작은 콩알 크기 정도이고 처음은 초록색으로 시작하나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차츰 붉은빛으로 익는다. 황색으로 차츰 물들어 가는 이 나무의 단풍과 함께 작은 루비 구슬 같은 열매가 다소곳이 달려 있는 모습이 가을 숲의 정취를 돋운다. 외국에서 개발된 여러 열매 수종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우리 숲의 우리 나무이다.
옛 관리들은 재임기간동안의 자기 업적을 비(碑)에 새겨서 남기기를 좋아하였다. 목민심서 6장 유애(遺愛)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판서 이상황(李相璜)이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괴산군에 닿았는데, 미나리 밭에서 한 농부가 나무 비에 진흙 칠을 다섯 번이나 하고 있었다. 어사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하니, ‘이것은 바로 선정비요’라고 대답하였다. 왜 진흙 칠을 하는지 다시 물었더니, ‘암행어사가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방이 나를 불러 이 비를 세우게 하였소. 혹시 눈 먼 어사가 이것을 진짜 비로 알까봐 걱정되므로 진흙 칠을 해서 세우려는 것이요’ 하였다. 어사가 그 길로 바로 동헌으로 들어가 먼저 진흙 비의 일을 따지고 고을원님을 봉고 파직시켜버렸다. 이와 같이 나무 비를 만든 비목(碑木)과 여기서 말하는 비목나무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목재는 나무질이 치밀하고 잘 갈라지지 않아 기구재나 조각재로 사용되기는 하나 관리들의 거창한 업적을 적어 넣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나무이다. 굳이 관련이 있다면 달랑 나무토막 하나에 이름 석 자라도 새겨지는 것으로 풍진세상을 하직하는 민초들의 무덤 앞에 흔히 세워진 나무들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비자나무
수 억원씩 한다는 바둑판 재료 향기.소리.탄력성 등 '최고'
고려까지도 흔한 나무였으나조선조 수탈로 거의 사라져
바둑을 즐기는 사람들은 비자나무 바둑판을 갖는 것이 소원이다. 나무에 향기가 있고 연한 황색이라서 바둑돌의 흑백과 잘 어울리며 돌을 놓을 때 소리가 은은하단다. 처음에는 표면이 약간 들어가는 듯하다가 돌을 쓸면 다시 회복되는 탄력성이 다른 나무가 흉내낼 수 없다고 한다.
현재 이 나무는 남해안 및 제주도에 드물게 자라기도 하나 큰 비자나무가 분포하는 지역은 대부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목재는 전혀 생산되지 않는다. 그래서 잘 다듬어진 비자나무 바둑판은 소위 명반(名盤)이라고 알려지면 자그마치 집 한 채 값, 최소 1억~2억은 간다니 서민에겐 먼 꿈나라 이야기다.그러나 옛날에는 흔히 자라는 나무의 하나이었으며 이는 문헌이나 출토유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에 보면 원종 12년(1271)에는 원나라의 궁궐을 짓는데 필요한 비자나무 판자를 보냈다 하며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비자나무의 분포지역과 조정에 바치는 세공(歲貢)에 대한 기록이 있다. 또 1983년 완도 어두리에서 인양된 고려 초기의 화물 운반선 선체의 밑바닥 일부와 완도 장좌리 청해진 유적지의 목책(木柵), 4~6세기 무덤으로 알려진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나온 관재의 대부분을 비자나무로 사용한 것이 확인되었다. 나무가 부드럽고 연하면서도 습기에 잘 견디므로 예부터 바둑판 이외에도 관재나 배의 재료로 널리 이용된 좋은 나무이다.
이처럼 고려 이전만 하여도 비자나무는 널리 자라고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으나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벌써 세종, 예종, 성종 때 여러 번에 걸쳐 비자나무 판자의 수탈에 관한 지적이 있었으며, 영조39년(1762)에는 제주도에서 바치는 비자나무 판자 때문에 백성들이 폐해가 심하므로 일시 중지시킨 기록도 있다. 그래서 우리와 가까이서 삶을 함께 하여온 비자나무 숲은 아깝게도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몇 곳만이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현실이다.
남해안 섬 지방 및 제주도에서 시작하여 육지는 전라남.북도의 경계에 있는 백양산과 내장산이 살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다. 늘푸른 잎을 가진 큰 나무로서 어릴 때 생장은 매우 느리나 크게 자라면 지름이 2m에 이르기도 한다. 나무 껍질은 흑갈색으로 세로로 길게 갈라지고 잎은 납작하며 약간 두껍고 끝은 침처럼 날카롭다.
암수가 다른 나무이고 봄에 꽃이 피어 열매는 다음해 가을에 익는다. 크기는 손가락 마디 만하며 새알 모양으로 생겼다. 껍질을 벗겨내면 연한 갈색에 딱딱하고 얕은 주름이 있는 종자가 들어 있다. 아몬드와 닮은 씨가 들어 있는데 떫으면서 고소하다. 그러나 함부로 먹을 수는 없고 예부터 회충, 촌충 등 기생충을 없애는 약으로 쓰였다. 동의보감에는 비자 열매를 하루에 7개씩 7일 동안 먹으면 촌충은 녹아서 물이 된다고 하였다.
비자나무는 숲 속 그늘에 자라는 자그마한 개비자나무와 잎의 모양이 매우 비슷하다. 구별은 손바닥을 펴서 잎의 끝 부분을 눌러보았을 때 딱딱하여 찌르는 감이 있으면 비자나무, 반대로 찌르지 않고 부드러우면 개비자나무이다.
상수리나무(흔히 도토리 혹은 참나무)
굴참나무 왜란 맞아 피란간 선조 수라상 올릴 마땅한 찬 없어 도토리묵 드렸단다
맛들인 왕 환궁후에도 즐겨 늘 수라상에 올라 '상수라'
참나무 종류 중에서 가장 흔히 만나는 것이 상수리나무이다. 북한에서는 참나무라면 우리처럼 참나무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상수리나무를 일컫는 말이다. 남북한 어디에도 잘 자란다.
상수리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진 연유에는 몇 가지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간 선조의 수라상에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아 도토리묵을 자주 올렸다 한다. 맛을 들인 선조는 환궁하여서도 도토리묵을 좋아하였으므로 늘 수라상에 올랐다 하여 '상수라'라 하였는데 나중에 상수리가 되었다. 상수리(도토리)가 달리는 나무란 뜻으로 상수리나무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황해도의 은율과 송화 사이에 구왕산이 있고 그 중턱에 구왕굴이라는 석굴이 있는데, 예부터 전란이 일어나면 임금이 흔히 피난하였다 한다. 언젠가 양식이 떨어져 임금님에게 수라도 올릴 수 없게되자 산아래 사는 촌로가 기근을 이겨내는 양식이라면서 도토리 밥을 지어 바쳤다. 이렇게 임금을 살려냈다 해서 그 굴을 구왕굴(求王窟), 산은 구왕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 후 도토리를 상감의 수라상에 올렸다 하여 '상수라'라고 했고 상수라가 상수리가 된 것이라 한다.상수리나무를 포함한 참나무 종류의 열매를 부르는 이름에 약간의 혼란이 있다. 상수리나무 열매만을 상수리라고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참나무 열매는 모양이 수종간에 엇비슷하여 식물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이 엄밀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참나무 종류의 열매를 통틀어 '도토리'라 하고 일부 지방에서는 '상수리', 경상도에서는 꿀밤이라 한다.
상수리나무와 아주 비슷한 나무에 굴참나무가 있다. 두꺼운 코르크가 발달하는 굴참나무 껍질은 예부터 비가 새지 않고 보온성이 좋아 지붕을 이는 재료로 사랑 받아 왔다. 고려 충숙왕 16년(1329) 봄 왕은 사냥을 위하여 천신산 밑에 임시 거처할 집을 짓고 관리들에게 '지붕은 무엇으로 덮으면 좋은지를 물었다. 관원들은 굴참나무(樸木) 껍질이 제일 좋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굴참나무 껍질을 채집하게 하여 매우 고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옛 멋을 살린답시고 장식용으로 쓰기 위하여 굴참나무 껍질을 인정사정 없이 홀딱 벗겨버린다. 창졸간에 나신(裸身)이 된 굴참나무는 고려 때와는 달리 몰지각한 백성들에 의하여 오히려 나무 자신이 고통스러워한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깊은 산골의 너와집은 흔히 굴참나무 껍질을 벗겨 지붕을 이었다. 이런 집은 굴참나무의 껍질(皮)로 만들었다하여 굴피집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굴피집의 재료가 굴피나무 껍질이라고 흔히 잘못 알고 있다. 굴피나무는 이름만 굴참나무와 비슷할 따름이지 코르크 껍질과는 인연이 먼 전혀 다른 나무이다.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는 잎이 좁고 긴 타원형이고 가장자리에 짧은 침같은 톱니가 있으며 침에 엽록소가 없어서 회갈색이다. 상수리나무의 잎 뒷면은 연한 녹색이고 껍질은 세로로 약간 깊게 갈라지나 코르크가 발달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굴참나무는 잎 뒷면이 희끗희끗한 회백색이고 코르크가 두껍게 발달한다.
엄나무
가시돋친 엄나무 가지 문설주 위에 걸쳐두면 들어오려던 잡귀들 갓. 도포 가시 에 걸려 나쁜 역귀 쫓는 효과도 있단다
엄나무와 음나무 둘 다 쓰이나 가시가 엄(嚴)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엄나무가 특징을 더 잘 나타내는 것 같다. 엄나무는 물갈퀴가 달린 오리발처럼 생긴 커다란 잎과 위압적인 가시가 특징이다. 잎의 크기나 모양새가 오동나무와 비슷하나 가시가 있다는 뜻으로 한자이름은 자동(刺桐)이며 해동목(海桐木)이란 이름도 역시 오동나무 잎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름은 개두릅나무이다. 봄에 새싹이 돋아날 때 두릅나무처럼 엄나무의 새순은 식도락가의 입맛을 돋우는 나물로 각광을 받는다.
옛 우리의 선조들은 흔히 가시가 듬성듬성한 엄나무 가지를 문설주 위에다 가로 걸쳐놓은 관습이 있다. 잡귀의 들락거림을 막기 위함이다. 귀신을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조의 전형적인 양반의 정장 차림(?)으로 상정해 놓고 보면 엄나무 가시에 펄렁이는 도포자락이 쉽게 걸리게 마련이다.
엄나무 껍질은 해동피(海桐皮)라 하여 알려진 한약재이다. 고려 문종 33년(1079) 가을 송나라에서 백 가지의 약품을 보내왔는데 여기에 해동피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에는 전라도, 제주도, 평안도의 토산물로 되어 있다.
동의보감에 보면 '허리와 다리를 쓰지 못하는 것과 마비되고 아픈 것을 낫게 한다. 이질, 곽란, 옴, 버짐, 치통 및 눈에 핏발이 선 것 등을 낫게 하며 풍증을 없앤다'고 하였다. 그 외 민간약으로도 엄나무는 널리 쓰이는 약나무이다. 옻닭과 마찬가지로 엄나무 닭도 한 여름의 보양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나쁜 역귀를 몰아내는 나무이면서 여러 가지 약재로 귀히 여겨온 엄나무는 행운을 가져오는 길상목(吉祥木)이다. 그래서 집안에 엄나무 연리목(連理木)을 만들어 두면 부부의 금실이 좋아지고 만복이 깃들인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4-5년생의 어린 엄나무 두 그루를 구하여 한 걸음 정도 떨어지게 심는다.
뿌리가 완전히 내린 다음, 두 나무의 껍질을 약간 긁어내고 탄력성이 있는 튼튼한 비닐 끈으로 묶어두면 두 나무가 한 나무되는 연리목이 만들어진다.
엄나무의 목재는 황갈색을 띠면서 가느다란 줄무늬가 들어있어서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나이테를 따라 커다란 물관이 딱 한 줄로 분포하는 것이 다른 어느 나무와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엄나무만의 특징이다. 박달나무처럼 단단하지도, 오동나무처럼 너무 무르지도 않은 적당한 강도를 갖고 있으며 아름다운 무늬마저 있다. 가구를 만드는 재료나 조각재, 악기재 등 쓰임새가 고급이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는 낙엽활엽수로서 지름이 두세 아름에 이를 수 있다.
오동나무
15-20년만 자라면 재목 구실 빠른 성장 불구 단단 "슈퍼트리"
장롱.문갑 등 생활용품은 물론 전통악기 만든는데 없어선 안돼
대중가요 오동동 타령은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로 시작되고, 주자의 권학문(勸學文)이나 백낙천의 시에도 가을의 오동나무를 노래하였다.
옛 사람들은 붉게 물드는 단풍을 보고 가을을 느낀 것이 아니라 커다란 오동잎에 투덕투덕 떨어지는 가을비 소리를 듣고 가버리는 한 해를 아쉬워 한 것 같다.
잎은 타원형이나 흔히 5각형이 되기도 하며, 크기가 나뭇잎 한 장으로 어른의 얼굴 전체를 가릴 수 있을 만큼 커다랗다. 1천여 종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나무 중에 이보다 더 큰 잎사귀를 갖는 나무는 없다. 바람에 찢어지기 쉽고 벌레가 눈독들일 이 커다란 잎사귀를 왜 갖고 있을까? 남보다 더 많은 햇빛을 받아 더 많은 영양분을 만들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몸집을 불리겠다는 속셈이다. 그래서 오동나무는 15-20년이면 쓸 만한 재목이 된다. 짧게는 40-50년, 길게는 100년 가까이나 되어야 겨우 '나무 구실'을 하는 보통의 다른 나무들이 눈 흘기고 질투할 만하다.
자람이 빠른 나무는 대체로 단단하지 못하여 쓸모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적어도 오동나무와는 무관하다. 1년에 나이테 지름이 2-3cm나 되는 초고속 성장을 하지만 세포 하나하나를 쓸모있게 만들어 넣을 수 있는 오동나무의 능력은 그야말로 '슈퍼 트리'이다. 그래서 자람의 속도에 비하여 훨씬 단단한 나무가 된다. 습기를 빨아들이는 성질도 적고 잘 썩지 않으며 불에 타지 않는 성질까지 있다. 당연히 쓰임새가 넓어서 장롱, 문갑, 소반, 목침, 상구(喪具) 등 생활용품에 오동나무가 쓰이지 않은 곳이 없다. 더더욱 악기를 만들 때 공명판의 기능은 다른 나무들은 감히 넘볼 수도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가야금, 거문고, 비파 등 우리의 전통악기는 오동나무라야만 만들 수 있다.
명종 15년(1559) 영천 군수 심의검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향교의 앞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었다가 벼슬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더 죄를 주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임금이 듣지 않아 간신히 면하였다. 현종 11년(1670)에도 남포 현감 최양필이 거문고 만들 재목으로 향교의 오동나무를 베었다가 파직 당한 기록이 있다. 가야금 만들기에 적합한 오동나무는 향교에 주로 있었는데, 고급 관리들이 이를 탐내었다가 나무 한 그루 때문에 가문의 영광인 벼슬마저 잃어버리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세종 28년(1445)의 실록기록에는 '왕비의 상제(喪制)에 세자는 위가 둥글고 아래는 모가 지게 한 오동나무 지팡이를 쓴다'고 하였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오동상장(喪杖)이라 하여 모친상에는 오동나무 지팡이를 쓰는 풍속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쓰임새가 많은 오동나무에 대한 옛 사람들의 사랑이 각별하여, 동(桐)이란 이름이 들어간 가짜 오동나무가 여럿 있다. 벽오동(碧梧桐), 자동(刺桐.엄나무), 유동(油桐), 의동(倚桐.이나무), 야동(野桐.예덕나무), 개오동 등 오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무들도 잎만 비슷하면 모두 오동이란 접두어나 접미어를 하사받는 영광을 얻었다.
오동나무 종류에는 오동나무와 울릉도 특산인 참오동나무가 있다. 잎의 뒷면에 연한 갈색 털이 있고 작은 통 같은 꽃의 안쪽에 자주 빛 점이 있으면 참오동, 잎 뒷면에 털이 없고 꽃에 자주빛 점도 없으면 오동나무이다. 실제로는 구분이 어렵고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은 주로 참오동나무이다.
은행나무
"씨에서 은빛 난다"은행나무 인류탄생 전부터 지구 지켜온 빙하도 꺾지 못한 수억만년의 위엄 한.중.일에서만 자라는 "살아있는 화석" 지금으로부터 약 2억5천만년전, 우리 인류는 아직 태어날 꿈도 꾸지 않았던 아스라이 먼 옛날 은행나무는 지구상에 터를 잡기 시작한다. 그동안 몇 번이나 있었던 혹독한 빙하시대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생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도 의연히 살아남은 은행나무를 우리들은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부른다. 은행이란 이름은 씨가 살구(杏)처럼 생겼으나 은빛이 난다하여 붙인 것이다. 때로는 거의 흰빛이므로 백과목, 심어서 종자가 손자대에 가서나 열린다 하여 공손수(公孫樹), 잎이 오리발처럼 생겼다 하여 압각수(鴨脚樹) 등 여러 이름이 있다. 은행잎은 독특한 모양새와 가을에 보는 노란 단풍의 정취만 아니라 잎에서 추출한 에끼스로 여러 종류의 신약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혈액순환제로 유명한 기넥신, 징코민 등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열매는 노랗게 익으며 말랑말랑한 과육은 심한 악취가 난다. 우리가 먹는 것은 종자이고 종자껍질이 은빛이다.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만 자란다. 본래의 고향은 중국이고 불교의 전파와 함께 들어온 것으로 짐작만 할 뿐 언제부터 우리의 친근한 나무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년을 넘기고도 여전히 위엄이 당당할 만큼 오래 사는 나무로 유명하다. 전국에는 800여 그루의 은행나무 거목이 보호되고 있는데 500살 정도는 명함도 못 내민다. 살아온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다른 나무가 갖지 못하는 태고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특별함이 있다. 우선 나무를 잘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세포 속에는 독특하게 머리카락 굵기의 10분의 1정도 되는 작디작은 "보석"이 들어 있다. 수산화칼슘이 주성분인데 현미경 아래서 영롱한 빛을 내어 은행나무에 또 하나의 신비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명륜당의 은행나무와 곽재우 장군 생가의 은행나무 등에는 유주(乳柱)라 하여 여인의 젖무덤을 연상하는 특별한 혹이 생기기도 한다. 꽃은 봄에 잎과 함께 암꽃과 수꽃이 각각 다른 나무에서 핀다. 바람에 실린 꽃가루가 암꽃까지 날아가서 수정이 이루어진다. 꽃가루는 진기하게 도 머리와 짧은 수염 같은 꽁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동물의 정충처럼 스스로 움직여서 난자를 찾아 갈 수 있다. 이를 알리 없는 홍만선은 산림경제에 은행나무는 암수 종자를 함께 심는 것이 좋고 그것도 못 가에 심어야 하는데, 이유는 물 속에 비치는 그들의 그림자와 혼인하여 종자를 맺는 까닭이라 하였다. 흔히 은행나무는 잎이 활엽수처럼 넓적한데 왜 소나무와 같이 침엽수에 넣느냐고 의문을 나타낸다. 엄밀히 말하여 은행나무는 침엽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나무의 세포모양을 보면 침엽수와 거의 같고 오직 한 종류밖에 없으므로 편의상 침엽수로 분류할 따름이다. 나무 색은 연한 황갈색을 띠면서 너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아 예부터 고급 나무로 널리 이용되었다. 바둑판, 가구, 상, 칠기심재 등으로 사용되었고 불상을 비롯한 각종 불구(佛具)에도 빠질 수 없는 재료이다.
경북대 박상진 교수의 나무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