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생애를 따라가는 이스라엘 성지] 엔 케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기념성당과 요한 세례자 탄생 기념성당
-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기념 성당.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2단을 시작할 때 바치는 기도입니다. 이 내용을 루카 복음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루카 1,39-40)
즈카르야는 사제로서 엘리사벳과 부부입니다. 두 사람은 흠 없이 살아가는 부부였지만 늘그막에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즈카르야가 성전 당번이 되어 성소에서 분향하는데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터이니 아이 이름을 요한으로 하라고 전합니다. 깜짝 놀라서 믿으려 하지 않다가 즈카르야는 그만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천사의 전갈대로 아기를 잉태했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지요(루카 1,5-25 참조).
마리아는 사촌 언니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알게 됩니다. 자신 또한 처녀의 몸으로 아들을 낳으리라는 놀라운 전갈을 받은 터라, 마리아는 늘그막에 아기를 갖게 된 사연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무척 궁금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아기를 가져 힘들어하는 언니를 도우려는 생각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엘리사벳을 만나려고 서둘러 떠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살았던 유다 산악 지방의 고을은 오늘날 엔 케렘(히브리어) 또는 아인 카림(아랍어)라는 동네로 전해집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7~8km 떨어진 아랍인 마을입니다. “산악 지방”이라는 복음서의 설명처럼, 산들로 둘러싸인 한적한 곳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그다지 멀지 않지만 나자렛에서는 120km 이상 떨어진 곳입니다. 마리아가 서둘러 간다 하더라도 사나흘은 족히 걸리는 거리입니다.
- 기념성당 마당에 있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청동상과 마당 벽면의 각 나라 글로 적은 ‘마리아의 노래’.
복음서는 마리아의 인사를 받았을 때 엘리사벳의 태 안에 있는 아기가 기뻐 뛰놀았고 엘리사벳은 이렇게 외쳤다고 전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하고 노래합니다. ‘마니피캇(Magnificat)’이라고도 하는 저 유명한 ‘마리아의 노래’이지요(루카 1,41-56 참조).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이 해산할 즈음까지 함께 지냈을 것입니다.
엔 케렘 마을 가운데 있는 공용 주차장에서 남쪽으로 1km 남짓 언덕길을 따라 오르면 언덕 위에 종탑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성당이 우뚝 서있습니다. 1955년에 완공된 이 성당이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기념 성당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성당 정면의 모자이크화가 순례객들의 눈길을 잡아당깁니다.
- 요한 세례자 탄생 기념 성당.
성당 앞마당에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모습의 청동상이 서있고, 마당 벽면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마리아의 노래’를 적은 타일들이 붙여져 있습니다. 한글로 쓰인 ‘마리아의 노래’도 보입니다. 대구대교구장을 지낸 이문희 대주교의 선친 고 한솔 이효상(1906~1989, 아퀼로) 선생의 친필 글씨라고 합니다.
성당은 2층으로 돼 있는데, 1층 경당에는 아치형 통로가 끝나는 곳에 오래된 우물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나온 자리라고 하지요. 1층에는 또 큰 바위가 옮겨져 있는데 헤로데가 무죄한 어린아이들을 학살했을 때에(마태 2,16-18 참조), 엘리사벳이 어린 요한을 숨겼던 바위라고 전해집니다.
루카 복음은 또한 엘리사벳이 해산했을 때의 이야기도 전합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을 때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은 아기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 즈카르야라고 부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이 요한이라고 해야 한다고 반대했고, 아버지 즈카르야가 글 쓰는 판에 ‘아기 이름은 요한’이라고 쓰자 즉시 혀가 풀려 하느님을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하고 노래합니다(루카 1,57-79 참조).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시간전례(성무일도) 아침기도 때마다 바치는 ‘즈카르야의 노래’이지요.
- 요한 세례자가 탄생한 곳임을 알리는 라틴어 글시가 새겨져 있는 지하 동굴 제대.
엔 케렘에는 남쪽 언덕 등성이의 마리아 엘리사벳 방문 기념 성당 외에 언덕 아래 마을 중심 인근에 요한 세례자 탄생 기념 성당도 있습니다.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 때의 성당 터에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17세기에 세웠고, 19세기 말에 개축해 오늘에 이릅니다.
성당 안에는 요한 세례자에게 봉헌된 제대와 엘리사벳 성녀에게 봉헌된 제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에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동굴 제대가 있는데 제대 아래에는 둥근 대리석 판에 ‘이곳에서 주님의 선구자가 태어나다’라는 글씨가 라틴어로 새겨져 있어 요한 세례자가 탄생한 곳임을 알려줍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살았던 집터의 일부로 추정됩니다.
성당 마당 벽면에는 ‘즈카르야의 노래’가 한글을 포함해 각 나라 언어로 역시 타일에 적혀 있습니다. 요한 세례자 탄생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벽면에 적힌 ‘즈카르야 노래’를 찬찬히 따라 읽어보십시오.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뭉클거리며 올라올 것입니다.
- 요한 세례자 탄생 기념 성당 마당 벽면 타일에 적힌 '즈카르야의 노래'.
엔 케렘은 오늘날 이웃 주민을 포함해 2000명 정도가 사는 크지 않은 동네입니다만, 해마다 300만 명 이상의 순례객이 찾는 성지입니다. 주차장에서 내려 엘리사벳 방문 기념 성당을 찾아 오르는 언덕길은 가팔라서 서두르면 건강한 사람도 금방 숨이 찹니다. 마리아는 수백 리 길을 서둘러 왔지만 서두르지 말고 유다 산악 지방의 풍광도 감상하면서 천천히 오르는 게 좋습니다. 그러면서 마리아의 심정을 헤아리고 두 사람이 만나는 모습을 그려 본다면 그 또한 좋은 순례가 될 것입니다.
언덕을 오르기 전 길가에 있는 마리아의 샘도 놓치지 마십시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러 가는 길에 갈증 난 목을 축였다는 샘인데, 물론 지금은 오염되어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는 샘이 되어 버렸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2월호, 이창훈 알퐁소(가톨릭평화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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