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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대망 -
(71) 여호사밧의통치(9) 멈출 줄 아는 사람 역대하 20:31-37
여호사밧은 위기의 순간 하나님을 붙들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혼자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온 백성들과 함께, 여인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나와서 하나님께 금식 기도할 수 있게 만든, 저 유다, 브엘세바에서 에브라임산지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던 사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사람을 위하여 하지말고, 여호와를 위하여 재판을 할 것을 명령했던 사람, 정치도, 종교도, 왕을 위한 것이 되지 않게, 진실과 성심을 다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가르쳤던 사람이지요.
그랬던 그는 야하시엘에게 주어진 응답 앞에 온전히 순종합니다.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여호와를 신뢰하라 견고히 서리라, 여호와의 말씀을 신뢰하라고 형통하리라 선포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하고, 무기하나 없이 대열을 이루고 말씀하신 저 드고아 들판으로, 저 세 나라 연합군을 마주하고 섰던 것이지요. 그러나 언제였습니까? 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며 서 있지 않았습니다. 찬양대가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적들을 향하여 나아갔던 것이지요. 자, 정확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였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 읽어볼까요?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대하20:17)
말씀 그대로 순종하며 나아갔던, 거기에 찬송과 노래를 올려드렸던 저 여호사밧과 군대는 하나님의 싸움을 목도하게 됩니다. 내 싸움이 하나님께 속한 싸움이 되는 것을 봅니다. 내것을 다 빼앗길 싸움이, 적들의 것을 다 내게 배달해주시는 싸움이 되었던 것이지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믿음으로 저들 앞에 맞서 나갔던 이들에게 하나님은 믿음대로 갚아주셨던 것이지요? 두려워말고, 놀라지말고, 맞서 나갔더니, 사흘을 꼬박 거두어야할만큼 의복과 재물과 보물을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두렵고 놀랍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곳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찬송하며 나아가 놀라운 은혜와 축복, 징계의 자리가 축복의 자리요, 고난의 현장이 기적의 자리, 눈물의 자리가 찬송의 자리가 되는 것을 보고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찬송하며 나아가서, 오히려 더 크게 찬송부르며 예배 드리러 돌아오는 승리의 여정 되시길 축복합니다.
자, 오늘은 여호사밧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백성들 앞에 쓰임받았던 여호사밧에 대한 마지막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1절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삼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20:31)
여호사밧은 비교적 젊은 나이 35세의 나이에 왕이 되어 25년을 다스렸습니다. 아버지 아사의 통치기가 41년에 비하면 훨씬 짧지만, 할아버지 아비아 3년, 증조부 르호보암 17년에 비하면 상당히 오랜 기간 통치를 한 것이지요.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해주시고, 그의 통치를 지켜 지속시켜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여호사밧, 그의 종교개혁과 노력에도 결국 끝내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32-33절입니다.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산당만은 철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마음을 정하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대하20:32-33)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의로운 왕이라는 평가를 듣지만, 두 가지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 문제가 결국 여호사밧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여호사밧에게 보이는 첫 번째 문제는 신앙적인 것으로, 산당을 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32-33절). 산당은 그의 조상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그 아버지 아사도 없애지 못했고, 솔로몬 당시에도 존재했던, 뿌리 깊은 문제였습니다. 산당은 본래 가나안 족속들이 우상을 섬기던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정복한 후 우상들을 파괴한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섬기던 장소들을 그대로 두고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상을 섬기는 종교적인 행위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혼합되고 스며들게 되었던 것이지요. 사실 아무리 왕이요, 개혁을 하려한다고 해도, 백성들 가운데 오랜 역사 가운데 스며 들어있는 종교적인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했고, 또 큰 은혜를 입은 여호사밧도 저 산당을 근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에게도 오래토록 손대지 못하고 있는 영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것만큼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전통이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여지껏 해오고 있다는 이유로, 전부다 나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며 타협하며 남겨두고자 하는 것들이 있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확인해보고 과감히 끊고 제거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내려볼 수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사밧의 두 번째 문제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 그리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와 동맹을 맺었다는 것이지요. 확인합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야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였더라”(대하20:35)
여러분도 깜짝 놀라셨지요? 아합과의 연합으로 죽을뻔한 여호사밧인데,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을 입기도 하였었는데, 기도하고 용서해주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났더니 마음이 다시 안일해졌던 것일까요? 나중에 말씀하시면 다시 회개하면 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오늘 또다시 여호사밧은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였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악한 자를 돕는 모습이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를 사랑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19:2).
그래요. 먼저 연합한 아합은 북이스라엘을 바알숭배로 몰아넣은 최악의 왕이었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도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은 저 부자와 계속해서 연합을 동맹을 맺고 교제를 이어갔던 것이지요? 물론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했을 수도 있습니다. 남왕국과 북왕국이 솔로몬 이후 계속해오고 있는 지겨운 전쟁과 적대적인 갈등을 멈추어보고자, 동족상잔의 피흘림을 멈춰보고자 했던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합의 딸을 데려다가 사돈도 맺어보고, 그 아들과 여전히 교제하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산당에 손대지 못한 것처럼, 이 관계에 과감하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이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전쟁은 종식되고 북이스라엘과는 화평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죄악이 남 왕국 유다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것을 막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신앙이 흔들리고 혼잡해지자, 이내 이방인과의 싸움이 많아진 것이지요. 여호사밧은 아합 때문에 길르앗 라못에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했고, 아하시야 때문에 재정적인 타격을 입기도 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아하시야와 연합해서 배를 만들어 다시스로 보내려 했습니다. 그 이유가 열왕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오빌의 금을 들여오기 위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확인해보지요.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왕상22:48). 아마도 아하시야의 도움을 얻어 솔로몬 시대의 해상 무역,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부가가치를 창출해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솔로몬) 왕의 배들이 후람의 종들과 함께 다시스로 다니며 그 배들이 삼 년에 일 차씩 다시스의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을 실어옴이더라”(대하9:21)
그러나 악인과의 연합, 동행, 이것의 목적이 또한 부를 축적, 과시하기 위함이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에셀을 보내어 책망하셨고, 배는 부서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레사 사람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을 향하여 예언하여 이르되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므로 여호와께서 왕이 지은 것들을 파하시리라 하더니 이에 그 배들이 부서져서 다시스로 가지 못하였더라”(대하20:37).
그래요. 잘될 수가 없습니다. 여호사밧은 아합과의 동맹을 통해 길르앗 라못을 수복하는 일에도 실패했을 뿐 아니라, 아하시야와의 동맹을 통해 오빌의 금을 구하는 일도 실패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아예 배가 출항도 못해보고 다 부서져 버렸던 것이지요. 불이 난 것인지, 큰 폭풍이 몰아친 것인지, 하나님은 악인과 함께 하는 저 욕심 사나운 항해를 한 발자국도 허락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요. 악인과의 연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결국 얻지도 못했지만, 세상적인 가치밖에 없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면, 악인과 같은 멍에를 메고, 같은 결국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깐은 성공하는 듯 보일 수 있으나 결국은 실패로 귀결되고 말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는 어떤 연합들이 있을까요? 그 연합은 악한 자를 돕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이를 사랑하는, 한번 혼쭐이 났는데도 또다시 어리석게 끊어내지 못하고 맺어가고 있는 교제는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연합이 아닌, 나의 인간적인 욕심, 세속적인 가치를 위한 연합이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오늘도 욕심껏 배를 만들고 있는, 꿈에 부풀어 있는 우리들 각자에게 말입니다.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알면서도 그것으로 만족 못하는, 아니 그것을 믿질 못하고 내가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못는 우리에게 말입니다. 오늘 이밤, 우리의 악한 연합과 욕심사나운 계획들을 돌아보시고 끊어내시고, 멈추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요. 여호사밧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지만, 산당을 없애지 못했고, 악인과 동행하며 평화를 얻으려 했습니다. 이를 보고 우리는 말하지요. 다른 이들에 비하면 이만한 이도 없는 거 아니냐. 이만하면 그 상황, 그 환경에서 잘한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멈추고 말고, 그래서? 더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지요. 늘 말씀드려옵니다. 상대적인 신앙생활이 아닌, 절대적인 신앙생활이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남들정도만, 혹은 남들보다 조금만 더 잘하는 수준에서 우리는 신앙의 열심을 타협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쵸?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신앙생활을 나름 훌륭히 열심히 하고 그로 말미암아 남들보다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이만하면 되었다는, 충분하다, 이제는 나도 좀! 이라는 생각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나의 작은 마음과 생각이 어떤 죄가 되고, 어떤 악한 결과를 낳을지 알 수 없다는 늘 깨어있는 경각심을 가지고 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더욱 우리의 신앙생활, 그리스도를 얻고 알고 붙잡고 이르고 오직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힘을 내는 것이 오늘 우리가 지녀야 할 신앙의 방향이자 목표, 우리가 보여낼 덕목인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선한 평가를 얻으며 승리의 행진을 완주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요. 여호사밧은 아합이 죽고 난 이후에도 북왕국 이스라엘 아합 왕조와의 교제를 끊어내질 못했습니다. 여호사밧과 아합 가문이 사돈집안 친인척이 되었기에 쉽게 정리할 수 없는 긴말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바꿔가며 아합왕조와의 교제가 위험하고 악함을 경고하십니다. 산당도 쉽게 정리하지 못하고, 아합집안도 정리하지 못하고, 어찌보면 여호사밧에게는 이런 우유부단한 면이 오늘 그의 완전함을 위한 걸림돌인 것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여호사밧에게 보여지는, 그가 잘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무리 잘못된 길을 가다가도, 어느 순간에 또 반복해서 악한 길을 가더라도, 다시금 하나님이 보내시는 선지자들의 말에, 여지없이 멈출 줄 알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요.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선지자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고,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조짐이 나타나면 더는 가지 않을 줄도 알았습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와의 동맹이 지속되는 가운데,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너가 건조한 배가 파선하게 된다는 메시지였고, 아닌게 아니라 이내 그 배가 파선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여호사밧은 재차 선박을 건조해서 보내자는 아하시야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더 이상 배를 만들지 않았던 것이지요. 확인해봅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왕상22:49)
그래요. 여호사밧에게 있어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합이나 아하시야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훨씬 민감했고, 하나님의 경고의 징조들에 즉시 멈출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오늘 여호사밧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고, 계속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오늘도 우리를 향한 말씀, 경고의 불빛들이 비춰집니다. 내 길에 등이고 빛이라는 말씀은 그쵸? 늘 캄캄한 밤에 헤드라이트 같은 불로, 알 수 없는 길에 안내 등처럼 비춰지겠지만 때로는 신호등과 같이 비추입니다. 때로는 파란 불로, 때로는 빨간 불로 비춰지는 것이지요.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 위로와 격려의 말씀, 변함없이 달리라는 말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비추시는 빨간 신호등, 멈추라는 말씀, 속도를 줄이라는 말씀도 잘 확인해야 합니다.
비록 그 말씀이 잔소리처럼 들리고, 부담스러워도, 내가 볼 때는 파란불이어야 하는데도 빨간 불이 켜져 있다면, 신호등이 고장은 아닐까 의심하지 말고, 내가 멈추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신호를 잘 받아 움직여야, 우리 인생에 손해가 없고 낭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커다란 사고를 피할 수 있고 훗날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때 그 신호를 지켰어야 하는데 하는 일이 없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자동차는 달리기 위해 제작되었지만, 멈춰야할 때 멈추지 못하고 달리면, 그것은 그저 거대한 흉기일 뿐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달음질 역시,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하면, 우리 역시 누군가를 죽이고 마는 흉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자동차와 성도는 푯대를 향하여 잘 달려가야 하지만, 순간 순간 잘 멈춰야 합니다. 그래서 먹이지만 않으시고 누이시곤 하시는 것이지요. 잘 멈추어야 다시 잘 달릴 수 있습니다. 잠시 멈춰서 하나님 전화도 받고, 잠시 멈춰서 지도도 확인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일을 허락하셨고, 그래서 새벽기도회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말씀을 듣고, 배가 파선하는 일을 겪으며 하나님의 경고와 빨간 신호등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곤 아하시야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상황을 통해서도, 사람을 통해서도 늘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역시 성경을 통해 가장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가까이하는 사람이 언제가 파란 신호인지, 언제가 빨간 신호인지 잘 아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기준삼아, 달릴 때 잘 달리고, 멈출 때 잘 멈추는 사람들이 되시길, 그래서 우리의 길, 손해없이 낭비없이, 남들 다 가는데, 나만 못 가는 일 없이 모두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복된 분들이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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