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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 세계사 에른스트 H. 곰브리치
2016.11.14. 이덕연
중세 시대는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1453년 동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말한다. 특히 프랑크 왕국(481~843)의 성립 이후 서유럽이 국가형성과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영주들을 중심으로 봉건제가 발달하였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공인 받은 이후 점차 로마인들을 중심으로 제국 전역에 걸쳐 기독교화를 진행하여 오늘날 유럽의 특징인 게르만적-그리스도교적 위상을 확고하게 정립하였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1096~1270)으로 유럽의 발전을 촉발하였으나, 로마가톨릭의 교황권이 약화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4장 암흑속에 빛나는 별, 중세의 시작
로마법도 잊혀지고 아름다운 그리스 조각들도 모두 부서져 버렸지만 그 암흑같은 밤에 새로운 신앙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면서 그들이 나아갈 길을 가리킨다
중세 초기인 5~8세기에 유럽에서는 제정이 무너진 대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게르만족의 독립적인 국가들이 들어섰다.
이 변화와 더불어 그리스도교가 급속히 퍼졌고(→보니파우치스) 그리스도교는 유럽 전체의 문화와 언어를 통일했다. 고대에 이교도의 수도였던 로마도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첫번째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이르러 로마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권력을 잃어버린 처지에서 다른 그리스도교 왕국에 정기적으로 보호를 요청하곤 했다.
동로마 제국은 로마의 이 호소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유럽에서 고립되었다.
비(非)로마 세력이 로마 제국을 사실상 차지한 5세기말에 이미 몇 가지 형태의 그리스도교 권력기관이 존재하고 있었다. 도시의 성직자 위계제도는 대도시나 그 주변에 확립되었고 지리적 교구의 중요성에 따라 그 교구를 맡은 주교의 지위가 정해졌다. 수도원은 정신적 완성을 위해 헌신했고, 종교 단체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덕이 높고 믿음이 깊은 사람들도 있었다.
전적으로 비 그리스도교권이었던 유럽에서 6세기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업적은 서유럽의 수도원제도가 확립된 것과 아리우스파 및 이교도가 정통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이었다.
서유럽에서는 6세기 이전에 많은 수도원이 세워졌지만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투스(480경~547경)가 세운 수도원은 종교 공동체를 조직하는 새로운 방법을 확립했다.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규율을 켈트 교회보다는 유럽의 수도원들이 실제적인 지침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유럽의 수도원들이 켈트 교회의 전통보다 더 세속적이고 덜 엄격했기 때문이었다.(→베네딕트: 축복받는자. ①아무것도 소유하지 말 것, ②결혼하지 말 것, ③수도원장에게 항상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것,)
그러나 이 2가지 접근 방식이 공존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교가 금욕 실천의 필요성을 그만큼 강하게 느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인이 아닌 다른 민족 지도자들의 개종은 유력한 사회 구성원들의 이교신앙을 근절하는 데 중요했다. 랭스의 레미기우스 주교는 481년부터 프랑크족 지도자가 된 젊은 클로비스 왕을 설득하기 위해 만약 그리스도교로 개종한다면 교회의 지지를 받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알라의 예언자 마호메트>
마호메트는 이슬람의 예언자로 역사상 위대하고 영속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610년경 히라산에서 짓눌리는 듯한 영적 체험을 통해 신의 계시를 받았다. (마호메트 자신이 후에 말하기를, 엄숙한 음성이 울리면서 빛나는 무엇인가가 그의 목을 붙잡고 계시된 신의 말씀을 복창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 그는 도망치려고 했다. 이윽고 계시가 끝나자마자 마음 깊은 곳에서 공허감이 그를 엄습했다. 결국 그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전해야 할 사명이 주어졌다고 확신하고 613년경부터 전도를 시작했다. 그의 가르침은 유일신의 전능을 열렬하게 그리고 되풀이하여 선언하는 것이었는데, 이 유일신은 우주의 창조자이며, 부활의 날에 그 피조물의 모든 것을 최후의 심판을 위해서 불러모으는 것이었다.)
메카에서의 마호메트의 가르침은 박해를 받았다. 이에 메디나로 이주하여 이슬람교를 전파하며 메디나의 정치가이자 지배자가 되었다. 그 후 메카와 후다이비야 조약(이 조약에서 메카는 점점 커지는 메디나의 이슬람교도 공동체를 정치적·종교적으로 승인했다)을 맺고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다가 메카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다신교의 신전인 카바를 이슬람교의 최고 신전으로 삼았다. 아라비아 반도 메카에서 제창되고, 메카를 신앙의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교는 점차 유대교·그리스도교와는 다른 종교라는 것을 명백히 하며 이슬람 국가를 확대해나갔다.
p249 마호메트는 특히 설교집과 환상, 계시록 등을 통해 천국을 아름답게 그려놓았다. 이런 글들을 코란 이라고 부른다.........당시 뜨거운 사막 지대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호화로운 천국이 싸우다 죽어도 좋을 만한 값진 약속이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지배할 줄 아는 정복자 카롤루스 대제>
프랑크 왕국은 피핀의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재위 768~814년)때 전성기를 맞았다. 카롤루스 대제는 즉위 후부터 꾸준한 정복 사업을 벌여 남으로는 이탈리아의 랑고바르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동으로는 라인 강 북방(작센 지방)과 다뉴브 강 상류 지방을 정복하였다. 또 서쪽으로는 에스파냐의 사라센 제국을 정벌하여 옛 서로마 제국 영토의 대부분을 통합하였다.
그는 전국을 300여 개의 주(州)로 나누고, 장관으로 백(伯)을 두어 통치하도록 하는 한편, 순찰사를 보내어 그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 쓰고,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였다. 이리하여 민족 대이동 이래 쇠퇴하였던 문화가 다시 꽃 피었는데, 이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한다.
카롤루스 대제는 크리스트교의 보호와 전파에도 노력했다. 그리고 랑고바르트 왕국을 멸망시킨 뒤 많은 영토를 교황에게 바쳤다. 그는 이와 같은 공로로 800년에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 의 관(신성로마제국의 초대 독일 황제)을 받았다. 이는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뜻하며, 당시 동로마 제국의 세력 아래 있던 서유럽을 독립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의 불만>
사제들에게 봉토가 하사됨으로써 상황은 진퇴양난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데 사제들의 수장은 교황이고 모든 봉토의 주인은 황제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싸움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머지않아 일이 벌어졌는데 이것을 서임권투쟁(독일의왕 하인리히4세=교황 그레고리우스7세)이라고 부른다.
<카노사의 굴욕>
p279~280 하인리히는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차리자......교황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 번에 두가지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셈이었죠. 파문도 풀릴테고 자기가 직접 나타남으로써 교황이 반대파들과 만나는 불리한 상황을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아랍문화>
그동안 황제들 때문에 권력자로서의 힘이 약해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종교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그가 이교도들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자고 주장하자, 서방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했다. 결국 대규모의 다국적 군대가 결성되어 예루살렘으로 출발했다. 이때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들을 ‘십자군’ 이라 부른다. 그때부터 기독교 세력(십자군)과 이슬람 세력(셀주크 튀르크)은 예루살렘 성지를 두고 약 2세기 동안 싸웠다. 이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 이다. 십자군 전쟁은 1096년에 시작하여 1270년까지 총 7차례 전쟁을 치렀다(학자에 따라서는 8차례로 보는 경우도 있음).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명분에 불과했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여러 세력은 각기 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먼저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분열된 동서 교회를 통합하여 교황권을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영주와 기사들은 새로운 영지와 재물을 얻기 위해 나섰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동방 세계와의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노렸고, 농민들을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교황의 권위는 추락했고, 봉건 영주들이 몰락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국왕들은 권력이 강해지고 영지를 확장하게 되었다. 결국 서유럽의 각 나라가 중앙 집권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또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 무역의 주축이 되었던 북이탈리아 여러 도시들이 성장 발전하게 되었고, 지중해 무역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지중해 무역권은 뒤를 이은 북유럽, 내륙 무역권 형성과 함께 발전하여 농업 중심이었던 중세 봉건 사회의 기반을 무너트렸다.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비잔티움 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접하게 된 서유럽 사회는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비잔티움 문화의 그리스·로마의 고전과 미술, 이슬람의 철학·의학·화학·수학·천문학 등이 전해지면서 서유럽 문화가 향상되었을 뿐 아니라 르네상스를 시작하는 발판이 되었다.
5장 중세 유럽에 부는 새로운 바람
<기사다운 기사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붉은 수염(Barbarossa)'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정복 군주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Ⅰ). 독일인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그는 이탈리아도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공물과 조세를 거두고 싶었다. 바르바로사는 군대와 함께 이탈리아로 진군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바로 로마 황제의 후계자 이므로 1000년전의 모든 권리를 가진다고 엄숙하게 공표하지만 이탈리아 도시들은 아무것도 바치려 하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반란의 중신지인 밀라노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밀라노 시민들은 도시를 재건했고 독일 황제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에 바르바로사는 모두 여섯 번에 걸쳐 이탈리아로 출정했지만 허울뿐인 명성만 얻었을 뿐 실질적 효과는 거두지 못한다.
오늘날의 우리는 진짜 축제라는 것을 모르고 산다. 당시의 일상생활은 지금보다 훨씬 더 단조롭고 초라했지만 축제만큼은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동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p.247)
<교황을 이긴 젊은 황제 프리드리히 2세>
그는 유럽의 역사에서 '잔인한 통치'로 악명이 높으며, 가톨릭의 역사서에서는 유럽 역사상 최악의 폭군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된다. 예컨대 그 자신이 정리한 반역자들에게 내리는 형벌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육신의 눈을 뽑아 버려라. 그들은 악마에 의해 내면의 눈이 멀었다.
말꼬리에 매달아 먼지구덩이에 끌고 다녀라. 그들은 죄 없는 먼지를 모독했다.
산 채로 바다에 던져라. 그들은 충신들에게 독배를 권했다.
공중에 매달아라. 파렴치한 거짓을 퍼뜨려 공기를 더럽혔다.
마지막으로 불태워 버려라. 그들은 충성의 불꽃이 완전히 꺼져 버린 자들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호엔슈타우펜 왕조 출신의 신성로마 제국 황제이다. 샤를마뉴 대제의 후손인 이 왕조는 교황청과 최악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악명이 높다.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두고 교황청과 영토 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왕조 출신의 황제들은 강인하고 독선적인 성격으로 교황청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파문도 여러 번 당했고 물리적인 충돌도 끊이지 않았다.
학문과 예술을 좋아했으며, 시대에 앞장선 근대적인 군주같은 행동때문에 「왕좌에 있는 사람 중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평가했다. 중세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군주로 평가된다. 평소에 식사는 검소적이며, 음주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열었던 연회는 호사스러울 정도였으며, 르네상스 시대를 먼저 살았다고 생각할 정도의 궁정생활을 보냈다. 프리드리히의 용모에 대해서는 같은 시대의 유럽 사람들은 전부 칭찬했다고 하지만 이슬람의 연대기 작자는 그를 「벗겨진 붉은 머리에 아는 것도 없어서 노예였다면 절대 가격이 높지는 않을 것이다」라며 풍채가 좋지 않는 인물로 기록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프리드리히가 세상의 종교를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해할 수 없었던 단 한 가지는 왜 세상 사람들이 늘 싸우는가 하는 것이었다. (p.252)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절실히 원하면서 그에 관해 자주 꿈꾸다 보면 마침내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어 버릴 수 있다. (p.255)
<유럽에 부는 새로운 바람, 도시생활>
11세기경부터 서유럽에서는 잉여 농산물이 증가하였고, 이를 교환하는 시장이 열렸다. 도시의 상인들은 처음에는 주변의 농촌을 무대로 상업 활동을 하였으나, 십자군 전쟁 이후로는 원거리 무역에도 참여하였다. 초기의 중세 도시는 영주의 지배권 하에 있었기 때문에 경제 활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까지도 영주의 영향을 받았다. 상공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도시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러한 봉건적인 속박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도시민들은 영주와의 타협을 통해 도시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인정해 주는 특허장을 사기도 했고, 무력으로 자치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특허장을 사거나 획득한 도시민들은 도시법을 제정하여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다.
중세 도시민들은 공동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길드라는 조직을 만들어 생산과 교역 활동을 통제하였다. 먼저 발달한 상인 길드는 중세 도시의 자유와 자치권을 얻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도시 행정에서 길드 회원들, 특히 대상인들의 발언권이 강해지면서 이들은 실질적으로 도시의 행정권을 장악하였다. 상인 길드보다 늦게 생긴 수공업자 길드는 같은 물건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만든 동업 조합이었다. 수공업자 길드는 도제, 직인, 장인으로 구성되었다.
시장은 성벽이나 탑으로 보호되는 곳, 대개는 영주의 성채 근처에 자리 잡았다. 이곳으로 이주해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시민이었다. 시민은 더 이상 영주에게 예속되지 않았다. 규모가 큰 도시의 시민들은 왕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굴종하지 않았기에 당시에는 이런 말도 유행했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 (p.262)
17세의 순박한 양치기 소녀 잔다르크가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믿으면서 완전 무장을 한 채 프랑스군을 이끌었고 마침내 영국군을 격퇴시킨 것이다. (p.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