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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의 사랑방 4
가야산의 속살
흔적 3집에 「해인사의 숨은 이야기」가 실린 후에 가야산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산인지 물어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3집과 관련된 부분을 정리해서 싣는다.
이 내용은 대구불교방송(94.5MHZ)에서 매주 화요일 오후 5시 20분에 방송되는 <불교역사 산책>시간에 방송되었던 부분이다.
인터넷에서 다시듣기가 가능하다.
가야산의 속살
1. 가야의 의미
MC ; 네, 매주 화요일은 영남불교문화연구원의 김재원 박사님과 함께 세월의 뒤안길에 묻혀있는 불교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우리가 별 생각 없이 가야산이라고 부르지만, 가야라는 말 속에는 깊은 뜻과 유래가 있을 것 같아요.
김 ; 물론이지요. 대체로 명산일수록 부르는 이름도 많고 유래도 다양한 편입니다. 그만큼 오래도록 인간들의 발걸음이 잦았고, 삶의 의지처가 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MC ; 이름이 많다 하셨는데 가야산 말고 어떤 이름들이 있습니까?
김 ; 가야산 말고 우두산, 상왕산, 중향산, 지달산, 개산으로도 불리는데 제가 조사한 바로는 7가지나 되었습니다.
MC ; 이름들이 아주 독특하네요. 다들 의미가 있는 이름일 것 같은데요. 그러면 먼저 가야산 이름의 유래부터 설명해 주시겠어요?
김 ; 가장 많이 알려진 가야란 말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가야산 자락의 고령과 합천은 지금부터 2000년 전에는 대가야 지역이었고, 가야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성주는 성산가야의 영토였습니다. 여러 가야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존속했던 대가야가 562년 신라 진흥왕에게 망하고 난 뒤에도 그 이름은 대가야군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가야산은 대가야와, 성산가야의 성지이었던 거지요. 가야란 말은 옛날 가야지방이라는 역사적 명칭에서 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부처님이 성도하신 인도 부다가야에서 10km 떨어진 곳에 가야성이 있고 이 가야성의 서남쪽에 가야산이 있습니다. 인도말로는 가야아시이르샤(Gayasirsa)인데 중국에서 가야시리사(伽倻尸利沙)라고 소리 나는 대로 번역하고, 줄여서 가야라고 했습니다. 이게 불교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가야산이 되었다는 설입니다.
MC ; 가야가 인도에서 온 말일 수도 있다는 뜻인 것 같은데요. 그러면 가야가 인도에서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김 ;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쓰였던 고대인도 말인 산스크리트어로는 가야가 ‘소’를 의미합니다. 인도인들이 섬기는 동물이 소이잖습니까. 성스러운 소를 닮은 가야산에서 석가세존께서 『가야산정경』(伽倻山頂經)를 설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야산 정경』은 부처님께서 문수보살과 발보리심에 대해서 문답한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경의 이름이 경이 설해진 장소를 따서 붙여진 경우입니다.
MC ; 그러니까. 가야는 부처님이 성도하신 부다가야 근처에 있는 성의 이름이고, 그 도시를 대표하는 산 이름이면서, 인도인들이 가장 신성시 하는 동물 소를 의미하고, 부처님께서『가야산정경』을 설하신 성소로 많은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것 같은데요, 소머리란 의미인 우두산도 같은 맥락인가요?
김 ; 가야가 ‘소’이니까 대부분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항간에는 가야산 정상이라고 알려진 우두봉이 소머리같이 생겼기 때문에 우두산이라 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가야산 정상을 몇 번 올라가 봤는데 우두봉이 소의 이미지처럼 우람하기는 해도 그 생김새는 소머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그러면 왜 우두봉이라 했을까 나름대로 조사를 해 봤습니다. 옛날에 가야산 산신제를 지낼 때는 우두봉에 소머리를 제물로 놓고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가야산은 사람 다음으로 귀한 소를 희생시켜서 모셔야 할 만큼 성스러운 산이란 의미이겠지요. 그 정상에 소머리를 희생으로 올려놓는 제단이 있다는 뜻으로 우두산이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MC 우두봉이 소머리처럼 생겼기 때문에 우두산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돼지머리를 쓰는 산신제에 가야산은 유독 소머리를 제물로 쓰기 때문이라는 말이군요. 지금 가야산 최고봉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요.
김 ; 그렇습니다. 최고봉 논쟁에는 합천군과 성주군의 미묘한 신경전이 끼어들어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지금까지는 합천과 성주의 경계선상에 있는 우두봉을 1430m로 표기하고 정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성주군이 요청하고 국토지리정보원이 측량한 결과 성주군에 속해있는 칠불봉이 우두봉보다 3m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지명학회의 추인 절차가 남아 있어서 가야산 국립공원 사무소 측은 아직까지 인정을 하지 않고 있지만 조만간 수정되리라고 보여 집니다.
MC ; 만약에 정상이 우두봉에서 칠불봉으로 바뀌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김 ; 자질구레한 변화는 많을 겁니다. 지도책에 표기가 달라질 것이고, 산의 행정구역은 정상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 만큼 ‘합천 가야산’으로 많이 불리던 가야산이 ‘성주 가야산’이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 가야산 전체 면적의 60% 이상이 성주군에 속해 있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성주군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가만히 놔두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MC ; 최고봉이 합천군에 있으면 어떻고 성주군이면 어떻습니까. 가야산은 가야산 그대로이면 되는 것이지.
김 ; 맞습니다. 최고봉 논쟁은 큰 틀에서 보면 정말 무의미 합니다. 그야말로 어린아이들의 구슬치기나 딱지치기 같은 장난에 지나지 않지요. 이런 소모적인 최고봉 논쟁은 이익 앞에서는 개인이든 잡단이든 우정이나 의리 같은 것은 내팽개치고 피나는 투쟁만 하는 인간들의 부질없는 분별일 뿐이고, 실제의 우두봉과 칠불봉은 오늘도 여전히 아래를 굽어보면서 못난 인간들의 행위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보듬어주고 있습니다.
MC ; 상왕산은 어떤 의미의 이름입니까?
김 ; 상왕은 코끼리 왕이라는 뜻이지요. 『열반경』에서는 상왕이 부처님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왕은 부처님이라는 뜻이 되지요. 소의 뜻을 가진 ‘가야’를 코끼리, 즉 상(象)으로 번역했으니, 얼핏 보면 잘 못 된 번역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고대인도 말인 산스크리트어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프라크리트 말에서는 <야 ya>와 <쟈 ja>는 서로 통합니다. 그래서 소의 뜻을 가진 ‘가야’를 코끼리란 뜻을 가진 가쟈(gaja)로 번역해도 어법에는 어긋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MC ; 상왕산이란 말은 ‘야’와 ‘쟈’를 구별하지 않고 쓰는 인도 유럽어의 특징을 적용시켜서 ‘가야’를 ‘가쟈’와 같은 걸로 보고 코끼리 상으로 번역한 거군요. 그러면 중향산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김 ; 중향산의 ‘중향’은 중향국토를 의미합니다. 중향국은 『유마힐소설경』에 나오는 나라 이름인데, 부처님은 향적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향적이라고 한 것은 이곳에서는 인간이나 천인이 뿜어내는 향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향기가 넘쳐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에는 청정한 대보살들만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MC ; 가야산을 향기가 넘쳐나는 중향정토로 보았다는 말이지요. 가야산을 지달산이라 한다고도 하셨는데 지달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김 ; 지달은 『60화엄경』에 나오는 불국토의 이름입니다. 『60화엄경』에는 ‘4대해 중에 보살이 사는 곳이 있어 지달이라고 하는데, 담무갈 보살이 머물면서 1만2천의 보살을 권속으로 두고 항상 설법하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80 화엄경』에 오면 ‘바다 속의 금강산에는 법기보살이 1만2천의 권속을 거느리고 항상 설법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MC ; ‘60화엄’, ‘80화엄’이라 하셨는데,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 ; 화엄경은『대방광불화엄경』을 줄여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이 경전의 특징은 각 장이 독립된 경전으로 되어 있던 것을 4세기경에 집대성했습니다. 한문으로 번역된 것으로는 세 가지 본이 전해옵니다. ‘60화엄, 80화엄 40화엄인데’, 여기서 숫자는 권수를 나타냅니다. 60화엄은 60권으로 된 화엄이란 뜻이죠. 60화엄은 420년에 중국 동진에 와 있던 불타발타라 스님이 번역을 한 것인데, 당시 나라 이름을 따서 진본 화엄경이라고도 합니다. 80화엄은 699년에 실차난타 스님이 번역한 것인데, 이때는 측천무후가 집권하면서 나라 이름을 주(周)라고 할 때입니다. 그래서 주본이라고도 하지요. 40화엄은 798년 당나라의 반야가 번역을 했습니다.
MC ; 60, 80, 40이 경의 권수를 나타낸 것이라 하더라도 이름에 들어 있는 것은 세 가지 번역본이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어떻습니까?
김 ; 내용은 같아도 차이는 납니다. ‘60화엄’은 7처8회 3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80화엄은 7처 9회 39장으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처는 불법을 설한 장소를 말하고, 회는 모임의 횟수를 뜻합니다. 40화엄은 60화엄과 80화엄의 마지막 장인 입법계품만 따로 떼어낸 것입니다.
MC ;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화엄경인데 어째서 60화엄에서 지달과 담무갈보살이 80화엄에서는 금강산과 법기로 번역되었는지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김 ; 발음만 보면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뜻입니다. 인도 스님이었던 불타발타라는 번역하면서 인명이나 지명 같은 고유명사는 인도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음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달과 담무갈은 인도 말 발음 그대로 번역된 거죠. 서역 스님이었던 실차난타는 인명과 지명까지도 인도 말이 품고 있는 뜻을 살려서 의역을 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가고 싶은 배려였겠지요. 그래서 지달을 금강산으로 담무갈보살을 법기보살로 뜻에 중점을 두어 번역한 겁니다. 두 말은 발음은 달라도 뜻으로 보면 같은 의미입니다.
MC ; 지달산이란 말이 화엄경에 나오는 용어이니까 가야산이 지달산으로 불리게 된 것은 화엄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 화엄종 사찰인 해인사가 창건되고 나서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 ; 해인사를 창건한 스님들이나 신도들은 화엄경에 나오는 말로 산 이름을 짓고 싶어 했겠지요. 또 그 반대로 가야산을 지달산으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화엄종 사찰이 자연스럽게 들어설 수 있었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해인사가 먼저 창건되었는지, 지달산이란 이름이 먼저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지요.
MC ; 화엄경의 용어인 지달산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화엄종 사찰 해인사가 자연스럽게 들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또 다른 이름, 개산이란 말은 어쩐지 토속적일 거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김 ; 맞습니다. 가장 비논리적이고, 설득력이 떨어지지요. 옛날 홍수가 일어나서 천지가 개벽되던 날 가야산은 개만큼만 남기고 물에 다 잠겨서 개산이라 한다고 합니다.
2. 가야산의 맥세
MC ; 그야말로 가장 단순하고 우리말 발음을 기준으로 한 유래인 것 같은데요. 가야산의 맥은 어디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습니까?
김 ; 가야산도 그 근원을 거슬러 오르면 백두산에 닿습니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이 수백 번 감돌고 휘돌면서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으로 이어지다가 태백산에 와서는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갑니다. 소백산, 주흘산, 희양산, 속리산 백화산, 추풍령, 황악산, 대덕산, 덕유산으로 이어지다가 지리산에서 그 여정을 멈춥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백두대간의 주맥 중 대덕산에서 남쪽으로 한 줄기가 뻗어 나와서 솟구쳐 놓은 것이 청암사가 있는 수도산입니다. 이 수도산에서 서남으로 염속산, 독용산 형제봉으로 이어지던 맥이 큰 산 덩어리를 일궈 놓는데 이게 가야산입니다. 수도산에서 동북으로는 별뫼산, 백양산, 방울암산으로 이어지다가 감천과 낙동강을 만나 흐름을 멈춘 곳이 금오산이고요.
MC ; 산줄기로 따라가니 아득한 곳으로만 느껴졌던 백두산이 상상 속에서 나와 손이 닿을 듯 가까워지는 것 같은데요. 설명을 들으니 가야산이 백두대간의 주맥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김 ; 그렇습니다. 가야산은 한반도의 등뼈라고 하는 백두대간의 주맥에서 약간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백두대간 가에 있는 산이란 뜻으로 ‘가에산’이었던 원래의 이름이 한자가 들어오고 불교가 유입되면서 ‘가야산’으로 정착되었을 것이란 새로운 이론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백두대간의 종착지 지리산 가에 있는 가에산이 세월이 흐르면서 가야산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주장이지요.
MC ; ‘백두대간의 가에 있는 산, <가에산>이 불교가 들어오면서 <가야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례만으로 어렵지 않을까요?
김 ; 그렇지요. 같은 사례로는 충청남도 예산과 서산의 경계에 또 다른 가야산이 있습니다. 이 가야산은 금북정맥의 주맥으로 풍수도참에서는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가 태어나는 자미궁이란 명당이 있다는 유명한 산이지요. 이 충청도 가야산 이름도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가에산이었을 거라는 겁니다. 주변의 산들은 모두 나지막한데 이 산만이 서해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거지요. 또 전라남도 장흥과 경상남도 울산에는 가지산이 있습니다. 이 산들도 가에산과 같은 맥락이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도 경상도와 전라도의 나이 든 어르신들은 ‘가에’를 ‘가세’라고 발음을 하거든요. 우리말에는 ᆺ과 ᆽ은 같은 음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해 바닷가에 불끈 솟은 가세산, 남해 바닷가에 우뚝 솟은 가세산이 선종의 9산 선문 중에 가지산파의 근거지가 되면서 가지산으로 정착되었을 거라는 주장이 같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3. 정감록과 가야산
MC : 명확한 근거가 없으니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정도의 생각이 듭니다. 가야산에는 민간신앙이 많지요?
김 ; 예, 많습니다. ‘명산, 가야산에 대한 민간신앙’ 그 강도는 대단합니다. 조선시대 우리 민족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을 들라고 하면, 저는 정감록을 들겠습니다. 조정에서는 금서로 분류해서 엄격히 통제했습니다만 민간에서는 신앙처럼 신봉하는 사람들이 최근까지도 숱하게 있었습니다. 우리민족의 밝은 미래를 가시화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랐던 거지요. 정감록의 핵심에 십승지(十勝地)가 있습니다.
MC ; 십승지란 말이 생소한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십승지의 뜻부터 요약해 주시죠.
김 ; 십승지는 조선시대 내내 왕실을 괴롭혔던 비결서인 정감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 하면 ‘난리가 났을 때 반드시 피난가야 할 곳’입니다. 십승지의 십은 처음에는 열 곳의 승지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만 뒤에 오면 열 곳이란 의미보다는 ‘대표적인’ 또는 ‘가장 좋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MC ; 『정감록』이란 말을 많이 듣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거든요.
김 ;『정감록』은 알다시피 왕조흥망을 예언한 비결서입니다. 주로 풍수지리설, 하도낙수, 천문, 기문 같은 방술에 의한 도참적 성격이 강해서 무척 난해합니다. 임진왜란 이후가 되면 역모 사건이 무척 많아지는데, 이때마다 정감록은 반드시 등장합니다. 요새말로 하면 정가에 떠도는 괴문서에 해당된다고나 할까요? 조정에서는 혹세무민하는, 허무맹랑한 불온서적이라고 금서령을 내리고, 가지고 있기만 해도 극형에 처한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만 날이 갈수록 극성스러워졌습니다. 조선 후기에 오면 민간 신앙으로까지 발전합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내용을 보면 일제 초에 정감록 신봉자가 수백만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MC ; 정부가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극형에 처했는데 왜 백성들은 그렇게 정감록을 신봉했을까요.
김 ; 왕조시대만 아니고 일제강점기나 해방 후에도 세상을 어지럽히는 미신으로 분류돼서 비난을 면치 못 했습니다. 그런데도 정감록은 이런 비난을 뛰어넘어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그 이유는 무능한 왕, 부도덕한 정부, 부패한 관료들의 등쌀에 민생이 파탄 났던 그 시대에, 실의에 빠져 암흑 속에 헤매던 민초들에게 민족이 무엇이며, 그 주체가 누구인지를 일깨워주고, 내일이라는 희망을 불어 넣어 새로운 용기를 갖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MC ; 정감록의 어떤 점에서 민중들이 희망을 갖고 들뜨게 되었는지 궁금해지는데요.
김 ; 정감록은 역성혁명설과, 후천개벽설과, 머잖은 장래에 이 지구상에는 밝은 세상이 도래하는데, 그때 우리민족이 세상의 종주가 된다는 남조선설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저는 조선 후기에 일어나는 동학이나 여러 민족 종교와 정역 같은 것들도 정감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MC ; 역성혁명설과 후천개벽설 때문에 조정에서는 금서로 규정하고 탄압을 한 것 같은데 간단히 풀이 좀 해 주시죠.
김 ; 착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하늘의 뜻이며 기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악덕한 왕을 내쫓고 새 지도자를 새워 새 왕조를 창건하는 역성혁명도 하늘의 뜻이라는 거지요. 조선왕조는 부패타락으로 천재이변과 난리가 일어나서 망하고 정도령이라는 새 지도자가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게 역성혁명입니다. 이 혁명은 지금까지의 역성혁명과는 다르다는데 특성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혁명은 아무리 착한 지도자가 새 나라를 세워도 궁극에는 집안 좋고, 힘세고, 머리 좋고, 능력 있는 사람만 잘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는 거지요. 그러나 정도령이 건설하는 새 세상은 잘난 사람은 물론 보잘 것 없이 못난 사람도, 힘없는 사람도, 불구자도, 모두 잘 사는 지상낙원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정감록이 주장하는 후천개벽입니다.
MC ; 못나고, 괄시받고, 힘없는 사람도 잘 사는 세상, 이것이 정감록의 후천개벽이군요. 민중이 혹 할 만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정도령의 능력이 탁월하다 하더라도 혼자 힘으로 역성혁명에 후천개벽까지 할 수 있을까요?
김 ; 혼자 힘으로는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부패한 조정이 멸망할 때 갖가지 천재지변과 난리가 연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지각 있는 사람들은 십승지에 피난을 가야 살아남는 다는 겁니다. 정도령이 나타나면 십승지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떨치고 나와서 거룩한 사업을 이룩한다는 것이 정감록의 줄거리입니다. 이래서 정감록에서는 십승지가 주체가 되고 있습니다.
MC ; 그러니까 십승지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난리를 피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숨어서 힘을 기른 후 때가 되면 나와서 후천개벽에 앞장서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김 ; 그렇습니다. 주역의 건(乾)괘에 잠룡(潛龍)이란 말이 있습니다. 용이 하늘에 올라가기 위해서 깊은 못에 몸을 숨겨서 외부로부터 오는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힘을 기르고, 아울러 등천할 시기를 기다리는 단계를 잠룡이라 합니다. 십승지는 바로 잠룡이 숨어서 힘을 기르는 깊은 못에 해당합니다. 잠룡이 거주하는 심연이 여럿이듯이 승지도 여러 곳입니다.
MC ; 그러니까 십승지는 난리를 모르는 땅, 풍요로운 땅, 인간이 꿈꾸어 오던 이상향으로 후천개벽의 힘을 기르는 곳을 뜻하는 것 같은데요. 결국 10이라는 숫자는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김 ; 그렇지요. 십승지라 말하지만 정작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는 제가 알기로도 50군데가 넘습니다.
MC ; 십승지란 말로 범주를 제한해 놨지만 십승지로 불리는 50여 곳은 나름대로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요.
김 ; 그렇습니다. 공통점이 아주 많습니다. 십승지로 알려진 곳은 모두 경치가 뛰어나고, 풍수도 좋고, 농사짓기도 좋고,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숨을 곳이 많고, 기도나 수도하기에 알맞은 토속 신앙의 성지이면서 모두 태백산 남쪽에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곳은 오랜 세월동안 짓밟히고, 억눌리고, 핍박받은 사람들, 예를 들면 화전민, 숯꾼, 나무꾼, 심마니, 유랑민, 동학당, 은둔자, 의병패잔병, 최근에는 빨지산 같이 이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서 화석처럼 굳어진 곳입니다.
MC ; 그러면 가야산이 십승지 중에 하나라고 하셨는데 정감록에서는 가야산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김 ; 정감록에서는 백두산의 기가 평양으로 들어가서 천년의 운을 열었고, 다음으로 송악으로 가서 오백년을 머물렀는데, 요사스런 승려와 궁궐 여인들의 장난이 심해서 지기는 쇠퇴하고 천운이 막혔다고 했습니다. 다시 백두산 맥이 금강산으로 내려와서 왕성해져 한양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서 오백년 왕운을 연다고 합니다. 그 다음 맥은 태백산과 소백산에 이르러 기가 크게 모이고, 이 정기가 계룡산에 들어가서 정씨 팔백년 왕운을 열어준다고 합니다. 그 뒤 맥은 가야산에 들어가서 조씨 천년왕조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MC ; 지금까지 있어 온 왕조는 평양, 송도, 한양 이렇게 지명을 밝혀 놓고 앞으로 오는 왕조는 계룡산, 가야산, 이렇게 산 이름으로 나오고 있네요.
김 ; 십승지도 지명을 들고 있습니다. 가야산의 십승지는 만수동이라고 합니다. 이런 곳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고 관념상의 지명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리산 청학동인데, 지리산에 있다는 십승지 청학동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자기들이 자리 잡은 곳이 청학동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지리산에는 청학동이란 이름이 열 군데가 넘습니다. 가야산 만수동도 마찬가지입니다.
MC ; 왜 실제 지명을 밝히지 않았을까. 궁금증이 더해집니다.
김 ; 예언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밝혀버리면 신비감이 사라지지요, 장감록 신봉자들은 구체적인 지명을 밝혀 놓으면 조정에서 그냥 두지 않기 때문에 실제 지명을 밝히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눈이 트인 사람들만 찾아오라고 청학동, 금계동, 우복동, 만수동 이라는 가공의 지명을 쓰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십승지란 곳을 가보면 전략적으로 험준한 도나 군의 경계에 위치해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많습니다. 또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너른 농토가 있고 산삼과 약초가 많이 나서 자체로 질병을 관리할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MC ; 십승지 중에 하나가 가야산 만수동이라고 하셨는데, 그 만수동을 지금 어디쯤으로 보고 있습니까?
김 ; 중국 도담(道談)에 ‘중국 도사들은 조선에 가서 금강산을 구경하고 청학동이나 만수동에 가서 사는 게 제일 큰 소원’이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학동이나 만수동은 실제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MC ; 왜 사람들은 실제 하지 않는 십승지, 청학동이나 만수동을 그토록 찾으려고 했을까요?
김 ; 만수동에 들어가 도를 닦으면 신선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걸 믿고 수많은 도사들이 그 곳을 찾아 들어갔는데, 제대로 찾아 들어간 사람은 신선이 되었는지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온 사람은 그곳을 찾는데, 실패한 사람들뿐이라서 아직까지 만수동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다는 겁니다. 더욱 더 찾기 어렵게 된 것은, 3공화국 때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공비가 나타나서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깊은 산속에 있는 독가촌이 북한 무장공비들의 은신처가 된다고 해서 화전민촌과 은둔자들의 주거지를 1975년에 전국적으로 일제히 정리합니다. 이때 그들이 갖고 있던 비결서를 미신이라고 해서 거두어서 불태워버립니다. 정감록 신봉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던 책마저 없어져 버렸으니 추적은 거의 불가능하지요.
MC ; 그래도 만수동을 찾아 들어온 주민들이 남아 있다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만수동이라고 믿고 있지 않을까요?
김 ; 그렇습니다. 지리산의 청학동이나 다른 십승지처럼 자기네들이 살고 있는 동네가 만수동이라는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와 주민들의 믿음이나, 감여가들의 이론을 들어보면 지금의 마수리가 가야산 만수동이라는데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MC ; 마수리라면 행정적으로는 어느 도, 어느 군에 속합니까?
김 ; 마수리는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마수리입니다. 그러니까 해인사의 뒤쪽 가야산 중턱이 됩니다. 마수리 곰시골을 만수동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10여 가구가 남아서 농사도 짓고 토종벌도 치면서 여유롭게 살고 있는 두메산골입니다.
MC ; 곰시골 말만 들어도 양지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자그마한 마을, 푸근한 인심이 연상되는 토속적인 마을일 것 같은데요. 무슨 깊은 사연이 깃들여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김 ; 그렇죠, 들을수록 정감이 가는 이름이지요. 두 가지 유래를 가지고 있는 마을입니다. 지형을 보면 마치 곰이 물을 마시는 형상이어서 웅수(熊水)라고도 합니다. 웅수, ‘곰 웅자 물 수자’ 한자로 번역해 놓으니까 정말 무덤덤하지요. 또 하나는 가야산 곰들이 매일 새벽이면 줄지어 와서 뒷산 대밭에서 떨어지는 폭포 물을 마시고 놀다가 돌아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라고도 합니다.
MC ; 새벽에 가야산 곰들이 물 마시러 왔다가 놀다 가는 곳,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평화로운 정경입니다. 인간과 곰이 어울려 사는 곳, 이런 곳이 십승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곰시골 생각만 해도 멋진 동네일 것 같습니다.
김 ; 가야산에는 곰뿐만 아니라 호랑이 표범 이야기도 많이 채집이 됩니다. 곰시골에서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턱걸이 바위’라는 희한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남으로는 지리산에서, 북으로는 태백산까지를 영역으로 하는 가야산 호랑이가 턱을 괴고 쉬는 곳이라고 해서 턱걸이 바위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장날 밤늦은 장꾼들을 앞장서서 동네까지 인도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혀 근거 없는 게 아니라 6.25가 끝나고 몇 년 뒤에 표범을 사냥한 적이 있고, 1962년 표범을 생포한 기록도 있습니다. 지금도 겨울 눈 위에는 지름이 15cm가 넘는 고양이과 동물의 발자국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MC ; 십승지, 가야산 만수동이라고 알려진 마수리 곰시골, 어떤 곳일까? 궁금증에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지는데요.
김 ; 원래 이 동네는 조씨 천년 왕국의 발원지라는 십승지, 가야산 만수동을 찾아 들어온 사람들이 살아 내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만수동, 또는 줄여서 수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랬던 것을 1894년 갑오개혁 때 ‘마수’라는 새 지명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유서 깊은 동네가 다 그렇듯이 이 마을에도 절이 있었습니다. 곰시골 뒤쪽에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미륵딩이’라고 부릅니다. 그 앞의 판판한 땅을 ‘탑양지’라 하는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없어진 절의 탑이 있었던 자리라고 합니다. 이곳은 십승지답게 산세가 아주 빼어납니다. 특히 주산인 가야산의 생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좌청룡 우백호가 거듭거듭 잘 마무리 되어 있습니다. 약간 다르긴 합니다만 해인사 안에도 가야산 전설을 담고 있는 유적이 지금도 버젓이 건재하고 있습니다.
4. 가야산신, 정견모주 감생설화
MC : 해인사 경내에 가야산 전설을 담고 있는 유적이 있다니 놀라운데 그 게 뭡니까?
김 : 해인사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관심 밖의 전각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절에는 없고 해인사에만 있는 유일한 전각입니다.
MC ; 해인사에만 있는 관심 밖의 신중단 그렇게 말씀 하시니까 꼭 수수께끼를 하는 것 같아 호기심이 이는데, 어디에 있는 무슨 전각입니까?
김 ; 봉황문을 들어서서 해탈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편 있는 국사단입니다. 이 국사단이 흥미를 끌게 하는 것은 명칭과 위치와 역사적 성격입니다. 보통 중요 건물은 무슨 ‘전’이나 ‘각’이란 이름이 붙는데 여기서는 ‘단’이라고 했습니다. 이름 자체에서 불교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죠.
MC ; 국사단이 불교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면 국사는 어떤 의미를 가졌기에 불교와 관련도 없으면서 버젓이 사찰 경내에 들어와 있는 겁니까?
김 ; 국사단 할 때 국자는 나라 국자가 아니라 판 국(局)자입니다. ‘사’자도 맡을 사(司)자입니다. ‘국사’란 말은 어떤 터의 형국을 주관하는 토지신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해인사 가람 터를 수호하고 재난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토지신을 모신 건물이 국사단입니다. 국사신앙은 정통 불교와는 상관없는 한국 전래의 토속신앙이기 때문에 규모도 작고 이름도 전이나 각이 아니라 단으로 붙인 겁니다.
MC ; 교리적으로 보면 들어올 수 없고, 우리 민족의 정서상으로는 꼭 있어야 할 국사단 설립에 갈등이 무척 많았겠습니다.
김 ; 잘 보셨습니다. 지으려니 부담스럽고, 안 지으려니 꺼림칙한 국사단, 정말 골치 아팠을 겁니다. 넣을 수도, 뺄 수도 없는 성격의 건물을 봉황문과 해탈문 사이에 앉힌 겁니다. 정말 절묘한 해법입니다. 불교와 관련이 없는 우리 민족의 토속신의 위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많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해탈문 안쪽은 불보살들의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천왕은 아직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입니다. 그래서 넓게 보면 일주문에서부터 가람은 시작되지만 좁혀서 보면 진정한 불국토는 해탈문부터입니다. 따라서 해인사는 봉황문부터 해탈문까지의 공간은 가람의 내부일 수도 있고, 바깥일 수도 있는 경계적 공간입니다. 국사단이 들어서기에 가장 적절한 위치지요.
MC ; 눈길 한 번 안주고 무심히 지나치게 마련인 생소한 이름의 국사단이 엄청난 갈등과 진통을 겪은 후에 건립되었다는 것이 세삼 놀랍습니다.
김 ; 그것만이 아닙니다. 일주문에서 바로 뻗은 길이 봉황문을 들어서면서 약간 왼쪽으로 꺾여 지면서 해탈문 계단으로 이어집니다. 봉황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는 국사단이 마치 정면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왼편으로 꺾여서 올라가는 계단 위에 길다란 해탈문이 균형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이 작은 공간 구조에 우리 민족의 조형미학이 고스란히 다 녹아 있습니다. 대칭과 비대칭, 균형과 조화, 정적과 역동성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이런 심오한 경지를 제쳐두고 우루루 몰려 와서 전각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듭니다.
MC ; 우리 조상들은 하찮은 것을 만들더라도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적재적소를 찾아 온갖 정성을 다 했다는 것을 국사단을 통해서 느끼겠습니다. 그런데 국사단 안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김 ; 국사단 건물은 105년 전인 1805년에 지었다고 합니다마는 단 자체는 해인사가 지어지기 전부터 있었을 것입니다. 사찰 안이지만 동네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산신제를 올리는 풍속이 최근까지 이어졌었다고 하거든요.
MC ; 산신제를 올렸다고 하면 건물 안에는 산신이 모셔져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요.
김 ; 예, 분명히 산신 그림이 모셔져 있습니다만 일반 사찰과는 양상이 다릅니다. 현대 한국화로 원근법과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수준 높은 산신탱화입니다. 중앙에는 창창한 소나무 앞 바위에 여신이 앉아 있고, 그 옆에 동남동녀가 사슴 한 쌍을 데리고 시중을 들고 있고, 그 오른편에 구름을 타고 천신이 내려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MC ; 일반 사찰의 산신각에는 소나무 밑에 흰 수염을 늘어뜨린 산신이 호랑이를 데리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여신과 사슴과 천신이 등장하고 있다니까 무언가 의미심장한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요.
김 ; 맞습니다. 보통 산신이라고 하면 백발노인의 남자 산신을 연상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에는 여자 산신도 많습니다. 지리산신도 여신이고, 경주 선도성모도 여신이고, 계룡산신도 여신이고 가야산신도 여신입니다. 이 그림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 건치연혁조를 근거로 해서 그린 것입니다. 동국여지승람은 한 500년 전 조선 성종 때 발간된 책인데 이 기사는 최치원이 썼다는 『석이정전』을 인용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최치원 선생이 이정 스님과 순응 스님의 전기를 기록 한 『석이정전』과 『석순응전』이 조선 중기까지는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요. 최치원 선생이 지었다는 석이정전을 인용한 동국여지승람에서 우리는 또 다른 가야국의 건국신화를 접할 수 있습니다.
MC : 국사단 산신 그림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책입니까?
김 ;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전 지역에 관한 지리책입니다. 세종 때 발간된 지리지에 변경사항을 보충해온 팔도지리지를 바탕으로 각 고을의 역사, 성씨, 풍속, 산천, 토산물, 학교, 사찰, 고적, 인물들을 조목별로 나누어 실었습니다. 성종 때 완성된 것에다 1530년 중종 때 보충해서 발간한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입니다. 조선 전기 사회와 지역 사정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지리서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MC ; 조선 중종 때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내용이라면 해인사의 창건과는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김 ; 언뜻 생각하면 그렇지요.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 건치연혁에는 신라 시대 최치원 선생이 쓰신 『석이정전』을 인용했다고 그 근거를 밝히고 있습니다. 최치원 선생이 이정 스님과 순응 스님의 전기를 기록한 「석이정전」과 「석순응전」이란 책이 동국여지승람이 쓰여 지던 조선시대까지 전해지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은 없어졌지요. 최치원 선생이 지었다는 『석이정전』을 단편적으로 인용한 동국여지승람에서 우리는 또 다른 가야국의 건국신화를 알 수 있습니다.
MC ; 그렇잖아도 국사단에 모셔진 가야산 여신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가야국 건국과의 관련.... 도대체 어떤 내용입니까?
김 ; 고령에 도읍했던 대가야는 시조 이진아시왕에서부터 마지막 도설지왕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야 지역 최고 성산인 가야산 산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가 하늘나라, 천신 이비가와 교감해서 두 아들을 둡니다. 큰 아들인 뇌질주일이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이고 둘째 아들 뇌질청예는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통 가야산신 감생설화라고 합니다.
MC ; 보통 6 개의 알에서 제일 먼저 깨어난 수로가 가락국의 왕이 되고 나머지가 차례로 5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김 ;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김수로왕 난생설화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김수로왕의 난생설화는 세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남방계 설화입니다. 구조와 내용이 혁거세 탄생설화 하고 비슷하지요. 자주색 밧줄에 묶여서 내려온 상자 속의 김수로의 금색 알이나 천마가 가지고 온 박혁거세의 자주색 알이 같고, 6촌장과 9한이 맞이하는 행위가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사료로서 가치가 좀 미흡하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하늘의 천신과 땅의 가야산신이 교감해서 왕을 낳았다는 대가야의 가야산신감생설화는 난생설화보다는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걸로 봐야 될 것 같습니다.
MC ; 천신과 가야산신이 만나 왕을 탄생시켰다는 것은 단군 건국신화와 같은 맥락으로 보이는데요.
김 ; 맞습니다.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를 맞이했다는 것은 하늘을 숭배하는 천신족과 땅을 성스럽게 여긴 지신족이 결합해서 대가야를 건국했다는 해석이 되겠습니다. 단군의 탄생과 일맥상통합니다. 다른 점은 단군신화에서는 천신인 환웅이 주도적 역할을 합니다만 여기서는 가야산신인 정견모주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MC ; 산신도 그림의 중앙에 여신이 크게 그려져 있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여신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김 ; 그렇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는 친영례가 아니라 신부가 신랑을 맞는 장가 풍습을 이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평화스런 정견모주의 나라에 문무백관을 거느린 천신 이비가가 나타난 장면입니다. 중앙의 정견모주는 머리 뒤에 불보살처럼 둥근 두광이 표시되어 있고 이비가의 무리는 한쪽 모퉁이에 크기도 작고 두광도 없습니다. 또 주민들은 이비가가 아닌 정견모주에게 산신제를 올렸습니다.
MC ;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의 둘째 아들 뇌질청예가 김해 금관가야를 세웠다는 건국신화를 근거로 해서 가야산 칠불봉 전설이 생성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김 ; 그렇습니다.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출가해서 도를 이루었다는 가야산 칠불봉 유래는 이런 바탕 위에서 성립되었을 겁니다. 칠불봉이 금관가야의 왕자들과 관련이 깊다면 나란히 솟아 있는 우두봉은 정견모주의 영역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우두봉은 그 모양새가 소머리를 닮아서라기보다는 소를 제물로 정견모주에게 산신제를 올린 장소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겁니다. 6.25직전까지 소를 희생으로 한 산신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견모주에게 산신제를 올렸다는 신단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사람들은 여신단이라고 합니다.
MC ; 정상 문제를 두고 성주군과 합천군이 말썽을 빚고 있다는 가야산의 칠불봉과 우두봉이 따지고 보니 외할머니와 외손자들의 사랑이 엉긴 장소이잖아요.
김 ; 그렇지요. 가야산을 산 전체로 봐야지 지자체별로 쪼개서 파악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몇 년 전 대보름에 참사가 일어난 화왕산만 두고 보더라도 이런 명산이 우리 군에 있다는 자부심으로 보듬고 가꿀 생각보다는 우리 군에 있으니까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소아병적인 발상이 불러일으킨 참사 아닙니까. 실제 농민들에겐 논두렁도 못 태우게 단속하는 관청이 명산에다 거대한 산불을 놓고서는 지역 축제라고 인기몰이를 하는 것은 뭔가 잘 못되어도 한참 잘 못되었다고 봅니다.
MC ; 여법하지 않은 발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준 가슴 아픈 교훈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지역의 가야에 정견모주 신화와 김수로왕의 건국신화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김 ; 역사적으로 풀면 이렇습니다. 4세기 말에 철과 소금으로 힘을 기른 김해의 금관가야가 왜와 백제와 연합해서 신라를 자주 침공합니다. 이것을 전기가야연맹이라고 하는데, 국가 존립 자체에 위기를 느낀 신라는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합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정예병 5만을 보내서 김해를 위시한 낙동강 일대를 초토화시켜요. 고구려의 파병으로 전기가야연맹이 해체되는데, 이게 서기 400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MC ; 광개토대왕의 군사파견으로 한반도 남부에 큰 변화가 있었겠습니다.
김 ; 판도가 새로 짜여 질 만큼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욱일승천하던 금관가야는 재기불능일 정도로 위축되고, 많은 제철기술자와 도자기 기술자들이 신라로, 백제로, 왜로 흩어집니다. 신라에서는 고구려에 인질로 가있던 실상이 돌아와서 고구려를 등에 업고 왕이 되었다가 눌지에게 시해되는 일이 일어나고, 충신 박제상이 외교활동을 벌입니다.
금관가야가 추축이 된 전기가야연맹이 무너지자 여러 가야가 다시 모이는데 이때의 맹주가 고령에 있었던 대가야입니다. 이것을 후기 가야연맹이라고 하는데, 정견모주의 신화가 정립된 것이 이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MC ; 그러니까 김수로왕의 6란설 건국신화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주도권을 잡았던 전기가야 연맹시대의 것이고 가야산신 정견모주와 이진아시왕 건국 신화는 고령의 대가야가 맹주국이었던 후기가야 연맹의 산물이라는 말씀이시지요.
김 ;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러니까 정견모주를 모신 국사단이 지금은 해인사 한쪽 모퉁이에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해인사 창건보다도 훨씬 먼저 인 대가야 시대의 유적입니다.
MC ; 그렇다면 해인사가 가야산신 정견모주을 모셨던 국사단 자리에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되는데요.
김 ; 그렇습니다. 보통 절 자리를 이야기 할 때 교리나, 신앙이나 풍수지리적인 측면을 많이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절터의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의 지원을 받거나 새로 일어난 종교가 퍼져나갈 때는 그 지역의 사람들이 믿는 토속 신앙의 성지에다 자기네들의 성전을 짓습니다. 자기네들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거지요. 이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고 시대의 선후가 다르지 않습니다. 해인사도 막강한 국가의 힘을 이용해서 이 지역 사람들이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국사단에다 절을 지은 거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MC ; 막강한 힘을 가진 해인사가 정견모주 사당을 탈취해서 절을 지으면서 그것을 없애지 않고 국사단이란 이름으로 남겨 두었을까요?
김 : 겨울 추위가 아무리 혹독해도 모든 새싹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이 지역 민중들의 저항이 그만큼 강했을 것이고, 또 원래 불교가 정복 종교가 아니라 포용의 종교이잖습니까. 이 지역 사람들의 신앙을 존중해서 절 안으로 끌어 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MC : 그러고 보니 불교가 전해지기 전부터 있었다는 정견모주감생설화가 어쩐지 분위기가 불교적이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김 ; 그럴 겁니다. 처음 듣는 사람들도 그렇게 낯설지 않게 들리는 것은 불교적 용어 때문일 겁니다. 정견이란 말 자체가 불교의 8정도 중의 하나 ‘정견’이잖습니까. 대가야에도 이미 불교가 들어와 있었고, 신라는 불교국가이었으니까 아무리 토속신앙이라 하더라도 불교적으로 변색되지 않고서는 존립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불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을 겁니다. 지금 토속신앙의 무당들이 불상을 모셔서 살아남듯이 신라시대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