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학문에 마음을 두고서 어린나이에 부여 지방의 수북정 부근에 강창(江倉)이 자온대 옆의 암석이 기괴함과 백강의 물결 보며. 옥호동에서 조룡대에 따라 내려가서 고란사‧ 낙화암‧ 부산을 지나 자온대 아래에 배를 매고 놀면서 영조시대의 문화융성기에 고란사에서 열공으로 학습을 계속하였다. 여기서 부여의 옥호동 풍경을 기록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금강 본류를 따라 부여․공주․부강 등의 주요 포구와 연결되는 물길(아래 지도상의 A권역), ② 논산천을 따라 분포하는 논산평야지대(B권역), 그리고 ③ 호남선 등의 철도를 따라 연결된 전주 중심의 만경평야지대(C권역) 등이 되었다. 그 대략적인 유통경로와 시장권이 있다.
이 무렵 주변 정치세력의 동향이 주목할 만하다. 노론의 거두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제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1606년 자신의 문인 최명룡 등 몇 사람이 강경포에 인접한 황산에 집을 짓고, 또한 율곡 이 이를 모시는 사당을 짓기로 함에 따라, 자신이 직접 땅을 살피고 나서 집을 지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당시에 건립한 정자가 임리정(臨履亭)이다. 더 나아가 1626년 김장생은 죽림서원(竹林書院)의 건립을 주도하였고, 1662년 (또는1663년)에는 그의 제자 송시열[(宋時烈), 1607~ 1689)}이 이곳에 2년 동안 머물면서 팔괘정(八掛亭)을 지었다. 서인계의 주축 인물들이 출입하고, 나아가 서원까지 건립하는 일은, 강경포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죽림서원의 건립은 서원 경영이 가능할 정도로 성장한 강경포구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강경읍 동흥리 47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활터[射亭] 덕유정도 관심의 대상이다. 덕유정은 1828년 이전에 무임(武任)과 상인들이 주도하여 건립한 정자인데, 1897년(광무 1)의 『완문(完文)』에는 ‘강경포의 덕유정이 수리시설[景雲洑]의 관리, 조정에 납부하는 세금, 서울 양반[京宰]들에게 내는 도지(賭地) 등의 공무(公務)도 맡아왔으며’, 또한 ‘계방으로서 감영과 공주부의 각 청(廳) 및 경무청(警務廳)에 관례적으로 1년에 2번씩 내는 일’ 또는 ‘산과 강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일과 감영 및 공주부의 말단 관리[校隸輩]가 왕래할 때 대접하는 일 또한 많다고 하면서, 포구의 세금과 구전(口錢)을 징수하여 쓰라고 하였다.’ 그 말미에 ‘김포면(金浦面)의 여각주인(旅閣主人), 상민(商民) 및 지역의 선박[土舡]과 물아래를 운항하는 선박[水下從舡] 또한 이에 따를 것’을 덧붙이고 있다. 전형적인 계방촌(契房村)의 모습이다. 계방촌이란 고을의 일정 경비를 부담하는 대신에 일정한 특권을 보장받는 마을을 가리킨다. 덕유정은 포구의 상인, 그리고 그 관리업무를 담당하는 무인들로 조직된 결사체였던 셈이다.
충청도와 경기도의 판소리였던 중고제의 전통 또한 금강 뱃길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고종 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했던 5명창 중의 한 사람인 김창룡(金昌龍, 1872~1935)은 장항 인근 성주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런데 그의 조부는 조선 순조 때의 판소리 명창인 김성옥(金成玉, 1795~1828)으로, 강경 옥녀봉 인근에서 태어나서 활동하였고, 아버지 김정근(金定根, 생몰 미상)은 강경리에서 출생하여 서천 횡산리(橫山里, 현 서천군 장항읍 성주3리 401번지 속칭 ‘빗그뫼’)에서 성장하였다. 금강 뱃길 주변에서 활동하던 명창의 가계였는데, 김창룡 대에 이르러 전국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겼던 것이다. 김창룡은 1903년 상경하여 원각사와 연흥사(延興社)에서 활동하였고, 1933년에는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과 함께 조선성악연구소를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면서 창극 공연에도 참여하였다. 김창룡의 아우 김창진(金昌鎭) 또한 당대의 명창이었으나, 가문의 법제를 어겼고, 이에 혼자서 수련하였는데, 그의 제자로는 박동진(朴東鎭)이 있다. 이러한 강경의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은 포구와 장시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번영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금강에서 조수의 영향은 현 부여군 규암리 인근까지 미쳤다. 그러나 바닷배는 보통 강경까지 운항하였다. 강경을 넘어서면 경사가 다소 급해질 뿐만 아니라, 곳곳에 여울이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첫 난관은 고다진(古多津, 현 부여군 세도면 반조원리 반조원나루) 인근의 수역이다.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물살이 험악해서 조금만 풍랑이 일어도 사람이 건너지 못하며, 조선시대부터 석성현과 임천군을 연결하기 위하여 항상 나룻배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곳을 경계로 상․하류가 다르다 하여 임천(林川)의 고다진(古多津)으로부터 금강 하구의 서천포(舒川浦)까지를 통칭 진포(鎭浦) 또는 진강(鎭江)이라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고다진을 넘어서면 부여에 이르기 전에 장암면 일원의 합여울이 있으며, 부여를 지난 후에는 청양군 청남면 왕진리 왕진 나루와 동강리 창강 나루 구간에 넓게 발달한 돌여울[石灘], 공주시 탄천면 대학리의 반여울[半灘] 등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합여울 주변에 다소 평탄면에 위치한 곳이 규암포구이다. 금천과 은산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돌출부에 위치하면서, 부여를 포함하여 홍산, 청양, 그리고 은산장 방면의 물산이 집결하였던 곳이 규암리의 ‘엿바위’[窺巖]포구다. 조선시대 지리지를 보면, 엿바위는 홍산과 부여의 조창이었다. 결국 조창지가 포구로 발전한 사례인 셈이다. 그런데 엿바위는 금강의 물줄기가 굽이도는 지점의 공격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엿바위 아래 물 깊이가 명주꾸리 한 타래가 들어갈 정도로 깊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실제로 1920년대 지형도를 보면 그 깊이가 10m에 이르고 있다. 엿바위의 위․아래편에 나루와 포구가 나뉘어 위치하고 있다. 상류의 거센 물살을 엿바위가 막아줄 뿐만 아니라, 강물이 불어도 깊은 만큼 물살이 급하지 않았으므로, 하류에서 올라온 짐배들이 정박할 곳은 엿바위의 아래쪽이었던 것이다.
한편 포구 이름의 유래가 된 엿바위는 백제시대 당나라 군사가 침공하는 것을 엿보던 병사가 사비성에 알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혹은 자온대(自溫臺)라고도 하는데, 『삼국유사』에는 백제의 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갈 때,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를 바라보며 절을 올리면, 돌이 스스로 따뜻해졌으므로[自煖] 돌석(㷝石)이라 한다고 하였고,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백제왕이 이 바위에서 놀면 스스로 따뜻해졌으므로 자온대(自溫臺)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지도서』 이후의 읍지에는 ‘의자왕이 이 바위에서 놀 때, 간신배들이 미리 숯불로 데워서 왕이 도착하면 스스로 따뜻해졌으므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윤색되고 있다.
엿바위에는 부여의 해창(海倉)이 있었다. 『충청도읍지』에는 해창에 속한 건물로 좌기청(坐起廳) 6칸이 있는데, 1928년 『부여지』에는 청풍정(淸風亭)이 곧 좌기청이라고 하면서 지금은 폐지되었다고 하고 있다. 정하언(鄭夏彦, 1702~1769)공이 지은 「청풍정기」에는 자신의 권유에 따라 건립하였다고 하였으니, 건축 연대는 1700년대 중반이 되는 셈이다. 임영휴의 「남유록(南遊錄)」에서는 “또 청풍정도 있는데, 각 고을에서 세곡을 바칠 때 수령들이 앉아서 일을 보는 곳이다. 창고가 널찍하게 늘어서고 곡식이 흘러 넘쳤으며, 주막과 여관[杏壚柳店]들이 좌우에 늘어섰다.”고 하였다. 1800년대 후반의 규암포구의 번성함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청풍정 윗편에는 인조반정에 참여를 완곡하게 거절한 후에 낙향한 순천김씨 김흥국(金興國, 1557~1623)이 건립한 수북정(水北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00호)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곳은 김장생, 신흠, 황신(黃愼, 1560∼1617) 등의 큰 선비들과 교유하였던 곳이다.
또한 자온대는 할아버지당산이며, 동시에 백마강의 용왕제를 모시는 곳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지금은 할아버지 산신제를 수북정에서 지내는데, 그 모습이 이채롭다. 할아버지 당산과 짝을 이루는 할머니 당산은 수북정에서 서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속칭 ‘봉구재’이다. 현재 할아버지 산신제에는 부여군수를 비롯한 기관장들이 참여하면서, 주민들은 유교식 제례의 면모가 한층 강화되었다고 지적한다. 반면에 할머니 산신제와 거리제는 무녀가 주관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이곳의 거리제를 주관하였던 무녀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은산별신제’의 단골이었던 고(故) 이어린년(1893년생)이었다. 이어린년이 주관하던 당시 포구가 있었던 속칭 ‘작은 배턱’과 나루터였던 속칭 ‘큰 배턱’으로 가는 길목 등에서 거리굿을 하면서 동네 잔치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산신제보존위원회에서는 당산제의 연원을 백제시대의 부산(浮山)과 연관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위에서 살핀 정하언 공의 글에는 부산을 나부산(羅浮山)이라 하고 있다. 도교와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부산은 중국 광동성(廣東省) 증성현(增城縣)에 있는 산으로, 진(晉)나라의 갈홍(葛洪)이 신선이 되었다고 전하는 도교의 명산 중의 한곳으로 꼽히는 곳이다. 현재 부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백마강 인근에 삼산(三山)이 있다고 한다. 삼산이란, 오산(烏山 또는 吳山), 일산(日山, 錦城山의 다른 이름), 그리고 부산을 일컫는다. 그런데 부산은 원래 청주에 있었던 산이었으나, 홍수에 떠내려오다가 호녀(虎女)의 고함소리에 깨어 낙화암 앞에 멈췄다고 한다. 이에 청주에서 부산의 산신령에게 애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산과 오산의 산신령과 헤어지기 아쉬워 백마강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신인(神人)들이 산 위에 살면서 서로 날아서 왕래함이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산에는 1719년에 건립된 부산서원(浮山書院)이 있다. 김집(金集, 1574~1656)과 이경여(李敬輿, 1585~1657)를 배향하는 곳인데, 이경여의 경우 영의정을 역임한 후 청나라의 간섭으로 인하여 부여로 낙향한 인물이다. 그는 낙향한 후 북벌에 관련된 상소를 올렸는데, 이에 임금이 애통함을 담은 글을 내렸고, 뒤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至痛在心 日暮途遠(호란의 치욕을 씻지 못하는 비통함이 남아 있는데, 날은 저물고 길은 멀기만 하다)”이라는 글을 그의 아들 이민서에게 전하였다. 손자 이이명은 1700년(숙종 26) 송시열의 글을 바위에 새기고 건물을 세워 대재각이라 하였다. 이 유적은 ‘부산 각서석(浮山 刻書石, 규암면 진변리 산 3-1번지)’이라는 이름으로 충남의 유형문화재 47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