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2월 18일,
인촌 김성수 별세
1) 생애 초기
김성수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 부안면 인촌리에서 유학자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으로
출생했다. 당시 군수를 역임한 낙재 김요협(金堯莢)의 둘째 아들 김경중(金暻中)과 장흥 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가 되었다.
1903년 13세에 김성수는 고정주(高鼎柱)의 딸이며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은 고광석(高光錫)과
결혼하였다. 1906년 장인 고정주가 세운 창흥의숙에 입학하였다. 창흥의숙에 수학하면서 김성수는
오랫동안 의기투합할 동지인 송진우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송진우는 조선총독부와 협상하는 일과,
김성수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자신이 대신 나서서 처벌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등 그를 앞장서서
도와주었다.
김성수는 무식함과 무지함이 조선의 멸망의 원인이라 확신하고 먼저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몽하겠다고 다짐했다. 1910년 4월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한 뒤 이듬해 같은 대학
정경학부로 진학했다가 1914년 7월에 졸업했다. 유학시절 당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 무저항운동인 간디이즘에 감격하여, 생활에 있어서는 간디이즘을 신조로 하여 물품과 물,
전기 등을 절약했고 나를 위한 소비를 최소한도 줄이고 그 남은 것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희사하였다. 유학시절 당시 인촌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유학생 50명을 포함 730명에 이른다고 한다.
일본 유학시절의 김성수(왼쪽 앉은 이)와 김연수.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간 김성수는 법적으로는 김
연수의 사촌 형이었다.
인촌 김성수의 영원한 벗 송진우와 함께(우), 중앙 사진은 서대문 형무소 수감 당시 송진우.
2) 계몽운동 및 학교 설립
1914년말 김성수는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등 일본 유학시절 동창들과 함께 교육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白山學敎)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고 학교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허가를 해주지 않아 좌절 당하였다. 이러던 중에 1915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앙학교로부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김성수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해 학교장을 지냈다. 이때 김성수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 사람들에게 식민통치를 당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며, 알려면 배워야 한다. 그
래야만이 자주독립을 할 수 있다. 지금 유행하는 학문이 계속 빛을 보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20년,
30년 후에는 바뀔 수가 있다. 문학보다는 과학에 관심을 가지라.'고 학생들에게 훈육하였다.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 설립
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1932년 3월에는 자금난에 빠졌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3월 26일 인수를 완료하고 보성전문학교
재단 주무이사에 취임하였다. 그 해 6월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이용익이 창설한 이래 계속 재정난을 겪다가 손병희가 맡았으나 여의치 못해 그가 인수하게
된 것이며, 1946년 종합대학 고려대학로 승격하여 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되었다.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 과목을 의무,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의 온상이자 불령선인의 양성소, 불순언론으로
지목되어 보성전문학교와 동아일보가 총독부의 압력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자 그는 한강 철교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창씨개명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창씨를 거절했다. 학생들의 창씨개명 거부와 학도병 징집 거부가 이어졌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대로 행동하라며 이들의 창씨 거부와 학도병 징집 회피, 징집
거부를 방관하였다. 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로 격하
당하였으나, 1945년 9월 광복을 맞아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하였다.
1937년 이화여전 재단 이사(뒤의 재단법인 이화학원 이사)에 취임하였고, 1939년에는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초창기 보성전문
1937년 당시 보성전문
고려대학교의 이모저모
3) 기업 활동과 민족자본 육성
식민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했던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웠다. 김성수는 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 하였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였다. 1918년에는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중앙상공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국내 의류업체들이 일본의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일본 면직물에 의존하여 제품을 생산,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하자, 1918년부터 중앙상공주식회사를 통해 직접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상황이 어려워서 늘 사재를 털어서 보충해 나가는 중에 1926년
이후에 동생 김연수가 경영에 능하고 재능이 있어서 성장시켰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경성방직공장
경성 방직 주식 회사의 국산품 애용 선전 광고.
4) 독립운동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되어 송진우에게 중앙학교 학교장직을 넘기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김성수는 자신의 거처를 독립지사들에게 제공, 이승훈, 한용운,
최남선, 최린 등이 그의 자택에서 3·1 운동을 준비했다. 3.1운동 준비 및 참여가 밀정의 밀고로
3·1운동 직후 송진우가 투옥되고 김성수도 체포되었다. 일경의 심문 때 송진우는 인촌은 투옥을
피해야만 교육사업을 비롯한 더 큰 민족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고 김성수를 설득하고 형문 때
송진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김성수의 관련을 적극 부인하여 결국 송진우만 1년 7개월 형을 살고
풀려났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출범 이후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익명으로 임정에 후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였다.
그의 자금송금은 후일 안창호, 김구 등이 알게 되었다. 익명으로 임시정부에서 밀파한 독립단(獨立團)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 중, 한번은 그의 서울 계동 자택에 찾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였다. 그는
대답 없이 자신의 금고문을 열고 속을 뒤적거리며 일부러 객에게 알린 뒤, 자신은 소변보고 온다 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독립단원들은 품에 안을 만큼의 자금을 품은 뒤 사라졌다.
김성수는 동아일보 사장이던 고하를 통해 김좌진 장군에게 3백 ~ 4백 명 규모였던 독립군의 무기구매와
훈련 등에 쓰도록 비밀리에 황소 백 마리를 살 수 있는 1만 원 정도씩 네 차례나 군자금을 보내주었다.
1937년 안창호가 수감되자 이광수의 호소로 안창호의 보석금을 마련하여 지불하기도 했다.
안창호는 석방되었으나 곧 경성대학병원에 입원했고, 김성수는 그의 치료비까지 부담했지만 그는 차도 없이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5) 언론 활동
'민족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는 1920년 4월 1일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했다.
한때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약했고 한겨레 신문을 창간했던 언론인 송건호는 당시 발기인 대표였던 그가
20대의 청년이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평가하였다. 송진우 출감 후 김성수는 그와 함께 동아일보를
경영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와 손잡고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1920년 4월 15일 조선총독부는 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직후의 동아일보에 판매와 배포를 금지처분 하였으나
김성수는 중단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 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1930년부터 농촌 계몽 및 문맹자 교화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고, 1931년부터는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브나로드 운동을 추진하였다.
193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의 지방판 조간 2면 및 8월 25일자 2면에 1936년 하계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우승 사실을 보도하면서 일본 제국의 국기를 삭제한 손기정의 사진을
게재(일장기 말소사건) 하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동아일보는 창간이래 4번째 무기정간을 당한다.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복간되었지만, 이를 전후로 일제강점기 말기 전시체제에 '어용 기관지'로
전락해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 글을 여러 번 올렸다는 흑역사를 남기게 된다.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좌)와 당시 일장기가 지워진 손기정 사진(우)
6) 친일 활동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 글이 여러 번 올라왔다. 5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김성수는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및 연설을 하였고(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9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시국강연에 나섰다. 1943년~1945년 기간 동안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잡지 《춘추》등에 학병제, 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
7) 해방 후 활동
1945년 9월, 미군정청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1월 동아일보 사장에 다시 취임했고,
오랜 친구인 송진우의 사망으로 공백이 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2월에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1947년 2월에는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했다. 해방정국 동안 김성수는 한민당을
이끌며 이승만과 함께 '반공, 반탁운동', '단독정부 수립운동'에 주도적으로 활동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2월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7월
동아일보 고문이 되었다. 1951년 6월 대한민국 제 2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어 1952년 5월까지 활동했다.
부통령 재임기간 동안 그는 독재정권 장기화를 막고자 많은 노력을 했었고 구 악습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도
많이 했었다. 부통령 임기 만료직전에 1952년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위라며,
이승만 정권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남은 임기 때려 치고 곧바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호헌동지회를 결성해 범 야당 세력을 결성하여 반(反)독재 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1954년부터
뇌질환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호헌동지회를 기반으로 '민주당'이 1955년 9월에 결성되기 이전인
1955년 2월 18일에 심근염, 뇌일혈, 위장병 등의 합병증으로 종로구 계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1955년 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국민장
8) 사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았다.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되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의 지도자로서 살아남은 자의 굴욕을 삼키면서 우선 당장은 아니지만 독립의
서광을 멀리 내다보고 인내하는 지성인의 고뇌로 혼란의 시대를 이끌어간 지도자에게 단순한 단어
"친일파"라는 용어로 규정짓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