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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1-7) 아구스도의 영으로 천하가 호적할 때에
누가복음 강해 (1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7)
때가 차매...
누가는 1장에서 마리아가 천사에게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고지를 받은 일과, 주님의 오심을 이스라엘에 알릴 요한의 출생에 관해서 설명했습니다. 이제 2장에선 예수님의 출생과 유년기의 성장에 관해서 기록합니다. 네 복음서 중에 마태와 누가만 예수님의 탄생 과정을 밝히고 있는데, 서로 강조하는 차원이 조금 다릅니다.
마태는 동방박사가 방문하여 아기 예수를 경배한 일과 헤롯 대왕이 자기 왕권의 경쟁자가 될 예수를 제거하려고 유아들을 살해한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페르시아의 현자들까지 숭배하는 만왕의 왕으로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로부터는 배척당했다는 사실을 시사한 것입니다. 반면에 '누가'는 마구간에서 탄생한 예수가 천사들의 찬송과 목자들의 경배를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주님이 아주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나 영계의 주인일 뿐 아니라, 유대 사회에서 소외 멸시 받는 자들을 치유 구원하시는 메시아가 될 것이라고 예표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출생을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적인 맥락으로 해석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갈4:4) 그 탄생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때가 차매’라고 말했으므로 예수님의 오심뿐만 아니라 ‘여자에게서’와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도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자에게서 나게 했다는 것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사7:14)이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넘어서는 더 근본적인 뜻이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거역 타락함으로써 그 후손 전부가 원죄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만든 원흉인 사탄에게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창3:15) ‘여자의 후손’이라고 지칭한 것은 이브가 타락의 시발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남자와 관계를 맺지 않은 동정녀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메시아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한다’라고 합니다. 율법을 준행하며 선행을 해야 구원받는다고 믿는 유대인과 인류를 아무 공로 없어도 주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으로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그 은혜를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아들의 명분을 얻는다고,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말한 여자에게서 메시아가 태어나는 구원의 때를, 누가는 지금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게 할 때와 일치시켰습니다. 주님이 우연히 이때 출생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설명한 그 의미대로 십자가 구원을 실현하려고 하나님이 정해놓은 때가 차매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관에 방이 없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절대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반드시 그때, 그 장소에서, 그런 모습으로 태어나야 했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탄생 장소와 모습에 관해선 지금껏 많이 다뤄져 왔으므로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서 아이를 낳자, 구유에 뉘었다고 했는데(7절) 그 장소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고대의 여관에는 건물 안에 혹은 부속 건물로 가축 축사가 붙어 있는데, 아마도 그런 곳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강보에 싼 것은 갓난아기를 따뜻하게 보존하면서, 아기가 자기 손톱으로 자기 얼굴을 손상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만삭의 여인이 곧 출산할 판인데도 여관방을 양보해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심성이 너무나 완악해져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이 나중에 “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마8:20) 당신의 사역에 관해서 하신 말씀을 태어나면서부터 실현해 보인 셈입니다. 사도 요한도 그래서 세상을 구원할 참 빛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요1:9-11)
예수님의 부모가 나사렛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베들레헴까지 가서 호적한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고대에선 다 그러하듯이 로마의 인구 조사도 군대에 징집할 남자를 대상으로 이뤄졌는데 초기에는 유대인들을 제외했습니다. 로마가 그들의 반골적인 저항 정신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아구스도가 세상을 평정하여 전쟁을 치를 필요가 없어지자, 세금을 부과할 목적으로 유대인들에게도 호적하도록 명했습니다.
로마는 현재의 거주지에서 호적을 하나, 유대인들은 가나안 정복 후에 열두 지파에게 공평하게 땅을 분배했던 하나님의 정신을 살려서 선조가 살던 고향 땅에서 호적을 했습니다. 아구스도가 반드시 고향에서 호적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 것 같지 않은데도, 유대인들은 로마에 항거하며 자기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살리려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다윗 가문이므로 유대 땅의 베들레헴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나아가 여자는 굳이 호적하러 가지 않아도 되는데 요셉이 만삭이 된 아내를 데리고 갔습니다. 나사렛은 인구가 3-4백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고서 석 달간 엘리사벳의 집에 거한 후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약혼자 요셉에게 언제 자신의 임신 사실을 통보했는지 몰라도, 요셉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마리아가 음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했으므로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지시를 이미 받았습니다. (마1:20, 21)
약혼 기간 일 년이 지나야 정식 결혼식을 올리고 동거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는데, 요셉은 마리아의 입장을 고려해 임신 사실을 통보받자 곧바로 데려와서 함께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녀의 배가 금방 불러왔을 것이므로 주변에서 결혼 관습을 어기고 혼전 관계를 맺었다고 수군댔을 것입니다. 요셉이 그녀가 받은 스트레스를 감해 주려고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아들을 출생한 것은 당시의 현실적 사정과 로마의 정치적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울이 때가 차매라고 말했듯이, 오래전부터 모든 상황을 주관 섭리하셔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라는 (미5:2) 미가의 예언을 성취한 것입니다.
아구스도가 복음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류 역사는 물론이고 개인의 인생사까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권능의 손길이 주관 통치하십니다. 아기 예수를 아구스도가 로마 황제일 때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아구스도 개인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추적해 봐야 합니다.
아구스도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로 줄리어스 시저의 외손자였는데, 나중에 양아들로 입양되어서 그의 후계자로 지명됩니다. 기원전 44년에 시저가 암살된 후에 오랫동안 권력 투쟁이 벌어졌으나 그가 최종 승리자가 됩니다. 특별히 기원전 31년에 가장 강력한 라이벌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과 치른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제국 전체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쥐게 됩니다. 기원전 29년에 공화정을 폐지하고 황제로 즉위하여서 주후 14년, 76세에 죽을 때까지 로마제국의 황금기(Pax Romana)를 열었습니다.
그는 북부 게르만 족속과의 지엽적인 전투를 제외하고는 당시의 지중해 세계를 정복함으로써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 시대를 열었습니다. 애굽의 풍부한 곡창 지대를 확보하여 고질적인 식량 문제를 해결했고, 각종 전투에서 승리하며 취득한 수많은 노예로 인해서 로마 시민들의 생활이 여유로워졌습니다. 전쟁을 잘 치르려고 전차가 다닐 수 있는 돌로 포장한 도로를 사통팔달로 뚫어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속담까지 생겼습니다. 그 도로 곳곳에 로마 경비대를 두어서 강도의 위협을 크게 감소시켰습니다. 기타 행정과 법률 제도들을 효율적으로 정비했고 각 식민지에는 고유의 종교를 비롯한 자치적인 통치를 허락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비록 많은 박해와 위험을 겪었어도 세 번이나 지중해 연안 곳곳에 비교적 편안하게 선교 여행을 하면서 초대 교회들을 세우는 데에 사실상 아구스도가 크게 기여한 셈입니다.
남자들이 전쟁에 끌려가서 일찍 죽을 염려를 없앴고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로마인은 물론 식민지 백성들로부터도 가장 존경받는 왕이었습니다. 최초로 황제(Emperor)라는 칭호를 받았고, ‘지극히 높임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지닌 ‘아구스도’라는 존칭까지 얻었습니다. 그 외에도 신과 인간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은 대제사장이라는 뜻으로 ‘폰티펙스 맥시무스’라고도 불렸고, 백성들에게 좋은 소식을 갖다주는 자라고 해서 ‘유앙겔리온’(복음)이라는 별칭까지 생겼습니다. 아마도 그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치르면서 승리했다는 보고가 로마에 전해질 때마다 백성들이 기뻐했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을 것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이순신 장군과 세종 대왕을 합친 인물인 셈입니다.
요컨대 백성들로 평온한 가운데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게 해주었기에, 그는 거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당시 세계에선 현실적인 구세주였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예수님은 너무나 연약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자 통치자로서 만왕의 왕이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런데도 누가가 설명한 대로 너무나 누추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지막에도 화려하게 장식한 백마를 타고서 호위 군대를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어린 나귀를 탄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너무 수치스럽고 고통이 끔찍하다고 해서 로마 시민은 처형하지 않는 십자가에 달려서 처참하게 운명하셨습니다.
인생의 임계점
이제 아구스도가 호적할 때에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명백해졌습니다. 아무리 현실 삶이 풍요하거나, 최소한 아무 문제 없이 평안해도 인생이 절대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차 당신의 사역으로 실현해 보일 그 진리를 아기 예수가 비천한 말 구유에 눕혀지면서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터트린 울음소리로 온 천하에 미리 선포한 셈입니다.
아구스도가 쌓은 업적을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폄하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전쟁을 없애고 평화 시대를 연 것은 크게 사줄 만하며 또 로마법에 반영한 덕목들은 지금까지도 서구 문화에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불신자 가운데 진심으로 이웃을 섬기고 인간 사회에 큰 공헌을 한 자가 많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도적같이 악한 일이 아닌 이상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이나 처해 있는 여건 모두를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거룩한 것이므로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종교적 믿음과 상관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성적으로 현실 삶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면서 자기 인생에 의미와 가치를 채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훈련하여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서 수행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생이 절대로 자신이 생각 의도 계획한 대로 무사 평탄하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구스도처럼 탁월한 지혜를 갖춘 위에 세상의 최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라도 반드시 그 모든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좌절과 실패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피폐해지지 않으면 정서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절망에 빠져서 좀체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지금껏 자기가 가진 풍부한 소유, 이뤄낸 엄청난 성과, 그래서 주변에서 칭송하고 부러워하는 모든 것이 전부 허무해지고 심지어 귀찮기만 할 때가 생깁니다. 평생을 큰 고난 없이 평탄하게 보낸 사람도 늙고 병들어서 죽게 마련입니다. 고통이 점점 심해지면서 한 걸음씩 죽음으로 끌려 들어갈 때면 사후 심판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다가옵니다.
모든 인생에는 완전한 무력감과 무지함에 함몰되어서 손가락도 까닥할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는 때가 한두 번씩 있게 마련입니다. 지극히 낙천적이라 아무 고민 없이 평생을 살았어도 죽음은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런 한계 상황에 갇히면 반드시 자신의 지난 인생과 자기라는 존재에 대한 의미를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전에 왜 이 땅에서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뼈 빠지게 살아야만 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완전히 벌거벗긴 채 황량한 광야에 자기 혼자만 서 있게 됩니다. 온 사방을 둘러봐도 그곳에서 헤어 나오도록 도와줄 사람은 물론이고 그 의미와 이유를 가르쳐 줄 자도 없습니다.
바꿔 말해서 인간은 다른 동식물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닌 모든 피조물에겐 이 땅에서의 생존과 번식이라는 두 가지 절대적 법칙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도 생존과 번식은 아주 중요한 과제이지만, 그것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에 빈 공간이 따로 있습니다. 최소한 죽음이라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장벽은 반드시 무너트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그냥 짐승 수준으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썩어 없어질 인간
미국 사대 프로 스포츠인 미식축구, 농구, 야구, 아이스하키의 선수들은 연봉이 엄청납니다. 일 년 내내 리그 우승을 위해서 사력을 다하고 우승하면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기쁨으로 파티를 엽니다. 당장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구동성으로 내일 디즈니랜드에 가서 실컷 놀겠다고 대답하는 것이 일종의 문화적 관례가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따지면 평범한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하는 세상 최고의 큰 성취를 이룬 기쁨도 그냥 하루만 즐기면 끝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현실적 풍요나 세상에서 출세만으로는 온전한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없습니다. 반드시 내가 왜 이 땅에 무엇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느냐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아무 목적 없이 그냥 버려진 존재인가, 아니면 특별한 목적이 있는지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인간은 출생과 죽음을 자기가 소망, 의도, 계획하여 스스로 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도록 제삼자가 계획하고서 제삼자가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육신적인 부모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부모 또한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이 땅에 살게 된 것입니다.
아구스도가 사람들의 기본적인 의식주를 보장해 준 것이 좋은 소식이긴 했어도 생존과 번식의 문제만 해결한 것입니다. 여전히 인간은 짐승 수준에, 최고로 잘 봐주어야 만물의 영장 차원에 머무른 것입니다. 물론 아구스도 황제 개인은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고 평안하게 만들었다고 자기 인생에서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개인적으로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 해답을 얻어야만 합니다.
현실 세계의 주인이었던 그도 출생과 죽음을 자기가 택한 것이 아니며, 인생을 허락해 준 제삼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을 찾고 만나지 못하면 아무 목적 없이 그냥 이 땅에 버려진 인생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화학적 원소 기호로 해체되고 조작할 수 있는 물질에 불과합니다. 콜로세움에서 로마 시민들의 유흥을 위해서 황제 앞에서 격렬하게 싸우다 죽는 노예 검투사와 화려한 왕궁에서 모든 사치와 쾌락을 누린 아구스도 황제의 결국은 똑같이 썩어 없어지는 해골입니다.
아구스도만큼 부와 권력을 이룬 솔로몬은 인생에 대해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고 한탄했습니다. (전1:3.4) 누구나 해 아래에 살면서 몇 번은 마주치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면 ‘될 대로 돼라.’는 식의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렇게 살아선 무슨 일을 해도 허무하니까 사치와 유흥으로 해결해 보려 하지만, 우리도 불신자 시절에 경험했듯이 더 허무해집니다. 솔로몬도 엄청난 업적을 이뤘으나 결국은 다 썩어 없어지고 더 중요하게는 정작 본인은 자기가 이뤄 놓은 것들을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한탄만으로 그치면 전도서는 염세주의 철학 교과서가 됩니다. 솔로몬은 맨 마지막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전12; 12라고 결결론지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 인생을 그 시대에 그 여건에서 그런 모습으로 살살게 하신분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로 돌아가서 자기 인생을 그분에게 온전히 의탁하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로 인간답게 살 수 없다고, 세상 최고 영화를 누려본솔로몬이 고백한 것입니다. 초등학생도 행복은 성적순이아니라고 외치듯이 실은 누구나 돈으로 행복을 절대 살 수 없다고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생의 참 주인인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있는 것이 인간의 치명적이며 너무나도 어리석은 죄입니다.
들꽃과 솔로몬의 영광
인간이 자기를 만들어 생존을 책임져 주는 존재를 알지 못하고서 또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고서 어떻게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자동차가 운전자 없이 스스로 운전하겠다고 나서는 꼴입니다. 누가는 예수 탄생을 통해 인생의 첫째가는 이 진리를 계시한 것입니다. 아구스도가 절대로 복음은 물론 왕이 될 수 없으며 참 복음이자 만 왕의 왕은 예수님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지 실제 당신의 삶과 사역으로 본을 보이려고 오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첫째가는 이 진리를 직접 쉽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6:28, 29)
들꽃은 하나님이 창조 운행하시는 법칙을 온전히 따릅니다. 자연은 그분을 거역하는 일이 아예 없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반면에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 대적하면서 솔로몬왕처럼 화려하게 살려고 평생 온갖 수고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등진 채 살다가 죽어서 지옥에 가면 그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시드는 들꽃보다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솔로몬의 겉치레 영광만 추구하는 자들과는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는 것이 풍요해지면 자기라는 존재와 인생도 풍요해지리라 믿습니다. 현실 세상을 주도하는 아구스도 황제 같은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칭송하다 못해 숭배까지 합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현실 삶의 부족분을 채워 넣으면서도, 때로는 자기들이 쓰고 남은 여유분을 가지고 가난한 자에게 구제도 하니까 스스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자신이 천애의 고아로 세상에 의미 없이 던져진 진짜 거지인 줄은 상상조차 못 합니다. 자기가 세상의 최고이자 전부인지라 다른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벌거벗긴 채 혼자서 사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적이 없으니까 영원한 구원은 안중에 없습니다.
비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대신에 자신의 가진 것과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절망의 장벽 안에 갇힌 자들을 먼저 찾아가서 만나 주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너희는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 세상을 지으시고 거룩하게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비록 너희 죄가 죽음의 형벌을 면할 길이 없지만, 너희 스스로는 그 죄를 도저히 깨끗하게 할 수 없으므로,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어서 그 죄를 사해주는 대신에, 너희를 사랑으로 품어주겠다고,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로서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바울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서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9,20)라고 선포했습니다. 성자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모든 고통, 슬픔, 상처, 억울함, 실패, 죄악 등을 짊어지고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실만큼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못하면 인생에서 절대로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생이 허무해지는 유일한 이유는 재물의 부족도 아니요 권세의 결핍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이 그렇게 지어주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구스도나 솔로몬 이상으로 화려하게 치장해 본들 텅 비워진자기 내면이 결코 채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고 있으면서도 완악하게 그렇지 않은 양 우기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지금 불신자를 탓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신자는 영생, 즉 인생의 해답을 이미 거머쥔 자입니다. 잘 죽을 준비가 끝났으므로 죽음 이후를 걱정하며 불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신자의 삶은 천국 영생으로 가는 직선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만 구원받았기에 자기를 높이려는 본성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해 아래에서 살아가는 현실 삶이 헛되고 헛되지 않으려면, 솔로몬이 결론 내린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대로 따르는 길뿐입니다.
혹시 지금 신자임에도 세상에서 황제처럼 살아보려고 하나님의 능력만 추구하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지 않고서 이방인처럼 먹고 마실 것을 채워달라는 기도만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들꽃이나 참새보다 못한 인생이라고 예수님이 야단쳤습니다. 예수님이 아구스도 황제 때에 태어났어야만 하는 이유와 뜻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골고다의 십자가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베들레헴의 구유도 고대 이스라엘의 동화로 그칠 뿐입니다.
그 반대로 혹시 지금 예수를 잘 믿고 신실하게 살고 있는데도 사방이 완전히 막혀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절망에 빠져 있습니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그 자녀 되는 신자에게 일부러 고난을 주어서 괴롭게 하실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매를 드는 것은 훈육의 목적 하나뿐이고, 또 훈육은 오직 자식이 잘되라는 간절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생의 경험과 지혜가 아무래도 자식보다 많은 아버지의 훈육은 항상 자식에게 유익이고 결국은 자식을 선한 길로 가도록 인도해 줍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이럴진대 천하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고난을 주신 것은 절대 아니며 신자 본인의 잘못이나 주변 사악한 세력의 훼방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실 뿐인데, 사방이 막힌 것은 하늘에서 비춰 내려오는 참 빛을 보게 하려는 축복의 뜻입니다. 신자더러 자신의 무력함 무지함 완악함을 다시 확인하고서 당신만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아구스도와 예수님 중에 너의 진짜 왕이자 진짜 복음이 어느 쪽인지 분명히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잠시 잊고 있었거나, 세상의 유혹에 한 눈이 팔렸거나, 심지어 자기 죄성에 이끌려 스스로 죄를 저질렀을지라도, 자신을 점검해 보고서 십자가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자기 인생에서 최고 좋은 소식이라고 온전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영적 시체였다가 성령의 간섭으로 하늘의 영광에 대해서 눈이 열리고 귀가 뚫린 참 생명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결말이 천국의 더 아름다운 장막에 있다는 정답을 손에 쥐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으로 바꾸자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 39)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진리, 즉 모든 인생이 반드시 찾아서 따라야 할 정답을 우리에게 쥐여주기 위해서 아기 예수는 아구스도 황제의 때에 태어나 비천한 말 구유에 눕혀진 것입니다.
(11/23/2025)
(P. S.)
누가는 아구스도가 호적한 때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되었을 때라고 밝혔는데(2:2), 이에 대해서 한동안 세속 역사의 기록이 없다고 그 신빙성을 문제 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오히려 성경 기록이 세속 역사의 오류를 바로 잡아 주었습니다. 그에 대해선 이전에 한 번 다룬 적이 있어서 이 설교에선 뺐습니다. 따라서 그 문제를 다룬 아래의 설교도 꼭 함께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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