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6회 2016.4.12.MP3
장소: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교학대학 1층 세미나실 일시: 2016년 4월 12일(화,오후 1시 15분~ ) 강사: 곽준(묘원 법사님)
교재 : 사념처 명상의 세계(도서출판 행복한숲 刊)
제7장
사념처(四念處) 수행
1. 사념처란 무엇인가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 방법을 자세하게 기록한 경전을 빨리어로 ‘사띠빠타나 숫따(satipaṭṭhāna sutta)’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경’이라는 뜻입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한다는 것은 몸, 마음, 느낌, 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확고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사념처(四念處)라고 합니다. 사념처를 자세하게 기록한 경전을 대념처경(大念處經)이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념처경을 바탕으로 출세간을 지향하는 수행 방법입니다.
대념처경에는 깨달음으로 가는 위빠사나 수행의 모든 방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대념처경에 있는 사념처 수행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이 방법은 고따마 붓다께서만 하신 수행법이 아니고 과거의 모든 붓다도 똑같이 실천하신 수행법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오실 붓다도 똑같이 이 법으로 깨달음을 얻습니다.
인간이 가진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세월에 상관없이 하나의 진실한 법이 통용됩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은 특정한 종교인의 것이 아니고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법을 궁극의 법이라고 하며 또 최승의법(最勝義法)이라고도 합니다.
궁극의 법은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는 마지막에 이른 법이라는 뜻입니다. 최고의 지혜를 얻은 붓다에 의해서 밝혀진 이 법은 사실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대에서나 사념처의 가르침에 충실할 때만이 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기서 벗어나면 벗어난 만큼 왜곡되기 마련이라서 진리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실재인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모두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의 대상이 법입니다. 그러므로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완전한 형태의 수행이 성립됩니다.
일반적으로 몸과 마음이 있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에 그치지 않고 느낌과 법을 넣어 네 가지를 알아차리도록 한 것은 깨달음 얻기 위한 완전한 수행의 체계를 이루도록 한 것입니다. 몸과 마음에 있는 느낌은 갈애를 일으키는 직접원인입니다.
그래서 느낌과 갈애 사이에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느낌의 중요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느낌은 무상, 고, 무아를 직접 알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인간이 아는 것은 모두 느낌으로 알기 때문에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없이는 결코 깨달음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느낌을 포함시켜 구체적인 수행체계를 이루었습니다. 무엇보다 법을 빼놓고서는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몸과 느낌과 마음을 하나의 법으로 알아차리지 않으면 수행이 시작되지 못하며 깨달음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수행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법은 알아차릴 대상이며 이 대상이 진리의 법으로 바뀝니다. 몸과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알아차렸을 때만이 지혜가 나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의 조화로써만이 질긴 괴로움의 사슬을 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념처 수행이 성립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은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번뇌를 소멸시키고 열반에 이르게 하는 가장 완벽한 수행 방법입니다. 하지만 2500년의 세월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마련이고, 문화도 변하고, 사상도 변하고, 세상의 가치도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때로는 시대에 따라 진리에 대한 가치도 다르게 평가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시대를 뛰어넘는 가르침이라고 해도 그 참 뜻이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현재 이와 같은 가르침이 그 위대함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념처 수행은 붓다께서 말씀하신 경전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 수행은 역대의 모든 스승들에 의해 면면히 계승되어 왔습니다. 또 이 기록이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왜곡되지 않도록 주석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스승들은 이런 가르침을 직접 수행으로 체험한 뒤에 우리에게 전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이상 열거한 과정은 하나의 진리가 바른 것인지 아니면 삿된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이런 확인이 필요한 이유는 진리는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석서는 역사적으로 주석에 또 주석을 한 복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념처경에 기록된 수행 방법은 모두 44가지입니다. 자세하게 분류하면 이것보다 더 많지만 크게 분류한 것이 이 정도입니다. 붓다께서는 수행에 대한 총론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정도이며 사람에 따라서 각론으로 들어가면 더 많이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수행 방법을 말하자면 팔만사천법문이 모두 수행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44가지 수행을 모두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수행은 기본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수행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근기에 따라서 선택할 수도 있고,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수행을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분은 오직 붓다밖에 없습니다. 반드시 스승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이 수행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법과는 다른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바라고 없애려고 하는 마음으로 살아왔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는 수행입니다. 그리고 대상과 하나가 되는 집중을 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려서 집중을 하기 때문에 기존의 방법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입니다.
수행은 가보지 않은 정신세계를 탐험하는 것이라서 혼자서 가기가 어렵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한 번 들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말을 무수히 들어도 기존의 견해를 버리고 새로운 견해를 갖기는 어렵습니다. 오직 지혜가 날 때만이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수행을 하면서 지속적인 가르침을 받아야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바르게 갈 수 있습니다. 누구나 진리 앞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_( )_
고맙습니다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