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낙화암용대왕포(洛花巖聳大王浦); 낙화암이 대왕포에 우뚝 솟아 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현재 전하는 기록으로 볼 때, “낙화암”이라는 용어는 고려말을 살았던 이승휴가 제일 먼저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승휴가, “삼천궁녀”라는 용어를 사용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긴 합니다.
낙화암(落花岩)
清浪 장팔현
누만년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
슬픈 백제의 유언 전하며 오늘도 말 없이 흐느낀다
나라가 망하던 날
사비의 여인네들 슬픔에 꽃잎 되어 하나 하나 떨어지니 타사암(堕死岩)*이라 일컬었네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한 유람선만이 옛 기억 찾아 울먹울먹 울먹이네.
2018.06.17.05:30
* '삼국유사'에 '타사암(떨어져 죽은 바위)'이라 기록되어 있다.
낙화암이니 삼천궁녀니 하는 용어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시어(詩語)나 일제시대 노래 가사에 등장하면서 현재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삼천궁녀는 많다는 의미 일뿐이다.
** 시간 되시는 분은 3천궁녀가 뻥이라는 역사적 근거를 보세요.졸필로 써 놓은게 있네요.언젠가 마무리 지어야하는데 ㅠㅠ
역사학자가 된 장윤혁. 그는 공주 근처 연기에 사는 인물로 중학교 때 스스로 천자문을 익히고, 박정희 정권 들어 근대화에 매진할 제, 가정 형편상 어린 마음에 조국근대화의 기수가 되기 위해 한참 인기가 치솟았던 청주기계공고에 입학한다. 기계제도를 전공하는 윤혁이었지만 솔직히 인문학에 재주가 있던 그에게 실업교육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3학년 1학기 방학을 이용하여 대전의 대아주물이란 곳에서 한 달 간 피아노 건반을 주물로 빼던 곳에서 일해 봤지만 힘만 들고 월급도 아닌 실습비 명목으로 고작 3만원을 받아들고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실습 준비하느라 사용된 5만원도 건지지 못하고 윤혁은 남은 2학기 동안 8천자 옥편을 떼기로 하고 하루에 3,40자씩 기계설계 연습하라 주는 질 좋은 전지를 32절지로 쪼개어 날마다 한자 익히기에 몰두한다. 그리고 3개월 만에 마침내 8천 여자 모두를 외우고 쓰고 하니, 과연 인간의 뇌는 쓰면 쓸수록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박사가 되고 천재가 될 수 있음이다.
스스로 한자 1만 여자를 익히고 백제역사와 일본어 공부에 심취하게 된 윤혁. 그는 다시 서울에 올라가 한 전자회사에 취직을 하나 2년 만에 그만두고 다시 대학 입시에 올인한다. 불과 학력고사 3개월을 남겨두고. 하루 2시간만 자면서 공부한 끝에 그는 지방 국립대학의 정치학과에 입학한다. 입학 후에도 학비가 부족하여 군 장학생이 된 그는 졸업과 동시에 학창시절 받은 장학금만큼 국가에 더 충성해야할 의무가 있어 남들의 두 배를 복무하고 전역하니, 그 때 나이 32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국가가 있어 빈한한 가정의 자식이라도 공부할 수 있었음에 늘 감사해 하고 있다.
30대 초반의 윤혁에게는 하나의 사명이 있었다. 바로 역사왜곡을 일삼는 적의 심장부, 일본에 들어가 일본을 속속들이 연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치 사마왕자(무령왕)가 왜국으로 건너가 실력을 쌓고 그 실력을 바탕으로 본국의 왕으로 즉위했듯이......
대학 재학 때부터 홀로 공부해온 일본어와 칠지도, 우전팔번경 등 백제에 관해 나름대로 공부했던 윤혁이 이제 마음 놓고 연구하여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나이가 무슨 대수인가. 그리하여 친구들과 친척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윤혁은 일본으로 뒤늦게 유학을 떠난다. 왜냐하면 본격적으로 한.일고대사를 연구하여 일본의 역사왜곡에 쐐기를 박겠다는 옹골찬 목표를 그는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문학박사 학위라는 종이 한 장이 필리핀에 가 있던 윤혁의 집에 배달되어 왔고, 대학 강사라는 배고픔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혁은 소설 형식을 빌어 그동안의 연구성과인 박사학위 논문을 근거로 먼저 국민 대다수가 읽을 수 있도록 『무령왕』을 먼저 출간하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3천궁녀를 거느렸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천추의 한으로 이국 땅에서 숨진 의자왕의 누명을 벗겨주어 그의 명예를 되찾아주는 일이 급선무로 다가왔다. 윤혁은 즉시 소설『의자왕』집필에 착수했다.
역사는 언제부터 의자왕이 3천궁녀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인양 널리 한국인들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아니, 이젠 화석이 되어 모두가 그렇게 믿고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부여에는 3천궁녀가 살았을 궁터나 건물이 없었음이다. 부소산성의 규모로 보거나 660년 당시 부여에 살던 인구가 한 연구에 의하면 5만 명 이내라는 사실을 보아서도 3천궁녀는 역사적 진실이 아닌 허구요 뻥에 불과하다. 3천궁녀라니? 너무들 하다.
의자왕은 후사도 없어 임금자리를 다른 왕족에게 넘겨야했던 왕들보다는 많은 왕비를 둔 것은 사실 같다. 자그마치 41명의 후손을 남겼다하니, 조금 많은 수의 왕비를 둔 것은 사실 같다. 그래도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아무리 많아야 수십 명 이내일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건 의자왕은 왕비도 많았고 자식도 많았지만 백제사직을 지키지 못한 면에서 자식 못 둔 정력 약한 임금과 도긴개긴이었지만........
하물며『삼국사기』에는 의자왕에 대해 평하기를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용감하고 대담하여 결단성이 있었다. 무왕이 왕위에 있은 지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그는)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고 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백제 인들은 의자왕을 중국의 증자와 같은 동방의 성인이라 하여 ‘해동증자’로까지 추앙하였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와는 반대의 기사도 눈에 띄니, 의자왕 16년 조에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 충(成忠)이 극력 말렸더니 왕이 성을 내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는 백제 멸망 후 그 원인을 방탕함에서 찾으려 누군가 이 구절을 끼워 넣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 후 승리자의 입장에서 백제 의자왕을 깎아내리려는 의도에서 그랬지 않나 싶다.
하여튼 의자왕이 그 좁은 부소산성에서 궁녀를 3천명 씩이나 거느리고 살았다는 것은 당시의 사비성 규모나 부소산성의 규모, 의자왕에 대한 인물 평가 등으로 볼 때 3천궁녀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수치라고 보는 것이 옳다. 백제 멸망 시 나이 60도 넘은 의자왕이 무슨 아주 특별한 비아그라라도 먹고 어디 세계적인 카사노바라도 되었단 말인가?
의자왕의 3천궁녀 이야기는 한참 후대인 조선시대의 한 문인이 술 마시다 백제의 멸망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아무리 많아야 수 십 명에 지나지 않았을 궁녀 수를 3천명으로 과장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를 일제시대에 대중가요 속의 가사로 집어넣으니, 가수 김정구가 구슬프게 불러 더욱 애간장을 녹이던 ‘낙화삼천’으로 대 히트를 치지 않았던가? 허구에 의한 가사지만 억압과 착취에 억눌리던 식민지 백성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던 노래였다. 그 가사 1,2절을 보자.
1.반월성 넘어 사자수 보니
흐르는 황포돛대 낙화암을 감도네
미풍은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고란사 저문 날엔 물새만 운다
물어보자 물어봐 삼천궁녀 간 곳 어데냐
물어보자 낙화 삼천 간 곳이 어데냐.
2.영월대 우에 송월대 우에
달만은 옛날같이 두거두거 하건만
옛 님은 어디 가고 물새만 울어
눈 속에 발길을 멈추게 하나
물어보자 물어봐 삼천 궁녀 간 곳 어데냐
물어보자 낙화 삼천 간 곳이 어데냐
(반복)물어보자 물어봐 삼천궁녀 간 곳 어데냐
물어보자 낙화 삼천 간 곳이 어데냐.
라고 부르니, 얼마나 식민지 조선 민중들의 가슴을 파고들었을까.
꿈꾸는 백마강이라는 대중가요에도 3천궁녀란 가사가 나오고 ‘백마강’ 노래의 3절 가사 중에도 나온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칠백년의 한이 맺힌 물새가 날며.
일편단심 목숨 끊은 남치마가 애닮구나!
아 낙화삼천 몸을 던진 백마강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
하면서 부르는 대중가요는 듣는 이로 하여금 너무나 애잔하게 들린다. 아마도 식민지 지배자로 조선에 온 왜놈들도 이 노래 듣고 슬퍼하지 않았을까?
백제의 멸망과 조선의 멸망이 어찌나 그렇게 샴쌍둥이처럼 보였던지, 삼천궁녀란 가사가 들어간 낙화삼천은 60년대까지도 광풍을 일으키며 인기 가요가 됐다.
더욱 낙화암이란 이름조차 백제시대에는 없었다. 이를 처음 사용한 것은 고려조 이 색(李穡)의 부친인 이 곡(李穀:1298 ~ 1351)이 부여를 둘러보고 ‘하루아침에 도성이 기왓장처럼 부서지니, 천 척의 푸른 바위를 이름 하여 낙화라이르노라!(一日金城如解瓦 千尺翠巖名落花)’라고 노래 부른 것이 처음이다. 또한 고려 말기의 이존오(李存吾:1341 ~ 1371)가 ‘낙화암 밑의 물은 호탕한데 흰 구름은 천년을 속절없이 떠도는 구나!(落花巖下波浩蕩 白雲千載空悠然)’라고 하여 사용한 흔적이 있다.
일연이 지은『삼국유사』에는 낙화암을『백제고기』를 인용하여 타사암(墮死岩: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궁녀가 빠져죽었음은 역사적 사실로써 기록하고 있으니, “그 날 궁인(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현재의 낙화암)에 올라가 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다.(『삼국유사』권1 태종 춘추공 조)"고 적혀있다. 백제멸망 때 당나라 병사들에게 겁탈당할 수 없다는 백의민족으로서의 순결함과 지조를 지키려는 굳은 마음과 나라가 망한 슬픔을 못 이겨 궁녀가 빠져죽었다고만 했지, 숫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낙화암이란 단어는 강원도 영월에도 있다. 비취색 푸른 강물이 도도히 흐르는 동강에도 낙화암이 있으니, 조선조 초기 단종이 포악한 삼촌 세조의 명으로 사약을 받자. 그를 모시던 일곱 시녀와 시종들이 바위 위에 올라 푸른 동강위에 몸을 던지니, 그 바위 또한 낙화암이라 한다.
백제 역사상 가장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은 나라까지 망한 터에 3천궁녀를 데리고 살았다고 잘못 알려진 의자왕일 것이다. 방탕한 군주로 잘못 알려졌으니, 그는 죽어서도 억울하여 중국 땅 황토 밑에서도 제대로 누워있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사서 그 어디에도 의자왕이 3천 궁녀를 거느렸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언제, 누가 그런 왜곡을 해놓았단 말인가.
사실 3천궁녀란 이야기의 시작은 백제나 신라, 고려시대도 아닌 한참 후대인 조선시대부터 나왔다. 한 조선 문인에 의해 시작됐다. 즉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민제인(閔齊仁:1493~1549)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가 지은『입암집』총 6권 중에 ‘백마강부’라는 시가 있다. 그 시에 처음으로 ‘3천궁녀’란 단어를 사용했다한다. 시를 쓰면서 처음으로 ‘궁녀 수 3천’이라고 근거 없이 과장하여 쓴 한 문구가 이후 낙화암과 3천궁녀로 자가발전 하여 수많은 문인들이 즐겨 시작(詩作)의 대상으로 삼았고, 애달픈 대중가요의 가사로 뜨게 된 것이다. 역사란 이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보태지고 왜곡되어 후세인들의 입맛에 따라 변질되고 덧칠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이고 민중들이 부르고 찾는 애닮은 망국사의 한 페이지인 것이다. 망한 백제나 마지막왕인 의자왕만이 죽일 놈이 됐다가 시 한수 읊을 대상으로 됐다가 후세인들에 의해 자유자재로 요리되고 흠집을 당하고 폄훼되고 있을 뿐이다. 하여 패자는 입이 있어도 말이 없나니......백제의 한이로다.
조선시대의 한 문인이 백제 멸망이 너무나 아쉬워 그 책임을 의자왕의 있지도 않은 삼천궁녀란 과장법으로 장탄식하며 썼던 시 한 수에서 시작된 의자왕의 억울함이여. 그러나 백제 멸망 시 “왕은 태자 효(孝)·왕자 융(隆) 및 대신·장사 88명, 백성 1만 2000여 명과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당시 낙화암에서 배를 타고 진주군 최고 장수인 소정방을 따라 중국으로 떠날 때 수많은 백성들이 울고불고 매달리며 의자왕 일행을 떠나보내니, 그 때의 애끓는 백성들의 숫자는 족히 3천은 넘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충남지방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백제의 노래 ‘산유화’가 백제 유민들이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라 전한다. 특히 금강 어귀에 있는 유왕산(留王山)의 전설이 자못 의미 깊다. 유왕산의 뜻은 말 그대로 ‘왕이 머문 곳’이라 해서 유왕산(留王山)으로 붙여졌다 한다. 백제가 멸망한 후 의자왕이 태자 융, 그리고 1만 2천 명의 백성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갈 때, 잡혀가는 의자왕을 사비성의 관문인 구드래 나루에서 금강을 따라 유왕산까지 뒤따르며 통곡 하면서 왕이 떠나는 길을 배웅했다 전한다. 어쨌든 역사적 사실인지 견강부회인지는 몰라도 애닮은 백제의 멸망을 아쉬워함은 매 한가지였을 것이다.
하여튼 한.일고대사를 전공한 윤혁이 봐도 의자왕은 나라를 빼앗긴 왕으로서 너무나도 많은 왜곡의 대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이제는 정확한 역사를 찾아 백제사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복원해야할 것이니, 윤혁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질 것이요, 여러 자료를 모아 분석하고 읽어가면서 의자왕을 정확히 묘사할 책임이 그의 어깨에 지워졌다.
출처: http://www.essay.co.kr/new_mybook/board_disp.php?no=9262
|
첫댓글 충청북도 조치원에 거주하고 있는 장팔현 박사님이 페이스북에 낙화암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글을 남겼습니다. 이 글에 대해 제가 약간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장팔현 박사는 <무령왕릉>이라는 장편 소설을 쓴 저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