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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출 수 없는 우리 – 유발 하라리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이기도 했던 《사피엔스》를 통해 알게된 ‘유발 하라리’교수는 그리 낯선 이름이 아니다. 이번에 다시 만난 그의 저서 《멈출 수 없는 우리》는 어린이용이라서 그림도 많고, 알록달록한 색깔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편하다. 어린이용 책이지만, 전작인 《사피엔스》와 올해 초 나왔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과도 맥락을 같이 할 것인 이 책의 뒷 표지에는 “밀 재배는 왜 굶주림과 전염병, 전쟁으로 이어졌을까? 옛날의 천재들은 어떻게 문자를 만들어 냈고, 세금은 왜 내야 할까? 왜 어떤 사람은 궁전에 살면서 명령을 내리고, 어떤 사람은 궁전을 청소하거나 명령을 따라야 할까?”라고 묻고 있는데, 모르긴 해도 이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야 할 명분은 있는 것 같다.
첫 장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존재들에게! 이미 죽었거나, 살아 있거나, 곧 탄생할 모든 이들에게! 오늘날 세상은 우리 조상이 만들었어요. 앞으로의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해요.”그리고 “어떤 사람은 왜 어리어리한 궁전에 살고, 어떤 사람은 오두막에 살면서 매일 궁전을 청소하러 갈까? 왜 사람들은 전쟁을 할까? 여성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진실일까? 아니면 오래된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일까? 역사를 배우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옛날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인지 알 수 있어요.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그저 오래전에 일어났던 일을 외우는 데 있지 않아요. 역사를 배우는 진짜 목적은 죽은 사람들의 꿈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있습니다.”라고.
생각해 보면 세상은 참으로 공평하지 않다. 왜 그럴까? 원래부터 그랬을까? 처음부터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하인이 따로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처음에는 왕도 왕국도 없었다. 적어도 한 지역 안에 사는 거주민이 수백만, 수천만 명이나 되는 큰 왕국은 확실히 없었다. 1만 년 전까지는 마을 사람이 많아야 수백, 수천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적은 무리로 부족을 이루고 살았다. 물론 그때도 부족들의 우두머리가 있고, 남들을 이끌고 싶어하는 사람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큰 무리의 족장도 대단한 권력을 갖지는 않았다. 으리으리한 집을 짓거나 지을 필요도 없었고, 그럴 힘도 없었다. 족장이라고 거들먹거리고 성가시게 굴면 ‘절 떠나기보다 내가 떠나면되었다.’그러나 1만 년 전쯤에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야망이 넘치는 몇몇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일부가 나머지를 지배하게 되었을까? 왜 지배자가 시키는 대로 따랐을까? 왕과 왕국은 어디서 생겼을까? 아마 이런 질문은 우리가 들어본 이야기 중, 가장 이상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저자의 말이다.
인간과 동물은 고기나 곡식, 과일 등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몰려들기 마련이다. 힘들이지 않고, 먹을 것을 찾을 수 있다면 누군들 그리로 가지 않겠는가? 처음에 그것은 아마 자연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곡식, 열매 등이었을 것이다. 얼마 뒤에는 물에서도 먹을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지만, 그저 자라는 식물에서 얻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벼보다는 밀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고, 아무데서나 잘 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밀도 아무 데서 자라는 식물은 아니다. 서아시아 몇몇 지역에서만 자랐을 뿐이다. 그래서 그곳의 문명이 일찍 발달했다. 또 밀은 여러 번 다듬어야 밀가루가 되고 반죽을 해, 가공해야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챘을 것이다. 밀을 재배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마른 풀과 나무에 불을 질러 땅을 기름지게 하면 밀이 잘 자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식물을 재배하는 법을 터득하고 나서 도랑을 파고, 물을 대는 방법도 알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적당히 와주지 않는 비가 문제였다. 언제 비가 올지, 그런 것을 아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을 연구하고 예언할 수 있는 전능한 사람을 찾았을 것이고, 그 사람은 신과 접선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하는 별종들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밀보다 귀하지만, 고기를 먹으면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동물은 밀보다 다루기가 훨씬 어렵다. 들에 사는 양이나 말, 닭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받치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동물을 손에 넣었다. 생각해 보면 양을 잡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힘 빠지거나 어린놈은 늑대나 곰이 먼저 차지하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럿이 같이, 몰이해 잡으면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한 마리만 잡아도 동네 사람들 모두같이 배불리 나눠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그것을 가축으로 만들어 목축하는 것이었는데, 가축은 처음에는 고기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농사도 짓고, 교통수단으로도 사용하게 됐다. 가축을 보호하고 번식을 위해 노력했다. 현재, 전 세계에 얼룩말이 50만 마리가 되지 않는데, 젖소는 15억 마리나 되니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얼룩말 한 마리당 젖소 3,000마리가 된다는 이야기다. 또 닭은 어떤가? 우리가 해마다 50억 마리의 닭을 잡아먹지만, 황새는 고작 5만 마리도 되지 않는다. 길러지는 닭이 전 세계의 다른 모든 새를 합친 것보다 많다. 가축을 키워 이용하고, 농사짓는 것을 ‘농업혁명’이라고 하는데, 이 농업혁명이 결국 인간을 변화시킨 것이다.
농업은 인간의 생활을 근본부터 바꿨다. 점점 더 많은 곡식과 고기와 유유를 생산해 아이들을 더 많이 먹였고, 더 많이 낳았다. 수렵 채취로 50명이 먹고 살려면 숲 하나를 통째로 뒤져야 했지만, 숲을 태워 밀밭이나 논으로 바꾸면, 100명도, 아니 1,000명도 먹여 살릴 수 있다. 농부들은 더 많은 숲을 태우고 수렵채집인들을 몰아냈다. 농사짓는 것이 힘드니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제 농부들에게도 꿈이 생겼다. 도랑을 파고 낱알을 심고, 양을 길들이고, 성벽을 쌓으면 언젠가 안전한, 좋은 삶이 펼쳐질 것이라는 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의도하지 않은 결과’때문이었다. 열심히 일해도 삶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잔뜩 생겼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많아진 아이들을 데리고 떠날 수 없었고, 떠날 필요도 없었다. 일찍 엄마 젖을 떼고 말죽이나 양젖을 먹였고, 더 자주, 1∼2년마다 아이를 낳았다. 일손이 많아지니까 아이를 더 낳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우리 마을이 이웃 마을보다 더 강해지기를 바랐다. 화장실 시설도 안 된 마을에 사람들이 늘어나니 전염병이 창궐하고, 많은 사람의 의견을 모두 듣고 무엇을 결정할 수 없었다. 이에 대표자를 뽑아서 그에게 일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유령이나 괴물을 두려워하지만, 어른들은 세금을 더 무서워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왕이었던 파라오는 아주 큰 힘을 가졌고, 그래서 피라미드 같은 웅장한 건물도 지을 수 있었다. 파라오는 세습되었는데, 여덟 살에 왕이 되어 열여덟 살에 죽은 투탕카멘 같은 파라오도 있지만, 나머지 왕들은 이름조차 우리가 잘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왜 왕들을 떠받들고 지켰을까? 큰 왕국은 그만큼 도둑과 침략자를 막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농업혁명으로 재산이 늘어나자 함께 모여 농사를 지었으며, 마을은 점차 도시화 되었고, 주민들은 금을 긋고는 여기는 우리 땅이라면서 지키기 시작했다. 많은 땅을 소유한 사람이나 집안은 부자가 되고, 작은 땅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가난뱅이로 남았다.
땅을 소유하지 못했다고 가난뱅이로 남는 것은 아니었다. 가뭄이나 병해로 농사를 망치는 경우도 있었고, 산 너머 마을에서 건장한 놈들이 쳐들어와 우리가 지은 농작물을 훔쳐가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웃에게 너네는 농사를 잘 지었으니 좀 나눠주라고 하면 적선을 베푸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인두세’라는 것이 있어서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었듯이, 세금을 내지 못하면 어떻게 됐을까? 끌려가 노예로 전락하거나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파라오는 누가 세금을 안 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100만 명이 살았다는 이집트 군사들은 누구에게 곡식을, 또는 아이를 빼앗아야 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는 같은 반 친구 이름은 기억하지만, 다른 반 아이들까지 모두 기억하기는 힘들다. 그만큼 인간의 뇌는 한계가 있다. 밭에서 수확을 얼마나 했는지, 기억하지 않고는 세금을 매길 수 없다. 100평을 가진 사람과 1,000평을 가진 사람에게 똑같이 매기는 것도 불공평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밀 생산량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다. 누구는 돼지 새끼를 몇 마리 낳았는지도 모두 알아야 했다. 그렇게 농사짓는 사람은 어떻게 할 수 있다고 해도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월급까지 고루 해결하는 문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을 해결할 천재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이집트 건너편 수메르인들로 뇌가 모두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뇌밖에 수를 저장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숫자와 수학은 단순한 것 같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들은 최초로 수를 기억하는 문자를 발명했는데, 그때가 5만 5천 년 전쯤. 막대기로 무른 점토에 기호를 쓰기 시작한 것인데, 경북 예천의 삼강나루 주막 할매가 벽에다가 외상장부를 기억하기 위해 그린 그림을 보았다면 아마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그들은 시를 쓰기 위해 문자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누가 무엇을 얼마나 가졌고, 빚졌는지 기억하기 위해 문자를 발명한 것이다. 최초 점토판에 적힌 글자와 숫자는 ‘보리, 13만 5천리터, 37개월 쿠심’이라고 적혀 있는데 무슨 뜻일까? ‘쿠심이라는 사람한테 37개월 동안 보리 13만 5천리터를 받았다’혹은 ‘받아야 한다’는 것을 확인해 준 문서가 아닐까? 그것이 맞다면 높이뛰기 선수 바심이 아닌 쿠심은 역사상 가장 먼저 이름을 남긴 사람이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시와 역사와 전설도 문자로 기록했다.
문자를 가르치기 위해서 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학교 가기를 싫어했다. 학교는 무엇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하는 규칙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규칙을 따라야 했다. 사람들이 규칙을 따르면 나라가 문제없이 돌아갔고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엉망이 되었다. 그러니 권력을 잡은 사람은 규칙을 따르라고 강요한다. 지금도 그렇다. 권력은 참으로 좋은 건지 잡으면 놓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규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권력자들은 믿음을 갖게하기 위해 거짓말이든 참말이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솔깃할만한 이야기를 했다. 훌륭한 이야기를 가진 무리는 언제나 막강한 존재였다. 모든 왕국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왕국의 모든 규칙은 아주 당연하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그 규칙은 아무리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어도, 자신을 감시하고 벌주는 병사가 없어도 지켰다. 그들은 규칙을 잘 지키면 신들이 기뻐한다고 하고, 적들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했다.
사실 아이가 태어나면 처음에는 그런 규칙을 모른다. 그런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규칙을 이야기하고 지키라고 한다. 어른은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이 부뜻해하고, 자기가 하는 이야기를 의심하면 불같이 화를 낸다. 물론 그런 방법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무엇인가 정말로 믿게 하려면 현실에서 실제로 보여주어야 한다. 아이는 크면서 파라오는 꼭대기, 사제는 그 아래 그리고 자기 가족은 중간, 노예는 맨 밑바닥 신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의 실체, 알맹이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것은 안다. 신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어떻게 알지? 혹시 지어낸 이야기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왕과 사제는 ‘의식’이라는 새로운 것을 창안했다. 웅장한 사원에 조각상을 가져다 놓고 말했다. “사원에 오면 신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예를 갖추어야 한다.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하고, 부정한 옷을 입어서도 안 되고 부정한 마음을 먹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제물을 바쳐라.”그 뿐이 아니다. 사원 밖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오되 반드시 오른발부터 들여놓아야 한다. 그리고 신을 보거든,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라. 그런 다음에 다시 일곱 걸음 나아가 이번에는 일곱 번 절하라. 신이 보이면 발을 만져도 되지만 손이나 머리는 절대 만져서는 안 된다. “그러면 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나요?”“물론이다. 너희는 신의 발을 만질 때 신에게 소원을 빌 수 있다. 비를 내려 달라거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된다. 물러날 때 신에게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 끝까지 뒷걸음쳐서 나와야 하고 마지막에 다시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처음처럼 오른발부터 나와야 한다. 잊지 마라!”사람들은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따르면서 신을 만나는 일을 매우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의식 절차를 이해하지 못해 실수를 연발했다. 귀 뒤까지 깨끗이 씻지 않았다거나, 왼발부터 들여놓거나, 노래를 부르지 않고 끼득거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부모는 아이를 나무랐고 아이들은 의식 절차를 제대로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서서히 깨달았다. 이렇게 해서 나무 조각이 창조신이 되고, 깃발이 나라를, 가문을 상징하기에 이르렀다. 태극기 깃발 앞에 서면 엄숙해지고 조국을 떠올리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사회를, 왕국을 하나로 묶는 이야기를 우리가 믿을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이 의식이라는 것이다.
국가에는 함께 꾸는 공동의 꿈이 있다. 이 공동의 꿈은 이야기 속에서 생긴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100만 명 모두가 그 꿈을 믿으면 함께 꾸는 꿈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 꿈을 믿지 않기로 하면 그 꿈은 사라지고 만다. 내가 가진 종잇조각을 내밀면 왜 점원이 빵이나 밀가루, 파인애플을 줄까? 그것은 종잇조각에는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를 모두가 믿기 때문이다. 1달러가 파인애플 한 개와 비슷하다고 하는 이야기다. 돈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중의 하나다. 모든 사람이 그 이야기를 믿기 때문에 종잇조각이 실제 가치를 지니게 된다. 돈이면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파인애플부터 우주선까지.
그것은 현대 미국이나 고대 이집트에서 같이 꾸었던 꿈이라 해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공동의 꿈은 세상에서 중요하고 힘이 세다는 것이다. 공동의 꿈 때문에 힘을 합쳐서 도시, 다리, 학교, 병원도 세울 수 있다. 이런 꿈은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심지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사람들은 죽지만, 그들의 꿈은 남는다. 자식과 손자들이 같은 꿈을 꾼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죽은 사람의 꿈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사용하는 돈, 사는 나라, 우리가 믿는 신들에 대한 꿈을 꾼 사람은 이미 죽었지만, 우리는 새로운 꿈을 생각해 낸다. 그래서 우리가 죽으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꾼 꿈속에서 또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식량이나 영토 때문에 싸우지만, 오직 그 한 이유만으로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동물과 달라서 과거에 일어난 많은 전쟁들이 이야기 때문에 일어 났다. 1000년 전 기독교 사제들은 사람들에게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신들이 신에게 메시지를 받았다고 떠들어 댄 것이다. “신께서 예루살렘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아닌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것을 보시고 화를 내셨다. 기독교인이 이곳을 되찾다가 죽으면 천국으로 맞이해 영원히 복을 받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그 말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러 나섰다. 전쟁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100만 명도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십자군 전쟁이라고 불린 끔찍한 전쟁은 ‘신이 그렇게 원한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이 책 마지막에는 젠더, 동성애라고 하는 이야기다. 이야기라는 것은 말의 도구로 매우 쓸모 있지만, 어떤 이야기는 사람들을 돕지 않고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중요하고 복잡한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는 ‘이 이야기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 사람이 없을까?’하고 생각해 봐야 한다. 이야기 하나가 많은 사람을 괴롭힌다면 바꿔야 한다. 이란과 우간다 같은 나라에서는 아직도 동성애자를 처벌하고, 우리나라도 혐오하는 것이 사실이다. 러시아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막고 있다.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사귀지 못하게 한 많은 나라들이 지금은 이 규칙을 폐지했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아들이나 딸이 동성애를 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을 때리고 내쫓기도 했고 심지어 자식을 죽이기도 했다. ‘신이 그렇게 하신다’는 이야기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거나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죠. 하늘 저 멀리 신이 있다면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누군가를 증오하는 사람을 처벌할 것이지 왜 사랑 같은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벌을 줄까요? 하면서 대들었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다. 여자가 대통령이 된다고?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였던 때가 있었다.
저자는 결론 삼아서 말한다. “나쁜 이야기를 바꿔야 한다면, 그 일을 할 사람은 어린이들 뿐이다”내 이야기, 이런 이야기가 고통을 주는 건 아닐까? 고통을 준다면 안 하는 게 맞다. 그런 다음 귀를 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도 했다. 이나 저나 우리는 불공평한 세상에 살고 있다. 역사 이전에 우리 조상은 수백만 년 동안 무리를 지어 살았고, 다른 존재를 지배하려 들지도 않았다. 식물과 동물을 잡았지만, 그들에게 명령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난 1만 년 동안 인간은 점차 도시와 왕국을 세우고 점점 더 다른 존재를 지배하려 들었다. 식물과 동물을 지배하는 방법을 알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은 이야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상이 커지자 이야기도 복잡해졌다. 나 아닌 다른 사람,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어떻게 의견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까?
어디를 가도 파인애플을 살 수 있고, 어디를 가도 빨간 신호등에 멈추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몇몇 규칙들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집트인이 인도인을 만나거나 중국인이 일본인을 만나거나 러시아인이 우크라이나인을 만나거나 이스라엘 사람이 바레인 사람을, 이란인을 만나거나 그들이 의견을 모으고 하나가 될 수는 없을까? 그 이야기는 또다른 이야기다. - 2024.10.17.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