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주 - 왕부지 철학
왕부지에 대해 배우며 왕부지의 철학관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궁금해졌습니다. 왕부지는 성리학자들이 공리공담을 일삼음으로 인혜 현실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하고, 과학적인 세계관을 정립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자연을 기의 모음과 흩어짐으로 설명하면서, 태극과 음양의 관계에 대해서도 태극을 추상적인 리로 설정하여 구체적 현상인 기(음양)를 낳는다는 성리학자들의 이원론적인 본체론에 대해 비판합니다. 그는 태극을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음양의 대립 통일의 범주로 설정합니다. 그는 항상 운동하는 음과 양이 합하면 태극이 되고, 나누면 음과 양으로 분리된다는 논리로, 태극을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읍양과 같은 법주로 설정했습니다. 즉 그는 태극을 물질 운동 속에 존재하는 대립 통일의 법칙으로 해석하고, 동정을 음양의 동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리가 음양의 동정을 초월 하여 고고하게 홀로 존재하지 않고 음양의 동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그는 자연을 인간의 의지에 관계없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다음으로 왕부지의 지행관에 대해 살펴본다면 왕부지는 성리학이나 양명학이 행함을 선험적인 앎을 드러내는 것으로 취급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즉 그는 성리학이나 양명학이 행함의 범주를 도덕적 실천 중심으로 설정하는 태도에 대해 비판한 것입니다. 그는 행함에 대해 도덕적 실천 뿐 아니라 과학 실험과 생산실천 등 역사 속에서 행하는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앎의 대상에 대해서도 선험적인 도덕 내용에 국한 시키지 않고 자연과 역사의 법칙 등으로 확장했으며 앎의 방법과 과정에서도 감각과 지각을 근거로 하는 감성적 앎과 개념 판단 추론을 기초로 하는 이성적 앎의 통일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앎의 방법에서 현상적인 앎과 본질적인 앎 중 어느 한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나머지를 소흘히 취급한 것이 아니라 현상적 앎과 본질적 앎이 통일 될 때 비로소 바람직한 앎이 형성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다음으로 지행선후의 문제에 대해 왕부지는 행함의 앞섬과 앎의 뒤 설의 기반 위에 행함의 앞섬에 대해 더욱 치밀한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그는 앎에 대해 감각 기관의 활동으로부터 시작하고 활동이 진행되면서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생산행위와 과학 실험 및 사회 변혁의 행함을 통해 정확한 앎이 도출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즉 그는 사회적 앎을 통하여 산재해 있는 모순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모순에 사회를 관념화 시키지 않고 자신의 시대 문제를 역동적으로 해결해 가는 이론의 근거로 작용했던 행함의 앞섬과 앎의 뒤설을 현대 사회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면서 현대의 문제를 풀어가는 이론 근거의 하나로 설정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지행경중의 문제에 대해 왕부지는 앎과 행함의 앞섬과 뒤 문제에서 많은 철학자들이 비록 앎의 앞섬을 주장했을지라도 가벼움과 중요함의 문제에서 동중서와 정이 등 일부를 제외한 공자와 주희 등 대부분의 중국 전통 철학자들은 행함을 중시하는 관점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했을지라도 그 행함의 내용은 선험적으로 갖추어진 도덕적 내용의 앎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구체적인 행위의 활동에 주목하며 행함을 중시하는 왕부지의 이론과 차이를 갖습니다. 왕부지는 왕양명의 앎과 행함의 합일에서 말하는 행함 역시 선험적인 양지를 현실 생활에 드러내는 행함이기에 진정한 의미의 앎과 행함의 통일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그는 앎에 대해 행함으로부터 나오며 도덕적인 가치 역시 인간의 역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출현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앎은 반드시 행함에 의지하고 행함을 통해야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중국식 사회주의 철학자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지행난이의 문제에 대해 왕부지는 앎과 행함의 어려움과 쉬움의 문제는 앎과 행함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기에 어느정도에서 차이를 드러냅니다. 정이와 손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국 전통 철학자들은 행함 중시의 관점에서 행함이 어렵과 앎은 쉬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왕부지 역시 이러한 관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중국식 사회주의 철학자들은 특별한 조건을 살펴보지 않고 단순하게 어느것이 쉽거나 혹은 어렵다고 해서는 안된다는 관점입니다. 중국식 사회주의 철학에서는 쉽거나 어렵다는 문제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전화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어느 경우에는 앎이 어렵고 행함은 쉬우며 어느 경우에는 행함이 어렵고 앎은 쉬울 수 있는데 이러한 상채는 또 다른 상황에 의해 전화될 수 있습니다. 아는 앎과 행함의 어려움과 쉬움 문제를 고정시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지행통일에 대해 왕부지는 앎의 자율성을 승인합니다. 그는 앎과 행함의 기원 문제에서 행함이 앞서지만 과정 중에 앎이 행함에 반작용하며 행함을 지도할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앎과 행함은 서로 관계하며 서로를 이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중국 유가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합리적인 사상으로 중국 현대 철학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특히 모택동은 이것을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 이론에 기여하게 하여 생산관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이론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식 마르크스 주의에서 주장하는 앎의 자율성은 실제를 벗어난 사유의 방임이 아니라 객관법칙에 부합하고 실제에 부합하려는 것이기에 자각적으로 객관 세계를 개조함은 물론 주관 세계또 개조하고 주관과 객관 앎과 행함의 주체적이고 역사적인 통일에 도달하려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10주차 토론주제 : 왕부지는 인간의 욕망을 천의 이치로 보면서 천리와 인욕을 배척의 관계가 아닌 긴밀한 관계라고 생각하며 인욕을 제거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주희는 인욕을 생리적인 욕구를 채우는 과정에 좋은 것으로 더하고자 하는 마음인 가욕과 그것의 이기적인 성향인 사욕을 포함하는 것으로 건강한 도덕 공동체 사회 건설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본다. 인욕에 대해 왕부지와 주희 중 어떤 입장을 더 지지하는가?
10주 차 토론 주제에 대한 저의 생각은 왕부지의 입장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저는 토론 주제를 처음 접하였을 때 인욕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욕이라는 것을 제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물음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니 인욕이라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혹여 인욕이 제거되어야 하는 나쁜 것이라고 본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성장에 있어 인욕을 적절히 조절하며 발전한다는 점에서 인욕은 인간의 삶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삶 속에서 인욕을 과하게 추구하는 것이 아닌 그렇다고 아예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닌 인욕을 자신의 삶에 맞도록 적절히 조절하여 삶 속에 적용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인욕에 대한 왕부지의 입장을 더욱 지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