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 2학년 때 교회에 매우 열심이었다.
한국에서 교회에 열심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참가해야 하는 예배의 수를 보자.
수요예배, 토요일 청년회 예배, 일요일 아침 본 예배, 일요일 저녁 예배, 거기에 종종 있던 금요일 부흥회…
게다가 열성적인 교회 청년들은 예배없는 날마저도 저녁때 기도 모임을 만들었다.
참석 안 하면 왠지 죄 짓는 듯한 분위기랄까.
그런데 이 와중에도 내 친구들은 온누리 교회 찬양 예배, 이초석(?)목사 집회등 유명하다는 집회는 모두 따라다녔다.
이초석 목사가 기도 중 "사탄아 물러가라!"소리치니 참석자 절반이 우수수 넘어갔다나...
뭐 이런 얘기를 들어야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들은 매주 금요일에 인천에 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의정부에 살았기에, 인천은 1호선 끝에서 끝이었다.
거기까지 간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정성이었다.
친구들이 다른 집회는 좀 권하다 말았는데, 그 인천집회는 꼭 가야 한다며 거의 억지로 끌고 갔다.
그 집회가 다른 집회와 특별히 다른 건 없었는데,
집회 후 어느 개인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거기서 서을매 집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한 19평 정도의 그냥 평범한 아파트로, 많은 청년의 방문을 받는 것 같았다.
첫인상이 매우 강렬했다.
무당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으니 그런 기가 느껴지는 여자분이었다.
찾아온 청년들 하나하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셨다.
기도의 형식은 다음의 3부작이다.
첫째, 네가 이런 사람이구나.
둘째, 하나님이 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셋째, 서을매 집사님이 개인적으로 해주는 기도.
이 세 부분을 각각 처음엔 방언으로 하시고, 그 후 알아들을 수 있게 해석하셨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첫 번째 부분이었다.
기도의 대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때 20, 21살이었다.
그 나이 때 정상적인 남자들 대부분의 고민은 당연히 “여자”, “성”이다.
그래서 몇몇 청년들은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게 방에 들어가서 기도를 받았다.
난 그 당시 상당히 비정상적이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엉뚱하게도 “양자역학”이었다.
얼마 전 양자역학을 소개한 2페이지 아티클을 읽고,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 적 없이 혼자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네 영혼이 참 순수하구나(아마 여자 생각이 없어서...)로 시작하시더니, “양자역학”이란 단어만 안 나왔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그대로 말씀하셨다.
헉… 충격이었다.
그 후 나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다는 걸 믿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교회 전도사님 중 “성령”을 강조하다 쫓겨난 분이 있다.
청년들을 모아놓고 방언을 받게 하려고 노력했다.
떼로 울고불고 큰 소리로 기도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방언이 튀어나오고, 난데없이 방언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생각하고 감사했다.
그런데 나는 방언을 못 받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전도사님이 나의 귀에 속삭였다.
“그냥 받았다고 믿으면 돼”.
내 머리는 “어떻게 안 받은 걸 받았다고 믿을 수가 있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방언을 못 받았다.
무당 신내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새끼무당이 아침부터 춤을 추며 신을 받으려고 노력했는데 해가 져가는데도 신을 받지 못해 괴로와했다.
어느 순간 어미무당이 “받았다고 믿으면 돼”라고 하니, 그 순간 새끼무당의 얼굴에서 신을 받았다는 안도와 감사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받았다고 믿으면 된다”
어쩌면 저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수십 년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다.
결론이 바뀌고 수정을 거듭하다가 언젠가부터 어느 정도 굳어져 더 이상 변하지 않게 되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세 가지 전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물질은 관념에 선행한다. 즉 물질이 있기에 그에 대한 관념이 생긴다.
둘째, 물질을 영원하며 끊임없이 변한다.
셋째, 변화의 동력은 외부의 힘이 아닌 “내적모순”이다.
나는 두 번째, 세 번째는 동의한다. 그러나 첫 번째 전제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은 세 번째가 아닌가 한다.
변화는 신과 같은 외부의 힘에서 오는게 아니라 내적 모순에서 온다.
즉 “변화는 이미 그 물질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서을매 집사님이 그 능력을 이미 잠재적으로 갖고 계신 분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 능력이 신의 개입이 아닌, 어떤 계기를 통해 발현된 것이라 생각한다.
방언 역시 그 뜨거운 종교적인 집단최면 분위기에서 자기를 버리고 정신줄을 놓으면 발현되는 능력 중 하나라 생각된다.
그 당시 방언 받고 온갖 집회 따라다니던 친구 중 현재 교회 나가는 사람은 아마도 없다. 불나방같이 뜨거움만 쫓던 사람들에게 그 뜨거움이 식어버렸을 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나 보다.
개신교에서 방언은 예수 부활 이후 성령에 의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구약을 잘 찾아보면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떠돌아다니던 시절 방언을 체험한다.
게다가 이것은 기독교만의 체험이 아니다.
이슬람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는 저런 신비주의적 체험을 강조하는 교파들이 있다.
물론 보수 기독교인들은 예수이전이나 다른 방언은 성령이 아닌 사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겠지만...
# 후기
그런데 5년이 넘은 후에 서을매 집사님을 다시 한번 뵙게 된다.
이번엔 의정부에서였다.
나는 그때 나를 인천집회에 끌고 갔던 친구 한 명과 어딘가 급히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의정부 터미널 근처 상가집 같은 천막에서 어떤 여자 분이 나오는데, 서을매 집사님이셨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헤어스타일이 심하게 바뀌셨는데도 신기하게도 나는 그 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 그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급히 가는 친구를 세워 “서을매 집사님이야” 했더니, 그 친구는 서을매 집사님이 누군지도 기억 못 하는 듯했다. 친구가 뭔 소리냐고 빨리 가야 한다고 재촉해서 눈인사만 했는데, 서을매 집사님은 살포시 웃으셨는데, 모든 걸 이해한다는 느낌이었다.
첫댓글 음...무섭네요...
잉... 교회 오래 다시니면서 이런 분 만난적 없으세요?
@안재형 ㅎㅎ저는 그런 분들과 안 친해요.
그것을 알려주마!!! 한편 보고 나온 느낌인데요...
그런가요^^ 전 제가 직접 겪어서 그런지 별로 이상하지가 않아요.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은 세번째가 아닌가 한다. 변화는 신과 같은 외부의 힘에서 오는게 아니라 내적 모순에서 온다. 즉 “변화는 이미 그 물질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요~~ 문장!! 생각해 볼 만한 꺼리가 많이 제게 주네요.^^ 현재 교회는 안 나가는 기독교인으로, 교회 다닐 때 본, "방언 & 성령 받으심"은 제게 '괴상한 일'이었답니다.
이 구절도 좋아하시겠네요^^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는 것이 아니라, 가을은 이미 한여름 속에 와 있다." 비슷하면서도 좀 다른데, 고대 일본 수필집에 있는 구절입니다.
@안재형 "가을은 이미 한여름 속에~~" 이 문구는 어느 책에서 저도 본 듯 해요. 이 말은 우리가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구요. 말복이 지나자마자 입추잖아요? 입추와 처서 사이에 이미 저녁 바람은 다릅니다. 냄새가 달라요! 가을 냄새.... 청정지역에서 자연을 대상으로 업을 하는 분들은 아마도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럴꺼요!!
그런데, 계절의 변화는 외부 환경이 요인이라고 봅니다. "내적 모순"이라는 단어를 보자.. 여러 생각이 떠올랐구요. 변증법적 유물론의 셋째 전제는 심리학이나 교육학 이론에도 영향을 준 걸로 압니다. "혼란함이 극도로 왔을 때, 그때가 배움을 득하려는 바로 전단계"라는 학습이론도 있습니다.
@한재연 "내적모순"이란게 좀 어려워서 토론을 많이 했던것같습니다. 주로 헤겔의 정반합때문인지 "모순"이라는 것에 치중했던것같은데... 저건 제가 여러 사람들의 생각들을 가지고 몇년 생각해보다 나름대로 낸 해석이었습니다.
@안재형 ㅎㅎㅎ "내적모순" 이 단어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픕니다. 저도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변증법, 철학 등등 심취한 적이 있는 대, 이해가 전혀 안 되더라구요. 그냥 포기했어요. 지금 기억에 남는 건 전혀 없어요. 컴퓨터와 수학이나 열심히 할 껄!! "예술 기질"이 충만했던 사람이라 폼만 열심히 잡다가 ㅋㅋㅋ
"내적모순" 단어 보고, 딱 떠오른 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인 데.. 말을 하다보면, 심리적인 내적모순이 발생해, 결국 그 말대로, 행동이 옮겨 간다는... 심리학의 인간 행동 이론이 떠올랐어요. 저도 보면, 결국 "결심이든 빗말이든" 제가 말한 대로 변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언어습관이 중요한 듯^^
학부때 개신교회에 나름 열심히 출석했었는데, '방언'에 대해서는 끝까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ㅎ 그리고 당시에 저는 '상대성 이론'에 열심이었어요. 저의 이성으론 창세기 1-2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의 결과였지요. 저도 정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ㅋㅋ 상대성이론^^ 서을매집사님 안수기도 받았으면 그분이 뭐라 하셨을지 궁금하네요^^ 창세기 1, 2장은 완전 다른 문서로 보여지죠. 신학에서는 1장을 엘로힘분서, 2장을 야훼문서라고 하더군요. 모세5경을 엮은 그당시 최고 지성인 랍비들이 이 정도 모순을 몰랐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런 저런 문서를 엮어 경전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걸 일관되게 수정할 수도 있었을텐데, 모순되더라도 그 당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료를 있는 그래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몇 천년이 지나서 그걸 문자 그래로 믿으려고 하고, 그 모순을 이상하게 정당화 시키려는 사람들은 그 옛날 랍비들의 마인드를 못따라가는거죠.
양자역학에 열심이셨다니 ㅋㅋㅋ 저도 그당시 길을 못찾고 방황했다는 거 빼고는 다른 사람들과 관심사가 같았습니다. 아마 사람을 많이 봐서 잘 맞추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열심은 아니고 2페이지짜리 아티클 하나 읽고, 머리에 넣고 계속 생각하고 다녔었죠...
ㅎㅎ 재미있는 집사님이네요..저는 모태신앙이라 어릴 때부터 교회 계속 다녔었고 유학 중에도 한인교회 꾸준히 나갔었는데 한국서 다니던 교회가 장로교 조용한 스타일이라 방언기도니 성령충만이니 이런 개념을 '본격적'으로 미국 한인교회에서 접하니 적응이 잘 안되긴 하더라고요. 성령충만, 방언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은 하는데, 그닥 사모하지는 않습니다. 너무 감정적인 흥분만을 강요하는 느낌이라서요..
저도 장로교였는데, 그 전도사님이 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죠^^ 그 전도사님 그덕에 장로님들한테 찍혀서 오래 못갔던걸로 기억합니다. 그쵸 그거 너무 감정적이죠. 그러니 그 친구들중 지금 교회 나가는 놈 하나도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