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사도행전 16장 6-10절
설교제목 : 밤의 환상
고맙다는 인사말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인내심이 바닥난 탓인지 아니면 정말 너무나 더운 탓인지 뜨거운 열기 앞에서 에어컨을켜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화요일에는 입추가 다가오는데 입추가 무색하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어느새 새벽에 귀를 기울이면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 뜨거운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시간이 도래할 것입니다.
지난주에 1년 8개월 동안 폐암으로 투병생활하던 친구를 떠나보냈습니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는 왜 착한 목사를 데려가셨나요 하면서 바닥에 주저 앉아 오열하였습니다. 너무나 선하게, 성실하게, 따뜻하게 삶을 살았고,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고 아끼던 친구의 장례예배는 눈물바다였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목회하였던 장로님은 슬픔으로 기도를 이어가며 친구 목사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 그 고통의 시간에 대하여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발인예배를 드리기 전날 새벽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 친구가 나타나 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뽀뽀를 하더니 제 품에 안겨서 죽고 나는 뒤로 넘어졌습니다... 꿈을 꾸면서 엄청나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꿈을 꾸고 저는 고맙다는 인사말을 건네서 참 위로를 받았습니다. 꿈의 의미보다도 마지막 저에게 건넨 인사로 작별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 아버님은 저에게 아들이 당신보다도 훨씬 잘 산 것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장례식에서 한 인생의 자취를 읽을 수 있는 듯 합니다. 어찌 인생을 값지게 채워야할지 곱씹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자취로 우리의 걸음을 채워갈 수 있는 나날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갈라서는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결의된 내용을 들고 다시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편지를 읽어주었고, 안디옥 성도들은 그 권면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조금 더 머물면서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른 여러도시로 가서 주의 말씀을 전하려고 떠나려 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을 데리고 가고자 했고, 바울은 이를 반대했습니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 중에 밤빌리아에서 자신을 버리고 함께 일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 마가를 바울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심하게 다툼 끝에 서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갔고,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다툼과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바나바는 미숙하여 실수한 것을 끝까지 보듬어 안아서 다시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위로자란 별칭을 가진 사람답게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기꺼이 실수조차도 품고자 했스니다. 반면에 바울은 충성을 배반한 자를 더는 신뢰할 수 없기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원리원칙과 충직함으로 삶을 살아가는 바울에게 마가를 세울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두 사람의 성향과 성품이 잘 드러납니다. 그 둘의 입장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고 싸웠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각기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행하기 위해 각기 다른 동역자와 함께 하며 선교를 이어갔습니다. 궁극적인 목적과 소명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갈등하고 실망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만큼은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길이 막힐 때
제 2차 선교여행을 시작한 바울은 이전에 세웠던 소아시아 교회를 방문하면서 든든하게 믿음을 튼튼히 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뜻밖의 막힘을 경험한 것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소아시아의 서북지역인 비두니아로 가기 원했지만 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자기의 계획이 무산되는 아픔을 경험하였습니다. 자신의 계획한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선한 일도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바울은 소아시아 서쪽 끝인 드로아에 이릅니다. 그런데 밤의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
낯선 이방사람이 밤의 환상 중에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돕기를 요청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립니다. 이 일은 유럽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초대임을 알고 자신의 궤도를 수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길이 막히고, 어떤 뜻밖의 사건으로 자신의 계획이 좌절될 때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개입일 수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거세게 나를 가로막는 것 앞에서 우리는 좌절하고 낙담하면서 자포자기 합니다. 나의 계획 속에 하나님을 묶어놓아서는 안됩니다. 자아의 제한된 틀 속에 위대한 하나님을 집어넣어서도 안되고 집어넣을 수도 없는 법니다. 막힘을 경험할 때 자아의 궤도를 수정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고자 하는 길, 격렬하게 때로 나를 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 즉 나의 주관적인 관점, 계획, 의도를 틀어지게 하고, 좋든 싫든 내 삶의 길을 바꾸어 버리는 모든 것”일 수 있습니다. 이때 나보다 더 위대한 힘이 나를 바꾸고 계심을 알아차리고 그 고통을 견디며 새로운 궤도에서 다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 마게도냐 사람
오늘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밤의 환상 속에서 기독교가 유럽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강력한 이미지로 소개합니다. 이런 밤의 환상은 마치 낮의 환상이 백일몽처럼 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은 꿈을 통하여 새로운 기독교의 역사적 전환점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런 밤의 환상, 꿈은 여전히 오늘 우리 시대에도 우리 자신에게 동일한 중요성을 부과합니다. 꿈은 자아의 계획과 태도를 점검하게 되고, 때로는 자아기의 계획과 의도를 넘어서 새로운 문을 열게 합니다. 꿈이 인생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치거나 불행한 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건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우리가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이행해나가야 하는지, 별의 길을 따라가는 길, 위대한 잠재력을 어떻게 실현해갈 수 있는지를 가리켜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밤의 환상, 꿈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언어이자 메시지입니다. 꿈은 개인의 인생과 기독교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안내이자 지도인 것입니다. 밤의 환상, 꿈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저는 마게도냐 사람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밤의 환상 중에 나타난 마게도냐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런 사람은 낯선 자입니다. 우리의 꿈에 낯선 자의 방문과 지시는 우리에게 중대한 변환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게 새로운 작업과 변환이 일어날 때는 새로운 아이의 출현 혹은 낯선 인물이 등장하여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설교 전반부에 소개한 고맙다 말한 친구의 꿈의 뒤 이야기는 장례식이 거행되고 꿈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는데 이번에는 무서운 인물하나를 배정합니다. 낯선 젊은 남성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마치 저를 공격하려고 하는 듯 다가왔습니다. 이 분열된 젊은이가 저를 해하려하는 느낌이 들어 이래서는 안된다고 진정시키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낯선 젊은이에게 이런 저런 말을 하면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분열된 20-30대 청년의 상은 저를 각성시켰습니다. 20대의 고통 속에서 분열하던 저의 상처입은 젊은이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고통받는 젊은이는 이 시대의 분열하는 청년의 상일 수도 있습니다. 서현역 에서 무차별 흉기난동으로 시민 14명을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방송보도에 의하면 22세 최모군은 중학교 3학년 시절 올림피아드에 참가해 입상할 정도로 영재였습니다. 특목고 진학에 실패하면서 비뚤어졌습니다. 그의 형은 특목고에 진학하였고, 명문대를 다녔습니다. 서현역 인근에 혼자 살고 있었고, 3년 전에 조현병 인격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받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분열하며 상처받은 우리 시대의 젊은이,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마게도냐 사람일 수 있습니다. 시대의 병을 짊어진 분열된 상처입은 영혼들이 보듬어야 합니다.
기쁜 소식을 만나야하는 마게도냐 사람이 누구일까요? 영혼의 참 만족과 기쁨은 세상의 기준과 성공과 다르며, 포로처럼 집단에 편승하여 끌려가는 이들일 것입니다. 풍요 속에 있지만 기쁨을 상실한 자들, 경쟁과 성공의 노예가 되어 자유를 잃은 자들,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분열하며 배회하는 자들이 기쁜 소식이 필요한 마게도냐 사람일 것입니다.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돈이나 권력이 아님을 전해야 합니다. 마게도냐 사람은 우리 안에 그림자일 수 있습니다.
낯선 자가 나타나 우리를 위협할 때 분열하는 인격을 치유하여 새로운 문을 여는 시간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우리 시대의 마게도냐 사람, 우리 내면의 마게도냐 사람에게 건너가서 그들과 만나고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